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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관련 성서해석, 칼빈 해석방법 주목해야”
조덕영 교수(창조론오픈포럼 공동대표)
2009년 06월 26일 (금) 07:53:11 전정희 기자 gasuri48@hanmail.net


   
창조론오픈포럼 공동대표인 조덕영 교수(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가 최근 “과학과 관련된 성서해석에서 칼빈의 신학적 방법론을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6월 22일 서울교회에서 열린 요한칼빈 탄생500주년기념 학술심포지엄에서 조 교수는 “21세기의 과학기술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사람이요 신학자인 칼빈을 통해 오늘의 시대를 바라보는 지혜를 얻어야 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이날 ‘칼빈과 현대과학’이란 논문을 발표한 조 교수는 “현대 과학의 문제들을 다루는 데 있어 기독교는 분명 칼빈이 사용한 적응(accommodation)의 방법을 사용할 수 있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보통 사람들을 위해 보통의 학교를 개설하셨다는 하나님에 대한 칼빈의 생각은 적응의 방법으로 나아간 것”이라고 전제하고 “칼빈은 창세기를 주석하면서 과학의 문제에 있어 매우 조심스럽다”고 밝혔다. 칼빈은 성경에서 천문학이나 고도의 기술을 배우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언급함으로써 마치 성경을 과학 서적처럼 다루는 일에 대해 강력히 경계한다는 것이다.

조 교수는 “심오한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조차 우리 인간을 위해 눈높이를 낮추었다”면서 “인간이 지닌 능력과 한계를 모두 인정하고 성경이 명확하게 계시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함부로 잘못 적용하여 잘못된 정죄의 오류에 빠지지 말게 하며 겸손히 때를 기다려야한다”고 주장했다. 일반적으로 복음주의는 자연계시가 구원적 가치에 있어 완전하다고 보지는 않으므로, 성경보다 앞서 자신의 주장을 계시보다 우월하다고 단정하는 것보다 일반계시의 점진성을 따라 겸손히 적응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조 교수는 이런 자세야말로 과학과 신학의 충돌이 첨예하게 나타나는 부분에서 고려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조 교수는 또 “루터와 칼빈은 천동설로 유명한 코페르니쿠스와 동시대를 살았던 신학자들인데, 사람들은 무심코 칼빈을 반 코페르니쿠스주의자였다고 인정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며 “칼빈이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알고 있었다 해도 그는 그것을 그리 중요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연과학에 대해 열려있고, 자연과학의 발전에 기여한 칼빈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을 공적으로 논평할 만큼 중요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조덕영 교수의 이날 논문 요약본은 다음과 같다.

칼빈과 현대 과학

요한 칼빈은 자연과학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을까? 칼빈이 현대과학기술시대를 산다면 어떤 신학적 해석과 입장을 취하였을까? 본 논고의 목적은 21세기 과학기술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사람이요 신학자인 칼빈을 통해 오늘의 시대를 바라보는 지혜를 얻는 데 있다.

과학이 꿈틀대던 루터와 칼빈시대는 천동설로 유명한 코페르니쿠스(Nicolas Copermicus; 1473~1543)가 살던 시대였다. 루터와 칼빈은 과연 코페르니쿠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코페르니쿠스의 태양계 중심설은 신학과 종교와 자연과학의 긴장과 충돌을 상징한다. 당시는 모든 천체는 지구를 돈다는 지구 중심설이 성서의 지지를 받는 듯 여겨지던 시대였다.

1. 자연과학에 대한 칼빈의 이해
앤드류 딕슨 화이트(Andrew Dickson White)는 <과학과 신학의 전쟁역사>에서 “칼빈은 창세기주석에서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모든 사람들을 정죄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통상 시편 93편 1절을 인용하면서 이 문제에 도전했고 어느 누가 감히 성경의 권위 위에 코페르니쿠스의 권위를 올려놓으려 할 것인가”라고 질문했다. 안티기독교인이었던 러셀(B. Russel)은 <서양철학사>에서 화이트가 주장한 이 내용을 반복해서 칼빈을 공격하였다. 심지어 최근의 토마스 쿤(T. S. Kuhn) 조차 이 구절로 칼빈을 공격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심코 칼빈을 반 코페르니쿠스주의자였다고 인정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위의 인물 중 어느 누구도 이 문제를 꼼꼼히 살펴본 적은 없는 듯하다. 칼빈의 어느 책에도 위의 구절은 나오지 않는다. 칼빈은 시편 93편 1절에 대한 주석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물론 지동설을 유지하고 천동설을 주장하는 해석학적 오류를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한 사실에 대한 분명한 강조를 말한다. 하지만 코페르니쿠스를 비난하고자 감정을 구체적으로 드러낸 문헌은 결코 없다.

로젠(E. Rogen)은 화이트와 반대로 칼빈의 모든 텍스트를 찾아보았으나 칼빈이 코페르니쿠스에 대해 들어본 일도 없고 따라서 그에 대해 어떤 태도도 가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호이까스(R. Hooykaas)도 칼빈은 한번도 코페르니쿠스를 언급한 적이 없으며 칼빈이 말했다는 ‘인용구’는 모두 가공의 산물임을 지적한다.

비록 코페르니쿠스가 가톨릭의 인물이었고 칼빈보다 루터가 가톨릭의 상황을 더 잘 이해하고 있었다고 해도 칼빈이 코페르니쿠스를 전혀 몰랐다는 것은 분명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왜 칼빈의 저서나 문헌에 코페르니쿠스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일까? 여기서 칼빈의 신학적 방법론이 주목의 대상이 된다. 어쩌면 칼빈이 설혹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알고 있었다 해도 그리 중요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즉 그것을 공적으로 논평할 만큼 중요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신학자로서의 칼빈에게 있어서 비록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가 관심의 대상이었더라도 자신의 저작 가운데서는 간과되었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칼빈은 분명 자연에 대한 과학적 탐구에 종교적 동기를 부여했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로 자연은 조금 일그러지긴 하였으나 여전히 하나님의 아름다운 책으로 본 것이다. 피조세계의 연구는 하나님의 지혜를 발견하는 훌륭한 도구였고 ‘하나님의 영광의 극장’이었다. 칼빈에게 있어서도 세상은 모두 하나님의 세상이었다. 칼빈은 과학을 무시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칼빈은 자연과학에 대해 열려있었으며 자연과학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칼빈은 과학적 연구를 적극 권장하였으며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 물질세계와 인간의 몸은 모두 하나님의 지혜와 성품을 증거한다. 칼빈은 천문학과 의학연구를 모두 지원한다. 1645년과 그 이듬해 과학에 헌신한 사람들의 부정기적인 모임으로 출발한 영국 왕립협회 회원들 대부분이 청교도적 칼빈주의자들이었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다만 칼빈은 성경을 관점과 관심이 다른 책으로 보았다. 성경은 천문학이나 고도의 기술을 가르치려는 책이 아니었다. 성경은 전문 과학 서적처럼 대할 책이 아니었다. 시편 주석에서도 칼빈은 성경의 저자들이 과학적 사건에 대해 감각이 느끼는 대로 묘사했지 과학적 용어로 묘사하려 하지 않았음을 역설한다. “성령께서는 천문학을 가르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 다시 말해 가장 단순하고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않은 일반인들에게 교훈을 내리기 위해 성령은 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모세와 선지자들을 사용하심으로써 아무도 그 말씀이 모호하다는 핑계를 대지 못하게 하셨다.”

2. 과학의 문제에 대한 칼빈의 해석방법: 적응
보통 사람들을 위해 보통의 학교를 개설하셨다는 하나님에 대한 칼빈의 생각은 적응(accommodation)의 방법으로 나아간 것이다. 적응은 라틴어의 수사학자나 법학자들이 청중들의 상황, 구조, 성격, 지적수준, 감정상태 등에 적응시키며, 조절하며 적합하게 진행하는 사용방법이다. 이 적응원리를 일찍부터 이용한 사람 중에는 오리겐, 크리소스톰, 어거스틴 등의 교부들이 있었다.

칼빈은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자화상을 그리신다. 즉 인간의 지성과 마음의 능력에 적응하신다. 좋은 웅변가는 청중의 한계를 잘 알고 거기에 적응한다. 하나님은 우리 수준으로 오시기 위해 몸을 굽히셨다. 하나님은 때로 입, 눈, 손, 발을 소유하신 분으로 자기를 나타내신다”고 하였다.

따라서 칼빈은 창세기를 주석하면서 과학의 문제에 있어 매우 조심스럽다. 칼빈은 창세기 주석에서 성경에서 천문학이나 고도의 기술을 배우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언급함으로써 마치 성경을 과학 서적처럼 다루는 일에 대해 강력히 경계한다. 신비한 세계를 탐구하려면 성경이 아니라 그 방면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칼빈이 보기에 창세기를 저술한 모세는 과학의 언어가 아닌 단지 우리 눈에 보이는 현상을 그대로 우리에게 알려줄 뿐이다.

여기서 필자는 칼빈이 당시의 과학적 지식에 적응하여 잘못 해석할 수 있는 여지도 있었다고 본다. 칼빈은 당시 천문학적 지식에 적응하여 달이 불명료한 물체라는 것을 인정하나 캄캄한 물체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았다. 칼빈은 달이 불타고 있는 물체일 것이라고 보았다. 즉 달은 발광체라고 말한다. 성경이 달을 ‘광명’(창 1:15~16)이라고 부르니 성경에 적응하면 달이 광명이라는 것이 옳다. 그러나 천문학적으로는 논라의 여지가 생긴다. 즉 발광체든 아니든 그것이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과학자들의 견해도 결국 시대를 반영한다. 그러므로 과학자들도 당연히 오류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지난 과학자들을 모두 오류투성이의 위선자들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처럼 칼빈도 당연히 제한적 지식 아래 잘못 말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은 적응 이론 아래에서 칼빈은 자신이 과학적 설명이 필요한 부분에 있어 성경 해석의 오류를 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부담에 대해 자유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해진다. 이런 것이 과학의 문제에 대한 칼빈의 성경주석이 미숙했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결코 안 된다.

3. 현대 과학과 적응 방법의 사용
과학에 대한 칼빈의 태도는 늘 긍정적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과학은 하나님의 지혜를 드러낼 수 있는 특별계시로 재해석되어 하나님을 높이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도구였다. 과학문제의 해석방법과 관련하여 적응의 방법을 일관되게 사용한 칼빈은, 과학혁명이 태동하기 시작한 시대를 살면서 적응이라는 해석방법의 성경해석이 모든 역사, 온누리를 향한 해석방법이 되어야 함을 자신의 저작에 일관적으로 흐르게 하였다.

따라서 칼빈이 보기에는 코페르니쿠스와 같은 과학자도 무조건 비난의 대상이 될 신학자는 아니었다. 과학의 생소한 이론이나 법칙이 발견되었을 때 적응의 방법은 때를 기다린다. 그는 모든 학문을 하나님의 일반은총으로 보았던 것이다. 적응의 방법을 사용할 때 우리는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는 겸손해지게 마련이다. 또한 의도적이지 않은 이상 실수에 대해서도 너그러워진다. 하나님조차 우리에게 눈높이를 맞추시기 위해 낮아지셨는데 우리 인간이 어찌 실수가 없겠는가. 실수를 용납하지 않으려는 어떤 근본주의적 분리주의 경향도 교만의 반영일 수 있다.

하나님은 칼빈시대나 모세시대만의 하나님은 아니다. 오늘 우리시대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하나님은 오늘날의 상황과 과학의 발달을 분명 예견하실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성경이 과거의 역사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책이기는 하나 우리에게는 현재의 책이요 미래의 책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과학만능, 과학주의가 만연된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적응은 어떤 것일까? 또 미래에의 적응은 무엇일까?

학문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면 학문의 최종적 결과 또한 학문의 자유 아래서 승리할 것이다. 이것은 복음주의가 적극적으로 과학의 문제에 뛰어들어야 함을 의미한다. 전쟁과 협상 없이 승리하는 전쟁이란 없다. 칼빈이 말한 ‘성령의 겸손’에 의지하여 학문적으로 아직 알려지지 않은 부분에 대해 겸손히 기다리는 것과 복음의 마지노선을 지키며 양보와 타협하지 않으려는 것은 의미가 다르다. 진리는 적응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맺으면서
여기서 우리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된다. 현대 과학의 문제들을 다루는 데 있어 기독교는 분명 칼빈이 사용한 적응의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적응의 방법은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현대적 이슈를 해석함에 있어서 몇 가지 관점을 제시한다.

먼저, 사랑과 평화의 방법이다. 적응의 방법은 하나님의 본래 사랑과 평화가 어디에 있는지를 추적한다. 즉 기독론적 사랑과 평화가 창조와 구속에 모두 적응된다고 보는 개념이다. 복음의 핵심 내용은 구약과 신약에서 동일하다. 창조자로서의 하나님 말씀과 구속자로서의 하나님 말씀 사이에는 아무런 긴장관계가 없다.

둘째는, 겸손과 기다림의 방법이다. 심오한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조차 우리 인간을 위해 눈높이를 낮추었다. 하나님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인간이 부족해서 였다. 적응을 오해하여 성경을 가지고 남을 함부로 비판하거나 잘못 정죄하는 누를 범하면 안 된다. 적응의 이론은 인간이 지닌 능력과 한계를 모두 인정하고 성경이 명확하게 계시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함부로 잘못 적용하여 잘못된 정죄의 오류에 빠지지 말게 하며 겸손히 때를 기다린다.

일반적으로 복음주의는 자연계시가 구원적 가치에 있어 완전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성경보다 앞서 자신의 주장을 계시보다 우월하다고 단정하는 것보다 일반계시의 점진성을 따라 겸손히 적응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 필요하다. 과학과 신학의 충돌이 첨예하게 나타나는 부분에서 고려될 수 있는 방법이다.

셋재, 명료성이다. 겸손과 기다림으로서의 적응은 단순한 소극적 대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명료성은 태초에 창조하실 당시의 창조섭리를 찾아내는 작업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명료한 부분에 대해서는 분명한 선을 긋는 작업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진화론이 과연 성경적 이론인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문제는 명료성의 판단 기준이 될 수 있다. 여기서 진화론은 명료하게 부정된다.

넷째, 적응의 적극성이다. 적응의 방법은 우리를 창조와 구속의 역사를 깨닫게 만드는 몽학선생으로서의 과학에 대해 게으르지 말고 연구하며 접근해 갈 것을 요구한다. 과학은 가만히 고여 있는 물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적응의 방법은 우리에게 자유함을 준다. 적응의 방법은 우리들이 성서 문자주의자가 되려는 유혹을 방지한다. 더불어 구원의 핵심이 아닌 창조의 영역의 문제에 있어서는 보다 자유함을 가지고 자연의 노예나 폭군이 아닌 사랑의 청지기로서의 삶을 요구하는 것이다. 포스트모던의 다변적 환경에서 진리 안에서의 자유함과 청지기적 사명은 분명 적응의 원리와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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