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신앙

천 길 깊이의 검은 바다가 바위섬을 감돌고 있다. 거대한 해자다. 누구도 침범 말라. 아무도 다가오지 말라. 설령 너일지라도 나를 밟지 말라. 시퍼런 서슬과 검은 위엄을 나는 감히 거역하지 못한다.

섬, 독도는 태고의 외로움을 기품 있게 지니고 있다. 세상을 덮는 바다를 뚫고 온몸을 긴장한 채 육중하게 솟아올라 있다. 섬 주변을 오르내리며 빈틈없이 초계를 서고 있는 괭이갈매기들, 먼지 한 톨 묻지 않은 매끈한 새의 날개, 쏘아보는 새의 눈. 그들은 말한다. 너는 육지의 속인 아니더냐. 가까이 오지 말라, 때 묻은 너의 손을 나의 주군에게 닿게 하지 말라.

발 딛음을 허락받지 못한 배는 천천히 섬을 돈다. 뱃전에 선 나는 섬의 이야기를 듣는다. 나를 압도한 섬은 명령한다. 나를 기억하라, 내 장엄을 경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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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네 시간 달려 울릉에 닿았고, 한 시간 반을 또다시 달려 독도에 닿았다. 그러나 접안 하지는 못한다. 날씨 탓이라고 했지만 어디 꼭 날씨 탓만이겠는가. 자신을 배알 하러 오는 인간의 속내를 검고 푸른 바다에 비춰 보았을 것이다. 불손한 자는 감히 나에게 닿으려 하지 말라. 준엄한 경계를 둔 것이리라.

속진俗塵에 절은 나는 배의 갑판에 서서라도 동해의 주인을 만나게 됨에 정신이 황황하다. 섬은 가파르다. 가파른 섬을 돌아간다. 빛이 가린 섬의 뒤편은 어둡고 검다. 어둡고 검은 절벽을 따라 해식 아치와 해식동들이 나타난다. 군데군데 솟아오른 외돌개, 그 높고 날카로운 실루엣, 신령스러움이 더해진다. 바닷물도 어둡고 검다. 어둡고 검은 바닷물은 흑요석처럼 빛난다. 흑요석 같은 바닷물이 삼엄하게 섬을 호위하고 있다. 다가오지 말라.

크고 우람해야만 장엄하고 신령스러운 것이 아니다. 독도는 충분히 장엄하고 충분히 신령스럽다. 이 깊고 사나운 바다 한가운데, 이웃 섬 하나 보이지 않는 이 막막한 곳에서 홀로 사백오십만 년을 살아왔다. 울릉도보다 이백만 살이 많고, 제주도보다는 삼백만 살이나 많다. 더욱이 암초섬 독도가 실은 울릉도 두 배쯤의 면적을 가지고 있다. 솟아 나온 봉우리 주변으로 넓은 해저 섬이 펼쳐져 있고 그 깊은 아래의 검은 보물, 지구 최후의 에너지인 ‘메탄 하이드레이트’가 잠겨 있다. 그래서 섬은 이토록 검고 이토록 신령스러운 것이리라. 섬을 수호하고 있는 바닷물도 검게 빛나고 초계를 서는 새의 눈빛도 이토록 번득이는 것이리라.

섬의 수호를 물과 새의 수고에만 기대고 있는 것은 불경이며 태만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더한다. 젊음의 정점에 선 우리의 아들들, 그들도 섬을 섬기고 있다. 선착장에 나란히 선 푸르른 그들이 긴 거수경례로 인사를 전해 온다. 상륙할 수 있었다면 저 어깨를 안아주었을 텐데, 머리 위로 커다란 팔 하트를 그려 마음을 전한다. 잠시 뒤 아들 하나가 경례를 풀고 같은 몸짓으로 답을 보내온다. 누가 낳고 누가 길렀건 오늘은 모두 내 아들이다. 아들아…, 국토를 국가를 부탁한다.

독도의 형제인 울릉은 푸르게 빛나는 보석의 나라다. 섬 가장자리를 따라 아쿠아마린 빛 바다가 감겨 있다. 쨍한 햇살이 바닷물에 스며든다. 스며든 빛살은 잔잔히 갈라지고 천천히 부서지며 말랑말랑 반짝인다. 챙그랑 쨍그랑 자르르르… 부숴져 내린다. 액체 보석이다. 손을 넣으면 자그르르 차랑차랑 소리를 내며 두 손 가득 푸른 알갱이가 건져질 것 같다.

깊은 산의 나라 우산국, 깎아지른 산들이 서로의 그늘에 덮여 어둡고 영험스럽다. 산 뿌리를 따라 구불구불 이어진 해안 길. 그 길 위의 아찔한 모퉁이, 뼈가 하얗게 드러난 나무들, 섬백리향이다. 백리향들은 깎아지른 벼랑 끝에서 갖은 풍상을 겪어내느라 한 뼘도 곧게 자라지 못하고 마디마디 꺾이고 줄기줄기 엉겨 있다. 그러나 그 위태한 곳에서도 제 본분을 다한다. 섬과 바다를 덮는 백리향 향기. 오래전, 바다에서 길을 잃은 어부가 별도, 나침반도, 등댓불도 아닌 이 나무의 향기를 따라 집을 찾아왔었다 한다. 울릉은 파리, 모기가 드물고 뱀은 아예 살지를 못한다. 육지에서 일부러 들여온 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죽어버린단다. 인간에게는 삶의 향기로 다가오는 섬백리향이 다른 무엇들에게는 죽음의 기운이 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아직은 다 알 수 없다. 저 깊은 산에 무엇이 더 잠겨 있는지는….

섬은 사람이다. 올망졸망 점점이 떠 있는 서해의 섬들은 순하고 어진 백성들이다. 그들은 평화롭고 여유롭다. 바다를 느긋이 맞아들이고 느긋이 보내준다. 바람도 느긋이 불고 개흙도 느긋이 무르다. 제주는 향낭을 차고 장옷을 쓴 정경부인이다. 평평하게 이어진 해안 길과 대란치마처럼 둘러 감긴 얇고 넓은 바다, 연한 빛의 그 바다. 그에 반해 울릉은 태양에 그을리고 바람에 거칠어진 중년의 장수다. 도성에서 먼 외지, 칼바람이 부는 변방에서 뭇 적들을 막아내던 눈빛 형형한 야전장수이다. 울릉은 그 장수의 힘줄처럼 강하고 그 장수의 눈빛처럼 깊고 맑다. 울릉은 아름답게 긴장하고 있다. 온몸의 힘줄을 세우고 근육을 긴장시키며 피부까지 소름을 돋쳐 섬모 한 터럭까지 빳빳이 긴장하고 있다. 굳은살 박인 손으로 병장기를 움켜쥐고 주문처럼 중얼거린다. 나는 국토의 최전방이다. 지그시 다문 이 사이로 낮게 으르렁댄다. 나는 긴장해야 하고 강해야 한다.

늦은 오후, 도동에서 저동을 잇는 해안길을 따라 갑옷 같은 울릉의 등을 밟는다. 높고 낮은 길 아래, 바다가 가득하다. 연초록 감태들이 나긋이 감기는 청록색 바다, 파도를 따라 흔들리는 바다 숲… 한동안 내내 흔들리고 혼란스럽던 나는 이 외떨어진 섬에 와서야 뭍과 물을 구별한다. 야전사령관 울릉은 국토만 지키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후르르 바람이 불고 가뭇이 어둠이 내린다. 가파른 비탈을 따라 하나둘 켜지는 노란 전등, 비로소 보이는 길. 낮은 하늘을 빠져나오는 밤별들, 하늘과 바다의 경계에 줄지어 선 인간의 별빛 배들. 검은 밤이 오기 전의 푸른 밤, 흐릿한 수평선 위아래로 별이 맺혀간다. 울릉의 어깨에 기대어 풀어내는 긴장. 탈피하는 내 곁에 밤새 내려앉는 긴 별.

전성옥 집사

2012년 <월간문학>에 소설로, 2013년 <에세이문학>에 수필로 등단한 후 <에세이부산 동인>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삶의향기 동서문학상 대상'(2012년), ‘부산수필문예 올해의 작품상’(2023년)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