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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뢰아의 성경상고
<베뢰아는 왜 이단인가?>(7)
2024년 02월 25일 (일) 23:11:27 허홍선 목 webmaster@amennews.com

허홍선 목사/서울성락교회 전수석부목사.베뢰아 아카데미 전담당목사. 베뢰아대학원대학교 전초대 교학과장

한국교회에는 소위 ‘귀신파’ 이단들이 한 주류를 이루고 있다. 김기동, 이초석, 이명범, 한만영, 류광수, 김광신 등이 여기에 속한다. 그 중에도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김기동 씨(베뢰와아카데미, 성락교회)다.

그동안 김기동 씨의 이단성에 대하여 많은 교단은 물론 이단연구들과 학자들이 나서서 비판하였다. 그렇지만 허홍선 목사보다 김기동 씨의 이단성을 속속들이 아는 분도 없을 것이지만, 그보다 이단 비핀 기준이 되는 정통신학을 충분히 공부한 분도 없을 것이다. 기준도 내용도 충분하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베뢰아는 왜 이단인가>(허홍선/누가출판사)라는 본 책보다 귀신파의 이단성을 가장 드러낸 책이 없을 것이며, 유사한 다른 귀신파들까지도 알 수 있는 시금석이 되고도 남을 것이다. 먼저 본 책의 내용을 수정 보완하며 본지에 연재한다.

                                           -편집자 주-

 

허홍선 목사

성경은 전부 읽어야만 아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경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통달하지 않고서는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한 페이지만으로도 능히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믿음을 가지려면 성경의 기록을 이성으로 연구하거나 따져서는 안 됩니다.(베원, p.37)
 

가능한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모두 읽어야 옳다. 무조건 많이 읽는다고 해서 진리를 알아지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연대기 순서로 재구성하여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 그리고 누구에게’라는 원칙에 따라 읽을 때 비로소 원저자이신 하나님의 뜻에 가장 가깝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구원을 받기 위해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며,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를 섬기며 사랑하기 위해 읽는다. 결국 성경을 읽는 이유는 하나님의 경외하는 법을 배우기 위함이다. 모세는 신명기에서 이런 유언을 남겼다.
 

“모세가 이 율법을 써서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는 레위 자손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에게 주고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매 칠년 끝 해 곧 정기 면제년의 초막절에 온 이스라엘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그 택하신 곳에 모일 때에 이 율법을 낭독하여 온 이스라엘로 듣게 할찌니 곧 백성의 남녀와 유치와 네 성안에 우거하는 타국인을 모으고 그들로 듣고 배우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고 또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을 땅에 거할 동안에 이 말씀을 알지 못하는 그들의 자녀로 듣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게 할찌니라.”(신 31:9-13)
 

김기동 목사의 주장처럼 한 부분만 읽어도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 있다면 굳이 66권이나 되는 성경이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롬 16:25)라고 말했다. 따라서 성경 전체를 온전하게 이해하려면, 구약의 사건들과 인물들과 율법과 희생 제도와 언약 및 약속들의 토대를 온전히 이해하고 신약을 읽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신약성경만 가지고 있다면, 복음서를 대할 때, 왜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기다렸는지, 왜 메시아가 와야 했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구약은 신약성경에 언급되는 유대인의 관습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책이다. 구약성경을 소홀히 하면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율법을 왜곡시켰는지, 예수께서 성전을 정결하게 하실 때 왜 그렇게 분노하셨는지, 예수께서 대적들에게 답변하실 때 사용하셨던 많은 말씀들을 어디에서 가져오셨는지 이해할 수 없다. 믿음을 가지려면 성경의 기록을 이성으로 연구하거나 따져서는 안 된다는 김기동의 주장은 심히 잘못된 주장이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온전한 믿음을 가지려면 맑은 정신과 경건한 마음으로 연구해야 한다. 이것은 인간의 이성과 지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라는 것이 아니라 "과연 그러한가?"라는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베뢰아 사람들의 신앙의 자세를 이렇게 기록하였다.
 

사도행전 17:11-12을 보면,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상고하므로 그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라고 했다. 누가는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비신사적이었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베뢰아 사람들이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었다고 했다. 누가가 베뢰아 사람들이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더 신사적이었다고 말한 것은 베뢰아 사람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상고했기 때문이다.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이 전한 말씀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바울이 선포한 복음의 내용을 매일같이 상고했다.

'상고하다‘라는 헬라어 ‘아나크리노’는 ‘비평하다,’ ‘판단하다’라는 뜻으로, 바울의 설교를 들은 베뢰아 사람들이 바울의 설교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분석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우리말 성경에 상고(詳考)라고 번역된 단어는 요한복음 5:39에 나오는 '에루나오'와 사도행전 17:12-13에 나오는‘아나크리노’를 말한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ἐραυνᾰτε)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행 17:12~13)
 

요한복음 5장에 사용된 ‘에루나오’는 베드로전서 1장과 요한복음 7장에도 사용되었다. 그들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장차 오실 주님이 받으실 고난과 얻으실 영광이 어느 때 이뤄지는 알고자 하여 열심히 상고했다.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의 설교가 구약성경에 근거한 것인지, 아니면 비이성적인 헬라철학인지 비평하고 분석했다. 그 결과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의 설교가 구약성경의 예언과 일치하는 것을 깨달고 그래서 바울의 말을 받아들였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했던 것이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나다나엘도 이런 부류의 사람이었다. 빌립의 친구였던 나다나엘은 빌립의 권유에 "구약성경에서 메시아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고 했다."면서 나사렛 출신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은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의 이적과 놀라운 능력을 보면서 그를 따랐지만 나다나엘은 제아무리 놀라운 이적을 행했다 할지라도 성경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나다나엘에게 “보라 이 사람은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라고 칭찬하셨던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바울의 설교가 과연 그러한가를 비판적으로 상고했던 베뢰아 사람들처럼, 성경과 맞지 않으면 제아무리 초자연적인 이적을 행한다 할지라도 따르지 않았던 나다나엘처럼, 기사와 이적을 보고 무턱대고 믿거나 따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베뢰아의 계시론

베뢰아의 잘못된 사상은 성경을 보는 관점, 즉 계시론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기동 목사가 어떤 성경관을 가지고 있는지 먼저 살펴보자.
 

성경은 믿음의 글을 모은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믿음을 사용해서 그 믿음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성경을 달리 성서라고도 말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된 가감되지 않은 말씀을 성경이라고 합니다. 제자들을 통해서 간접으로 하나님에 대해 소개받은 거룩한 글들을 성서라고 합니다. 성경은 모본이고 성서는 참고할 만한 것으로 성경에 버금가는 것입니다. 공관복음을 많이 읽으면 믿음이 생기고 요한복음을 많이 읽으면 깊은 영적 차원에 이르게 됩니다. 성경은 성령에 감동된 '사람들'이 쓴 것이지, 하나님이 직접 쓰신 것이 아닙니다.(베원, p.48-54)
 

대한성서공회는 성경에 대해 이렇게 정의를 내린다. (대한성서공회, <성경과 성서는 어떻게 다른가요? 아니면 같은 뜻인가요?>, 2107.4.7.

https://www.bskorea.or.kr/bbs/board.php?bo_table=society1&wr_id=10)
 

우리나라에서는 기독교의 경전을 “성경(聖經)”이라고 부를 것인지, “성서(聖書)”라고 부를 것인지, 가끔 논란이 됩니다. 거룩할 “성(聖)” 자에 경서(經書) “경(經)” 자를 쓰면 우리의 경전을 높여 부르는 이름인 것 같고, 거룩할 “성(聖)” 자에 책 “서(書)” 자를 쓰면 그 경전을 조금은 폄(貶)하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아서 굳이 성서라고 하지 말고 성경이라고 하자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약전서와 구약전서를 거룩한 경전이라고 하든 거룩한 책이라고 하든 그것이 그렇게 예리하게 의미 구분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경전을 다만 중국 전통에서는 성경이라고 불러오고 있고, 일본 전통에서는 성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두 전통을 융합하고 있는 현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란 말도 쓰고 성서라는 말도 쓰고, 「성경전서」라고 하여 경과 서를 절묘하게 융합하고 있습니다. 본래는 성경이든 성서이든 그것은 일반 종교의 경전을 두루 일컫는 보통명사입니다. 기독교가 우리나라에서 우세한 종교가 되면서 그 용어를 기독교가 사유(私有)하게 된 것입니다. 일본 사람들이 성경이라고 하지 않고 성서라고 하는 것은 일본에서 불경을 성경이라고 했기 때문에 그것과 구별하려고 한 것 같다는 말을 전 일본성서협회 총무 사토 목사에게 들은 일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사정도 이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불교 용어에 “성경대(聖經臺)”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불경을 놓고 읽는 독서대(讀書臺)입니다. 이제 “성경”은 “성경전서”를 줄여서 부르는 이름입니다. 처음 두 자를 취한 것입니다. “성서”는, 본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만, “성경전서”의 첫 자와 마지막 자를 취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둘 다가 다 경전을 일컫는 이름입니다. 경이나 서에 가치판단의 구분은 없습니다. 예언서들은 으레 예언서/선지서라고 부르지 절대로 예언경/선지경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야고보서라고 하지 로마경 고린도전후경 야고보경이라고 하지 않는 것도 고려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기독교의 경전의 이름은, “성경”도 “성서”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기독교의 경전의 고유한 이름은 “언약서/계약서”입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구약”과 “신약”입니다. 이것은 다른 종교들과 공유하는 이름이 아닙니다. 이 이름은 기독교의 경전의 성격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일면을 밝혀주기도 합니다. 계약서로서의 경전입니다. 무슨 고전으로서의 경전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성경"은 헬라어 ‘그라페’를 번역한 것으로 ‘a writing, a scripture"를 뜻한다.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이 상고하고 있던 모세 율법을 비롯한 시가서와 역사서가 자신을 증언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성경과 성서를 구분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김기동 목사는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계시하기 위해서 고의적으로 기록한 것을 성경이라 말합니다. 그 외에는 성경이라 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욥기, 열왕기, 역대기, 다니엘서 등과 같은 책은 율법을 시인해 주고 증거해 주는 성서입니다. 오늘날 설교집이나 간증집은 수백 년 후에 성서와 같은 수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소리 하면 욕먹으니까 못합니다. 사도행전이나 또는 기타 편지들은 증인들에 의해서 예수님의 생애를 지지하고 시인하는 내용이 들어있는 성서입니다. 계시와 증거를 혼동하면 안 됩니다. 성경이란 율법과 예수님의 생애처럼 영원히 가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성서란 얼마든지 가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은 가감할 수 없는 절대적인 부분을 말하며, 성서는 얼마든지 가감할 수 있습니다.(베뢰아아카데미 9기 강의 테이프, No.24-1)
 

김기동 목사의 이러한 성경과 성서 구분은 아무런 근거 없는 주장으로 성경의 참된 의미를 훼손하는 것이다. 율법은 성경이기 때문에 가감할 수 없지만 욥기, 열왕기, 역대기, 다니엘서 등은 성경이 아니라 성서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가감할 수 있다는 김기동 목사의 주장에서 베뢰아 사상이 왜 이단인지를 엿볼 수 있다.
 

​김기동 목사의 이러한 성경과 성서에 EOGS 주장은 초대 교회에 이단으로 정죄되었던 말시온(Marcion)의 주장과 유사하다. 말시온은 구약성경은 유대인의 역사서요, 율법일 뿐이라고 하면서, 바울 서신 10개와 누가복음의 편집본만 정경(正經)으로 인정하고 나머지 성경을 인정하지 않았다. ​
 

김기동 목사는 자신의 설교집이나 간증집도 수백 년 후에는 성서와 같은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사도행전을 비롯한 사도들의 편지들은 예수님의 생애를 지지하고 시인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가감할 수 있다고 말한다. 계시와 증거를 혼동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5-16)
 

​디모데후서 3:15-16에 '성경'으로 번역된 헬라어 ’그라머‘는 '기록된 문서(a written document), '편지'(a letter or an epistle, '글'(writings)을 의미한다. 바울은 디모데가 어릴 적부터 외할머니와 어머니에게 배우고 읽었던 구약성경을 성서라고 말하면서, 성경과 성서를 다르게 구분하지 않았다. 다양한 영어 번역 성경들이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증명해 주고 있다.
 

[NKJV] and that from childhood you have known the Holy Scriptures, which are able to make you wise for salvation through faith which is in Christ Jesus. All Scripture is given by inspiration of God, and is profitable for doctrine, for reproof, for correction, for instruction in righteousness,

[ESV] and how from childhood you have been acquainted with the sacred writings, which are able to make you wise for salvation through faith in Christ Jesus. All Scripture is breathed out by God and profitable for teaching, for reproof, for correction, and for training in righteousness,

[NASB] and that from childhood you have known the sacred writings which are able to give you the wisdom that leads to salvation through faith which is in Christ Jesus. All Scripture is inspired by God and profitable for teaching, for reproof, for correction, for training in righteousness;

[NET] and how from infancy you have known the holy writings, which are able to give you wisdom for salvation through faith in Christ Jesus. Every scripture is inspired by God and useful for teaching, for reproof, for correction, and for training in righteousness,
 

이와 같이 성경을 가감할 수 없는 성경과 언제든지 가감할 수 있는 성서로 나눌 수 있다는 김기동 목사의 주장은 그가 한국 교회로부터 이단으로 규정된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또 그는 구약의 예언서에 대해서 이렇게 주장한다.
 

성경의 예언서 같은 것을 너무 중요하게 보면 안 됩니다. 사람들은 다니엘서나 요한계시록에 대해 말하면 상당히 신령하게 봅니다.(베원, p.63)
 

기독교는 구약성경의 예언서를 대예언서 5권과 12권의 소예언서로 나눈다. 대선지서와 소선지서로 나눈 분류 기준은 책의 분량이며, 시대적으로는 왕정시대 12권과 포로 시대 5권으로 분류한다. ​대예언서는 이사야, 예레미야, 예레미야 애가, 에스겔, 다니엘이며, 소예언서는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이다. 예언서는 전기(前期) 예언서와 후기(後期) 예언서로 나누는데, 전기 예언서는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서, 열왕기서이며, 후기 예언서는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외 '12예언서'이다. ‘12예언서'는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이다. ​
 

이러한 구약의 예언서가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어떻게 다루시며, 어떤 일을 하시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구약의 예언서를 통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이 어떤 삶을 기대하시며,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 행위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배울 수 있다. 그러나 김기동 목사는 이러한 예언서를 너무 중요하게 보면 안 된다고 말한다.
 

율법은 죄를 생각나게 하며, 구원하는 법이 아니라 정죄하는 법입니다. 율법은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복음의 용무는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율법은 훌륭한 말씀이지만 죄인에게는 복된 말씀이 아닙니다. 율법은 의인이 들어야 할 좋은 말씀이기 때문에 죄인인 인류에게는 그림의 떡일 뿐입니다. 십계명의 첫째부터 넷째까지는 하나님께 대한 계명이고, 다섯째부터 열째까지는 대인관계에 대한 계명입니다. 첫째부터 넷째까지 계명을 범한 것을 죄라고 하며, 다섯째부터 열째까지 계명을 범하는 것을 악이라고 합니다.(베원, p.83-98)
 

율법은 레위기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다. 레위기는 하나님께서 레위와 맺은 언약으로 생명과 평안의 법이다. 레위기대로 살면 생명과 평안(life and peace)을 얻게 되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레위기 2:4-5을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이 명령을 너희에게 내린 것은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이 항상 있게 하려 함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 내가 이것으로 그에게 준 것은 그로 경외하게 하려 함이라 그가 나를 경외하고 내 이름을 두려워하였으며”라고 하였다.
 

김기동 목사는 율법은 의롭게 하는 법이 아니라 정죄하는 법, 죄를 생각나게 하고, 죽음을 가져온 법이라고 말했다. 또한 율법은 "훌륭한 말씀"이지만 죄인에게는 복된 말씀이 아니며, 의인이 들어야 할 "좋은 말씀"이기 때문에 죄인인 인류에게는 그림의 떡일 뿐이라고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의도를 모르고 하는 말이다. 그는 율법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지 않고 단지 "훌륭한 말씀" 또는 "좋은 말씀"으로 취급한다.
 

십계명의 첫째부터 넷째까지는 하나님께 대한 계명이고, 다섯째부터 열째까지는 대인관계에 대한 계명이라는 것도 역시 십계명에 대한 오해이며, 죄란 첫째부터 넷째까지 계명을 범한 것이며, 악이란 다섯째부터 열째까지 계명을 범하는 것이라는 것도 역시 성경에 대한 무지의 결과다. 넷째 계명인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라는 말씀은 하나님께 대한 계명이 아니라 일하는 노예들과 쉬지 못하고 일하는 가축들에게 숨을 돌리게 하시려는 사랑의 법이다. 사람이 안식일을 지킨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덕 보는 것은 없다. 따라서 안식일은 사람(특히 일하는 노예)을 위해 있는 계명이며, 육체 노동하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랑의 계명이다.
 

예수님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런 말씀을 듣고도 넷째 계명이 하나님을 위한 계명이라고 하는 것은 깨달을 귀가 없다는 말이다. 안식일에 쉬는 것보다 앞선 것은 먼저 엿새 동안 힘껏 일하는 것이다. 오늘은 쉬고 내일도 노는 자는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알 수 없다. 하나님께서 그날을 거룩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일하는 노예들, 일하는 육축들, 그리고 일하는 외국인들까지 쉬게 하시려는 사랑의 계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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