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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동 씨의 광시체험과 하나님의 의도
<베뢰아는 왜 이단인가?>(6)
2024년 02월 16일 (금) 14:29:18 허홍선 목사 webmaster@amennews.com

허홍선 목사/서울성락교회 전수석부목사.베뢰아 아카데미 전담당목사. 베뢰아대학원대학교 전초대 교학과장

한국교회에는 소위 ‘귀신파’ 이단들이 한 주류를 이루고 있다. 김기동, 이초석, 이명범, 한만영, 류광수, 김광신 등이 여기에 속한다. 그 중에도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김기동 씨(베뢰와아카데미, 성락교회)다.

그동안 김기동 씨의 이단성에 대하여 많은 교단은 물론 이단연구들과 학자들이 나서서 비판하였다. 그렇지만 허홍선 목사보다 김기동 씨의 이단성을 속속들이 아는 분도 없을 것이지만, 그보다 이단 비핀 기준이 되는 정통신학을 충분히 공부한 분도 없을 것이다. 기준도 내용도 충분하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베뢰아는 왜 이단인가>(허홍선/누가출판사)라는 본 책보다 귀신파의 이단성을 가장 드러낸 책이 없을 것이며, 유사한 다른 귀신파들까지도 알 수 있는 시금석이 되고도 남을 것이다. 먼저 본 책의 내용을 수정 보완하며 본지에 연재한다. -편집자 주-

 

허홍선 목사

김기동 목사의 신비로운 체험

김기동 목사는 5년 동안 75독을 마쳤을 때 충남 예산군 광시면 시목리 입구에서 하늘에 이상 중에 나타난 밝은 불빛으로부터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요 8:31)라는 말씀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는 말씀이 모래시계처럼 흘러들어오는 것을 체험하였다. 그 순간, 성경 66권에 나타난 모든 말씀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의도가 드러나는 신기한 역사를 맞이했다(베원, p.7)는 것이다. 그의 말을 직접 인용해 보자.

 

내가 ‘광시체험’에서 그 순간 그 시간에 능력을 받았고 그날부터 큰 이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이 오늘까지 오는 것이다. 나는 누구보다도 진리를 잘 아는 사람이요, 누구보다 예수를 잘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백 퍼센트 그 말씀에 거하는 자이기 때문에 그의 제자라는 긍지와 자부심이 있다.(토요새벽연합집회, 2009.12.12.)

 

1980년대 전까지만 해도 김기동 목사는 "광시체험"에서 “하나님의 의도”를 깨달았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그가 “하나님의 의도"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한 때는 1992년 '베뢰아 사범반'에서부터이며, 1976년부터 1992년까지 베뢰아를 담당했던 필자의 베뢰아 강의 자료를 아무리 살펴봐도 "하나님의 의도"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김기동 목사는 광시체험에서 능력을 받았으며, 그때부터 큰 이적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누구보다도 진리를 가장 잘 아는 사람, 100% 말씀에 거하는 자라는 제자의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2천 년 기독교 역사 가운데 다른 사람들이 깨닫지 못한 ”하나님의 의도“를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기동 목사 말하는 ”하나님의 의도“는 그가 베델성서연구원 성서연구 과정을 마치면서 습득한 용어로 보인다.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그때 나는 '성경을 아무리 다독해도 그 말씀이 조립되지 않으면 여전히 영적인 고아요 방황하는 탕자가 될 수밖에 없구나' 하는 확신과 함께 '하나님의 의도'를 깨달았다. 그때로부터 내 몸에는 신유의 능력과 이적이 한량없이 나타났으니, 이는 일시적이 아니요 43년이 지난 오늘에도 여전히 그러한 능력과 이적은 계속되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세계 각처에서 많은 이적과 능력들이 나타나고 환언(還言) 운동이 태풍처럼 일어나고 있다.(베원, p.7)

 

베뢰아 원강은 나 시무언이 베뢰아 강의 1기부터 24기까지 강의한 내용을 정리하여 한곳에 모았고 20기 강의를 중심하여 엮은 것이다. 21세기는 베뢰아 운동, 곧 환언 운동의 역사적 시대라고 확신한다. 기독교가 20세기가 넘도록 아직도 성경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성경 밖으로 나가 배회한다는 것은 큰 죄악이다.(베원, p.7)

 

하나님의 의도는 위에서 한눈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계획과 전체적인 뜻을 한 폭의 그림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베뢰아 아카데미에서 다루는 핵심입니다.(베원, P.471)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은 하나님을 알기 위함이다. 그런데 성경을 읽을 때는 줄을 치지 말아야 한다. 성경에 줄을 치면 처음 읽을 때 받았던 감동의 수준을 절대로 벗어나지 못한다. 이는 고정관념 때문이다. 고정관념을 수로 관념이라고도 한다.(베원, p.23)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배우는 이유는 단순히 하나님을 알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우기 위함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사랑하며 섬기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오히려 성경에 메모를 하면서 읽으면 처음 읽을 때 받았던 감동의 수준을 넘어 그 은혜 위에 더 큰 은혜를 체험할 수 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책이기 때문에 성경을 바르게 배우고 읽을 때 성령의 감동을 받는다. 성령 충만은 우리의 삶을 통해 마땅한 열매를 맺는다.

 

베뢰아의 환언운동(換言運動)

   
환언특강을 하는 김기동 목사. 유튜브 갈무리

김기동은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교리에서 성경으로, 신학에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베원, p.26)라고 주장한다. 성경으로 돌아가자는데 여기에 반대하거나 부인할 사람은 없다. 만일 이를 부인한다면 그는 신앙인이 아니다. 김기동이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은 자신의 주장과 해석을 지지하게 하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원래 “성경으로 돌아가자”(Back to the Bible)는 말속에는 전통에 근거한 해석으로 돌아간다는 전제가 내포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전통이란, 어떤 신학적인 해석의 틀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도들이 세워 놓은 신앙의 원칙과 틀을 통해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 사도들의 믿음을 회복하려는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정신을 추종하는 성도라면 개혁된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이 성경으로 돌아가는 참 뜻이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기독교 신앙은 사도들의 믿음과 사고를 이어 받아 계승 발전시킨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닦아 놓은 성경적 원칙과 교리 위에 세워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을 부인하고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말을 되풀이하는 김기동을 경계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의 속뜻은 사도적 신앙의 전통과 내용보다는 자신의 주장과 행동에 초점을 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로마 가톨릭은 오랜 세월동안 일반 성도들이 성경을 읽는 것과 해석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들은 성경 외에 교회 회의를 통해 확정된 외경과 교황의 교시를 신적인 권위를 여겼다. 성경을 해석하는 권한은 전적으로 교황과 성직자들에게만 주어졌다고 믿었고, 그 결과 로마 카톨릭은 행위와 공로를 통한 구원, 성경적 근거 없는 성례들, 교황 무오설, 면죄부 판매, 연옥 사상, 우상 숭배적 예전의식, 신비주의와 미신을 좇는 종교적 행습이 마치 성경의 가르침인양 정당화하였다. 이때 16세기 종교개혁가들은 카톨릭의 부패한 유물들을 교회 안에서 쓸어내고 성경이 무엇을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그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외쳤던 것이다.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것은 오직 성경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베뢰아가 말하는 인본주의란 무엇인가?

하나님은 자신을 가장 사랑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라고 한 말씀처럼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시되 그 독생자의 목숨을 버릴 만큼 세상을 사랑하셨다 하여, 하나님이 사랑하신 비중을 아들보다 세상에 더 두셨던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것이 인본주의입니다. 여기서부터 완전히 뒤틀려 가는 것입니다. 인본주의와 신본주의는 다릅니다.(베원, p.473)
 

인간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다 보니 하나님은 인간을 위한 시녀로 격하되고, 인간에 대한 무한한 애착 때문에 하나님이 희생하시고 오래 참으시는 것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일을 하신 것입니다. 인간이 범죄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들을 억지로 끌어 내려서 십자가에 달리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승리를 위해 잠시 고난 받으신 것이 인간에게 은혜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은혜, 긍휼, 은총을 고마워 하는 것은 좋으나 그것이 지나쳐서 성경 전체를 인본주의적으로 보는 것은 잘못입니다.(베원, p.473)
 

김기동은 하나님은 자신을 가장 사랑하기 때문에, 독생자의 목숨을 버릴 만큼 세상을 사랑하신 것이 아니며,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비중을 아들보다 세상에 두는 것은 인본주의라고 하였다. 범죄한 아담 때문에 예수께서 대신 죽으셨다는 것이 과연 인본주의 신앙인가? 김기동 목사는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돼지의 착각"이란 비유를 가지고 하나님의 구원을 이렇게 모독하는 것이다.
 

이것은 먹고살기 어려울 때 집주인 대학까지 졸업하고 취직해서 월급 타다가 돼지 집 지어주고, 똥 치워 주고, 밥 주고, 씻어 주니까 '이 집안에서는 내가 왕이다. 왕! 내가 최고의 영광을 받는 왕이다. 주인은 참 불쌍하다. 나 때문에 어렵게 취직해서 돈 번다'라고 생각하는 돼지와 같습니다. 돼지는 주인이 자신을 위해서 수고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렇게 오늘날 인본주의는 다 돼지 생각과 같은 이치입니다.(베원, p 474)
 

성경은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첫째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다음에 인류를 사랑하신 것이지, 인류를 사랑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을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예를 들면, 농사꾼이 곡식을 기를 때 땀 흘리며 벼 이삭 하나도 떨어지지 않게 하려고 얼마나 노력하며 정성스럽게 가꿉니까? 그렇다고 곡식이 ‘농부는 자기보다 나를 더 사랑하고 나의 종노릇 하고 나를 위해 희생하고 자신을 버리는구나. 아, 나는 위대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 그러므로 ‘나를 위해 예수께서 오셨다’하는 것이 인본주의의 핵심이 됩니다.(베원, p.478, 481)
 

만일 인류의 구속이 목적이라면 전능하신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구원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창세 이후 지금까지 예수 믿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인류가 그렇게 많아도 예수 믿는 사람은 지극히 적은데,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 능력으로 겨우 이 정도 밖에 구원하지 못하셨겠습니까?(베원, p.481)
 

김기동 목사는 또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농부의 곡식”에 비유하였다. 그는 하나님이 독생자를 죽일 만큼 인간을 사랑했다고 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또한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먼저 사랑하고 나서 그 다음에 인류를 사랑한 것이지, 하나님을 제쳐 두고 자기를 사랑하면 인본주의가 된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들에게 속했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기독교 인본주의라는 용어는 넓은 범위의 관점을 가리키는 말로, 인본주의라고 해서 다 비성서적인 것은 아니고 그중 일부는 다른 것들보다 더 성서적인 것들도 있다. 일반적으로 인본주의는 인간의 가치와 잠재력, 중요성에 중심을 두는 사고의 체계를 말한다. 인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본질적 가치를 강조하며 인간을 자율적이고 이성적이며 도덕적인 존재로 보는 사상 체계이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과 어떻게 통합되느냐에 따라 성서적인지 아닌지를 결정하게 된다.
 

인본주의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다. 르네상스와 결부된 고전적 인본주의는 인간의 자유와 문학과 예술, 그리고 철학을 강조했다. 기독교적 인본주의와는 달리 세속적 인본주의는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소원을 모두 배제시킬 정도로 인간의 잠재력과 능력을 강조한다. 따라서 이것은 이성과 과학적 사고에 기초한 자연주의 철학으로 이어졌다.
 

기독교 인본주의는 인간의 자유와 개인의 양심, 지적인 자유가 기독교 원리와 조화될 수 있고, 성경 안에 인간의 존귀함과 성취감을 의미하는 말씀들이 있다고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 구원을 바탕으로 우주와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지배를 수용하는 것이다. 기독교 인본주의자들은 성서 언어인 히브리어와 헬라어에 집중하면서 고전적 인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이성과 자유로운 탐구, 그리고 교회와 국가의 분리, 자유의 이상을 추구했다. 또한 기독교 인본주의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인간에게 존엄과 가치가 있다고 믿으며, 인간이 그리스도와 올바른 관계를 맺을 때 비로소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김기동 목사는 하나님은 자신을 가장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되 그 독생자의 목숨을 버릴 만큼 사랑했다는 것을 기독교 인본주의라고 한다. 즉 하나님의 사랑의 비중을 아들보다 세상에 두면 인본주의라는 엉뚱한 주장을 하고 있다.
 

김기동 목사의 목회성공과 성경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권위를 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능력이 나타납니다. 목회하면서도 성경을 거의 대하지 않으니 무능해집니다. 그러면 하나님도 더 이상 역사하실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대할 때마다 하나님을 대하듯 하면 목회도 대성(大成)할 것이고 신앙도 크게 성장할 것입니다.(베원, p.28-29)
 

모세는 신명기 31:9-13절에서 7년에 한 차례씩 온 이스라엘 백성의 남녀와 유치와 성안에 거하는 타국인을 모으고 그들에게 율법을 낭독해 주라는 유언을 남겼다. 백성들로 하여금 7년 마다 율법을 듣고 배워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말씀을 알지 못하는 자녀로 듣고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게 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읽고 배우는 목적은 하나님의 경외하기 위함이며, 능력을 받거나 이적을 일으키기 위함도 아니고, 더구나 목회 성공이나 교회 부흥을 위함이 아니다.
 

하나님을 경외(敬畏) 한다는 뜻은 즉 하나님을 두려움 가운데 그의 명령을 따르는 것을 말한다.(fear God and keep His commandments)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은 회개하지 않으며, 온갖 거짓말을 지어내는 것이다.
 

요한복음 15장 7절에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라고 했습니다. 또 8장 31절에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라고 했습니다. 말씀이 자기와 떨어져 있으면 능력도 없습니다. 손을 얹을 때, 나을까 안 나을까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얹으라'하셨으니 순종해서 얹으면 됩니다.(베원, p.29-30).
 

기도 응답을 신유와 능력에 국한하는 김기동 목사의 주장은 성도들로 하여금 기도에 대한 비뚤어진 시각을 갖게 만든다. ​요한복음 15:7절에서 "거하다"라는 말은 예수의 가르침을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따르고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자는 예수의 제자가 될 것이며,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구하면 이루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구하면 이루어지게 될 것이라"라는 말은 예수의 제자가 되면 뭐든지 달라는 대로 다 주시겠다는 만사형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당시 유대인들의 시각에서 해석해야 이해되는 구절이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13-14절에서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무엇이며, 예수께서 무엇을 시행하시겠다는 것인가? 본문을 잘못 적용해서 기도 끝에 ‘예수님 이름으로’라고 말해야 하나님께서 간구를 들어주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 이름으로”라는 말을 종교적인 주문으로 취급하는 것과 같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일 5:14-15)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권위로 기도하는 것을 의미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달라는 간청이다. 즉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도한다는 뜻이며, 그때 예수께서 그 뜻을 시행하시겠다고 하셨다. 만일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면, ‘예수님 이름으로’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의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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