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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시대(1517~1648년)
송요한 목사의 이단분별법(7)
2024년 02월 13일 (화) 12:03:35 송요한 목사 webmaster@amennews.com

송요한 목사(중화권 선교사, 이단연구가, 백석)

무려 1,000여년 동안 중세의 암흑 속에서 신음하던 교회 위에 한줄기 밝은 빛이 비취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바로 종교개혁의 빛이었다. 종교개혁의 과정에서 서방교회(로마교회)는 로마가톨릭교회(천주교)와 개혁그룹인 개신교회로 분리된다. 세상 사람들은 두 진영을 신교(新敎), 구교(舊敎)로 부르기도 한다. 가톨릭(Catholic)이란 말은 ‘우주적’이란 말인데, 로마가톨릭교회가 자기들이 정통이란 의미에서 고수하는 용어다.
 

그러나 진정한 정통은 개신교회다. 왜냐하면 천주교는 외적 정통을 말하지만, 개신교회는 내적 교리적 사도적 성령의 정통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개신교회는 영어로 ‘Protestant’(프로테스탄트)라고 하는데, 이는 ‘반대자’란 의미을 가진 것으로, 로마가톨릭교회의 비성경적이고 우상적인 가르침과 부패에 대하여 반대한 것이다. 곧 배교와 부패를 벗어 던지고 사도적인 정통교회 본래의 모습 즉 로마가톨릭과 같은 타락과 배교가 나타나기 이전 초대교회의 순수한 모습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 개신교회의 핵심 사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정통은 천주교가 아니라 개신교회임을 알아야 한다.

 

가. 루터와 초기 종교개혁

1)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종교개혁은 로마가톨릭교회의 타락과 배교에 대항하여 일어난 필연적인 사건이었다. 종교개혁의 시작은 루터로 말미암는다. 그렇지만 루터가 처음부터 로마교회를 뒤엎고 새로운 운동을 전개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신학대학 교수였던 루터는 단지 자기 신앙 양심에 따라 교회가 저지르고 있는 잘못들에 대해 토론해 보자는 취지에서 95개조 반박문을 준비했을 뿐이다. 그런데 로마교회는 그의 행동에 대해 과도한 민감성을 나타내며 그를 제거하려 하였다. 결국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한 루터는 교황권에 불만을 품고 있던 몇몇 봉건 영주들(중세 유럽의 정치체제는 왕이 임명한 영주들이 각 지방을 자치적으로 다스리는 봉건제도였음)의 보호를 받으며 세력을 키웠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어(헬라어) 원문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회중이 널리 읽을 수 있게 하였고 또한 많은 저술 활동을 하였다. 활자의 발명으로 서적의 보급이 용이해졌던 시대였으므로 그 영향력은 로마교회로서도 어쩔 수 없는 엄청난 폭발력을 발휘하였다. 그와 함께 했던 종교개혁의 지도자들은 마르틴 부처(Martin Bucer, 1491-1551)와 멜랑흐톤(Philip Melanchthon, 1497-1560) 등으로 그의 사역에 든든한 지원군이 되었다. 루터가 주장한 종교개혁의 메시지는 아래와 같이 정리될 수 있다.
 

   
루터

① 오직 성경

루터는 성경만이 우리 신앙의 기준이요 최종 권위라고 여겼다. 그래서 성경에 반하는 교황의 교서나 교회의 제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경에서 명확히 설명하지 않는 내용은 교회의 전통을 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았다. 그는 성경만을 강조하다가 교회의 전통이나 역사성마저 부인하지는 않는 균형감각을 가졌던 것이다.
 

② 오직 믿음, 오직 은혜

루터는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보았다. 그것은 당시 로마교회가 가르쳐 온 것과 같은 예전, 행위, 공로, 면죄부 등에 의해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닌 오직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그 백성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믿게 될 때 주어지는 것이다. 이는 이신칭의(以信稱義) 사상으로서 오늘날 개신교 신앙의 핵심이기도 하다.
 

③ 십자가 신학

오직 믿음과 은혜만 말한다면 신자의 선행은 전혀 불필요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루터는 그러한 가능성을 십자가의 신학으로 극복한다. 십자가 신학을 통해 신자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다.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 성도는 선행을 하게 되는 것이다.
 

④ 만인 제사장

루터에 의하면 세례 받은 모든 성도는 제사장이다. 또한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로마가톨릭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사제나 성례를 통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루터는 교회의 직분을 거부하지 않는다. 교회의 직분은 교회를 위하여 반드시 있어야 할 특수한 역할이라고 여겼지만, 이는 기능상의 구별이지 신분이나 존재를 구별하는 것은 아니었다.

 

2) 쯔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

스위스의 개혁자 울리히 쯔빙글리는 학문적인 면에서는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1466-1536)와 교제하면서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았고 신학적으로는 루터와 교류하며 그의 영향을 받았다. 쯔빙글리의 개혁운동은 1522년부터 쮜리히(Zurich)에서 시작되었다. 그도 루터처럼 스위스 말로 성경을 번역하였다. 그와 제네바에서 일어난 칼빈의 개혁운동을 가리켜 “개혁파”(the Reformed) 개혁운동이라고 부른다. 이는 그들이 루터의 개혁운동을 계승하되 보다 철저히 개혁했다는(reforming Lutheranism) 의미였다. 쯔빙글리의 사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로마가톨릭교회가 제정해 놓은 금식일과 사순절 기간 동안의 음식법에 대하여 비난하였다. 그는 교회가 제정해 놓은 음식법은 신약 성경이 제정해 놓은 것이 아니며 사도 바울이 정죄한 유대주의의 음식법과 유사하다고 지적했다. 결국 쯔빙글리의 추종자들은 1522년 사순절 기간에 돼지고기와 소시지를 먹기 시작했다.
 

② 교회의 화상(images)들과 성자들의 성상들(statues)과 심지어 십자가 형상을 공격하였고 교황 제도, 미사 제도, 성지순례, 성직자의 독신 제도, 수도원 서약 등의 제도를 비성경적이라고 부인했다. 더 나아가 교회 안에서 음악을 사용하는 것도 금했다.
 

③ 루터는 교회의 제도에 있어서 성경이 금하지 않는 것은 로마가톨릭이 제정했다고 할지라도 허용하는 입장을 취한 것에 반해 쯔빙글리는 성경이 구체적으로 제정한 것이 아니면 인정하지 않는 입장이었다.
 

④ 로마가톨릭교회의 성찬관인 화체설을 부인하며 “이것은 내 몸이다”라는 말을 영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쯔빙글리는 성찬과 세례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며 성찬 자체가 신비적으로 은혜를 가져온다는 로마가톨릭교회의 ‘화체설(化體說)’을 부인했다. 또한 성찬과 함께 그리스도께서 실재로 임재한다고 주장한 루터의 ‘공재설(共在說)’도 거부하고 성찬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곧 쯔빙글리의 성찬관은 ‘기념설(記念說)’이다.
 

3) 재세례파(재침례파, Ana-Baptists)

재세례파는 급진적인 종교개혁자들이었다. 그들은 유아세례뿐만 아니라 로마가톨릭교회에서 받은 세례도 무효라고 하며 그런 사람들은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침례만을 옳다고 보았다. 재세례파는 많은 지도자들에 의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지만 크게 급진파와 온건파로 분류할 수 있다. 급진적 재세례파는 "새 예루살렘"을 이 지상에 건설하기 위함이라면 폭력을 동원하는 것도 타당하다고 보았다. 반면 신약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비폭력을 주장한 온건주의자들은 탄압이 와도 견디며 비폭력으로 대응하기를 힘썼다. 이 온건파들은 오늘날의 침례교회와 메노나이트(Mennonites)의 기원이 된다. 재세례파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유아세례와 로마가톨릭교회로부터 받은 세례는 무효이므로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② 세상과 교회를 완전하게 구분하였다. 그들은 이 세상이 마귀의 지배 아래 있으므로 멀지 않은 장래에 멸망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회는 잠시 잠깐 박해를 당하지만 말씀 운동을 통하여 영광스러운 시대가 올 것이라고 믿었다.
 

③ 재세례파는 시간이 흐르면서 광신적이거나 신비주의적인 경향을 띠는 그룹들이 많아졌는데 심지어 성경의 권위마저 무시하고 직통계시를 신봉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들 중에는 직통 계시를 받았다고 하며 천년왕국 운동을 벌인 사람들도 있었다. 결국 그들은 스위스에서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는데 재세례파 탄압의 큰 빌미가 되었다.
 

④ 재세례파는 교회가 세상을 정복하려면 우선적으로 세상으로부터 스스로 구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교회 권징의 성실한 시행을 강조하였다. 그리할 때 교회의 순수성이 유지되어 교회 개혁이 완성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재세례파 운동의 특징을 도덕회복운동으로 보기도 한다.
 

재세례파는 온건파의 경우 동정 받을 부분이 많았으나, 급진주의자들의 폭력성과 기성교회의 전통이나 역사성을 전면 부인하는 태도는 지나친 일이었다. 로마가톨릭교회는 물론 종교개혁가들 마저도 그런 재세례파를 이단으로 여긴 것은 당시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4) 성공회

대륙에서의 종교개혁이 지극히 신앙적인 원인에서 시작된 반면 영국 성공회의 탄생은 지극히 사적이고 정치적인 동기에서 기인한다. 영국의 풍운아로 불리는 ‘헨리 8세’(Henry VIII, 1491-1547) 국왕은 스페인의 ‘캐서린’(Catherine of Aragon, 1485-1536) 공주와 결혼했는데 이 결혼은 애정 없는 정략결혼이었다. 그래서 헨리 8세는 캐서린과의 사이에서 아들이 없다는 핑계로 이혼하고 시녀 ‘앤 볼레인’(Anne Boleyn, 1504-1536)을 새 아내로 맞으려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혼신청을 해야 했는데 그 제가권은 교황이 가지고 있었다. 교황은 당대의 강대국 스페인의 체면을 생각해 이혼을 거절했다. 그러자 헨리 8세는 엔 볼레인과의 결혼을 성공시키기 위해 로마가톨릭교회와 단절을 선언하고 수장령(首長令, 영국은 왕이 교회의 머리라는 선포)을 발령하여 영국의 성공회를 탄생시키게 된다. 그 동기가 지극히 사적인 것이었지만 로마가톨릭교회로부터 독립하였다는 것과 점차적으로 종교개혁자들과 같은 노선으로 옮겨왔다는 측면에서 성공회도 정통 개신교회로 인정되고 있다.
 

캐서린과 앤 볼레인은 똑 같이 딸을 낳았는데 그 두 딸들은 영국의 격동의 역사를 대변해 주는 사람들이다. 캐서린의 딸 ‘메리’(Mary Tudor 1516-1558)는 훗날 여왕이 되어 성공회와 개신교를 금하고 수만 명을 학살하는 악명 높은 왕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별명이 ‘피의 메리’(Bloody Mary)라고 부르는 것이다. 한편 메리여왕의 사후 앤의 딸이 다시 여왕에 등극하는데 곧 유명한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33-1603) 여왕이다. 그녀는 메리와 반대로 성공회를 유일한 국교로 재선포하였다. 그 결과 로마가톨릭 교도들과 청교도들(칼빈주의 성향의 개혁 그룹)이 탄압을 받게 되었다. 청교도들은 꾸준히 성공회의 개혁을 추진했지만 큰 성과를 이루지는 못하였다. <pp~. 참조> 오늘날 성공회 신학은 3가지 표준으로서 성경, 전통, 이성을 강조한다.
 

나. 칼빈과 개혁의 진전

   
칼빈

1) 칼빈(깔뱅, Jean Calvin, John Calvin, 1509-1564)

칼빈은 프랑스 태생의 신학자이지만 그의 주 활동 무대는 스위스였다. 그는 쯔빙글리와 더불어 “개혁파”(the Reformed)라 칭해질 정도로 개혁의 사람이었고 그가 개신교회에 미친 영향력은 실로 지대하다. 그의 저서로는 유명한 ‘기독교강요’가 있다. 칼빈의 후계자들은 개혁교회와 장로교회를 발전시켰고 세계에 널리 퍼뜨렸다. 오늘날 개신교회 교단들은 칼빈의 사상 중 많은 부분을 교리로 받아들이고 있다. 개신교회 신학의 체계화에 있어서 그의 영향력은 실로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 알미니우스주의자들도 구원론을 제외한 그의 신학의 많은 부분들은 별다른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칼빈의 주요사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절대주권사상

칼빈 사상의 핵심은 ‘하나님의 절대주권’(the absolute sovereignty of God)이다. 그의 모든 사상은 이 전제 위에서 전개된다.
 

② 성경론

모든 신앙의 진정한 권위는 성경에 있지, 제도적 교회에 있지 않다.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는 성령의 조명해 주심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③ 속죄론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은 만족의 개념으로 이해한다. 하나님은 범죄한 사람들을 사랑하시지만 당신의 공의에 따라 심판하셔야 한다. 이에 그리스도는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우리 죄인에게 죄 용서를 공로로 안겨다 주었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것이다. 그러면서 칼빈은 신앙에 의한 의인론(義認論, 칭의론)을 강조하였다. 의인(義認)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롭다고 선포하는 것을 뜻한다. 믿는 자는 여전히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어 의롭다 인정받는 것이다.
 

④ 교회론

칼빈에 의하면 교회는 하나님이 당신의 일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통로로 세우셨다. 그 목적은 바로 우리를 그리스도와의 연합에로 부르시고 그 일치를 계속 유지시키시기 위함이다. 칼빈이 제도 교회 내에서 가장 강조한 부분은 치리이다. 그래서 엄한 교회법을 시행하여 신자들이 항상 행동을 조심하도록 하였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교회의 영혼이라면, 치리는 교회의 힘줄과 같아서 몸의 각 지체를 연결시킨다고 하였다.
 

예전에서 성찬을 해석함에 있어서는 신자가 떡과 포도주를 먹을 때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임재하사 그와 교통하신다고 보는 ‘영적 임재설’을 주장한다.
 

⑤ 윤리론

칼빈은 인간의 삶 전부가 하나님 중심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칼빈의 ‘하나님 중심사상’이라 한다. 의롭게 된 기독교인이라고 해도 여전히 죄인이며 이 지상에 살고 있는 동안에는 계속적으로 죄인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의롭게 된 기독교인은 그의 의인된 열매를 보여 주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후대의 칼빈주의 윤리관과 ‘청교도주의’(Puritanism)에 큰 영향을 끼쳤다.
 

⑥ 예정론

칼빈의 예정론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을 말한다.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모든 사람에게 일어날 것을 자기의 뜻대로 결정하셨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동일한 조건으로 창조된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영생으로 예정되었고 어떤 사람은 영원한 파멸로 예정되었다. 누구든지 이 둘 중의 한 편으로 창조되었다. 선택받은 사람에 관한한 이 계획은 사람의 어떤 행위나 공로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다만 하나님의 크신 은총에 의거한다고 보았다. 예정론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전제로 하는 칼빈신학의 필연적 귀결이다.

 

2) 개신교회의 전 유럽 확산

루터가 종교개혁의 기치를 든 이후 많은 개혁자들이 등장하였고 그로 인해 종교개혁은 더 한층 탄력을 받아 전 유럽에 확산되기에 이른다. 독일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던 종교개혁은 각국으로 퍼져 나갔다. 특징적인 것은 루터가 시도했던 것과 같이 자기 나라말로 성경을 번역하여 읽히는 일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때로는 허다한 사람이 피를 흘리기도 했지만 종교개혁의 흐름은 결코 멈출 수 없었다. 독일, 프랑스, 스위스, 네덜란드, 영국, 스칸디나비아 반도, 동유럽 국가들에 개신교회가 속속 세워지게 되었다.
 

3) 로마가톨릭교회의 반종교개혁

로마가톨릭교회는 개신교회의 확산에 적잖이 당황하였지만 이내 반격을 시작한다. 이 때 사제들을 중심으로 한 반종교개혁 결사대가 조직되기도 했는데 ‘예수회’(Jesuite Order)가 그것이다. 그들은 교황에 대한 절대복종을 맹세하였고 이단(개신교회)을 멸하고 선교에 힘써 로마가톨릭만의 세계를 이루기를 추구하였다.
 

   
 

또 한편 교황청은 트렌트종교회의(Council of Trent, 1545-1563)를 열어 종교개혁에 대항하였다. 그들은 더 이상 개신교회와는 대화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종교개혁가들이 비판하던 자기들의 교리들을 올바른 것이라고 재확인하였다. 그리고 자기들에게 충성하는 정치세력들을 충동질하여 개신교인들을 말살하려 나섰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는 개신교인들을 추방하든지 종교재판에 회부하여 처형하였다. 프랑스의 개신교인들은 1530년대부터 1685년에 걸친 기간 동안 여러 번의 종교전쟁을 벌이며 한때 종교의 자유를 쟁취하기도 하였지만 결국 루이 14세(Louis LIV, 1638-1715)에 의해 큰 핍박을 받게 되어 해외로 대거 이주하게 된다. 이들을 ‘위그노’(Huguenots)라 한다. 신성로마제국(오늘날의 독일)에서는 로마가톨릭교회 진영과 개신교 진영의 전쟁이 벌어졌는데 30년 전쟁(Thirty Years' War, 1618-1648)이라 한다. 종교적 문제와 정치적 문제가 뒤얽힌 이 전쟁에 거의 모든 유럽나라들이 참전하게 되었는데 결국 1648년 평화조약인 베스트팔렌 조약(Peace of Westfalen)이 체결되어 서로간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며 종결되었다. 30년 전쟁의 결과로 사망자만 8백만 명에 이른다고 전해진다. 이는 당시 신성로마제국(오늘날의 독일)의 인구 1/3에 해당한다. 종교개혁기 거의 대부분의 유럽 나라들은 종교 갈등으로 인한 유혈극을 빚었고 그 후유증으로 인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다. 알미니우스주의와 칼빈주의의 대립

1) 알미니우스(Jacobus Arminius, 1560-1609)

본래 알미니우스는 칼빈주의자로서 네덜란드 신학교의 교수였다. 그러나 특별한 계기로 말미암아 칼빈주의와 결별하였다. 네덜란드 정부의 관리출신이기도 했던 코른헤르트(Dirck V. Coornhert, 1522-1590)라는 사람이 칼빈주의의 ‘주권’, ‘예정’ 등을 반박하는 글을 써서 당시 칼빈주의가 통치이념이기도 했던 네덜란드에 혼란을 야기했다. 정부와 국민들이 술렁이기 시작하자 칼빈의 수제자로서 당시 네덜란드 교회의 최고지도자였던 ‘베자’(Theodre Beza, 1519-1605)는 오랫동안 신뢰해왔던 사람, 알미니우스로 하여금 사태수습을 부탁했다. 이에 진상파악에 나서 ‘코른헤르트’의 글을 읽던 알미니우스는 자기와 코른헤르트의 생각이 다르지 않음을 알고 잠자코 있기로 했다. 그러나 알미니우스는 1603년경 자기의 입장을 밝혀야만 할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이에 알미니우스는 당시 네덜란드의 칼빈주의식 예정론이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론을 피력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2)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의 항론과 도르트 회의(Synod of Dort)

알미니우스가 죽은지 1년후인 1610년, 알미니우스의 제자들은 5개조항의 반대 글을 발표했다.
 

① 인간은 타락하였으나 하나님을 믿지 못할 만큼 타락한 것은 아니며 자신의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믿기로 선택할 수 있다.(부분 타락, 자유의지 여존)
 

② 예정이란 하나님께서 누가 복음을 믿을지 미리 아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신 것을 의미한다.(예지예정 및 조건적 선택)
 

③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받으신 고통은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단지 믿는 자들만이 거기에 참여한다.(만인구원 및 보편속죄)
 

④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어떤 선도 행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은혜는 불가항력적인 것은 아니다.(가항력적 은혜)
 

⑤ 참된 신자는 은혜로 끝까지 견디고 구원받는다. 그러나 이 구원은 상실될 수도 있다.(궁극적 구원 실패가능)
 

이것을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의 ‘5대 항론(Arminian Remonstrance)’이라고 한다. 이 항론을 접수한 네덜란드 교회와 정부는 도르트(Dort) 시에서 종교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가 도르트회의(Synod of Dort 1618-1619)이다. 이 회의에서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이단으로 규정되었고 ‘도르트신조’(Canons of Dort)와 칼빈주의 5대강령(TULIP)이 발표된다. 칼빈주의 5대강령에는 칼빈주의 구원관의 핵심 요점이 무엇인지 잘 드러난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p.참조>
 

① 전적 타락 (Total Depravity)

② 무조건적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③ 제한 속죄 (Limited Atonement)

④ 불가항력적 은혜 (Irresistable Grace)

⑤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Saints)
 

도르트 회의를 전후하여 칼빈주의는 각지에 전파되었고 각 지역에서 나름대로의 신앙고백서와 교리서를 작성하여 발표한다. 벨직(네덜란드) 신앙고백(The Belgic Confession),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The Heidelberg Catechism),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등은 오늘날 개혁교회(Reformed Church)와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에게는 기둥과 같은 신앙유산들로 남아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교회의 제도적 개혁에 주력한 면이 컸다. 그 반면 칼빈의 종교개혁은 교회의 사상적 면에서 개혁을 이끌어 내었다는 점에서 그 공로가 지대하다고 할 것이다. 종교개혁 초기의 칼빈주의는 로마가톨릭교회와의 차별화를 위해서라도 강한 개혁주의적 교의를 세워나갈 필요가 있었다. 특별히 30년전쟁을 목전에 둔 격동의 시기였기에 알미니우스주의적 태도가 용납되기 어려울 만도 했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정착되고 적절한 시점이 이르자 하나님은 웨슬리를 통해서 알미니우스의 손도 들어주셨음을 보게 된다. 사실 루터파와 성공회의 구원관도 알미니우스적 관점을 포용하는 입장이다.
 

3) 칼빈주의 구원관의 변화

17세기 초 칼빈주의 5대강령의 내용을 극단적이라고 여긴 프랑스의 몇몇 교회지도자들에 의해 제한 속죄에 대한 수정작업이 일어났다. 그리고 18-19세기에는 미국의 대각성 운동의 와중에 칼빈주의 절대 예정교리에 대한 이탈현상이 뚜렷해졌다. 그 중심인물은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 ‘찰스 피니’(Charles G. Finny, 1792-1875), ‘티모시 드와이트’(Timothy Dwight) 등이었고 특별히 찰스 피니는 알미니우스적인 경향이 매우 강했다. 이 때 나타난 칼빈주의의 완화된 경향을 일컬어 ‘온건 칼빈주의’(Sober Calvinism), ‘수정 칼빈주의’라고 부른다. 각 집단마다 조금씩 견해가 다르지만 대체적으로 누구든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는 제한속죄를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다.
 

오늘날 미국이나 서구의 칼빈파 교회들은 온건 칼빈주의가 다수를 차지한다. 이런 경향은 한국이나 중국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보수적인 칼빈주의 경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교회는 네덜란드와 스위스와 미국의 일부 개혁교회와 한국의 일부 장로교회들이다.
 

라. 기타 교파

1) 청교도 (Puritan)

청교도는 16-17세기경 영국의 칼빈주의 성향을 가진 개신교 개혁그룹을 일컫는 말이다. 그들은 비교적 도덕적 수준이 높았고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추구하였으며 그릇된 것을 바로잡고자 하는 개혁적 성향이 강했다. 그런데 당시 영국은 정치적 영향으로 인해 성공회를 국교로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이에 대하여 청교도들은 성공회가 로마가톨릭적인 면이 많다고 여겨 성공회의 개혁을 시도하게 된다. 아울러 왕과 성공회가 청교도를 탄압한 면도 있었기에 이를 바로잡고자 하였다. 그러나 청교도들의 개혁작업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국외나 북미 신대륙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었다. 청교도들의 개혁정신과 경건한 삶의 태도는 오늘날도 많은 신앙인들의 모범이 되고 있다.
 

2) 침례교회와 회중교회의 형성

청교도들은 성공회 내부에 남아서 개혁을 시도한 그룹과 충돌을 피하고 외부에서 종교의 자유를 누리기를 꾀한 그룹으로 나뉘어진다. 성공회를 떠난 청교도들 중 일부가 온건한 재세례파와 교류하며 알미니우스적인 만인구원설(예지예정에 기초한 믿는 자는 누구든 구원받는다는 관점)을 받아들여 1609년 런던에 최초의 침례교회를 세웠다. 그 후 칼빈주의적인 특별침례교회(Particular Baptist Church), 침수침례교회(Immersion Baptist) 등이 세워진다. 그리고 1644년에는 칼빈주의 침례교도들을 중심으로 한 침례교회 신앙고백서(제1차 런던신앙고백서, First London Confession)가 작성되기도 하였다. 침례교회의 신대륙 전파는 1630년경이다. 침례교는 미국에서 신도수가 가장 많은 교단인데 대부흥운동기에 비약적 발전을 이루었다. 오늘날의 침례교회는 칼빈주의를 받아들이는 측, 알미니우스주의를 받아들이는 측, 웨슬리-알미니우스주의를 받아들이는 측, 칼빈주의와 알미니우스주의를 적당히 융합한 측 등 신학적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한국의 침례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공통점은 유아세례 반대와 침례 주장이다.
 

또 한편 동일한 청교도들이 침례교회 설립과 비슷한 시기에 영국에 처음으로 회중교회를 세웠다. 그러던 것이 후일 신대륙 곧 오늘날의 미국 땅으로 건너가 그 곳에서 크게 성장하게 된다. 1620년 메이플라워호(Mayflower)를 타고 신대륙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은 바로 회중교회 신도들이다. 신학적 색채는 칼빈주의였다.
 

마. 종교개혁기의 이단들

종교개혁기의 이단들로 대표적인 인물은 세르베투스와 소시니인데 모두 삼위일체론에 문제를 가진 인물들이었다.
 

1) 세르베투스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 1511-1553)는 몇몇 저서를 통해 삼위일체 신앙과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교리에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오랫동안 칼빈과 더불어 서신교환을 하며 논쟁을 벌였다. 그러던 중 로마가톨릭교회에 의해 리용에서 붙잡혔다가 탈출하여 칼빈이 있는 제네바로 갔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는 시의회에 의해 다시 체포되어 종교재판을 받고 처형된다.
 

2) 일부 재세례파 그룹과 소시니안파(Socinianism)

반 삼위일체 경향은 재세례파 사람들에게서 많이 발견된다. 재세례파의 과격파는 그 성향이 기존의 것을 전면 부정하는 것이었으므로 삼위일체도 부정했다. 이런 반 삼위일체 경향의 재세례파는 한때 제법 큰 세력을 형성하기도 했는데 그 중심 지도자는 소시니(Fausto Paolo Sozzini, 1539–1604)였다. 소시니는 성경은 유일한 진리지만 이성과 상식에 맞지 않는 부분은 거부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삼위일체 교리, 그리스도의 신성과 그의 속죄 사역을 부정하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이런 사상은 18세기 이후 자유주의 신학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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