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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 <나는 하나님을 아는가?>
전에 몰랐던 하나님을 새롭게 알다
2010년 01월 06일 (수) 08:06:05 양봉식 기자 sunyang@amennews.com


지식과 경험의 차이
   
▲ 튤리안 차비진 지음/장택수 옮김/생명의말씀사
지식과 경험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지식은 머리의 작업이고 경험은 가슴의 작업이다. 둘은 분리되어있지만 연결되어 있으며,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르며, 서로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하기 위한 연합을 갈망한다.

하나님을 앎을 열망할 때, 지성적 작업은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온전한 앎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지성의 작업이 온전해지는 것은 경험을 통해서다. 하나님은 이 온전해지는 시기를 때를 따라 사람마다 각기 다르게 정하셨다. <나는 하나님을 아는가?>는 지성과 경험을 아우르는 하나님을 아는 것에 관한 것을 다루고 있다.

저자는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손자다. 그에 대한 명성은 익히 알고 있고, 그의 가족과 자손들은 당연히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을 것으로 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 역시 어릴 적부터 하나님을 믿었고 또 진리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과 사건들을 배우고 암송했으며, 결코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는 하나님에 ‘대해’ 많이 알았을 뿐 하나님 ‘자신’을 알지 못했다. 깊은 만남이나 관계도 갖지 못했다. 자신의 느낌, 그리고 일방적인 태도로 하나님을 대하고 배웠을 뿐 하나님과 실제적인 교제가 이루지지 못했다.

결국 그는 10대 시절에 자신의 정체성의 혼란으로 인해 그동안 자신이 믿고 따랐던 것을 떠났다. 반항의 시간이 그에게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몫을 가지고 아버지를 떠났던 둘째아들처럼 저자도 하나님을 떠나 쾌락과 향락의 즐거움 가운데 지냈다. 자신을 파괴하던 그는 절망의 자리에서 죄로 뒤덮은 자아를 발견한다. 그리고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을 만나면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그는 극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구원이 기쁨을 누렸으며,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머리에 올바른 지식이 있더라도 뭔가가 빠질 수 있다”는 불확실성을 경험한다. 그리고 신학과 경험을 접목할 필요가 있음을 절실하게 느꼈다. 절대 진리를 부인하는 불확실한 시대에 사는 이들을 위해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확신이 있는가?”라는 글을 쓴다.

하나님을 앎
이 책은 불확실한 것이 오히려 절대 가치처럼 여겨지는 이들에게 확신과 확실을 심어주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 다름 아닌 하나님을 앎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는 구원을 얻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영접기도가 구원의 조건이 아닐 수 있다. 저자는 이점을 확실히 짚고 넘어간다. 사실이면서도 사실이 아닌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 가운데 일어나는 왜곡된 신앙일 것이다.

저자가 어릴 때부터 알고 있던 성경의 지식과 하나님에 대한 것은 그를 구원으로 이끌지 못했다. 뭔가 1% 부족한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믿음을 시험하지 못한 것이다. 현재 믿고 있다는 신념의 확고함은 오직 하나님을 알 때 전기충격처럼 성립된다. 그것은 자기의 의지보다 은혜 가운데 덧씌운 선물이다. 저자는 “당신은 하나님을 아는가?”라고 묻는다.

이 질문은 단순한 지적 작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이런 물음의 전제에 기억할 것은 교리나 윤리적 삶, 일정한 종교 행위를 따르는 것만이 아니라고 말한다. 기독교, 아니 하나님을 믿는 핵심은 하나님과의 관계, 즉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참으로 아는 것이다.

저자는 열여섯 살에 집에서 쫓겨났다. 부모가 바란 바가 아니라 경찰관이 부모 집에서 데려간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그리고 쾌락을 추구했다. 마약과 술에 취한 삶에서 그는 결코 자리를 찾지 못했다. 어릴 적부터 믿었던 하나님을 떠나 세상에서 삶을 이해하고 자신을 찾으려 했지만 그는 절망의 자리에 앉아 있는 자아의 끝만 발견했을 뿐이다.

평화가 없고 자아와 죄로 뒤덮여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다른 것도 보았다.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다. 여전히 그분은 구원받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을 알기를 바라고 계셨다. 저자는 다시 밑바닥에서 시작했다. 그는 “하나님을 정말 알고 싶다면 그분과 개인적으로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말한다.

‘입양’으로 영원히 맺어진 관계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이것은 인간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아무도 그것을 대신할 수 없다. 하나님과 멀어질수록 삶은 절망스럽다. 무엇인가 빠진 것 같다. 그것은 구원으로 부르는 하나님의 신호다.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었던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저자는 ‘입양’이라는 말을 선호한다. 그것은 관계적 차원의 구원에 대한 적합한 말이기 때문이다. 관계에 대한 적합한 말을 통해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입양하고, 더 이상 깨어지지 않는 영원한 관계를 유지하신다. 우리가 뛰쳐나가지 않는 이상 관계의 친밀함은 계속될 것이다. 만약 뛰쳐나가도 관계는 유지된다. 다만 친밀함이 없을 뿐이다. 관계의 영원한 안전함은 물론 내면에서 불안함도 사라진다. 지속적인 교제를 통해 하나님은 자신을 알려주시며 그 깊은 관계 가운데 그분으로부터 공급된 수액을 통해 열매들이 맺어진다(요 15장).

구원의 확신은 두 가지 방식으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첫째는 명백한 성경의 약속이다. 이것은 매우 객관적이면서도 선언적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사람은 구원의 기회가 있다. 약속을 믿고 받아들이면 되기 때문이다. 둘째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의 내면적이고 주관적인 특성이다. 구원에 대한 확신은 성경을 통해 보장되지만 그것은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내면적이고 주관적인 것이 없으면 변화가 없다.

성경에서도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지만 그 관계에 대한 내적 인식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자녀에게 의심의 시기를 닥쳐왔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자녀들에게 의심의 시기를 허락하신다. 그러나 시기가 오래 가거나 끝나지 않기를 바라지 않으신다. 의심의 시기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내면에서 깨닫기를 원하신다. 그것은 만남과 앎에서 비롯된다.

존 스토트는 “선물이 자기 것이라는 확신이 없다면 선물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없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면서 마음껏 누리라고 하시는 것은 그 생명이 우리 것이라는 확신을 지라는 말씀이다”고 했다. 구원의 깊은 확신을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삶의 무게가 커도 내적인 평안을 빼앗기지 않는다.

거짓된 확신
저자는 거짓 확신을 경고한다. 분명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했지만 ‘많은 사람’이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 되고 만다. 저자는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거짓 확신에 속은 것 때문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무엇이 올바른 행동인가에 집착하기보다는 예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따르기로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에 대한 실망이 사회적으로 크다. 그 이유는 믿은 자로서 구별이 세상 사람과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적 범죄는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심지어 교회 안에서까지 심각하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분명히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또 모임에 열심인데도 삶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그저 종교적 열심이다. 저자는 이런 것은 거짓된 확신에 속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첫 번째 착각은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기도를 했으니까 그걸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집회에서 개인적인 영접 기도를 한 것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선언을 받는다. 물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착각일 수도 있다. 울면서 고백한 그가 마음을 새롭게 변화를 받아 삶이 변화되고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으면 죄를 짓는 것이 반복되지 않는다.

두 번째 착각은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를 기억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과거에 일어난 사건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믿음은 언제나 현재다. 과거 손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죄인의 기도를 하고 결단한 순간을 기억하는 것만으로 하나님과 참된 관계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정기적인 예배와 십일조, 교회 활동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안정시킨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저자는 거짓된 확신에서 벗어나기를 촉구한다.

그릇된 확신
또 다른 두 가지 착각은 그릇된 확신이다. 그것은 종교적 열심과 영적 민감성이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과거 종교적인 열심은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지적하신 것이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바리새인들의 종교적인 열심에 대해 비판적이다. 하지만 자신이 눈먼 것은 보지 못한다. 특히 종교적인 구조에 얽매여 종교와 조직에 충성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전혀 살펴보지 못한 이들이 많다.

십일조, 금식, 세례, 성만찬 등을 하거나 자선 행위를 하고 종교기관과 연결되어 있는 것만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다고 믿는 이들이 많다. 이들은 분명히 테러리스트, 아동성추행자, 강도는 아니다. 분명히 하나님께 헌신된 자들이다. 그러나 자신의 종교적 행위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보장한다고 착각한다. 이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어도 경건의 능력은 부인한다(딤후 3:5).

또 하나는 영적인 민감성으로 충분하다는 착각이다. 과학이 발달했음에도 인간은 여전히 초월적인 것에 관심을 둔다. 그렇게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월적인 것이 동양주술, 외계인, 심령술, 내세, 형이상학적 치유에 대한 관심으로 영적인 갈망을 채우려는 것이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재미삼아 사주와 점, 관상을 인터넷이나 전화를 통해 경험한다.

그러나 이것은 영적으로 스스로 악한 영을 자신에게 초청하는 일이다. 하나님에 대한 영적 갈망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고 만족하려 하지만 오히려 해로운 일을 당하게 된다. 영적 갈망을 채우는 가장 확실한 길은 그리스도께 가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깨닫게 될 것이다.

약속된 말씀의 신뢰
저자의 관심은 우리의 착각과 그릇된 신앙의 행동에서 말씀으로 이끈다. 과연 우리가 믿는 믿음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신뢰하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지만 정말 무엇을 알고 있는가? 단순히 그분을 만나는 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가. 아니면 성경의 말씀을 신뢰만 하는 것으로 충분한가?

저자는 하나님의 약속과 그분을 향한 신뢰가 무엇인지 바로 알기를 촉구한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모든 위험으로부터 제외되었다거나 더 쉬운 삶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다. 이교도의 신처럼 대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충분히 우리가 조심하면 위험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음에도 위험에 빠진 다음 곧 바로 하나님을 향해 비난을 하거나 따진다. 또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인가 보상해줘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권위적인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이들은 육신의 아버지로부터 권위적인 상처를 받은 이들이다. 멀리 계신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이들은 버림을 받았거나 보호나 관심을 받지 않고 자란 이들이 가지는 생각들이다.

이처럼 우리는 성경의 어느 부분을 자신의 것으로 취하고 나머지는 버린다. 그리고 왜곡된 말씀으로 하나님을 안다고 말한다. 우리의 본성은 하나님께 내어드리지 않으면 변화지 않는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사람이 되는 데 필요한 모든 능력을 얻는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경건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기 때문이다.

지식의 감정을 새롭게
하나님을 아는 데 있어 지식은 매우 요긴한 요소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차갑고 감정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 온전한 것은 아니다. 자칫 살아 계신 하나님의 관계 중심에서 오는 지식과 다른 철학적이고 신념적인 개념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존 파이퍼는 “성도가 평생 동안 생각하는 것보다 사탄이 하루 동안 하나님에 대해서 하는 생각이 훨씬 참되다. 그러나 사탄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 사탄의 문제는 그의 신학이 아니라 그의 욕망이다.”라고 했다.

인간에게 지적 능력을 주셨으며 그 능력을 하나님과의 관계에 사용하기를 기대하신다. 지식은 많지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 지식은 별로 없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더 낫다. 이 말은 지식이 하나님과 관계를 온전하게 이끌지 못한다는 말이다.

왜냐면 우리의 지식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것으로 인해 더 풍부하고 초월적인 하나님의 지식을 막아버리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냉철한 지식보다 하나님 자신을 갈망하는 성도의 마음을 원하신다. 하나님은 누구보다 자신의 어떠함을 더 잘 알고 있음에도 성도가 그 어떠함을 하나님 앞에서 논하려 하는 모습을 안타까워하신다.

그렇다고 감정이 온전한 것은 아니다. 생각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지식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되듯이 감정과 생각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하신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우리의 지식과 생각, 감정을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되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완전하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온전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시지만 우리 역시 하나님께 다가가야 한다. 멀리서 계산하고 지식적인 잣대로 하나님을 판단하면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저자는 하나님을 알기 위해 은혜의 자리로 나가라고 말한다. 진실한 기도와 은혜의 공동체와 나눔을 가지라고 권한다.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 데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살기를 촉구한다. 믿음 안에서 영원한 날이 올 것을 기대해도 된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기쁨은 현재의 삶에서 충분히 하나님을 누릴 것이다. 또한 영원한 나라에서 경배와 환희를 맛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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