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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분석 / 구원파 이요한(서울중앙교회)의 실체
지교회 40개, 신도수 3만 명 교세로 성장
1997년 07월 01일 (화) 00:00:00 장운철 기자 kofkings@amennews.com

구원파 이요한(본명 복칠)측이 전국 지교회 40개, 교인수 3만여 명으로 성장하며, 구원파 교리를 꾸준히 전파하고 있다. 대한예수교침례회라는 교단 명칭을 사용하고 있는 이 단체는 금년 들어 벌써 일산, 구리 지역에 2개의 지교회를 세우는 등 그 세가 지속적으로 확장되고 있는 추세다. 미국, 괌, 일본, 중국, 뉴질랜드 등 한국 유학생들이 밀집해 있는 해외에서의 활동도 주목할 만하다.

   
▲ 안양시 인덕원에 위치한 서울중앙교회
본부격인 경기도 안양시 인덕원 소재 ‘서울중앙교회’의 경우 신도가 3천여 명에 달한다. 전남 광주광역시에 있는 지교회에는 2천여 명의 신도들이 모이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씨측은 이 두 곳을 주된 활동 지역으로 삼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깨달음 구원’ 등의 교리로 이단 규정된 구원파 중 이씨측은 그 동안 권신찬(유병언의 장인), 박옥수측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심권 밖에 있었다. 구원파를 말할 때면 권씨측과 박씨측이 주로 거론돼 왔던 것이다. 단지 이씨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초창기 권씨 추종자’, ‘헌금 문제로 권씨측과 분리된 자’ 등이 전부다.

권씨측과 박씨측이 이단 문제로 언론에 집중적으로 오르내리는 지난 세월 이씨측은 어떤 모습이었나. 그 동안 알려져 온 구원파의 모습과 달라진 부분이 있나. 있다면 어떤 면이 얼만큼 달라졌을까. 

기자는 이씨측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5월 27일 안양 인덕원에 위치한 본부교회(서울중앙교회)를 찾았다. 지난 95년 1월 서울 방배동에서 이전해 온 본부교회는 1천여 평의 대지 위에 5층 크기의 예배당 건물과 그 뒤켠에 신축중인 교육관 건물이 있었다. 외형적으로는 크게 성장했음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 서울중앙교회 집회 모습(비디오)
기자는 본 건물 1층에 있는 상담실을 먼저 찾았다. 구원파 신도들은 기성교회 성도들과의 개별 접촉을 통해 자신들의 교리를 전파하는 방법을 자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씨측도 예외는 아니었다. 상담실에는 6-7명의 요원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고, 상담용 전화도 두 대가 따로 마련돼 있었다.

상담 신청이 이루어졌다. 기자의 신분은 일반신도. 이 단체의 전도사로 있다는 이성기 씨가 상담자로 나왔다. 상담은 옆방(서점)에서 진행됐다.
“기성교회에 10년을 넘게 다녔으며, 교회 봉사도 열심히 하고 있는데 이요한 목사님의 책을 읽고 설교 테잎을 들으면서 신앙을 점검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자는 신앙 생활 중 누구나 한번쯤 생각들 수 있는 평범한 신앙 증세로 말했다. 상담자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몇 가지 질문을 기자에게 던졌다.

“지금 당장 죽는다면 천국에 들어 갈 것을 확신하십니까.”
“네”
“확실하게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네”

상담자는 자신이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인지 다른 형태의 같은 질문을 계속 던졌다.

“천국에 들어갈 100% 확신이 있어야 하는데 조금이라도 부족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생각해 보니 부족한 것 같습니다.”

기자는 상담자가 원하는 듯한 대답을 해 보았다. 그러자 그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비슷한 질문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그리고 기자의 신앙 감정 결과를 말했다.

“구원받지 못하셨군요.”

이 때까지 걸린 상담 시간은 길게 잡아야 5분 정도. 상담을 원한 내담자가 스스로 생각하는 자신의 상태와 상담자의 몇 마디 질문으로 인해 구원을 받았는가의 여부가 확실하게(?) 결정된 순간이다. 그 상담자의 주된 관심은 상대가 구원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즉, ‘구원받음’의 근거를 본인의 확실한 느낌이나 인식에 두고 있는 모양이다. 그것으로 인해 10년이 넘게 신앙 생활 해왔다는 한 ‘가상’ 성도가 ‘구원받지 못했다’는 사형 선고를 받게 된 것이다.

물론 그 상담자가 ‘믿음’을 말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믿음을 수 차례 강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믿는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 항상 말미에 붙어 있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또 다른 상담자인 이정익 씨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도 이 곳에서 전도사라는 직분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기자에게 메모까지 해가면서 자신들의 교리를 설명했다.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세계에 두 갈래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천국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지옥으로 가는 길입니다. 거듭나야만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믿는 것만으로는 천국에 들어가기에 부족하다는 것이다. ‘거듭남’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거듭남의 결과로 확신을 얻을 수 있으며 그것은 성경의 ‘깨달음’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이씨측은 자신들의 교리를 전파하기 위해서 ‘성경강연회’라는 자체 전도 프로그램을 이용한다. 이씨의 성경강연회는 박옥수 씨가 ‘부흥대성회’라는 이름으로 개최하는 행사와 성격이 비슷하다. 죄사함, 거듭남, 깨달음 등을 강조하며 장시간의 설교를 위주로 매일 저녁 7시 30분부터 약 2시간씩 6일간 계속된다. 이씨측의 행사는 각 지역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대게 한두 달에 한 번씩 열린다. 강사로는 이씨를 비롯해 부목사로 있는 사람들이 뛴다. 이를 위해 이씨는 2주에 한 번 꼴로 지방을 돌며 행사에 참석한다. 직접 강사로 나서기도 하지만, 집안 단속의 의미도 있어 보인다.

서울 인근 지역에서는 이씨가 1년에 4차례 정도 직접 강사로 나선다. 서울 지역의 가치를 비중 있게 둔다는 것이다. 이씨는 지난 1월 셋째 주간에 한 차례 집회를 가진 이후, 6월 9일부터 일주일간 두 번째 서울 지역 집회를 가졌다. 이씨가 강사로 나설 경우, 홍보의 수준도 한층 높아진다. 교회 주보를 통해 계속적으로 광고를 하고, 지역 주민들에게 전단지를 배포하는 등 이씨의 신도들의 발길이 바빠진다. 그 때문인지 6월 행사에 참석한 인원이 매일 2천여 명에 달했다.

이들이 행사를 치를 때면 이 단체에 대한 문의가 폭증한다. 이들의 주장이 이상하다는 내용이다. 이씨측 본부 교회 인근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한 목사는 “‘예배가 이상하다, 일반 교회와 다른 것 같은 내용이 많다’는 성도들의 문의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이씨측 신도들은 그들끼리 모인다. 이들도 조, 구역, 교구라는 조직을 갖고 있는데, 신도가 가장 많은 인덕원의 본부 교회에는 50개의 조와 40개의 구역 그리고 9개의 교구로 편성되어 있다. 조 모임은 한 달에 두 번씩 갖는데 참석 대상은 주로 주부들이다. 선교회라는 조직도 11개가 있다. 먼 거리에 있는 신도들을 위한 지역 모임이다. 지교회로 독립하기 전의 모임 형태다.

‘진리의 말씀출판사’와 ‘영생의 말씀사’라는 두 출판사에서 이씨의 설교집과 관련 출판물을 내고 있다. 이 곳에서 출판된 서적이 아직까지 시중 서점이나 기독교 서점 등에서 유통되고 있지는 않지만, 출판물의 양과 종류는 꾸준히 늘고 있다.

부목사와 전도사들은 주로 구역과 교구 모임에 집중적으로 투입된다. 전도인이라고 부르는 직분도 있다. 전도사로 혼용하기도 하는데 이들은 전도만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이다. 전국에 50여 명이 있다.

목사, 전도사, 전도인 등이 되기 위한 조건은 기성교회와 ‘전혀’ 다르다. 기존의 신학교를 나온다고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곳에서는 신학교를 나와야 할 의무도 필요도 없다.

물론 나름대로의 기준은 있다.

“먼저 거듭나야 합니다. 그리고 전도의 소명이 있어야 합니다. 신학교는 안 나와도 됩니다. 바울, 디모데, 실라 등 예수님의 제자들도 신학교를 나온 것은 아닙니다.”

이씨측의 한 전도사가 말하는 신학교는 신학교의 운영 체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신학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신학교를 안 나와도 된다는 말은 기존의 신학을 거부한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렇다고 신학이 전혀 필요 없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필요한 부분은 수용하겠다는 것이다. 목사 후보생들은 매일 한 시간씩 자체적으로 공부를 한다. 공부는 대화식으로 진행되며 이 때 신학 서적도 참고를 한다. 

이씨측은 두 가지 계획을 갖고 있다. 신학교 설립과 대학가 공략이다. 신학교 세우기는 자신들이 현재 진행중에 있는 목사 후보생들의 공부 방식을 체계화하면 되는 것이다. 구원파 신학교의 탄생은 예고된 셈이다.

이들의 대학가 공략은 현재 시작단계에 있다. 대학가 집회를 통해서 대학생뿐 아니라 인근 지역 주민들까지 포교의 대상으로 삼는다. 집회 시간을 저녁 시간으로 잡는 것도 그 이유다. 아직까지 대학 내에서 공식적으로 구성된 동아리는 없다. 그렇다고 대학이 이들로부터 안전한 영역은 아니다. 이씨측은 금년 들어 한양대와 건국대에서 집회를 가졌다. 5백여 명이 참석한 것으로 전해진다. 상당수 대학에서 이들은 이미 자체 모임을 갖고 있다. 계속해서 이들은 전국 대학으로 자신들의 모임을 확산시킬 예정이다.

구원파 교리의 핵심은 ‘깨달음’

   
▲ 이요한 씨
이씨측 신도들은 ‘깨달음’이라는 말을 많이 했다. 이 말은 다른 구원파 단체에서도 자주 사용하는 대표적인 용어다. 그리고 그 말의 의미를 구원의 조건과 깊이 연관시키는 것도 그들의 공통점이다. 이것은 “성경말씀을 깨달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지 다른 방법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이요한 씨의 주장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씨는 설교와 책을 통해서 이와 같은 말을 자주 하고 있다<자료1 참조>.

깨달음이 있으면, 반드시 깨달은 날이 있게 된다는 주장도 구원파의 특징이다. 이씨측에서도 이는 확연히 드러난다. 마치 그들끼리 통하는 암호와도 같다. 이러한 모습은 그들이 발간하는 계간 잡지인 ‘생명의 빛’에 잘 나타나 있다.

“안녕하세요. 95년 10월 21일 구원받은 김래경 자매입니다.”
“1995년 4월 8일 구원받은 이창준 형제입니다.”
“주님의 은혜 가운데 함께 해 온 시간은 이제 겨우 두 달, 1996년 10월 13일 구원을 받고부터 제 삶의 모든 것이 변해 버렸습니다.”(중국에서 김광호)
“구원받은 지 18일만에 교통사고가 났다. 지난 해(96년) 6월 8일 12시 나는 영혼의 거듭남을 경험했다.”(서산교회 김희숙)

이들은 깨달은 날을 특별히 기억한다. 그래서 신앙 간증을 하거나 자신을 소개할 때 그 날을 종종 언급한다. ‘날짜는 구체적으로 깨달았는지 알기 위해서 질문하는 것’이라는 말이, 그들이 날짜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가를 입증한다. 자신들에게는 확실하게 구원받았다는 증표가 되기 때문이다.

이요한 씨가 구원받았다는 날은 62년 10월 30일이라고 한다. 기자에게 상담자 역할을 해 주었던 이성기, 이정익 씨도 각각 자신들의 구원받은 날이 있음을 밝혔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그 날이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 예로 노인이나 군인 등 특수한 경우를 든다.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그 날을 잊어버리기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때문인지 이요한 씨는 구원받은 시간에 있어서는 오후 6시와 8시로 혼동하며 사용하고 있다.

   
▲ 이씨의 설교 테잎
이씨측의 ‘깨달음’에는 두 가지 오류가 더 발견된다. 첫째 5-10분 간의 노방 전도를 통해서 구원받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주장과, 둘째 5-6세 정도의 어린아이는 깨달음이 힘들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깨달음이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그들의 기준에 의하면 어린아이는 단지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구원과는 거리가 멀다는 뜻이 된다. 그들은 자신들이 말하는 깨달음이 없는 상태에서 행해지는 복음 전파와 영접기도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한다. 결국 이들이 주장하는 ‘깨닫는다’는 것은 ‘오직 믿음’이라는 기성교회의 구원론과는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구원파의 깨달음 교리에 있어, 권신찬 씨는 “죄사함을 깨닫고”, 유병언 씨는 “복음을 깨닫고”, 박옥수 씨는 “깨닫고 거듭나야” 등으로 말한다. 이요한 씨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라는 등의 표현을 한다. 이와 같은 말은 그의 설교 가운데서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오직 성경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않으면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이요한의 설교집 ‘너는 어디로 서냐’, 34쪽).
“곧 복음의 진리를 깨달음으로 좁은 문을 통과합니다. 그러나 복음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주님이 모르신다고 하실 것입니다”(위의 설교집, 22쪽).

이씨측이 말하는 깨달음은 ‘믿음’과 구별된다. 믿음만으로는 구원받는 데 부족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씨도 믿음을 말한다. 그러나 그 때의 믿음도 기성교회에서 말하는 의미의 것은 아니다. 믿는다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며, 반드시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깨달은 ‘날’을 강조한다. 그 날이 깨달음을 확인하는 근거가 된다고 한다. 이씨측은 자신들의 깨달은 날의 근거를 골로새서 1장 6절에 두고 있다. 성경이 말하는 그 날이 자신들이 말하는 복음을 깨달은 날이라고 한다.

   
▲ 이씨측의 간행물. 계간지와 소책자들.
따라서 이씨측은 믿음만을 말하는 기성교인들 가운데는 구원받은 사람이 매우 적다고 한다. 자신들과 같은 깨달음이 없다는 점에서 그 말은 당연하다. 적은 수가 얼마라고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는다. 이는 이씨의 설교에서 잘 나타난다.

“우리 시대도 주님을 올바로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지가 큰 문제입니다. 그 숫자는 하나님만 아시겠지만 성경에는 적다고 되어 있습니다. 믿는 사람 중에 천국에 들어갈 사람이 몇 퍼센트나 될지 모르지만 너무나 적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적다고 하신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믿는다고 하는 수많은 기독교인들 중에 실제로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은 너무나 적을 것입니다”(이요한 설교집 ‘너는 어디로 서냐’, 21, 27쪽).

이씨는 구원받은 수와 관련하여 소돔과 고모라성, 노아의 방주, 예루살렘 멸망 사건 등을 예로 든다. 그 사건에 나오는 ‘10, 8, 1’이라는 숫자를 강조하며 마치 자신들만이 ‘선택받은 소수’인 듯이 말을 한다. 이같은 점은 이씨측의 한 전도사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거듭난 자가 몇 명이라고 말 할 수는 없지만, 많지는 않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거듭난 사람을 만나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이다.”

그 전도사는 자신들은 대부분 깨달은(거듭난) 신도라고 자랑까지 한다. 이러한 이씨측의 주장에 의하면 기성교회 교인들 대부분은 구원받지 못한 셈이 된다.

이씨는 기성교회와 자신들을 구분하기 위해 기성교회를 비난하는 말도 한다. 굳이 ‘기독교인’과 ‘그리스도인’을 구분하고, ‘종교생활’과 ‘신앙생활’을 나누는 등 기성교회와 자신들과의 차별화를 통해 자신들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듯이 비춰지고 있다. 이는 권신찬 씨가 ‘종교’와 ‘복음’을 구분하여 기성교회는 ‘종교’이고 자신들은 ‘복음’이라며 차별화를 했던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이씨의 주장을 직접 보자.

“천국가지 못할 기독교인들(설교제목) -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곧 목사, 전도사 혹은 부흥사 노릇도 하고 성경을 가르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내어쫓고 병도 고치는 등 많은 권능을 행한 사람도 주님께서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셨으며 결국 쫓겨난 것은 웬일일까요.”(자료1 참조).
“구원받는 적은 무리(설교제목) - 구원받는 자가 아주 적은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구원받은 적은 무리에 참여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위의 자료 참조).
“훌륭한 종교가들 즉 목사, 신학박사, 부흥강사, 심지어 성령충만하다는 사람들까지 수없이 지나갔는데, 그들이 지나가면서 무엇을 했습니까? 여러분의 영혼을 고쳐주었습니까?”(자료3 참조).
“종교생활과 신앙생활이 다르듯이 그리스도인과 기독교인은 다릅니다. 기독교가정에서 태어나서 기독교교육을 받고 교회 의식에 참여하고 열심을 내면 누구든지 기독교인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아무나 될 수 없습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교회당에 열심히 다니는 사람을 크리스챤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진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다니면 열심 있는 교인일 뿐입니다”(이요한, 요한복음 강해 3. 107쪽).

심지어 이씨측은 주기도문을 외우는 것조차도 단순한 종교생활 차원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주기도문을 외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씨측의 주일예배, 수요예배, 청년부 예배 등 어느 집회에 참석해 보아도 이들은 주기도문을 외우지 않는다. 새벽 예배, 철야 예배는 아예 이 곳에서 존재하지도 않는다.

주기도문 이야기가 나오면 이씨측은 항상 “그것은 외우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다”라고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한다.

   
▲ 이씨의 설교집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에서 어떻게 기도해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주기도문은 매일 암송하라고 준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라는 말씀은 우리의 생활 가운데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고 영광스럽게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기도하라는 의미입니다”(이요한, 요한복음 강해 3집, 21, 23쪽).

그렇다고 이들이 외우는 행위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들은 매주 자신들의 주보에 성경 구절을 3개씩 적어 놓으며 암송을 강조하고 있다. 지난 주, 이번 주, 다음 주 할 것까지 공개적으로 안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유독히 주기도문에 한해서는 ‘외울 필요가 없다’고 고집한다. 심지어 이씨측 전도사 이정익 씨는 “외운다는 것이 성경적으로 합당치가 않다. 주기도문으로 해서, 율법을 외우는 것으로 끝나는 그런 형식도 성경에는 없다”고까지 말한다. 주기도문 외우는 것을 율법주의적 종교행위로 여긴다는 말이다.

기존에 알려진 구원파도 이씨측과 마찬가지로 주기도문을 외우지 않는다. 한 번의 깨달음을 통해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얻었으니 그것을 위한 기도는 필요 없다는 이유다. 그 때문에 회개를 ‘회개와 자백’이라는 두 용어로 나눈다. 회개는 죄인인 상태에서 딱 한 번만 하는 것이고 이후로는 자백(죄사함을 받기 위한 구체적인 통회 자복과 간구가 아닌, 자신이 죄인이라고 하는 단순한 인정)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죄까지 다 용서해 놓으셨으니. 구원받고 난 후 잘못된 것이 있으면 예수님 앞에 자백할 수 있습니다. 전에는 자백과 고백, 회개를 구별하지 못했는데 예수를 믿은 후에는 구별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미 회개하고 고백한 그리스도인들은 생활 가운데서 죄가 발견될 때마다 주님께 자백하며 살아야 합니다”(권신찬, 오실 이가 오시리니, 237쪽).

그 동안 구원파는 구원받기 위하여 한 번만 회개하면 되는 것이고, 그 이후로는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해 왔기 때문에, 주기도문 중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라는 반복적 회개 부분이 용납될 수 없어서 주기도문을 외우지 않는 것으로 지적돼 왔다. 이씨측이 주기도문을 외우지 않는 것도 바로 이같은 이유 때문인지는 아직 직접적으로 확인되지 않고 있다.

예배중 주기도문을 사용하지 않는 것처럼 기도 자체를 하지 않는 것도 그 동안 알려져 온 구원파 교리의 특징의 일부다. 울고불고 통회하며 기도하는 것은 구원받지 못한 증거가 된다며 기도를 외면해 왔다. 그러나 이씨측은 기도를 한다. 오히려 기도의 중요성을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기성교회의 기도와는 다르다. 통회하는 기도의 모습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평일이나 ‘성경강연회’가 열리는 그들의 특별 집회가 있는 날 등 어떤 날에도 새벽 기도회나 철야 예배가 없다는 점이 이씨측의 ‘다른 기도’를 입증하는 한 예다.

이렇듯 이씨는 자신만의 독특한 구원파 교리를 신도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무리한 성경해석을 한다. 일명 풍유적 해석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씨는 자신의 성경해석이 옳으며, 그렇게 이해하지 않는 기성교회 목사를 향해 ‘무지’와 ‘교만’이라는 용어까지 사용하며 몰아붙이기도 한다(자료3 참조).

그가 자주 사용하는 대표적인 성경 본문은 누가복음 10장의 ‘선한 사마리아인’에 관한 것이다. 그는 이 설교 내용을 ‘참이웃’이라는 제목의 작은 소책자로도 발행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사람이 타락하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강도는 마귀, 제사장은 종교지도자, 레위인은 자기의 열심 있는 종교행위, 상처를 치료하는 데 사용했던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 기름은 성령,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이라고 해석한다. 심지어 주막을 교회라고 덧붙이기도 한다.

이런 식의 성경 해석에 대해 김하연 목사(예루살렘 히브리대 박사 과정)는 ‘대표적인 풍유적 해석’이라고 지적한다.

“이 본문의 서두에 어떤 율법사가 ‘누가 내 이웃입니까’ 하는 질문에 예수님은 37절에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고 하심으로 문맥은 어떻게 내가 진정한 이웃이 될 수가 있는가에 답을 해 주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이 구절은 어떤 여행자의 지극히 평범한 여행로를 설명한 것이지 결코 더이상 영적인 타락이니 하고 해석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요한 씨의 ‘깨달음 교리’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가 다른 구원파처럼 많이 알려지지 않았고, 어느 정도 변형된 교리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그 피해의 심각성이 생각보다 훨씬 커질 수 있다.

취재중 기자는 이요한 씨의 인터뷰를 위해 그에게 몇 자례 전화 연락을 취했다. 그의 사상을 밝히는 데 중요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6월 10일 본지 발행인이 최삼경 목사라는 점을 들어 끝내 인터뷰를 거부했다.


이요한 교리 자료
  
<줄임표기 안내>
너는: 설교집 “너는 어디로 서냐”
①: 설교집 “요한복음 강해 1”
②: 설교집 “요한복음 강해 2”
③: 설교집 “요한복음 강해 3”

자료 1. 이요한의 어록   
자신이 거듭났는지 거듭나지 않았는지 확실히 모르는 사람은 자신이 거듭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자신이 거듭난 것을 압니다(97.1.13).

어떤 사람은 “지금 영접하십시오.”, “예 내가 영접합니다. 예 내가 주님 이 시간 영접합니다. 내 마음 속에 계신 줄로 믿습니다. 아멘” 그래도 안 계시는 수가 더 많아요.(웃음) 그렇게 해서 영접하는 게 아닙니다(97.1.15).

우리 시대도 주님을 올바로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지가 큰 문제입니다. 그 숫자는 하나님만 아시겠지만 성경에는 적다고 되어 있습니다. 믿는 사람 중에 천국에 들어갈 사람이 몇 퍼센트나 될지 모르지만 너무나 적을 것입니다(너는-21쪽).

우리는 주님이 적다고 하신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곧 복음의 진리를 깨달음으로 좁은 문을 통과합니다. 그러나 복음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주님이 모르신다고 하실 것입니다(너는-22쪽).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과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이란 대개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신자와 불신자, 기독교인과 이교도, 혹은 선한 자나 악한 자로의 구별이 아니라 오히려 이미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두 종류가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너는-24쪽). 

천국가지 못할 기독교인들(설교제목) -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곧 목사, 전도사 혹은 부흥사 노릇도 하고 성경을 가르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내어쫓고 병도 고치는 등 많은 권능을 행한 사람도 주님께서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셨으며 결국 쫓겨난 것은 웬일일까요(너는-25쪽).

구원받는 적은 무리(설교제목) - 구원받는 자가 아주 적은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구원받은 적은 무리에 참여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성경에는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말씀이 있는가 하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잘 믿으려 노력하는 사람들 중에 실제로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라는 말씀도 있으니 성경말씀에 비추어 보아 자신의 구원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 믿는다고 하는 수많은 기독교인들 중에 실제로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은 너무나 적을 것입니다(너는-26,27쪽).
기독교인과 그리스도인(설교제목) - 기독교인과 그리스도인은 엄격히 구별되어 있습니다(너는-31쪽).
성경말씀을 깨달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지 다른 방법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너는-74쪽).

어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믿기는 믿는데 마음에 괴로움이 많습니다. 집에서는 예수 믿는다고 미워하는 사람도 있고 핍박도 있고 세상을 살아가자니 여러 가지 답답한 일도 많고 죄로 인한 양심의 괴로움과 갈등도 있습니다. 예배당에 가면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를 하는데 그 마음이 너무나 복잡하고 답답해서 울면서 하소연합니다. “이렇게 괴롭지마는 죽어서 천국에나 가야지” 그러나 그렇게 답답한 사람은 천국에 가지 못합니다. 그 마음이 지옥인데 어떻게 천국에 가겠습니까(너는-77쪽).

요즘 교회당에 다니는 사람 치고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지 않는다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사도신경을 줄줄 외우고, 또 믿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구원받았습니까”라고 물으면 “구원을 어떻게 받습니까”라고 합니다. “죄사함 받았습니까”라고 물으면 “죄사함을 받아야 할텐데, 회개를 덜해서···” 등으로 대답합니다(너는-155쪽).

거듭나는 것이 많은 사람에게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구원받았습니까” “거듭났습니까”라고 물으면 대체로 거부감이 생깁니다(①-95쪽).
우리가 거듭나는 것은 복음을 깨달음으로 됩니다(①-98쪽).

지금은 성경을 믿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적은 필요 없습니다(①-335쪽).
이제 머지 않아 유럽에서 한 인물이 나타나서 비상한 방법으로 중동에서 평화를 약속하고 세계평화를 이룩할 것입니다. 이때 유대인들은 그를 기쁘게 왕으로 영접할 것입니다(①-190쪽).

어떤 사람은 당장 깨닫는데 나는 왜 이렇게 못 깨닫느냐고 합니다. 그 이유를 자신은 모르지만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 사람이 구원받을 상태가 될 때까지 두고 보시는 것입니다(①-279쪽).
거듭나는 것은 순간적이고 분명한 경험입니다. 이 경험이 있는 사람은 듣고 깨달은 날이 있습니다(②-44쪽).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에서 어떻게 기도해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러나 주기도문은 매일 암송하라고 준 것이 아닙니다(③-21쪽).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라는 말씀은 우리의 생활 가운데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고 영광스럽게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기도하라는 의미입니다(③-23쪽).
예수님께서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나라가 임하는 것이 될까요? 구원받은 사람 하나하나가 “나라”입니다(③-221쪽).

요즈음 예수님을 믿어도 구원을 못 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과 직접적으로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확실하게 알아야 영생을 얻는다는 뜻입니다(③-32쪽).
교제 안에 있는 것이 주님 안에 있는 것이고 교제를 떠나는 것이 주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비이자 비밀입니다. 거듭난 사람이 아니면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③-113쪽).
종교생활과 신앙생활이 다르듯이 그리스도인과 기독교인은 다릅니다.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서 기독교교육을 받고 교회 의식에 참여하고 열심을 내면 누구든지 기독교인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아무나 될 수 없습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교회당에 열심히 다니는 사람을 크리스챤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진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다니면 열심 있는 교인일 뿐입니다(③-107쪽).

자료 2. 이요한의 간증
저에게는 그 날이 있었습니다. 제가 교회에 다닌 것은 중학교 1학년 때부터였습니다. 나중에 성경을 열심히 배웠고, 신학교를 다니면서 교회를 맡아 설교도 했습니다. 누구보다도 열심있는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했습니다. 금식 기도, 산 기도, 철야 기도 그리고 노방 전도 등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습니다. 공원에나 열차에서 전도지를 나눠주면서 전도도 하고 교회를 맡아서 열심히 설교도 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저를 보고 젊은 사람이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저렇게 할 수 없다고 칭찬도 해주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거듭나지 못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이제 죽으면 하나님 앞에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1962년 10월 30일 확실한 복음을 듣고 깨달아 거듭나게 되었습니다(①-94).

거듭나는 것이 많은 사람에게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구원받았습니까” “거듭났습니까” 라고 물으면 대체로 거부감이 생깁니다(①-95).

우리가 거듭나는 것은 복음을 깨달음으로 됩니다(①-98).
제가 구원 받던 날 집에 가서 일기장에 “하나님이 1962년 10월 30일 저녁 8시경 허리를 굽히시고 더러운 흙덩어리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셨다”고 썼습니다(①-102).
필자가 복음을 깨닫고 난 후에 소경이 나를 인도해 왔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재자신도 눈이 감겨 있었으므로 저를 인도하던 사람이 소경인지 아니지 조차도 몰랐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제 눈이 뜨였습니다. 밝은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는 제가 오히려 소경들을 인도해야 할 책임이 있음을 통감하게 되었습니다(①-297).
성경에는 복음을 깨달음으로 거듭난다고 하셨는데(①-170)

자료 3. 이요한의 풍유 설교
강도 만난 자(설교제목)- 누가복음 10장으로 돌아가서 29절에 이 율법사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라고 합니다. 지금껏 길게 말씀드린 이유는 많은 사람이 바로 율법사처럼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으니 그 이웃이 누구인지 알려 주기만 하면 찾아서 자기 몸처럼 사랑할 수 있겠다는 말이지요, 사랑을 받을 대상인 그 이웃은 다름 아닌 바로 ‘자신’이고 자기 몸처럼 이웃에게 사랑을 주실 분은 ‘주님’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이게 무지이고 교만입니다. 이 부분을 설교하는 유명한 설교자들 대부분이 말씀의 본 뜻을 오해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해당 문구에만 집착한 채 그 말씀하신 취지와 깊은 뜻을 못 보면 그들의 얘기가 일리가 있는 것 같지요.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불쌍한 사람들(강도 만난 이웃)을 도와주는 선행이 사랑이며, “이를 행하라”(28절),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37절)고 가르치는 것이 통상적인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이 성경말씀이 그런 뜻이 아니라는 것은 지금껏 말씀드린 것으로 분명해졌습니다. 30절 이하의 내용에는 ‘이웃’은 누구이고 어떤 처지에 있는 사람인지, 그 이웃을 도울 수 있는 ‘사마리아인’은 누구인지 등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무엇을 설명하겠습니까?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도성, 거룩한 하나님을 섬기는 곳입니다. 여리고성은 저주받은 곳이고, 조금 더 내려가면 죽음의 바다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섬겨야 할 인간들이 하나님을 떠나 세상으로(예루살렘 → 여리고) 가는 타락의 과정을 설명합니다 강도(마귀)가 그 사람을 때려서 만신창이를 만들어 거반 죽은 상태로 버려두고 갔다는 것은 그 영혼의 비참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생각이나 현대 20세기 기독교의 가르침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영적인 상태는 곤고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벌거숭이이며, 만신창이가 되어 지옥으로 행해 내려가는데 자신들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 소위 주제파악을 전혀 못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본 비유말씀에 등장하는 제사장이나 사마리아인이 아니라는 사실부터 알아야 합니다. 그 사실을 모른 채 그 이하의 내용을 보면 강도 만난 사람은 자기가 도와줄 수 있는 가련한 타인으로만 보이고, 사마리아인이 자신인 양 크나큰 착각에 빠집니다.

그런데 그 제사장은 만신창이가 되어 죽어 가는 이 불쌍한 사람을 ‘보고는 그냥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여러분 곁으로 얼마나 많은 종교가들이 지나갔습니까?, 훌륭한 종교가들 즉 목사, 신학박사, 부흥강사, 심지어 성령충만하다는 사람들까지 수 없이 지나갔는데, 그들이 지나가면서 무엇을 했습니까? 여러분의 영혼을 고쳐주었습니까?

이렇듯 제사장(종교지도자들)도, 레위인(자기의 열심 있는 종교행위)도 자기를 도와주지 않고 그냥 지나가고 말았습니다(영혼의 상처를 전혀 감싸주지 못했으니).

여기서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 기름은 성령을 가리킵니다. 포도주와 기름이 강도 만나 죽게 된 자의 목숨을 건졌듯이 예수님의 피와 성령의 역사 하심이 우리 영혼을 구원하는 치료제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성경이 주어져 있는 것은 죄인으로 하여금 죄 용서함 받아서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한 것 아닙니까? 죄사함 받으려면 예수님의 피로써 씻김 받아야 하고, 성령은 그 사실을 알게 하면서 거듭난 사람 속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 성경말씀에 복음의 핵심 진리는 다 거론된 셈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나그네는 지옥갈 운명에 처해 있으면서 자력으로는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는 개개인의 영혼이고, 그 강도 만나 죽게 된 자의 이웃인 사마리아인은 영혼의 구원자인 예수님입니다. 죽게 된 상처인 죄를 치유하는 것은 포도주인 예수님의 피이며, 그것을 알고 믿음으로 새 생명을 갖게 해 준 것은 기름 곧 성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미리 약속하신 대로 오셔서 정해진 구속사역 곧, 죄를 사함 받기 위한 피흘림의 일을 하셨습니다. 영혼치유의 하나의 치료제인 피(포도주)는 준비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기름)이 예수님(사마리안인)에 의해 부어져야 즉, 성령의 사역이 있어야 영혼의 구원역사가 이루어지는데, 어떠한 사람 속에 성령께서 역사 하시느냐가 중요한 문제로 남습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다 알아도 그 아는 것이 이론에 그친다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성령이 주시는 믿음이 없는’ 지식이 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세상에는 그런 ‘생명 없는’ 모조품 그리스도인도 많습니다. 그 은혜와 진리가 있는 곳이 어디입니까? 예화에 주막으로 나온 안식처이자 치료소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월간 <교회와신앙> 1997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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