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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모 받을 자격 있는 오직 한 분
2008년 10월 28일 (화) 00:00:00 장경애 jka9075@empal.com

<이것이 예배이다> 중에서
A.W. 토저 지음/ 이용복 옮김/ 규장 펴냄

현재의 기독교는 ‘자판기 기독교’라고 부를 수 있다. 왜냐하면 500원짜리 동전을 넣으면 필요한 것이 즉시 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 오늘날 기독교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과거의 기독교는 달랐다.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이 믿었던 기독교는 두려움, 놀람, 갈망, 사랑, 숭모의 감정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기독교였다.

어서(Usher) 감독은 토요일에 강가로 내려가 오후 내내 하나님의 존전에서 무릎을 꿇고 외경심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경배하곤 했다. 조나단 에드워드의 사위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는 눈이 쌓인 곳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와 중보기도와 경배에 몰두했는데, 그가 기도를 끝냈을 때에는 그가 앉은자리의 눈이 원형으로 녹아 있었다고 한다.

감리교가 배출한 위대한 성자 존 플레처는 아무 세간도 없는 골방 바닥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곤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사람들이 그곳을 찾았을 때 그 골방의 바닥에서 오목하게 들어간 부분이 발견되었다! 또한 그 방의 한 벽면은 그가 하나님을 갈구하면서 내뿜은 입김으로 변색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그는 거룩함과 영광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을 경배했던 것이다!

이것이 숭모(崇慕)이다. 이 숭모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숭모하다’라는 말을 아주 아껴서 사용한다. 나는 어떤 인간을 가리켜서 “나는 그를 숭모한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절대 그럴 수 없다. 나는 아기들을 사랑한다. 사람들을 사랑한다. 그러나 그들을 숭모하지는 않는다. 나의 숭모를 받을 자격이 있는 분은 오직 한 분뿐이시다. 나는 이 단어를 오직 하나님을 위해 사용할 것이다. 하나님 이외의 어떤 다른 존재 앞에서도 나는 무릎을 꿇지 않는다. 그 어떤 존재 앞에서도 나는 두려움과 놀람과 갈망과 외경심을 느끼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만 나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짖을 정도로 하나님에 대한 소유욕으로 불탄다.

신학의 검댕을 잔뜩 뒤집어쓴 어떤 이들은 “나의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느낀다. 심지어 얼음 바다에서 나온 편집자들이 몸에 붙은 비늘 같은 얼음조각들을 떨어버리고 펜을 꺼내어 웨슬리와 왓츠의 찬송가를 뜯어고친 것 같다는 느낌을 주는 찬송가책들도 있다. 나도 이런 찬송가책을 적어도 한두 가지 본 기억이 있다. 그들은 ‘나’, ‘나를’, ‘나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없애고 그 대신 ‘우리’, ‘우리들’, ‘우리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적어 넣는다. 예를 들면, “나는 하나님을 사랑할 것입니다”라는 문장을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것입니다”라고 고쳤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이 감히 ‘나’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못할 정도로 겸손한 사람들이라고 칭찬해주어야 하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은 “오, 하나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새벽에 하나님을 찾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법이다. 예배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사랑을 체험하는 사건이다. 사도 바울, 다윗, 이사야, 모세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열정으로 불탔던 사람들이다. 나는 그들처럼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다”라고 외칠 것이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시23:1,2)라고 노래하였다. 만일 얼음 바다에서 갓 나온 편집자가 이 시를 읽었다면 “여호와는 우리의 목자시니 우리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우리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고쳤을 것이다. 이렇게 고친다면 집단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된다. 이 경우, “나의 하나님‘의 관계는 실종된다.

‘나의 하나님’이라고 말하기 전에 ‘우리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마치 이 세상에 다른 사람들이 전혀 없는 것처럼 영혼의 고독 속에서 하나님과 일대일로 만나는 경험이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없다.

숭모는 우리를 하나님 앞에 쏟아 붓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발 앞에 쏟아 부어지기를 원한다. 진정으로 원한다. 당신은 다윗에게 일어난 일을 기억하는가? 언젠가 그는 갑자기 ‘회고의 정’에 사로잡혔다. 우리는 이것을 ‘향수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향수병’이라는 말이 더 적당할 것 같다. 어느 날 갑자기 향수병에 사로잡힌 다윗은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누가 나로 마시게 할꼬”(삼하23:15)라고 말했다. 그는 소년시절이 생각났던 것이다. 그의 말을 들은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충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다”(삼하23:16). 어쩌면 그들은 높아지고 싶은 욕심 때문에 그렇게 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들은 목숨을 걸고 위험 지역으로 들어가 물을 길어왔다. 그러나 물을 받아든 다윗은 그것을 마시지 않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리며 “여호와여 내가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갔던 사람들의 피니이다”(삼하23:17)라고 말하였다. 그는 그 물을 하나님께 봉헌하였던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알게 될 때,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성품을 무한히 신뢰하게 될 때, 하나님께 감탄하면서 하나님의 탁월성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 하나님의 영광에 매혹되고 하나님을 숭모할 때,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의 발 앞에 우리를 온전히 부어드리기를 원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도록 누군가 우리를 조르고 독촉할 필요는 없다. “와서 헌신하라! 와서 성별된 삶을 살라!”라고 계속 외치고 재촉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재촉하고 구걸하면 당장은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별 도움이 안 된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발 앞에 자신을 쏟아 부어들기를 원하는 법이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에게는 성별과 헌신이 어려운 것이 아니다. 누가 말려도 그는 스스로 헌신된 삶을 살기를 원한다.

어시스트 장경애/ 빛과소금교회 최삼경 목사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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