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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 <그들의 자살, 그리고 우리>
“한국교회, 자살을 논하자”
2008년 10월 24일 (금) 00:00:00 전정희 기자 gasuri48@hanmail.net

   
▲ 조성돈/정재영 지음, <그들의 자살, 그리고 우리>, 예영커뮤니케이션, 2008년 10월 14일 발행

개인 생명의 주체는 누구인가? 자신인가, 하나님인가? 대한민국은 일 년에 1만2천174명, 하루 평균 33명이 자살로 죽어가고 있다. 2007년 죽은 자들의 원인을 보면 자살은 암, 뇌혈관 질환, 심장 질환에 이어서 사망 원인 4위다. 이것은 당뇨병보다 높은 수치다. 자살을 생각하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사람들, 시도를 했지만 죽지는 않은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자살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은 어떤가? 요즘은 성도들 중에서도 자살하는 이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이에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 것은 ‘기독교인이면서 자살한 이들의 구원문제’다. 그리고 ‘자살한 이들에 대한 장례예식’을 교회에서 치러주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그들의 자살, 그리고 우리>는 이런 주제를 다룬다.

그동안 기독교에서는 가룟 유다의 자살에서 신의 저주를 보듯이 자살하면 지옥간다는 상식이 있어왔다. 이러한 입장을 잘 보여주는 것은 어거스틴이 5세기 초에 쓴 <신국론>(De Civitate Dei)이다. 이 책에서 그는 자살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취했다.

“어느 누구든 범죄자조차 개인적으로 죽일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자기를 죽이는 사람은 누구나 명백한 살인자다. …유다는 하나님의 자비를 멸시하고 자기 파괴적인 죄책감에 사로잡혀서 구원을 얻게 하는 기회를 남겨놓지 않았다. …자살자는 ‘네 이웃을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에 분명히 저촉되며 인간, 즉 다른 사람 그리고 자신에게도 적용된다. 자신을 죽이는 것도 인간을 죽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하고 우리가 확인하는 것, 그리고 온갖 방법을 다하여 우리가 증명하는 것은 결코 일시적인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 생명을 포기할 권리가 인간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끝이 없는 세계에 빠지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1권 17장, 26장).

이 같은 <신국론>의 논리를 정확히 보면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이다. 즉 자살이라는 것이 자신을 죽이는 것이라고 하여도 자신의 생명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그 권리조차도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자살에는 살인의 죄가 더해지는 것으로 이해를 한 것이다.

이러한 어거스틴의 견해에 따라 563년 ‘브라가 공의회’와 580년 ‘오세르 성직자 회의’에서는 모든 자살자를 처벌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또 중세의 스콜라 철학의 대가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의 대표작인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에서 자살에 반대하는 세 가지 이유를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첫째, 만물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자살은 이러한 자연적 순리를 거스르는 일이 되는 것이다. 둘째, 공동체에 속한 일원으로써 자살은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공동체에도 손해를 끼치게 된다는 것이다. 셋째, 생명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부여해주신 선물이기에 인간의 마음대로 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들은 중세를 이어왔다. 1917년 <교회법전>까지도 이러한 논리에 따라서 ‘데리베라토 콘실리오’(Deliberato consilio), 즉 자기 맘대로 생명을 해치는 권한을 행사한 자로부터 교회에서 행해주는 장례의 혜택을 박탈했다. 이로써 자살한 이들은 죽어서도 보통 사람들처럼 교회 묘소에 묻힐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이 죽은 이후에도 ‘시체에 대한 재판’, ‘공개적인 시체 처벌’, ‘부관(部棺, 무덤에 묻힌 시체를 꺼내어 형을 가하는 것)’, ‘자살한 자의 재산 몰수’ 같은 형벌이 가해졌다.

이와 같이 교회는 전통적으로 자살에 대해서 심각한 수준의 형벌로 대응해 왔다. 이것은 범죄자로서의 자살에 대한 징계와 함께 현재의 자살이 영원의 죽음으로까지 이어진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자살 앞에 사람들로 하여금 심각하게 대면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자살에 대한 이러한 태도들이 교리적으로 확정된 형태는 아니었다. 물론 가톨릭에서는 이와 유사한 형태의 가르침이 ‘가톨릭교회 교리서’에 담겨져 있다. 그러나 거기에도 자살을 구원의 문제와 연결 짓지는 않았다. 단지 왜 자살을 하면 안 되는지에 대해서 중세의 어거스틴이나 아퀴나스의 논리에 의거하여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개신교회는 어떠한가. 알다시피 자살에 대해서는 정해진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정확한 가르침 없이 자살한 이들은 구원받지도 못하고 지옥에 간다는 중세적인 속설이 목회자들에게나 성도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저자들은 “자살한 자에 대한 장례예식은 어떠한 식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인지, 거기서 이루어져야 할 설교는 어떻게 행해져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모범이 정해져야 할 것인데 아직 거기까지 교회의 준비가 이루어져있지 않다”며 “개인의 판단에 따라서 자살에 대한 태도나 죽은 자들에 대한 장례의 예식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교회는 좀 더 진지하고 심각하게 자살에 대해 논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실철신학대학원 교수이기도 한 저자들은 “자살에 대해서 연구하고 글을 발표하는 신학자들은 극히 드물다”고 전제하고 총신대 윤리학과 이상원 교수의 ‘자살과 기독교’ 강연논문을 인용해 성경의 교리적이고 윤리적인 기준을 제시한다. 저자들과 마찬가지로 이 부분을 이 서평에서 인용하기는 좀 부담스러운 분량이지만 사항의 민감성과 옮기는 데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전문을 옮겨본다.

[A] 자살한 기독교인들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견해는 자살을 성령훼방죄로 해석하는 데서 비롯된 생각이다. 자살이 성령을 훼방한 죄라는 견해는 중세시대에 형성된 견해이며 루터, 푸치우스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과 개혁주의 전통에 서 있는 신학자들과 윤리학자들에 의하여 비성경적인 교리로 거부되었다. 성령훼방죄(마 12:31, 막 3:28-29)는 히브리서 10장 2, 9절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이며,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행동에 제한시켜 적용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죄를 죽는 순간까지 고집하다가 죽으면 그 후에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이 성령훼방죄의 핵심이다. 자살을 성령을 훼방하는 죄에 관련시키는 것은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

[B] 다른 죄를 범한 사람들은 죽기 전에 자기가 범한 죄를 회개할 시간이 있지만 자살한 사람은 자살이라는 죄에 대하여 회개할 시간을 갖지 못하고 죽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한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마지막 구원은 인간이 지은 죄를 남김없이 회개한 공로를 근거로 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졌느냐에 따라서 결정될 뿐이다. 만일 특정한 죄를 회개했는가에 근거하여 구원이 결정된다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그렇다면 항공기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미사일을 맞아서 회개할 시간을 갖지도 못한 신자는 구원받지 못하는가? 치매에 걸려서 자기가 한 행동을 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자는 구원받지 못하는가? 많은 신자들은 과거에 지은 죄를 회개하고 싶어도 생각이 나지 않아서 회개하지 못하기도 하고, 과거에 범한 죄가 죄인 줄을 모르기 때문에 회개하지 못하기도 하고, 심지어 많은 신자들이 회개할 시간을 충분히 주어도 회개하지 않고 세상을 떠나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그렇다면 이 신자들은 예수를 믿었어도 다 지옥에 가야 하는가? 그럴 수 없다. 신자의 삶이 값없이 오직 은혜로 중생함으로써 시작되었다면, 마지막 날에 구원받는 것도 값없이 오직 은혜로 영화됨으로써 구원받을 뿐이다.

[C] 구원받은 신자들이라 할지라도 자살에 충동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신자의 중생의 상태를 너무 이상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이미 우리는 엘리야, 욥, 요나 등과 같은 하나님의 선지자들로부터 죽고 싶어 하는 충동에 사로잡혔던 이야기를 알고 있다. 신자들도 자살에의 충동을 느낄 수 있으나 믿음 안에서 넉넉히 극복할 뿐이다. 자살은 분명히 기독교인이 피해야 할 죄라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믿음이 약하여 자살에의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죽은 신자를 평가할 때 자살을 결행한 그 한 순간의 행동만을 가지고 그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 다윗은 우리아를 죽음에 내모는 살인죄를 범한 죄인이지만, 하나님은 그 하나의 행동을 가지고 다윗을 규정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다윗의 중심과 다윗의 삶 전체를 보시고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평가하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평가하실 때에도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하고 하갈을 취한 한 사건에만 근거하여 아브라함을 평가하지 않으셨다. 수십 년을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온 신자를 순간의 충동을 이기지 못하여 자살한 그 순간만 가지고 단죄해서는 안 된다.

[D] 청소년에게 자살하면 지옥 간다는 말이 교육적 효과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의 진리를 왜곡시키고 진실이 아닌 가르침에 근거하여 교육적 효과를 거두려고 해서는 안 된다. 목적이 선하면 방법도 선해야 한다. 다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청소년들을 설득하여 자살의 충동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성적이나 가정불화나 실연 등으로 고민하는 청소년들에게 더 깊은 배려와 사랑과 관심을 베풀어주면서 자살이 기독교인들에게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죄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선한 방식으로도 얼마든지 자살 예방효과를 거둘 수 있다. 선행을 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가르침은 중세 말기 로마 가톨릭의 복음 왜곡과 교회 부패의 진원지가 되었다. 그 가르침으로 평신도들을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해서 악을 행하는 것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 때문에 사람의 영혼을 결정짓는 복음이 심각하게 왜곡되었고, 공로주의에 사로잡힌 교회는 이를 이용하여 돈을 주고 구원을 사고파는 면죄부 파동까지 일어났다. 교육적 효과는 복음과 진리를 희생시키지 않는 방법으로 도모되어야 한다.

[E] 그러나 교회는 자살한 성도가 자살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는 가르침을 성도들에게 전달하는 방법에 있어서 지혜로울 필요가 있다. 루터는 자살자도 구원을 잃지 않는다는 말을 평민들에게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보았는데, 그 이유는 사탄이 이 가르침을 이용하여 더욱 더 많은 살인을 자행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공예배 석상에서는 자살은 기독교인이 피해야 할 죄라는 것과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는가에만 근거하여 결정된다는 점을 동시에 강조하는 선까지만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만 자살한 가족을 가진 성도들이 자살한 가족이 죽은 후에 간 길에 대하여 불안에 사로잡혀 있을 때 개인적인 상담을 통하여 신앙고백을 한 신자라면 사망을 포함한 그 무엇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말씀으로 위로해 주면 될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자살의 사회적 영향력이 어느 때보다 큰 현재 상태에서 단순하게 신앙이 없어서 자살을 했다거나 구원의 확신이 없었을 것이라는 단죄는 하나님의 영역을 우리가 침범하는 행위라고도 말한다. 또, 자살한 사람들은 모두 지옥에 갈 것이라는 언어표현도 남아 있을 유족들을 생각해 볼 때 또 다른 우울증 환자를 양산해 내는 잘못을 저지를 위험이 높다는 지적이다. 따라서 자살에 대해 기독교윤리학, 심리학, 상담학, 사회학 등의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을 해 보고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자살이 무엇을 의미하고 교회적 울타리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외에도 저자들은 특히 사회학적 관점에서 자살이 사회적 질병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이러한 관점에서 교회가 이 시대에 맡겨진 역할을 감당해 줄 것을 당부한다. 또, 자살이 단순히 믿음의 문제만이 아니라 상당히 복합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부분들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개신교인의 인식조사 설문결과를 정리하고, 자살을 심각하게 고려했었던 일곱 명과 심층인터뷰 한 내용도 덧붙였다. 그러면서 저자들은 구체적인 대안으로 △자살에 관한 관점의 전환이 필요 △성인교육을 통한 건강한 자의식과 바른 세계관의 강화 △공동체 의식의 고양 △교단차원이나 범사회적 차원에서의 대책기관 설립 △노회나 지방회, 또는 지역교회협의회 수준에서도 실제적인 기구 설립 등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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