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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답지 못한 것이 실망스럽다”
반기독교 정서 원인 분석
2008년 10월 10일 (금) 00:00:00 양봉식 기자 sunyang@amennews.com

   
    ▲ 반기독교 문화를 상징하는 대표적 숫자(사진: www.Desktop-collector.com)
 
반기독교적 정서
기독교에 대한 반감의 공식적 용어는 ‘개독교’일 것이다. 최근 기독교에 대한 비기독교인들, 특히 인터넷상의 기독교 관련내용들은 욕설과 불신과 적대감이 가득하다. 이런 분위기가 언제부터 조성되었는지, 발원지를 조사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그 원인을 분석할 필요는 있다. 단순히 진리가 아닌 이들의 반감 정도의 수준을 떠나 그 분위기가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기독교에 대한 적개심이나 반감은 기독교인이 마치 사회에 악을 끼치고 또 국가에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이들로 몰아가는 경향이 있다.

이런 오해와 함께 기독교인들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주는 이유를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기독교가 사회와 소통하는 데 있어 수월할 수 있다. 이는 우리 자신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통해 21세기에 한국교회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할 것인가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기독교적 정서는 지난해 일어난 아프가니스탄 사태 이후 점점 증가하고 있다. 그 중에 미디어, 특히 공중파 방송국들의 교회와 목회자들에 대한 부정적 보도는 반기독교적 정서를 부추기는데 일조하고 있다. 그 동안 미디어가 본 기독교는 크게 다섯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첫째 대형교회 세습, 둘째 대형교회 목회자들의 비도덕적인 삶, 셋째, 사이비이단들의 형태, 넷째, 수구 보수권의 행보-기독교는 자기 권리 획득을 위해 안간힘을 쓰는 종교로 비침, 다섯째, 이재록 김계화 김기순 정명석 안상홍 신천지 등 이단들이 정상적인 기독교인마냥 언론에 비쳐진 것 등이다.

물론 미디어들이 일방적으로 기독교를 비하하는 방송을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빈도수와 충격적인 내용을 제대로 분석하지도 않고 모든 기독교를 도매금으로 취급한 것은 반기독교적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기에 충분했다. 이런 사회적인 정황이 반기독교적인 정서와 적대감을 불러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

다양성을 추구하는 21세기에 기독교의 배타성과 진리의 유일성은 다른 종교인들에게 거부감을 가져온다. 다신론을 섬겼던 로마시대부터 기독교는 배타적일 수밖에 없었고 그 현상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미국의 기독교 전문 리서치그룹 조지 바나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의 젊은(16세-29세) 비기독교인 5명 중 2명(37%)이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인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또 3분의 1이 기독교는 그들이(비기독교인) 관련되고 싶지 않은 부정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고 응답했다. 그 숫자는 10년 전과 비교하면 3배가 증가한 것이라고 바나 그룹은 분석한다.

비기독교인들이 느끼는 기독교에 대한 가장 큰 갈등은 무엇인가? 비기독교인들이 생태적으로 기독교인들을 싫어한 것은 아니다. 가령 한국교회사에서 초기 기독교는 사회적으로 냉대를 받았다. 서구 선교사들에 대한 반감은 ‘아이를 잡아먹는 사람들’처럼 무섭게 그려지기도 했다. 하지만 3.1운을 전후로 기독교에 대한 사회적 공헌이 커져갈수록 기독교에 대한 이미지는 긍정적으로 변했다.

수준 낮은 그리스도인
그러나 1980년대를 지나 90년대 이후 기독교의 성장이 둔화되면서 고속성장에 따른 후유증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그것을 한 마디로 축약하면 ‘수준 낮은 기독교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기독교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면서, 기독교인들의 행태가 사회적인 비판거리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교회와 상황은 다르지만, 한국교회가 미국교회의 성장중심, 은사중심 등의 가치관을 그대로 직수입하면서 나타난 현상은 한마디로 무질서다.

교회가 성장하지 않으면서 목회자들은 성장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하지만 성장을 위한 탄탄한 기반이 매우 약한 것이 문제다. 기반이 약하다는 말은 본질에 충실하지 않고 예배당을 채우기 위한 각종 수단이 동원되고 있다는 것이다. 양적성장과 질적성장을 똑같은 가치로 추구하지 않는 상황에서 말썽 피우는 신자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말썽꾸러기 신자와 목회자는 전체의 문제로 인식되고 비쳐질 수밖에 없다. 특히 사람들로부터 주목받고 있는 교회의 지도자들, 그리고 사회 각 분야에서 리더의 위치에 있는 기독교인들의 수준 낮은 언행이 교회를 비하시키는 데 일조하고 있다.

   
▲ 여전히 기독교를 왜곡시키는 글이 블러그에 올라와 있다. 사진은 반기독교블러그에서 캡쳐한 것.
이의용 소장(교회문화연구소)이 말했던 ‘MB형 크리스천’이 추구하는 신앙은 기독교의 본질에서 벗어난 경우가 많다. 사회적 실력은 있을지라도 신앙적인 면에서 수준이 떨어지는 경우다.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는 이들이 교회에서도 리더급으로 있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이들의 신앙이 마치 교회를 대표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말과 행동이 기독교의 기준으로 보는 일이 발생한다.

최근 불교와 관련해서 장경동 목사가 미국에서 발언한 설교 내용은 시기적으로 적절한 발언은 아니다. 장경동 목사의 설교는 기독교 입장에서 보면 매우 원론적인 내용이다. 스님도 예수를 믿어야 된다는 말이 기독교에서 ‘진리는 예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틀린 말이 아니다. 그렇지만 “스님도 쓸데없는 짓 그만두고 예수 믿어야 한다”고 한 발언이 상대방이 듣기에는 매우 불쾌할 수 있다. 이것은 타인에 대해 전혀 배려하지 못한 발언이다. 배려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이것은 길을 가다 믿지 않는 사람들을 보고 “이 지옥 갈 사람아! 예수 믿고 천국이나 가라”라고 한 것과 다를 바 없다. 아무리 옳아도 강요하는 것은 인격을 침해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예수님도, 하나님도 하지 않은 강요를 기독교인이 스스럼없이 하는 것은 지나친 처사다.

부정적 이미지의 기독교
비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인들에 대한 적대감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앞서 지적했듯이 기독교를 오해한 이들과 또 미디어의 매체가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연약함 역시 무시할 수 없는 한 부분이다. <나쁜 그리스도인>의 저자는 비기독교인들이 갖는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의 원인 중 하나가 “기독교인들에게서 받는다고 느끼는 ‘비기독교인들을 행한 적대감’(경멸)”이라고 지적한다.

즉 기독교인들이 비기독교인들을 정죄하며 판단하고, 또 우리와 다른 이들이라는 선긋기를 통해 적대감정을 가지는 것이 오히려 비기독교인들에게 부정적 이미지를 낳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인들이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가에 대한 것보다 ‘무엇을 반대하고 있는지’가 그들에게 비쳐지는 이미지라는 것이다. <나쁜 그리스도인>에서는 기독교인의 부정적인 이미지는 여섯 가지로 나뉜다. 첫째 위선적, 둘째 전도에 지나치게 집중, 셋째 동성애 혐오, 넷째 안일하다, 다섯째 지나치게 정치적이다, 여섯째 타인을 판단한다 등이다.

이 진단은 미국교회의 상황이라는 점에서 한국교회와 동일시하기에는 무리일 수 있다. 그렇지만 미국교회가 한국교회 모델이라는 점에서 한국교회도 이 지적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오히려 신중하게 검토하고 성찰할 필요가 있다.

위선적인 그리스도인
우선 ‘위선적’이라는 지적은 한국교회 상황과 그렇게 다르지 않다. 비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인들을 두고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언행일치는 모든 사람들에게 발견하는 문제다. 그렇지만 기독교인들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언행일치의 삶을 기대하는 기독교인들이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회 다니는 사람이 욕과 거짓말을 더 잘한다, 내가 아는 거래업체 사장이 일부러 부도를 내고 도망갔는데 그 사람이 장로다” 하는 등 기독교인들에 대한 위선적인 태도를 꼬집는다. 이런 지적은 오래전부터 지적된 것이지만, 이런 모습이 비기독교인들을 불편하게 하거나 또 상처를 주고 있다는 점이다.

더구나 위선적인 것에는 “기독교인들이 교회만이 가치가 있고, 도덕적으로 고결한 사람을 위한 장소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비기독교인과 차별을 둔다는 것도 포함한다. 비기독교인들은 이런 생각을 하는 기독교인들이 특별하게 도덕적이고 고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과 별 차이가 없기 때문에 위선적이라고 생각한다.

그 다음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전도에 지나치게 집중하는 것’에 대한 지적이다. 전도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이다. 그래서 기독교가 가장 우선하는 것이 전도다. 비기독교인들의 기독교인들의 열정적인 전도에 짜증이 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비기독교인들에게 이해를 구하거나 설득하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다.

배려 없는 전도
그러나 지나친 전도에서 문제는 상대방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집중한다는 지적 가운데는 무례함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인격적인 침해도 있다. 노방전도에 대한 시시비비도 많다. 조용한 지하철에서 갑작스럽게 소란을 피우는 전도행위는 역효과를 낼 수 있다. 열정도 좋지만 때와 장소를 불문한 소란스러움은 기독교의 부정적 이미지를 고양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다.

그러나 지나친 전도의 지적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 중에 하나는 상대방에 대한 인격적 침해다. 기독교인들은 전도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지지 않는다. 그중 하나가 봉사를 통한 접근이다. 교회가 지역교회를 섬기고 많은 봉사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문제는 봉사 프로그램 자체가 복음으로 착각을 할 때 발생하는 문제다. 많은 비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인의 선행에 감탄하지 않는 이유는 선행의 목적에 전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아무리 친절해도 그 목적이 예수를 믿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등을 돌린다. 관계를 맺는 목적이 인격적인 것이 아닌 전도하는 접근이기 때문에 인격적인 상처를 받는 것이다.

“그럼 그렇지, 그동안 당신이 내게 친절한 것은 전도를 위한 것이었어. 순수한 것이 아니야.”

이렇게 말하고 떠나버린다. 비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인들의 접근에 불쾌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자신들 인격으로 대하지 않고 수단으로 여긴다는 것 때문이다. 우리가 선한 행위를 하고 이웃을 섬기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이런 행위로 인해 교회로 올 수 있고 예수를 믿게 될 수도 있지만 그것은 많은 숫자가 아니다.

복지와 봉사 프로그램은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을 위한 하나님의 명령이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다. 우리의 선한 행실은 하나님을 드러낼 수 있고, 그리스도의 향기로 존재할 수 있지만 그 자체를 복음으로 여기고 비기독교인에게 접근한다면 자칫 오해와 인격적 침해를 가져올 수 있다.

분명한 경계선을 그어야 한다. 우리의 선한 행위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사랑의 행위이고, 그것을 구실삼아 전도를 강요하는 일은 자제할 필요가 있다.

   
▲ 기독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경험하지 못한 이들은종종 이런 오해를 한다. 안티기독교블러그에 올라온 카툰 캡쳐.
긍휼을 품는 마음

미국의 경우 동성애는 사회적으로 큰 문제라고 여기지 않을 만큼 관용적인 면이 있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젊은 세대가 기독교인들의 ‘동성애 혐오’를 두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당연할 수 있다. 그러나 국내에서 동성애에대한 문제는 아직 관용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그냥 지나칠 수 있다. 하지만 동성애를 포함해서 성경이 죄인이라고 말하는 부류에 대한 태도는 미국의 기독교인들과 다를 바 없다.

기독교인들의 죄인들에 대한 태도는 배타적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교회에 술주정뱅이가 들어오면 곧 바로 추방될 것이다. 노숙자가 와도 마찬가지다. 돈 몇 푼 쥐어주고 빨리 나가주기를 바라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동애자이든 또 다른 부류의 사람이든, 문제는 이들을 태하는 태도에서 위선적이거나 부정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낸다는 점은 동일한 문제 중에 하나다. 우리는 이 문제의 해결을 예수님의 태도에서 찾아야 한다. 예수님은 죄인들의 친구셨다. 친구라는 말은 죄를 관용한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죄인들을 향한 긍휼함이 있으셨다는 것이다. 동성애는 분명 죄다. 그러나 동성애나 기타 교회가 용납할 수 없는 죄를 저지른 사람들에 대한 태도는 심판자의 위치가 아니라 성육신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모습이 보이지 않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낳게 된다. 기독교인들의 안일함에 대한 지적이나 정치적이라는 지적은 한국교회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안일하다는 말에 포함되는 것은 게으르고 자신의 일에 충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예배당 중심의 그리스도인들은 습관적으로 모든 일을 교회 일에 우선한다. 그래서 직장에 중요한 업무도 놓치는 경우가 있다. 지각을 해도 미안해하지 않으면서도 업무시간에 성경책을 펴고 보는 이들도 있다. 또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이유로 전문지식을 습득하지 않고 무사안일주의 습관을 가지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일하시는 분이시며, 또 매우 독특한 전문적인 분이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책무를 착각한 이원론이 빠진 그리스도인들이 안일한 사고 속에 게으른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부지런하시고 성실하신 하나님을 핑계를 댄다고 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매우 부지런히 그리고 성실하게 이 땅을 살 필요가 있다.

또한 기도교인들이 정치적이라는 지적은 일리가 있어 보인다. 한국교회의 보수 세력의 결집은 정치세력화로 충분히 비쳐질 수 있다. 자신들의 논리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획득하려는 태도가 결국 정치세력화로 나타나고 또 권력화라고 진단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의 주장은 어떤 점에서는 너무 맹목적이고 또 지나친 감이 있기도 하다. 물론 보수권만 아니라 진보권도 마찬가지다. 사회정의를 부르짖지만 인간의 본성은 하나님 앞에서는 도토리 키 재기일 뿐이다.

기독교의 부정적 이미지의 마지막은 타인에 대한 판단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생득적으로 선악을 구분하기를 좋아한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자신과 의견이 다르면 편가르기를 쉽게 한다. 이런 태도가 기독교인들에게 매우 잘 나타나는 것 중의 하나다.

비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인들과 대화를 하는 것이 어렵다고 말한다. 어떤 사안을 이야기 하면 늘 정답만 말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답만을 말하고, 더 이상 경청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판단의 습관을 사화와 소통의 어려움을 겪게 마련이다. 무엇이 옳은가의 문제에 신경 쓰는 것으로 인해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지 못하면 결국 오해와 다툼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특히 보수적인 사고를 가진 기독교인들에게 이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고답적인 자세가 자신만의 해결방식으로 끌고 가게 되고 그 결과는 부정적인 것만 남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선하고 적절하고 겸손한 방식으로 사람들의 의문점과 의구심을 해결해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국 비기독교인들과 사이가 멀어지고, 선교에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것이 해결 열쇠
기독교에 대한 존경심을 읽어버렸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쁜 그리스도인>에 따르면 다른 사람들이 기독교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과 그리스도인들과의 만남과 대화가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이것을 뒤집어 생각해보면 그리스도인의 말과 삶이 달라진다면 외부인들의 부정적 이미지도 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기독교인이 모든 일을 그르치고 사회에 해악을 하는 이들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몇몇 지도자급의 목회자들, 혹은 기독교엔지오단체나 복지 시설에서 사역하는 이들의 탐심과 실수가 전체를 매도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 때는 언론의 보도를 통해서 알려지는 것이고, 이 영향은 예전과 달리 인터넷 상에서 늘 현재 상황처럼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좋지 않는 영향을 끼치는 것은 사실이다.

비기독교인들은 알게 모르게 자신들의 삶에 기독교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언론을 통해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사고방식이나 행동 양식에 미치는 언론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크게 상처받은 경험도 기독교에 대한 시각에 큰 영향을 준다. 교회에서 좋지 못한 경험을 한 이들은 나중에 반기독교적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는 이들도 있다. 실제로 전도하는 과정에서 과거의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경험 때문에 예수님께 마음을 열지 못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이런 부정적인 시각의 꼭지점에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답지 못함에 대한 지적이 많다는 것이다. 어둠에 빛을 비추기를 기대했던 이방인들이 그런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을 두고 실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기독교인들에 대한 실망감은 기독교에 대한 분노로 변하는 경우도 있다.

기독교인에 대한 이미지가 부정적인 것에 대한 책임이 기독교인 자신에게 있다면 그 문제에 대한 우리 자신의 성찰을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세상은 우리를 항상 고운 시선으로 보지 않는다. 그것은 십자가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진리를 가진 이들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다. 세상과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바로 이 다른 점이 선명하게 삶에서 나타나고 있는가를 점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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