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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우리 마음이 부서질 필요가 있다면
2008년 09월 12일 (금) 00:00:00 장경애 jka9075@empal.com

<네 가지 사랑> 중에서
C. S. 루이스 지음/ 이종태 옮김/ 홍성사 펴냄

아무리 무법적이고 아무리 무질서한 사랑이라도, 스스로 선택한 자기 방어 차원에서 사랑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봅니다. 그런 사랑 없음은 마치 “저는 당신을 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라는 이유로 자신이 받은 달란트를 수건에 싸서 숨겨 놓는 행위와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자신의 행복과 심지어 자연적 사랑에조차 더 신중해지라고 가르치시고 고통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만일 사람이 눈에 보이는 지상의 연인을 향해서도 계산적이라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해서는 틀림없이 더 계산적일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랑에 내재해 있는 고통을 피하려고 애씀으로써가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분께 바침으로써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됩니다. 자신의 모든 방어 무기를 다 내어 던짐으로써 말입니다. 만일 우리 마음이 부서질 필요가 있다면, 만일 그것이 그분이 선택하신 방법이라면 우리는 기꺼이 그 길을 감수해야 합니다.

분명 모든 자연적 사랑은 무질서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무질서하다는 말은 ‘덜 신중하다’ 거나 ‘너무 크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는 양에 관한 용어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을 단순히 ‘너무 많이’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비해서 그를 너무 많이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질서한 사랑인 것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작아서이지 그를 향한 우리의 사랑이 크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 역시 부연 설명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사실 대단히 바른 길을 가고 있으면서도, 지상의 연인을 향해 느끼는 그런 뜨거운 감정을 하나님에 대해 느끼지 못한다는 이유로 공연히 염려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감정은 우리 모두가 언제나 갖기를 바라마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은사가 우리에게 주어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지상의 연인 중 누구를 ‘더’ 사랑하는가 하는 질문은, 우리의 기독교적 의무에 관한 한 두 감정 사이의 강도를 비교하는 질문은 아닙니다. 진짜 질문은 우리가 어느 쪽을 섬기고 선택하고 우선시할 것인가에 있습니다. 최종적으로 어느 쪽 요구에 우리의 의지를 굴복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흔히 그렇듯이, 이번에도 주님의 말씀이 신학자들의 말보다 훨씬 더 격하면서 동시에 훨씬 더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그분은 상처 입을지 모르니 지상의 사랑을 경계하라는 식의 말씀은 전혀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우리가 그분을 따르는 것을 막는 순간에는 가차 없이 모두 밟아 뭉개라는, 가혹한 채찍과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나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누가복음14장 26절).

위 구절에서 미워하다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사랑 자체이신 분께서 일반적 의미의 미움 - 분을 품고, 상대의 불행을 기뻐하고 그를 해롭게 하기를 즐기는 것 - 을 명령하신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저는 주님이 베드로에게 “내 뒤로 물러가라”고 말씀하셨을 때, 위의 의미로 그를 ‘미워’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미워한다는 것은, 연인이 악마의 제안을 해 올 때는 그 아무리 달콤하고 애처롭다 해도 거절하고 물리치고 불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두 주인을 섬기려하는 자는 둘 중 하나는 ‘미워’하고 다른 하나는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단순히 싫어하거나 좋아하는 감정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에 대해서는 고수하고 동의하고 봉사해야 하며, 다른 하나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또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라는 말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에서를 ‘미워하셨다’는 것이 실제 이야기 속에서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우리가 예상하는 방식과는 상당히 달랐습니다. 에서가 끝이 좋지 않았고 구원받지 못했을 것이라고 가정할 근거는 전혀 없습니다. 구약 성경은, 다른 곳에서처럼 여기서도 그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들은 이야기를 통해 보면, 지상에서 에서의 삶은 일반적 의미에서 볼 때 야곱보다 훨씬 더 복된 삶이었습니다. 실망, 굴욕, 공포, 사별 등을 겪은 이는 야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에서가 갖지 못한 무엇이 있었습니다. 그는 유대 민족의 위대한 조상 중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히브리 전통과 그 소명과 축복을 전달하는 사람이 되었으며 우리 주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야곱을 ‘사랑했다’는 것은 어떤 높고 (고통스러운)소명을 위해 야곱을 받아들였다는 의미입니다. 에서를 ‘미워했다’는 것은 그런 일에서 그를 거절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거부’당했고, 시험에 ‘떨어졌고’, 그런 목적에 쓸모없는 사람으로 판정 받았습니다. 이처럼, 아무리 가깝고 친밀한 사람이라도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을 방해할 때에는 가차 없이 그들을 거부하고 부적격 판정을 내려야 합니다. 분명 그것은 미움처럼 비춰질 것입니다. 그러나 동정심에 좌우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눈물에 눈을 감아야 하고, 그들의 탄원에 귀를 닫아야 합니다.

이러한 의무가 어렵다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너무 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떤 이들에게는 거의 참을 수 없을 만치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모두에게 어려운 점은 그렇게 ‘미워해야’ 하는 경우가 언제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질은 우리를 속입니다. 온유하고 온화한 사람 - 공처가, 순종적인 아내, 자식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부모, 말 잘 듣는 자녀 - 은 그 시점이 왔다는 사실을 쉽사리 믿지 않습니다. 반면 다소 사납고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은 너무 빨리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평소 우리의 사랑에 질서를 잘 부여하여, 그런 때가 아예 오지 않도록 하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입니다.

어시스트 장경애/ 빛과소금교회 최삼경 목사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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