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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베버와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한국개혁신학회 학술발표회, 사회과학으로 자본주의와 청소년 비행 분석
2008년 09월 02일 (화) 00:00:00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 베버 연구가 한국 신학에 주는 적용 가능성 모색 -

한성진 교수 /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역사신학

1. 서론

막스 베버(Max Weber)는 흔히 사회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사회과학방법론, 정치사회학, 법사회학, 종교사회학, 도시사회학, 경제사, 공공행정학, 농업사 분야 등에 창시자적인 업적을 남겼다. 그는 법학 교수로 시작하여 다음에는 경제학 교수, 그리고 말년에는 사회학자로 공헌했다. 1990년대 후반 근대, 탈현대(post-modern) 논쟁과 함께 '베버 르네상스'라고 불릴만한 막스 베버 붐이 전 세계의 인문, 사회학계를 강타했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는 마르크스의 사회주의가 대한민국의 모든 학계를 거의 평정하다시피 했던 90년대 초반까지 베버처럼 몰이해 되고, 오역된 인물이 없었을 것이다. 제3의 물결 논쟁과 함께 베버의 참된 함의를 찾자는 반성이 베버 논쟁에 참여하는 모든 진영에서 일어난 일은 참으로 반갑다. 이에 따라 80년대까지 주로 영미권에서만 한정되었던 베버에 대한 재평가와 이해가 유럽과 아시아 등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베버 르네상스는 사회과학 방법론, 경제학, 정치학을 포함하여 근대와 탈현대 논쟁과 관련된 전 범위에서 탈이데올로기화 된 관점에서 막스 베버의 본 모습을 찾고자 하는 시도들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시도에도 불구하고 특히, 우리나라의 막스 베버 연구에 중요한 요소가 결여되어 있음을 느낀다. 즉 80년대 막스 베버 연구를 '종교적' '심리적' 인식을 넘어서 '역사적' '제도적' 요소를 강화해 균형을 맞추자는 시도 이후로, 반대 편향적 현상이 지금까지 막스 베버 연구를 지배하고 있다. 80년대 학자들의 주장대로 막스 베버의 본 모습은 그의 종교사 연구와 경제사 연구의 균형을 통하여, 가장 잘 드러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사회과학적' 베버의 모습은 끊임없이 연구되고 있지만, '종교사회학적' 베버는 완벽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90년대 말에서 지금까지 계속되는 베버의 부활 이후에도 '신학' 분야에서 베버의 모습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과연 베버의 '신학적' 측면에 대한 이해 없이 베버의 '합리화'와 '이해' '경제체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많은 사회과학자들이 나름의 구색을 갖추기 위해, 특히 그의 대표작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이해하려는 목적에서 책 속의 신학을 설명하지만, 신학자의 눈으로 볼 때, 그 이해와 수준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사실<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베버의 방법론은 역사학적이며 신학적인 시도이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역사신학'적 이해 없이 베버의 본 저작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 소논문은 막스 베버, 그리고 그의 대표작인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해석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신학 읽기'라는 방식으로 단순히 읽어가려는 시도다. 이를 통해 베버가 그러하였듯이 신학이 여타 학문들과의 학제간 연구에 기여하는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2. 베버의 가정과 교육 그의 생애

막스 베버의 본명은 ‘칼 에밀 막시밀리안 베버(Karl Maximilian Weber)’다. 그러나 아버지인 막스 베버의 이름을 따라 그냥 막스 베버라고 부른다. 아들이 아버지보다 커다란 명성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베버는 1864년 4월 21일 독일 튀링겐 주의 에르푸르트에서 아버지 막스 베버 1세와 어머니 헬레네 베버(Helene Weber, 1844~1919)의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인 베버 1세는 법률가로서 베를린 시의 행정가로 일하다가 베버가 태어날 당시 에르푸르트의 시의회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는 전형적인 세속적인 인물이었다. 친가는 베버의 인간적인 면모나 지적 세계의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지 못했으며, 그 또한 친가에 대한 애착은 거의 없었다. 한편 베버는 어머니 헬레네에 대한 애정을 평생 유지한다. 헬레네는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칼빈주의 신앙을 아들에게 고스란히 물려준다.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는 아주 엄격했지만, 약자들에 대한 사랑으로 다양한 사회봉사 활동에 헌신했다. 또한 당시의 여성에게는 드물게 인문주의의 역사와 고대문학에 대한 교육도 받았다. 이러한 외가의 영향이 베버의 삶에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쳤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도 칼빈주의를 통한 영향이 사회학적인 저서의 면면에 드러난다. 아버지의 세속적인 성공의 열망보다, 어머니에게서 학문과 신앙, 봉사의 정신이 베버의 일생을 통해 드러난다. 사고방식과 삶의 목표가 다른 어머니와 아버지의 차이는 어머니를 닮은 막스 베버와 쾌락주의적이고 세속중심적인 삶을 산 동생 알프레드 베버의 차이로 나타난다. 알프레드 또한 뛰어난 경제학자이자 사회학자였지만 삶의 양식에 있어서는 달랐던 것이다.

베버는 13살이 되던 1876년 부모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한다. 선물은 두 편의 역사 에세이였다. "독일 역사의 과정에 관하여: 황제와 교황의 지위에 대한 특별한 언급을 덧붙여" 그리고 "콘스탄틴에서 민족들의 이주 시기의 로마 제국에 관하여"였다. 이미 14살 경의 편지에는 호머, 베르길리우스, 키케로 등이 언급되어 있으며, 대학에 입학하기 전 그의 지식은 괴테, 스피노자, 칸트, 쇼펜하우스 까지 확장된다. 1882년 베버는 하이델베르그 대학에 법학도로 등록한다. 베버가 법률을 택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법률가인 아버지를 본받아 법률가로서 직업을 얻으려는 생각이었다. 또한 법률가는 국가관료로 진출하는 방법이었다. 다음으로 산업자본주의가 발전해 가면서 기업들이 법률전문가들을 필요로 하기 시작했으므로 시민계층은 법학을 선호하고 있었다. 그는 주전공인 법학과 함께 경제학, 중세사, 신학 등의 과목도 듣는다. 이후 잠시 동안 스트라스부르크에서 군인으로 복무했다. 1884년 가을 베버는 베를린 대학에서 공부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왔다. 1886년 괴팅겐 대학에서 국가시험을 치르고 대학 학부교육을 마쳤다. 공부를 계속한 그는 1889년 베를린 대학에서 중세 이탈리아 도시의 상사(商社)에 관한 연구로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어서 1891년 역시 베를린 대학에서 국가법과 사법의 의미에서 본 고대 로마 농업사 연구로 독일의 대학교수 자격인 하빌리타치온(Habilitation)을 획득한다.

교수자격을 획득한 베버는 1892년부터 베를린 대학에서 사강사(Privatdozent)로 일하다가, 1년 후인 1893년 부교수로 로마법, 독일법 및 상법을 가르치게 된다. 그해 초가을 베버는 5촌인 마리안네 슈니트거(Marianne Schnitger, 1870~1954)와 결혼한다. 그녀는 막스 베버가 학문적 업적을 쌓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평생의 반려자가 되었다. 그녀는 “윤리적 목표가 고상하고 의지가 강한 졈에서 베버의 어머니와 비슷했다. 어머니와 부인은 사랑하는 아들을 위인으로 만들려는 보이지 않는 동맹을 맺고 있다고 표현될 정도였다. 베버와 마리안네는 서로를 부인과 남편을 넘어 정신적인 동반자로 간주했다. 마리안네는 남편을 훌륭하게 내조했으며, 학문을 통해 지적 공동체를 이루었다.

막스 베버는 1894년 30세의 나이로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경제학 및 재정학 정교수로 초빙됨으로써, 독일 학계에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이어 1897년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경제학 및 재정학 정교수로 초빙되었다. 이후 1919년 뮌헨 대학의 사회과학, 경제사 및 경제학 정교수로 초빙되었다. 1920년 6월 베버는 우연히 감기에 걸렸는데, 이것이 폐렴으로 악화되어 1920년 6월 14일 쉰여섯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3.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그의 저작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분명 이 논문은 개신교에 대한 심층 연구가 아닐뿐더러, 다양한 종교의 사상과 경제적 태도 사이의 상호 작용을 탐구한 후기 저작들의 입문서도 아니다. 이 책에서 베버는 칼빈주의 윤리와 사상이 자본주의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는 이론을 제시한다. 흔히 이 이론은 사회의 경제적 토대가 모든 다른 측면들을 결정한다는 마르크스의 이론을 뒤집어 놓은 것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종교적 헌신은 대체적으로 경제적 추구를 포함한 세속 활동에 대한 거부가 수반된다. 그러나 왜 프로테스탄트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을까? 이 책은 이러한 역설을 설명한다. 프로테스탄트 특히 칼빈주의의 금욕적인 측면이 산업 자본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은 단순히 종교적 요인이 경제에 영향을 미쳤다는 직접적 논리로 제한되는 것은 아니며, 그의 연구가 단지 기독교적 배경에서 출발한 국지적인 것은 아니다. 신역사학파의 방법론적 측면에서 그의 연구는 현대의 ‘합리화’에 대한 체계적인 증명시도이며, 종교 사회학적 측면에서 볼 때, 세계 종교와 그 종교가 이루는 사회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의 결과이기도 하다.

베버는 개신교의 어떤 유형은 경제적 이익과 세속적인 활동의 합리적인 추구를 선호하며, 이에 대해 긍정적인 영적 도덕적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나 이 측면은 개신교 종교 사상의 목표가 아니며 부산물임을 강조한다. 교리의 내재적인 논리와 교훈이 직적 또는 간접적으로 경제적 이윤 추구에 있어 계획의 수립과 자기 부인을 장려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종교개혁적 입장은 “소명”을 세속적인 직업에 까지 확장시킴으로써, 공공 선의 추가가 덧붙여져, 세속 직업도 신의 축복을 받은 “신성한” 것이 된다고 본다. 따라서 삶의 모든 측면이 하나님께 바쳐지는 거룩한 것이라는 이 견해는 직업윤리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베버가 개신교에 대한 연구를 더 진행하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다. 우선 그의 친구이자 신학자였던 에른스트 트뢸치(Ernst Troeltsch)가 기독교 교회와 분파의 사회 교리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앞에서 언급했듯이, 보다 더 넓은 종교적 맥락에서 종교와 사회를 비교하는 작업에 착수했기 때문이다. 사실 베버가 말한 경제적 윤리는 개신교 윤리였다. 그러나 이것이 기독교 이외의 종교에 적용되면서, 일반화된 ‘직업 윤리’라는 말이 채택되었다. 따라서 오늘날 ‘직업 윤리’라는 말의 창시자도 베버인 셈이다.

1) 저자 서문
베버는 서문에서 문명사적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보통 그렇게 생각하듯이) ‘보편적’인 의의와 가치를 지닌 발전선상에 놓여 있는 듯한 문화적 현상이 서구 문명에서 그리고 오직 서구 문명에서만 나타난 사실은 어떤 일련의 환경들에 귀속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가 그것이다.” 베버에 의하면, 오직 서구에서만 타당하다고 인정하는 발전단계에 도달한 과학이 존재한다. 왜 그럴까? 경험적 지식, 우주와 삶의 문제에 대한 사색,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지혜는 서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데 말이다. 왜 인도, 중국, 바빌로니아, 이집트는 아무런 합리적 증명을 남기지 못했을까? 중국에도 인쇄는 있었지만, 신문과 정기간행물은 오직 서구에서만 출현했다. 더욱이 지속적이고 합리적인 자본주의적 경영에 의한 이윤추구 그리고 영원히 ‘재생되는’ 이윤의 추구가 왜 서구에서만 발생한 것일까?

베버는 자본주의적 경제행위를 교환기회의 사용에 의한, 즉 평화적인 이윤기회의 사용에 의한 이윤기대에 의존하는 행위라고 정의한다. 서양은 자본주의를 양질에 있어 다른 곳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유형, 형태, 방향으로 발전시켰다. 바빌론, 헬라스, 인도, 중국, 로마에서도 화폐대부자들이 존재했고, 자본주의적 벤처기업가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비합리적이고 투기적인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근래 서양의 자본주의는 인류의 보편적인 부의 축재와는 다른 형태이다. 베버는 이를 “‘자유로운 노동’의 합리적인 자본주의적 조직화”라는 말로 표현한다. 베버는 합리적 조직이 가능하게 된 이유를 가사와 사업의 분리, 합리적 부기 제도로 돌린다. 인도에서 십진법이 고안되었지만, 그 기술적 사용이 서구에서 가능했던 이유는 경제와 사회 전 분야에서 ‘합리화’ 과정이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합리화 과정은 법률과 행정의 합리적 조직을 필요로 했다. 고정자본과 계산의 확실성만으로, 개인의 창의에 따라 유지되는 합리적 기업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법률의 합리화는 어디에서 이루어졌을까? 베버는 삶의 여타 분야에서 비합리적 태도에서 합리적 태도로의 변화가 있다고 본다. 경제생활, 기술, 과학적 탐구, 군사훈련, 법과 행정에서의 합리화. 이것들이 이루어진 동인이 무엇일까? 베버는 자신이 두 편의 논문을 통하여 “일정한 종교적 관념이 경제적 정신 혹은 경제체계의 에토스의 발전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입증하려고 함을 밝히고 있다. 즉 근대적 경제생활의 정신과 금욕적인 프로테스탄티즘의 합리적 윤리 사이의 연관성을 다루는 것이 논문의 목적이다.

△ 문제
본래 이 책은 두 편의 논문을 합친 것이다. 첫 부분은 '문제'라는 제목 아래 ‘종파와 계층’, ‘자본주의 정신’, ‘루터의 직업개념·탐구의 과제’ 등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두 번째 부분은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의 직업윤리'라는 제목 아래, ‘현세적 금욕주의의 종교적 토대’, ‘금욕과 자본주의 정신’로 구성된다. 이제 내용 하나하나를 천착해 들어가고자 한다.

△ 종파와 계층
막스 베버가 개신교와 경제와의 상호 관계에 관심을 가진 동기는 당시 독일 지역의 산업인력의 분포였다. 그는 자본 소유자와 경영자층, 상급의 숙련 노동자층, 특히 근대적 기업에 있어 높은 기술적, 또는 상인적 훈련을 받은 구성원들이 매우 현저하게 프로테스탄트적 성격을 갖는 사실을 발견했다. 따라서 대규모의 근대적 상공업에서 자본 소유와 경영, 고급노동에 종사하는 프로테스탄트의 백분율이 전인구의 구성비율보다 현저히 높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이 역사적 이유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경제적 현상의 ‘원인’이라기 보다는 현상의 ‘결과’로 바라본다. 즉 16세기의 종교개혁에서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한 지역은 대부분 인근 지역보다 경제적으로 발전된 지역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베버는 한 가지 역설적인 질문을 한다. 개혁기의 제네바, 네덜란드, 영국 등에서 구 도시귀족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울 정도의 엄격한 칼빈주의를 어떻게 부르주아적 중산계층은 수용했을 뿐더러, 그것을 영웅적인 태도로 실천했는가 하는 것이다. 베버는 카톨릭과 개신교의 이러한 차이를 역사적-정치적 상황보다는 종파의 지속적인 내적 특성에서 찾아야 함을 강조한다.

베버는 카톨릭의 강한 ‘비세속성’, 카톨릭의 최고 이상인 금욕적 성격이 신자들로 하여금 현세의 재물에 대해 보다 강한 무관심을 보이게 할 수 밖에 없었다는 일반적인 견해에 강력히 반대한다. 오히려 엄숙함과 생활에서의 종교적 관심의 강력한 지배를 ‘비세속성’이라고 부른다면, 프랑스의 칼빈주의자들은 지구상의 어느 민족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비세속적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베버는 초기 프로테스탄트 정신의 일정한 특징과 근대 자본주의적 문화 사이에 내적인 친화성을 찾으려면 유물론적인 혹은 반금욕적인 ‘세속성’에서가 아니라 순수한 종교적 성격에서 찾아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즉 몽테스키외가 『법의 정신』에서 언급한 것처럼 “영국인들이 상업에서 우월한 이유는 그들이 세 가지 측면에서 다른 민족을 능가한다는 것이다. 즉 신앙, 상업, 자유”라는 것이다. 도대체 신앙이 상업과 자유의 문제와 어떻게 관련이 되어 있는가? 베버는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개념이 무엇인지를 설명해 나간다.

△ 자본주의 ‘정신’
베버가 자본주의 ‘정신’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베버는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의 훈계를 인용하면서 자본주의 정신을 설명한다. ‘자본주의’는 중국, 인도, 바빌론 그리고 고대와 중세에도 존재했지만, 근대 자본주의와의 차이점은 근대 자본주의에는 독특한 에토스가 있다는 점이다. 달리 말해 노동이 신성하면 그 ‘대갗인 돈도 신성하다는 것이다. 고대와 중세에는 추잡한 탐욕과 상스러운 생각이라고 배척되었지만, 노동과 자본이 신성하다면, 그것을 비합리적인 목적을 위해 축적하거나 낭비하는 대신, 철저하게 합리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발생한다. 이것은 근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정신이다. 어느 시대에도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을 ‘직업(소명)’으로 연결시키지 않았으며, 이 경향은 종교적 교육이 전통주의적 구습을 타파한 예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정신’이란? 직업으로서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정당한 이윤을 추구하려는 정신적 태도이다.

베버는 이 ‘정신’에 따른 영리활동을 모든 시대에 걸쳐 존재했던 ‘이윤에 대한 멈추지 않는 추구’와는 구별된 것으로 바라본다. 따라서 자본주의 정신을 ‘탐욕’과 ‘무한한 이윤추구’로 바라본 동료 좀바르트의 견해를 반박한다. 즉 자본주의 기업가의 ‘이념 형’은 그가 개인적으로 비천하건 세련되건 벼락부자 근성과는 전혀 다른 것임을 지적한다. 자본주의 ‘정신’에 적합한 기업가는 과시, 불필요한 낭비, 권력의 고의적 사용 등을 꺼리며 자기가 받는 사회적 존경이 밖으로 표현되는 것을 오히려 부담스러워 한다는 것이다. 즉 일종의 금욕주의적 성격을 지닌다는 것이다. 이전의 사람들은 도착적인 충동인 ‘금전욕’이라는 것을 죽도록 추구한 반면, 비합리적일 정도로 엄격하게 자신의 직무에 종교적 경건을 가지고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베버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이 나타난다. 그는 이러한 소명이 ‘물적’ 토대의 관계에서 ‘사상의 상부구조’로 반영되었다는 말은 전혀 무의미하다고 단언한다. ‘경제적 토대’라는 하부구조가 ‘사상이라는 상부구조’를 형성한다는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이론을 완전히 뒤엎은 것이다. 그렇다면 겉으로 보기에는 이윤 추구활동에 불과한 것이 어떻게 개인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소명’(직업)의 범주에 속하게 된 것일까? 이것은 어떠한 사상의 세계에서 유래한 것인가? 분명 합리화 과정은 근대 시민사회의 ‘생활의 이상’ 중 중요한 부분을 규정한다. 즉 인간의 물질적 재화의 공급을 합리적으로 형성하기 위한 작업을 ‘자본주의 정신’의 대표자들은 자신들의 생애에 주어진 노동의 목적이라고 보았음이 분명하다. 즉 그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일거리를 주며’ 고향도시의 인구수와 거래를 증진시킴으로써 고향도시의 ‘번영’에 기여했다는 기쁨과 긍지는 근대적 기업가층만이 지니는 ‘이상주의적’이며 ‘특수한’ 삶의 기쁨이었다. 그렇다면 이 특수한 ‘소명’의식은 어디서 생긴 것일까?

△ 루터의 직업개념·탐구의 과제
베버는 독일어로는 ‘Beruf’와 영어로는 ‘calling’이라 불리는 ‘직업’이라는 단어에 종교적 내용이 함축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직업’에 ‘신으로부터 받은 임무’라는 의무가 정확하게 포함된 것은 고대와 중세의 어떤 문명권에서도 찾아볼 수 없고, 카톨릭 민족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인 반면, 개신교를 받아들인 모든 민족에서는 뚜렷이 드러나는 특징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세속적 직업에서의 의무이행을 도덕적 자기증명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내용으로 평가한다. 그러므로 ‘직업’ 개념이야말로 프로테스탄트 교파의 중심교리의 표현이라고 본다. 이 교리는 도덕적 계율을 ‘명령’과 ‘권고’로 나누는 카톨릭의 태도를 거부한다. 또한 신을 기쁘시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수도사적인 금욕주의를 통해 현세적 도덕을 경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현세적 의무를 완수하는 것이라 보았다.

따라서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의 주장처럼, 세속 노동은 아무리 신이 의도한 것이라 해도, 피조물에 불과한 것으로 먹고 마시는 것처럼 도덕적으로는 무관한 자연적 토대일 뿐이라는 주장을 루터가 거부했다는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세속적인 직업 노동은 이웃 사랑의 외적 표현이다. 따라서 세속적인 의무를 다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허용된 모든 직업은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이다. 그러나 베버는 루터가 중세의 전통주의적 소명관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다고 말한다. 즉 루터의 직업관은 금욕적인 자기연마의 경향에 위선이라는 혐의를 두었으며, 하나님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을 자신의 처지에 대한 무조건적인 순종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베버에 의하면, 루터의 ‘직업관’은 금욕적인 의무가 현세적 의무보다 우위에 있다는 중세적인 믿음을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처지에서 당국과 운명에 복종하라는 한계를 지녔다.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베버는 칼빈주의만이 중세 카톨릭과의 완전한 단절을 이루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때문에 카톨릭은 지금까지 칼빈주의를 카톨릭의 진정한 적으로 간주한다고 설명한다. 물론 그 이유는 우선적으로 정치적 이유에서이지만, 다음으로는 칼빈주의의 윤리적 독특성이라고 본다. 그러나 베버는 칼빈주의가 없었다면 종교개혁의 성과가 외적으로 지속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종교적 신앙과 직업 윤리 사이의 친화성이 인식 가능한 정도인지, 그리고 종교운동이 물질적 문화의 발달에 작용한 방식과 일반적 방향성은 어떠한 것인가? 이것이 2부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의 직업윤리’에서 다루어지는 내용들이다.

2)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의 직업윤리

△ 현세적 금욕주의의 종교적 토대
베버는 2부의 첫 번째 장인 ‘현세적 금욕주의의 종교적 토대’에서 금욕적인 개신교의 역사적 담당자로 네 운동을 분석한다. 첫째 칼빈주의가 17세기에 취했던 형식, 둘째 경건주의, 셋째 감리교 넷째 침례교다. 베버는 감리교를 18세기 중반에 새로운 교회가 아니라 영국 국교회 내부의 금욕적 정신을 새로이 환기시키려는 운동으로 본다. 또한 경건주의는 17세기 말경 슈페너의 영도 아래서 루터주의에 흡수되었지만, 진젠도르프에 의해 후스파와 칼빈주의의 영향을 받아 독특한 교파를 형성한 것으로 본다. 한편 칼빈주의와 침례교는 초기에는 첨예하게 대립되었지만 17세기 말부터 상호밀접한 관계를 지니는 것으로 본다. 2부 1장은 철저히 신학적인 논문이다. 주로 역사신학적 방법이 사용된다. 따라서 베버의 책을 경제학적 접근이나, 사회학적 방법론을 통해서 해석하는 사람들이 베버를 오독할 수밖에 없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베버의 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도 한데, 그 부분이 신학적 해석을 요구하므로, 이에 대한 신학적 지식 없이는 베버의 함의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베버는 16세기와 17세기에 자본주의가 가장 발달했던 문화국가로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를 꼽으며, 이 나라들에서 칼빈주의가 위대한 정치투쟁과 문화투쟁을 수행했다고 본다. 그리고 가장 특징적인 칼빈주의 교리로 ‘예정론’을 든다. 한편 칼빈주의는 구원의 문제와 결부되어 극도의 개인적 불안의 상태에 빠질 수 있음을 지적한다. 나는 선택되었는가? 그렇다면 나는 그 선택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베버는 이러한 질문 속에서 노동의 의미가 부각되었다고 주장한다. 우선, 자신을 선택된 자로 여기고, 모든 의심을 악마의 유혹이라고 거부하는 것이 의무화 되었다. 다음으로, 자기 확신에 ‘도달하기’ 위한 가장 탁월한 수단으로 부단한 ‘직업 노동’이 엄명되었다는 것이다. 일만이 종교적 회의를 씻어버리고 구원의 확실성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베버에 의하면 개혁주의자들은 고린도 후서 13장 5절에 따라, 구원이 ‘오직 믿음’(sola fide)만으로 이루어진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선행을 구원을 얻는 수단에서 배제했다. 그러나 구원에 대한 유효한 확신에 대한 근거가 필요했기 때문에 선행을 선택의 표지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카톨릭은 고해성사나 성례 등을 통하여 사제가 죄를 사하며, 구원의 희망을 심어질 수도 있었지만, 칼빈주의자들은 이처럼 우호적인 인간적 위안이 없었기 때문에 카톨릭의 ‘선한 의도’를 대체할 무엇이 필요했다. 따라서 칼빈주의자들은 성도들에게 개인적인 ‘선행’을 행하도록 요구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체계로 고양시켜 ‘선한 삶’을 살도록 요구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상과 세속적인 삶에서 신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또는 “모든 것이 신의 영광을 더하기 위하여”(soli Deo gloria)라는 개념이 칼빈주의에서 만큼 절실하게 이루어진 적이 없다고 평가한다.

베버에 의하면, 종교적 의미에서 금욕적인 방법의 삶을 산 사람들은 이제까지 수도사들뿐이었다. 금욕이 개인을 사로잡으면 잡을수록 그는 더욱 더 일상생활에서 멀어져 갔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이제까지 수도생활의 대표자들이 제공했던 정열적인 진지함을 내면에 갖춘 사람들로 하여금 세속적 직업생활 안에서 금욕적 이상을 추구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금욕을 추구하면 할수록 그는 더 세속 직업에 열심히 일하게 되는 것이다. 즉 수도원이 아니라 세속적 직업생활에서 자신의 신앙을 증명해야하기 때문이다. 베버는 인간의 전존재를 철저히 기독교화하는 것은 칼빈주의와 루터교의 대립적인 윤리적 생활방식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루터교에 있어서 참회를 통해 언제든지 다시 획득할 수 있는 ‘상실 가능한 은총’에는 윤리적인 삶 전체의 체계적인 합리적 형성에 어떠한 동인도 포함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칼빈주의를 카톨릭과도 그리고 루터교와도 다른 행도를 걷도록 만든 신학적 동인은 무엇이었을까?

베버는 그것이 예정론의 영향이라고 본다. 물론 대부분의 사회학자들이나 경제학자들이 베버가 예정론이 자본주의 정신 형성의 직접적이자 유일한 동인이라고 보았다고 분석하는 것은 베버에 대한 신학적 무지의 발로이다. 베버 스스로 다음처럼 분명히 한다. “즉 칼빈주의의 예정설은 여러 가지 가능성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물론 칼빈주의의 예정설이 매우 특출한 결과를 낳은 것일 뿐 아니라 매우 탁월한 심리적 효과를 가진 것이었음을 확신한다.”

경건주의를 분석하면서, 베버는 슈페너가 루터주의적 신앙 경향에 선행 자체가 ‘신의 영광을 위하여’ 이루어진다는 개혁파의 특성을 덧붙였다고 한다. 프랑케는 직업 노동을 최고의 금욕적 수단으로 생각했다는 점에서 청교도와 유사하다고 보았다. 진젠도르프에 들어서면서, 칼빈주의파와 모라비아파는 본질적으로 개혁파의 직업윤리를 지향했다고 평가한다. 헤른후트는 존 웨슬리에 완성 추구를 거부하고, 기독교적 삶의 적극성으로 선교와 직업노동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한편 웨슬리는 당시의 행위주의(행위 의인사상)와 투쟁하면서, 단지 행위는 구원의 실재 근거가 아니라 인식 근거에 불과하며 그것도 단지 행위가 신의 영광을 위해서만 행해지는 경우뿐이라는 초기 청교도주의의 사상을 부활시킨 것 이상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물론 웨슬리에게는 올바른 행위만으로는 부족하고 그 자신의 경험처럼 구원의 감정이 추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감리교에서는 ‘보다 성결한 삶’, ‘제2의 축복’ 등에 대한 추구가 있지만, 그것은 예정론에 대한 일종의 대용물로서 작용했을 뿐, 영국 감리교의 윤리적 실천은 어디까지나 영국의 개혁파 기독교인 청교도의 실천을 지향한 것이라고 베버는 바라본다.

베버는 경건주의나 감리교에서 칼빈주의의 영향을 발견하지만, 칼빈주의를 제외하고 개신교 금욕주의를 독자적으로 담당한 교파로 침례교와 그 분파들인 메노나이트, 퀘이커교 등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침례교 분파들에게는 개신교 금욕주의를 채택했으면서도 왜 칼빈주의자들의 적극적인 사회참여가 나타나지 않는가? 베버는 메노나이트와 퀘이커교의 경우는 무기 사용과 선서를 철저히 거부함으로써 관직으로의 진출 자격이 박탈당했으며, 비정치적인 원칙의 결과일 뿐이지, 결코 생활 속에서의 철저한 금욕적인 선행을 거부한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베버에게 금욕적 생활방식은 자신의 전 존재를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합리적으로 구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금욕은 신앙 이외의 과외 활동이 아니라,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기 원하는 모든 이에게 요구되는 행위이다. 따라서 베버는 이를 결정적인 것으로 본다. 즉 종교적으로 요구되는 성도의 특별한 생활은 더 이상 세속 밖의 수도원에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그 질서 안에서 행해진다. 내세를 바라보면서 세상 안에서 생활방식을 합리화한 것은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의 직업사상이 낳은 결과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개신교의 금욕적 성향이 자본주의 정신과는 어떠한 친화성을 지니는가?

△ 금욕과 자본주의 정신
베버는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의 종교적 기본사상과 경제적 일상생활 사이의 관련성을 검토하고자 실천 목회에서 나온 저술들을 사용할 필요성을 주장한다. 그는 칼빈주의에서 유래된 영국 청교도주의가 직업 사상에 대한 가장 철저한 정초를 제공했기 때문에 그 대표자를 중심으로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베버가 선택한 대표자는 리처드 백스터(Ricahard Baxter)다. 백스터는 화폐와 재물에 대한 추구 자체를 죄악시한 것은 아니라고 베버는 주장한다. 백스터가 도덕적 비난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은, 우선 재산을 갖고 휴식하는 것, 부를 향락하여 태만과 정욕을 낳고 특히 '거룩한' 삶의 추구에서 이탈되는 것이었다. 현세에서 인간은 "낮 동안은 자신을 보내신 이의 일을 행해야"한다. 따라서 시간 방비는 모든 죄 중에 최고의 중죄다. 노동은 단순히 금욕 이상의 것이며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삶의 자기 목적이다. 백스터는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바울의 명제는 무조건적으로 만인에게 적용되는 것이며, 노동의욕의 결핍은 구원받지 못함의 징후라고 말한다.

베버는 백스터에게서 부의 추구가 합리화되는 것을 발견한다. "당연히 육욕과 죄를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 신을 위해서라면 부자가 되기 위해 노동해도 괜찮다." 즉 직업의무의 행사로서 부의 추구는 도덕적으로 허용될 뿐만 아니라 명령된 것이기까지 하다. 영주의 고상한 방종과 벼락부자의 과시적 허세는 모두 금욕주의가 증오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정직하게 자수성가한 부르주아는 대단한 윤리적 평가를 받았다.

베버는 유대교의 경제적 에토스가 자본주의 발생의 주요인이라는 좀바르트의 견해에 반대한다. 베버가 보기에 중세와 근대 유대교의 경제윤리는 프로테스탄티즘과 거리가 멀다. "유대교는 정치나 투기에 의존하던 '모험가' 자본주의에 속한다. 즉 유대교의 에토스는 한 마디로 말해 천민 자본주의의 에토스다. 청교도주의는 합리적인 부르주아 경영과 노동의 합리적 조직화를 수행했다." 베버에 의하면, 현세적인 프로테스탄트의 금욕주의의 공헌은 다음과 같다. 개신교의 금욕은 전력을 다해 재산낭비적 향락에 반대해 왔고 소비, 특히 사치재 소비를 봉쇄했다. 이익추구를 합법화시켰을 뿐 아니라 직접 하나님의 뜻이라고 간주함으로써 이익추구에 대한 질곡을 뚫고 나왔다. 또한 금욕주의는 구약에 따라 그리고 선행에 대한 윤리적 평가에 있어, 목적으로의 부의 추구는 비난받아야 할 최악의 것이라 보면서도 직업노동의 열매인 부의 획득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보았다.

베버에게 있어 이러한 태도는 자본주의 '정신'에 해당하는 생활관에 대한 가장 강력한 지렛대이다. 베버는 칼빈주의가 세력을 얻은 지 7년 만에 네덜란드의 자본력이 영국을 압도하게 된 이유를 영국의 중상주의 저술가들의 증언을 통해 보여준다. 영국과는 달리 네덜란드인들은 새로 늘어난 재산을 부동산 투자에 쏟지 않고, 자본주의적으로 사용했다. 또한 영리활동을 '소명'으로 볼 뿐만이 아니라, 노동 또한 '소명'으로 보았다. 영국인들은 네덜란드인들이 기업가만이 아니라, 노동자들조차 자기 일을 하나님이 주신 임무로 알고 수행하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베버는 근대적 자본주의 정신, 또한 근대 문화의 구성 요소의 하나인 직업사상에 입각한 합리적 생활방식이 기독교적 금욕 정신에서 탄생한 것임을 증명하려 시도했다. 그렇다면 베버는 하나님께 봉사하는 부의 추구에서 긍정적인 요인만을 보았던 것일까? 베버는 가장 경건한 퀘이커 교도나 감리교인 조차도 재산이 증대되면서, 세속적인 욕정과 자만, 삶의 교만함에 빠지는 현실이 있음을 인정한다. 종교의 형식은 그대로지만 정신은 사라져 간다는 것이다. 베버는 현재의 푸른 나무가 나중에도 푸른 나무일 수 있을까 질문한다. 또한 '합리화'의 과정도 '정신'이 상실되어 효율적인 합리화 과정만이 강화될 때 '정신 없는 전문가, 가슴 없는 향락자'라는 '최후의 인간'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베버는 다음 과제로 이 금욕적 합리주의가 인문주의적 합리주의, 생활 이상과 문화적 영향, 철학적 과학적 경험주의의 발전, 기술적 발전, 정신적 문화재 등과 가지는 관계의 분석을 촉구하면서 글을 맺는다.

4.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대한 비판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의심할 바 없이 근대 사회과학에서 가장 유명하고 논쟁적인 저작 중의 하나로 간주된다. 1904년~1905년에 걸쳐 『사회과학과 사회정책 잡지』(Archiv für Sozialwissenschaft und Sozialpolitik)에 두 부분으로 된 논문으로 처음 발표되자, 곧 비판적인 논쟁이 벌어졌다. 베버는 적극적으로 논쟁에 참여했다. 그러나 7년이 지나도 논쟁은 열기를 잃지 않았다. 이에 따라 베버의 사망 직후 두 편의 논문에 주석이 덧붙여져 출판된 것이다.

1) 사회학적 비판
베버는 근대 서구 경제의 기원을 해석하는데 '종교'와 '자본주의'를 적용함으로써, 당대의 거의 모든 마르크스 주의자들의 비판을 받았다.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베버의 이론은 '경제결정론'에 대한 '관념론'의 도전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베버는 경제결정론을 관념론적 역사해설로 대체하려했던 것이 아니다. 스스로 밝히듯이 이 저작은 오히려 역사에는 '역사의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의 신념의 표현이며, 일원론적인 해설이 아니라, 다원론적인 해설 즉, 서구에서 근대 자본주의의 출현은 역사적으로 특수한 여러 사건들의 결합의 산물임을 드러낸 것이다.

1930년대 영역판이 출판된 이후, 전 세계적으로 베버에 대한 비판이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대표적인 주장으로, 베버가 칼빈주의만이 근대 자본주의 발전의 유일한 원인으로 간주했다는 것이다. 또한 베버의 가설로는 일본처럼 기독교 '정신'을 지니지 않고 근대국가로 발전한 나라들을 파악할 수 없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기든스는 이들이 베버가 자기 저서의 부분적인 성격을 강조한 것을 보지 못했거나, 고의로 무시했다고 비판한다. 즉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1920년대와 30년대에 나온 『종교사회학 논문집』『경제와 사회』의 후속 연구의 맥락에서 분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 종교적 비판
앤서니 기든스는 베버에 대한 이제까지의 비판을 요약한다. 그 중에 종교적 비판은 베버가 프로테스탄티즘을 잘못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부의 주장에 의하면, 베버는 루터가 이전의 성경해석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소명' 개념을 도입했다고 잘못된 가설위에 논제를 전개해 나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비판은 베버의 논문 전체를 읽지 않을 때 생기는 전형적인 실수다. 사실 베버의 논문이 가지는 신학적인 중요성은 베버가 처음 발표했던 논문 자체보다, 그의 사후에 발표된 책이 더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베버는 논문의 발표 이후 제기된 여러 문제들에 대한 대답을 '주석'형식으로 덧붙였기 때문이다. 본고의 각주 23에 나오듯이, 베버는 루터와 구약과의 연관성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모든 언어적 사용에서 오직 구약적 사용에서만 일부분의 '유사성'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한다.

한편 칼빈주의 윤리가 실제로 간접적인 목적으로라도 부의 축적을 신성화하기는커녕 칼빈주의는 본질적으로 '반자본주의'라는 주장이 있다. 분명 칼빈의 사상에도 그 후예들의 사상에도 부의 축적에 대해 경고하는 부분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베버에 의하면, 칼빈은 심지어 성직자의 이윤추구조차 사람들에게 지나친 반감을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면, 정당한 추구는 가능하다고 보았다. 아울러 17세기 네덜란드나 영국의 칼빈주의에서 부의 추구 자체를 지나치게 탐닉하거나 얻어진 재화를 낭비하는 것을 비판하는 경우는 있지만, 정당한 직업에 의한 부의 추구를 비난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비판은 칼빈주의의 '반자본주의적' 측면이라기보다는, 자본주의가 그 '정신'을 잃고 역으로 재화가 '정신'을 상실하게 만드는 것에 대한 경고로 해석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한편 베버가 신학교육을 받은 적이 없으므로, 카톨릭의 교리를 잘못 해석했다는 카톨릭측의 비판이 있다. 베버가 정식으로 신학교육을 받은 적은 없다. 그러나 베버는 목사인 이종사촌형 오토 바움가르텐(Otto Baumgarten, 1858~1934)과 함께 다양한 신학과 철학 책을 읽고 토론함으로써 충분한 신학적 지식을 보유하고 있었다. 더욱이 베버는 하이델베르크에서 교수 생활을 하고 있을 때, 1910년부터 신학자이자 종교철학자였던 에른스트 트뢸치와 동거했다. 베버 가족이 2층에서 트뢸치 가족이 3층에 살면서, 주일 오후에 열린 베버 서클에 함께 했는데, 트뢸치로부터 많은 신학적 자문을 얻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베버의 카톨릭 분석은 베버의 독자적인 분석이라기보다 당시 독일 신학계의 일반적인 인식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5. 베버의 연구와 업적

막스 베버는 칼 마르크스(Karl Marx), 에밀 뒤르껭(Émile Durkheim)과 함께 현대 사회학의 창시자로 간주된다. 또한 그는 공공행정학의 창시자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베버의 당시 새로운 현대적 학문이 태동하고 있는 시대였기 때문에 그를 몇 가지 분야로 한정할 수는 없다. 스스로도 법학자에서, 경제학자, 말년에는 사회학자로 활동했기 때문에, 그의 학문은 다양한 분야의 형성으로 연결되었다. 베버는 사회과학 방법론, 정치 사회학, 법 사회학, 종교 사회학, 경제사, 농업사, 음악 및 예술 분야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법학자였던 베버에게 경제학 또는 사회학으로의 이전은 어떻게 일어났던 것일까? 더욱이 이러한 전환을 통해 베버는 어떻게 새로운 사회학의 방법론을 발견하게 된 것일까?

1897년부터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던 베버는 1898년 초, 갑자기 탈진 상태에 이르고 말았다. 의사는 지속적인 과로와 감정의 흥분 탓이라고 안심시켰지만 곧 정신적, 육체적으로 완전한 탈진 상태에 이르렀으며, 극심한 우울증에 빠지게 되었다. 1899년 봄부터 아예 책을 읽지도 글도 쓰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심지어 어떠한 사유조차 하지 못할 정도였다. 베버는 사직서를 제출했으나 무기한 휴직으로 처리되었다. 1902년 두 번째 사직서를 제출하자, 교육부는 1903년 10월 교수직에서 물러나 명예교수가 되도록 결정했다. 이 불운의 시간이 베버에게는 새로운 도약을 위한 계기가 되었다.

베버는 이 기간을 주로 이탈리아에서 여행과 휴양을 하면서 보냈다. 지적으로 마비된 듯한 4년여를 보냈지만 이 기간은 오히려 과거의 지적 방법론과 결별하는 시간이었으며,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극이 되었다. 전공 분야의 책을 읽을 수 없었던 그는 그 이유가 과거의 전통적 방법으로는 새로운 사회 변화를 설명할 수 없다는 인식에 도달했다. 그의 관심은 더욱 광범위해졌으며, 가장 복잡한 문제인 방법론의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다. 휴양을 통해 회복한 그는 이 과업을 떠맡았다. 1904년 베버는 베르너 좀바르트(Werner Sombart, 1863~1941), 에드가 야페(Edgar Jaffé, 1866~1921)와 더불어 『사회과학 및 사회정책 저널』(Archiv für Sozialwissenschaft und Sozialpolitik)의 편집을 맡게 되었다. 베버는 1904년 대학 시절 동료이자, 당시 하버드 대학의 교수로 재직 중이던 후고 뮨스터베르크의 초청으로, 에른스트 트뢸치(Ernst Troeltsch, 1865~1923)와 함께 미국을 방문하게 된다. 베버는 미국의 자본주의가 눈부시게 발전하는 모습을 관찰했는데, 이 관찰은 그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Die protestantische Ethik und der Geist des Kapitalismus)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1904년과 1905년 두 차례에 걸쳐 발표되었는데, 이 논문이 실린 것이 위의 학술지였다.

1) 종교사회학적 연구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과 함께 시작된 베버의 종교 사회학 연구는 중국의 전통 종교인 유교와 도교, 인도의 종교인 힌두교와 불교 그리고 고대 유대교에 대한 연구로 확대된다. 세계 종교에 대한 연구는 세 가지 주제로 행해졌다. 종교적 사고가 경제 활동에 미치는 효과, 사회적 계층과 종교적 사고 사이의 관련성 그리고 서구 문명의 두드러진 특징 등이다.

베버가 종교 사회학에서 두 번째 주요 작업으로 다룬 것이 『중국의 종교: 유교와 도교』다. 베버는 서구 유럽과 중국 사회의 상이한 측면에 주목, 프로테스탄트와 비교를 통해 왜 중국에서는 자본주의가 발달하지 못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룬다. 베버에 의하면 중국에서도 자본주의 경제의 발달을 일으킬 만한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특히 종교적 이유에 의해 무산되었다. 유교는 우주의 '도'(道)에 순응하고 전통적 의무를 실천함으로써 사회와 자연에 대한 불안을 최소한으로 감소시켰다고 본다. 따라서 토지 거래가 금지되거나 매우 어려웠으며, 채무 지불, 직업적 규범, 업무 과정의 합리화 등에 방해가 되었다. 베버에 의하면, 유교와 청교도주의는 포괄적이면서도 상호 배타적인 합리화의 두 유형이다. 둘 다 절대적인 종교적 신념에 따라 인간의 삶에 질서를 부여한다. 삶의 건전함, 자기 통제가 부의 축적과 양립할 수 있다. 세상에 적응하는 방법으로, 교육, 자기-완전, 공손함, 가정의 경건성 등이 추구된다. 그러나 청교도주의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람들이 만들어 지는 수단이었으며, 하나님을 섬기고 세상을 다스리는 인간형을 창조하고자 했다. 행동에 대한 신념과 열정의 강도는 유교의 심미적인 가치에는 이질적인 것이었다. 반면 유교에 있어서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책무는 전통에 따라 부모에 효를 다하고,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돌보는 일이다. 때문에 개인과 가정 외의 다른 사람과의 인간관계는 부차적이다. 따라서 유교의 "현세 적응" 논리는 개신교의 "현세 초월" 윤리와 정반대로 기능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베버는 이러한 심성의 차이가 서구에서는 자본주의의 발전에, 중국에서는 오히려 자본주의의 억제에 기여했다고 기술한다.

베버의 세 번째 주요 연구는 힌두교와 불교의 사회학이었다. 이 저작에서 그는 힌두교라는 정통적 교리와 불교라는 비정통적 교리를 지닌 인도 사회의 구조를 다룬다. 또한 대중의 종교성이 사회에 어떤 변화를 다루었는가와 함께 마지막으로 인도 사회의 세속 윤리에 종교적 신념이 미친 영향을 탐구한다. 고대 인도의 사회 체계를 형성한 것은 카스트 개념이다. 카스트는 직접 종교적 신념과 연결되었으며 사회를 여러 그룹으로 분리시켰다. 베버는 카스트 제도가 브라만(승려), 크샤트리아(전사), 바이샤(상인) 그리고 수드라(천민)으로 이루어졌다고 묘사한다. 다르마(法) 개념과 관련하여 그는 인도의 윤리적 다원주의는 유교나 기독교의 보편 윤리와 매우 다르다고 결론 내린다. 베버는 영원한 윤회의 굴레와 세상의 탄원으로 이루어지는 불변의 세계 질서 개념에 주목한다. 그리고 종교에 의해 뒷받침 되는 전통적인 카스트 제도가 경제 발전을 느리게 했음을 발견한다. 내세는 현세와 연속되어서 현세에서 착한 삶을 살다보면 이 공로로 내세에는 더 높은 카스트로 태어날 수 있다는 윤회사상은 변혁의 의지를 억류하며 현세의 불공평한 사회 구조에 순응하는 보수 이데올로기의 기능을 하였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카스트 제도의 ‘정신’이 자본주의의 고유한 발전에 방해가 된 것이다.

『고대 유대교』가 그의 종교사회학의 네 번째 주요 작업이었다. 베버는 세상의 불완전성으로부터 멀어지는 대신, 세상을 정복하고 변화시키려는 기독교의 몇몇 측면을 강조한다. 기독교의 이러한 특징의 유래가 고대 유대교의 묵시라는 것이다. "유대인에게 세계의 사회적 질서는 미래의 약속과는 반대인 것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미래에는 이것이 바뀌어 질 것이다. 유대인들은 다시금 세계에 편만하게 될 것이다. 세계의 현 구조는 인류 행위의 산물인데, 무엇보다 유대인들의 모든 행위들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세계는 참으로 하나님이 예정하신 질서로 향해가도록 계획된 역사적 산물이다. 따라서 유대교에는 사회적 행위에 대한 고도로 합리적인 종교 윤리가 존재한다. 유대교에는 마술이라든지 구원을 향한 비이성적인 추구 형식이 없다는 것이다. 베버는 유대교가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모태가 되었을 뿐 아니라 현대 서구 국가들의 등장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서술한다. 유대교는 마술적이고 밀교적인 명상이 없이 율법의 연구에 헌신하며, 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하나님의 눈앞에서 올바르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선지자들은 사람의 일상생활이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도덕 법의 명령에 순종하는 신앙의 종교를 세웠다. 이런 방식으로, 고대 유대교는 서구 문명의 도덕적 합리화를 창출하는데 기여했다는 것이다.

2) 사회학적, 경제학적 연구와 기여
정치 및 정부 행정에 있어 베버의 가장 중요한 기여는 그의 논문 「소명으로서의 정캣(1919년)다. 여기서 베버는 서구 사회사상의 중추가 되었으며 흔히 '베버의 명제'라고 불리는 국가의 정의를 발표한다. "국가는 합법적으로 물리적 힘의 독점적인 사용권을 소유한 실체이다". 이 에세이에서, 베버는 정치는 국가가 힘의 상대적인 배분에 영향을 미치고자 스스로 개입하는 활동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정치는 권력에서 유래한다. 베버는 정치가가 반드시 산상수훈에 나온 내용이나, 한 쪽 뺨을 맞으면 다른 뺨을 대어주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윤리'를 지닌 사람이어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정치적 영역은 성자들을 위한 영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정치가는 궁극적인 목표와 책임감을 결합시켜야만 한다. 그리고 그의 직업에 대한 열정과 자신의 권력 행사와 자신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도 갖추어야 한다. 베버는 또한 사회의 관료화에 대한 연구로도 유명하다. 관료제라는 말이 유명해 진 것도 베버의 연구를 통해서다. 현대 공공 행정학의 많은 부분이 그에게서 비롯되었으며, 고전적이며 서열제로 조직된 공공 서비스의 대륙적 유형을 '베버적인 시민 서비스'라고 부른다. 물론 이 유형은 그의 『경제학과 사회』(1922)에 나타난 이상적인 공공 행정과 정부의 모습이기는 하다.

경제학에서 그의 가장 큰 기여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다. 경제학에 대한 베버의 또 다른 기여는 방법론과 그의 '이해("Verstehen")이론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사회적, 경제적, 역사적 연구는 귀납법적이나 서술적 방식으로는 결코 충족될 수 없다. 연구자는 반드시 개념적 장치를 통해 접근해야 하는데, 베버는 이것을 '이념 형"(Idea Type)이라고 불렀다. 베버의 이념형은 사회과학에 있어 가장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가 되었다. 베버는 "이념 형"의 사용이 하나의 추상임을 인정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사회적 현상을 이해하는 데는 그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사회현상이란 자연 현상과는 달리 이념형으로만 해석되어야만 하는 인간의 행위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념형은 그의 반-실증주의 논증과 함께 "합리적인 경제인"(homo economicus)이라는 가설을 위한 방법론적 수단이었다. 경제학에 대한 베버의 또 다른 기여는 로마 농업 사회의 경제사, 1914년 경제와 사회에 잇는 자본주의의 역사에 있어 이상주의와 유물론이 있는데 이 책에는 마르크스에 대한 베버의 비판이 제시된다. 그의 『일반 경제사』(1923)는 독일 역사학파의 최고 정점으로 간주된다.

6. 베버의 연구가 한국사회와 신학에 가지는 의미와 적용

한국 사회와 교회가 위기다. 한국의 프로테스탄트가 지금처럼 사회의 지탄을 받는 시기가 없었다. 이것이 단지 한국 교회가 교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못하고 있기 때문에, 또는 일부 부정적인 한국 교회의 모습과 실천이 반기독교 세력에 의해 전체의 모습인양 확대 재생산되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일까? 20세기 초반의 막스 베버가 던진 종교사회학적 질문들이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의 상황에는 어떻게 유추될 수 있을까?

(1) 베버의 연구는 한국사회의 산업화의 동인은 무엇이었으며, 한국 자본주의의 '정신'(또는 에토스)은 무엇인지 질문하고 있다. 또한 한국 자본주의의 형성에 종교적 요인은 어떻게 작용했으며, 그 상관 관계에 대해서도 묻고 있다. 아울러 급속도로 빠른 산업화로 OECD 회원국이 되었으며, 세계 12위의 수출대국이 된 한국 사회와 경제가 다음의 성장을 위한 '공통의 사회적 합의 또는 정신'을 지니고 있는지 질문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정신'의 형성에 한국 기독교의 책임과 반응을 요청하고 있다.

(2) 베버의 연구는 한국 교회에 개인이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베버는 마르크스주의의 계급주의 또는 집단주의에 반대, 개인이 경제, 사회적 활동의 주체임을 드러내었다. 아울러 개인이 윤리를 구성하면, 그 윤리가 개개인들이 모인 집단의 정신 즉 직업윤리가 된다. 이 직업윤리가 자본주의의 정신으로 발휘될 때, 사회가 변화된다는 것이 베버의 주장이다. 이제까지 단 한 사람의 구원 문제에 전력을 다했던 한국 교회에 그러한 개인들이 모인 보다 큰 공동체의 변화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닐까? 신앙적인 변화가 개인과 교회를 넘어 가정과 직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의 직업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라면, 그 직업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방법을 교회와 신학은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3) 베버의 연구는 한국 신학계가 신학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를 설명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 퍼부어지는 비난은 한국 교회가 이 사회 속에서 존재해야할 이유를 묻고 있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보면, 한국 사회는 위기의 상황에서 절실한 도움을 한국 교회에 요청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성육신'은 단지 신학과 교회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한국 사회의 다양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총체적인 문제에 대해 기독교 신앙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그것이 과연 자신들을 구원할 만한 것인지를 묻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대답은 그들이 이해할만한 언어로 제공되기를 바라고 있다. 기독교가 과연 희망과 빛과 소금의 종교라면, 그것을 우리 사회에 보여 달라는 것이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확장되는 것을 진심으로 원한다면, 그리스도의 주권이 참으로 교회만이 아니라, 정치, 사회, 경제, 역사, 문화의 모든 면면에 높여지기를 원하는지 스스로 질문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 기독 신학자들이 교회적 일과 신앙, 신학의 문제에만 천착할 수 있는 환경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현 위기는 신학에게 내부의 신학적 충실함을 사회로 확장하기를 명령한다. 사회를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는 틀을 이해 가능한 언어로 제공해 주기를 원한다. 이것이 21세기 한국 신학자들이 떠맡아야만 할 임무가 아닐까? 이를 위해서라면 사회학자, 정치학자, 경제학자, 역사학자들과 과감히 대화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베버가 칼빈주의적 관점을 활용하여, 법학자, 경제학자, 사회학자로 이동해 간 것처럼, 우리 신학자들도 과감하게 학제적인 연구에 참여할 것을 베버는 삶의 모범으로 보여주고 있다. 결국 베버가 시간과 공간을 넘어 21세기 한국의 크리스천에게 해 준 대답은 '소명의 인간'을 회복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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