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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개신교계 신종교의 윤리성에 대한 비판적 접근(3)
신천지 증거 장막성전을 중심으로
2008년 07월 07일 (월) 00:00:00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본 글은 임웅기 전도사(한국기독교이단상담소 광주지부)가 전남대학교대학원 윤리학과 석사과정을 밟으며 금년 2월 논문으로 제출한 ‘한국 개신교계 신종교의 윤리성에 대한 비판적 접근 - 신천지 증거 장막성전을 중심으로 -’을 저자의 허락에 의해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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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새 예루살렘 순례단, 이스라엘 수도원, 삼각산 기도원

1) 새 예루살렘 순례단
(1) 황국주의 출생과 활동

황국주는 1930년대 초반에 출현한 자칭 메시아 중 한 사람으로 1909년에 황해도 장연군에서 태어났고 아홉 살 아래인 누이동생 은자가 있었다. 그는 서울에 있는 배재학교에 다니다가 부모를 따라 만주 용정의 은진중학교로 전학을 하였다. 용정에서 황국주 부친은 용정 중앙 장로교회의 장로로 봉사하였다. 유족한 환경 탓에 황국주는 서울로 와서 사직동에 있던 법률학원(또는 법정학교)에 재학한 적도 있다. 다시 용정의 집으로 와서는 용정 중앙 장로교회 유년 주일학교 교사로 활동하였고 1930년에 아들을 낳았다. 황국주의 용모는 잘 생겼으며 열변가는 아니었으나 설교는 사람을 끄는 힘이 있었다. 1929년에는 황국주는 용정을 떠나 100리(40Km) 정도 떨어진 발전된 블라디보스톡 지역의 모습을 보고 강한 충격을 받았다.

황국주가 신비체험을 했다고 소문이 들리기 시작한 것은 블라디보스톡을 여행하고 난 뒤 인 1930년 또는 1931년 이었던 것 같다. 황국주는 자신의 신비체험을 고백하기를 30세 때에 백일기도(百日祈禱) 중 머리를 길러 내리고 수염을 기르니 그 풍채가 그림에 나온 예수의 모습과 비슷하였다. 그 모양으로 교회(敎會)에 나타나서 ‘내가 기도 중에 예수가 나타나 내 목을 떼고 예수의 머리로 바꿔서 붙여주고 내 몸의 피를 예수의 피로 교체하여 투석시켜 주었다. 예수의 마음을 갖게 되었고, 예수가 보여주신 이적도 행하게 되었으며, 자신이 전부 예수화(化) 되었다’고 하였다. 이 내용이 바로 ‘목가름’이자 ‘피가름’ 교리이며 황국주의 제자 정득은을 통하여 통일교와 전도관 그리고 정명석에게로 이어져 오고 있다.

황국주는 자신을 따르는 신도들을 모아 ‘새 예루살렘’을 향한 순례의 길에 나섰다. 황국주와 신도들의 새 예루살렘 순례는 용정에서 출발하여 함경도를 거쳐 서울까지 수십 명의 사람들이 함께 걸어갔으며, 가는 도중에 집회를 허락한 개신교 지역교회를 대상으로 부흥집회를 인도하기도 하였다. 새 예루살렘을 향하여 길을 떠난 황국주의 행렬은 1931년 7월경에 함남 흥원군 삼호교회 앞에 도착하였다. 이 순례단의 행렬을 지켜 본 조승제 목사는 자신의 저서 『牧會餘話: 나의 牧會生活 40년의 白書』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1935년 7월 경 함경남도 삼호교회를 목회하던 시절에 황국주를 추종하는 남녀가 섞인 60, 70명 무리들이 혼잡한 모습으로 예배당 유리창 문 밑에서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예배당 안에서도 혼잡한 남녀들이 누워 난잡한 행동을 하였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리고 이 무리에 황국주의 아버지인 용정 중앙교회 황장로도 참여 했으며 아들 황국주에게 절대 복종을 하였다. 황국주의 모습은 마치 사진 속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과 닮았다.

황국주 일행이 조승제 목사에게 부흥회를 인도하고자 교회 강단을 내어달라고 하니 일언지하에 거절을 하였다. 그래서 순례단은 남쪽으로 내려가 함흥을 거치고 원산을 거처 약수터로 이름난 삼방 방면으로 갔다. 황국주 일행이 원산지역에 도착했을 때 예수교회의 한준명이 이들을 만났고 황국주 일행은 삼방지역에서 흩어졌다고 한다. 황국주와 그의 신도들은 1931년 9월 말에서 10월 초 쯤에 서울에서 이용도를 만났다. 이용도가 아현 성결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던 중 쫓겨난 것이 10월 2일 밤이므로 황국주를 만난 것은 그 다음날인 3일에서 5일 사이였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서울에 도착한 황국주 일행은 서울, 황해도, 평안도, 경상도 등 전국 곳곳을 2, 3명씩 짝을 지어 전도여행을 하였다. 황국주와 누이동생 황은자가 부흥집회를 인도하였으며 집회시간에 밀가루를 물에 타서 마시고 사람들은 아우성을 치면서 기도를 했다. 집회를 통하여 병(病)이 나은 사람도 있고 부흥회 기간에 봉헌한 헌금으로 예배당을 새로 건축한 교회도 있었지만, 가정을 버리고 떠돌아다니는 유부녀들과 수종(隨從)드는 처녀들이 황국주를 예수같이 숭배(崇拜)하고 돈과 정조(貞操)를 바치며 음란(淫亂)한 집단생활을 하는 모습에 사람들은 비난을 쏟아내었다. 그래서 예수로부터 목가름과 피가름을 받았다고 하는 주장과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황당무계한 사건들을 종합하여 평양노회에서는 1932년 11월 28일에 한준명, 백남주, 황국주, 유명화를 이단으로 결의하고 부흥회 인도 금지를 하였다.

1933년에 들어와서 황국주는 전도여행과 부흥집회 인도보다는 ‘영계(靈界)’라는 월간지를 발간한다. 사장에 정중명(鄭重明)을 세우고 자신은 편집, 발행인이 되어 1933년 11월에 창간호를 세상에 내어 놓는다. 현재 창간호 한 부가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의 5층 희귀본 서고에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2) 황국주와 이용도의 관계
황국주에 대한 기성교회의 반대와는 달리 이용도는 황국주에 대해 환영하는 입장을 취한다. 황국주가 1933년 11월에 평양(平壤)에 온다는 사실을 알고 원산 예수교회 이용도는 평양(平壤)에 있는 신도들에게 황국주에 대해 성자(聖者)라고 치켜세우며 맞이하자고 했으나, 신도들의 강경한 반대에 부딪혀 황국주가 평양(平壤)에 들어오는 것이 무산된다. 황국주와 이용도의 관계가 친밀했음을 알려주는 자료가 있다. ‘영계(靈界)’라는 월간지를 창간했을 때 이용도가 보낸 ‘축(祝) 창간(創刊) 주(主)로써 귀사(貴社)의 번영(繁榮)을 축(祝)합니다’라는 축전을 창간호 제2쪽에 실었다. 그리고 황국주는 제18쪽에서 20쪽을 할애해서 ‘이용도 목사는 이단인가?’라는 글과 끝부분에 ‘이용도는 주(主)의 사명(使命)을 다하고 안식(安息)의 나라’로 들어갔으며, ‘참 선지자(先知者)가 죽었다’고 이용도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며 애도(哀悼)하고 있다. 현재 월간지 영계(靈界)는 창간호만 전해지고 있다.

2) 이스라엘 수도원
초원(初園) 김백문(金百文)은 1940년대에 스승 백남주의 곁을 떠나 독자노선의 길을 걸어간다. 그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창립했고 ‘이스라엘 수도원(以生列 修道院)’을 이끌었다. 김백문이 1990년 12월 20일 경에 별세한 후에, 1954년 3월 2일 제3기생으로 이스라엘 수도원에 입문한 수사(修士) 신현식(申鉉植)이 계승자의 삶을 살고 있다. 그는 현재 91세의 나이로 서울시 성북구 정릉에서 ‘이생렬(以生列, 이스라엘) 기념관’과 ‘영원한 복음 선교원’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신현식(申鉉植)은 스승 초원(初園) 김백문(金百文)이 직접 집필한 저서『성신신학(聖神神學)』, 『기독교 근본원리(基督敎 根本原理)』, 『신앙인격론(信仰人格論)』과 자신의 저서인 『자서전(自敍傳)』, 『재림론(再臨論)』, 그리고 신현식(申鉉植)의 처제인 집사 양재숙(楊在淑)의 고희 기념문집 『같이 가자 하시던 당신이기옐와 수기『보이지 않는 손길옐등의 책을 맡아 출간하고 있다. 이스라엘 수도원 제3기생인 수사(修士) 신임철이 집필한 『40년(年) 신앙(信仰)의 길』은 자신의 신앙고백과 회고담으로 엮어져 있는데 아쉽게도 비매품으로 분류되어 있다.

초원(初園) 김백문(金百文)이 남긴 세 권의 저서 가운데, 성신신학(聖神神學) 서론에 보면 김백문은 ‘요한의 신학관(神學觀)’을 통하여 삼위일체(三位一體) 되신 하느님의 삼위(성부, 성자, 성신)가 일체적으로 기독교구원(基督敎救援)의 역사’를 도모하시는데 구약 시대는 성부가, 신약 시대는 성자가, 그리고 종말 시대에 성신이 각각 시대적으로 역사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성령의 인격화에 대해서도 기술하고 있다. 또한 이 책에서 언급한 기독교삼원리서(基督敎三原理書)와 인류타락의 근본적인 원인을 기초하여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추론할 수 있다. 그것은 ‘스승 김백문의 사상을 통일교 문선명이 자신의 계시로 도용하여 사용하고 있다는 주장’에 대해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이다. 그리고 박정화는 『야록 통일교회사』에서 ‘김백문의 이스라엘 수도원에 최선길과 함께 다니던 문선명이 김백문의 논리를 그대로 도용했으며, 유효민이 도용한 것을 논리적으로 정리해 주었다’고 한다.

(1) 초원 김백문과 이스라엘 수도원
초원(初園) 김백문(金百文)은 1917년 10월 19일(양력) 경상북도 칠곡군 인동면 인의동 448번지(현재는 경북 구미시 인의동(仁義洞) 488번지)에서 고인이 된 김해 김씨 가문인 아버지 김광조(金光祚, 1881년 8월 23일 생)와 남평 문씨 문아지(1882년 6월 6일 생) 사이에서 4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초원의 위로는 형 김이문과 누나 김덕희가 있고, 아래로는 남동생 김병문, 여동생 김복희, 막내인 김상문이 있다. 김병문은 태어난 지 2개월 만에, 그리고 여동생 김복희는 생후 6개월만에 숨졌다고 한다. 초원(初園) 김백문(金百文)에 대한 학력은 정확하지 않다. 단지 일제 강점기 때 대구의 의전전문학교에 다니다 중퇴(3년) 했다는 이야기만 있을 뿐이다. 또한 김백문은 장차 의사가 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함경북도 청진의 박장로(이름은 불명)가 경영하는 병원에서 약 짓는 일을 도와주었다고 한다. 박 장로의 부인의 이름은 차은영이었다.

당시 김백문의 형 김이문이 함경북도 회령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을 때, 김백문의 나이 만 17세가 되던 1934년 어느 날 경상도 음식을 찾아다니다 김백문은 회령에서 하숙하는 경상도 출신 김남조 여사를 만난다. 김남조는 1893년 태생으로 당시 일대를 전도 여행했던 황국주 일행과 교분이 두터웠고, 신비주의 기도파에 속하였으며 후에는 김백문의 조력자로 신앙의 어머니가 된다.

첫 만남에서 김백문의 비범함을 본 김남조는 종교에 관심이 없었던 김백문을 설득하여 기독교 신앙의 길을 걷게 하였다. 이때부터 김남조는 김백문의 ‘신앙의 어머니’격 역할을 하여 회령, 청진, 주을, 나남 등지의 신비주의 기도파들에게 김백문을 소개시켜 주었으며, 결국은 원산(元山) 신학산(神學山)의 백남주에게도 소개되어 그의 제자가 된 것이다. 그리고 백남주가 ‘천국결혼 잔캄 사건으로 인해 1934년 9월 초가을 무렵에 원산(元山) 신학산(神學山)에서 추방되었을 때에도 초원 김백문은 백남주를 따라 다녔다. 1935년 봄 즈음에 평안북도 철산군 장좌동에 있는 김성도 새주파를 찾아가 합류할 때에도 함께 했고, 부흥집회를 다닐 때에도 항상 동행을 하였으며 평생 동안 스승 백남주를 존경하고 따랐다.

초원 김백문은 원산(元山) 신학산(神學山)과 장좌동 성주교 생활을 통해 점점 신비주의에 몰입하였고, 1937년 즈음에 비몽사몽간에 ‘주(主)님을 만나서 자신에 대한 사명과 미래에 일어날 역사와 기독교의 난해한 성서에 대해 가르쳐 주셨다’고 한다. 그리고 김백문은 성주교를 비롯해서 신비주의 집단들이 3년을 넘기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을 보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 본격적으로 연구하여 시작하였다. 그래서 초원 김백문은 세 권의 저서를 남기게 된다.

비슷한 시기에 김백문은 함경도 방면의 신비주의 모임에서 알게 된 곽할다(郭割多) 여인의 딸 조선애(趙善愛)와 혼례를 치른다. 조선애는 김백문보다 4살 연상이었으며, 1938년 2월 25일 경에 아들 김흥규(金興圭)를 출산한다. 1938년에는 기독교가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일제는 조선인들에 의해 창립되는 신종교들이 민족주의 색채가 강하다고 하여 ‘유사종교 해산령’을 내려 탄압을 한다. 뒤를 이어 ‘창씨개명’의 강압조치가 취해져, 김백문의 집안의 성씨가 1940년 2월 25일에 ‘향산(香山)’으로 바뀌게 되었다. 김백문의 이름은 ‘천(泉)’으로, 부인 조선애의 이름은 ‘정지(靜枝)’로, 그리고 아들 흥규의 이름은 ‘청(靑)’으로 개명 되었다. 그리고 1941년 12월 즈음에 미국과 일본이 전쟁을 치르게 된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평양신학교가 폐교되고, 1940년 4월에 서울에서 ‘조선신학원’이 강의소 형태로 개원될 때 스승 백남주를 떠나 김백문이 여기에 학생으로 입학을 하게 된다. 김백문은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혹독한 고문과 ‘신령회’ 사건으로 조선신학원의 교수 및 학생들과 함께 구속되었다. 후에 감옥에서 나온 김백문은 김헌(金憲)이라는 지인의 도움을 받아 경기도 파주군 파평면 섭절리(현재는 율곡리)에서 ‘야소교(耶蘇敎) 이스라엘 수도원’을 세운다. 후에 김헌(金憲)은 정득은의 삼각산 기도원에 입교(入敎)한다. 이때가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인 즈음으로 파악된다.

김백문이 사용하던 성서 속에 ‘수도삼칙(修道三則)’을 기록한 날짜가 1943년 7월이라고 적혀있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 경기도 파주군 섭절리에 온 것으로 추정되며 김백문을 따라 신앙의 어머니격인 김남조도 두 아들 위종과 석기를 데리고 왔고, 가족들도 문산 읍내(섭절리에서 4km 이내)로 이사를 와서 김백문의 아들 김흥규가 1944년에 문산에 있는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김백문이 섭절리로 오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그의 부인 조선애가 다른 남자와 외도를 하여 1943년 3월 12일에 함경북도 경성군 주을면 온천동 8구에서 영(鈴)이라는 딸을 출산했기 때문이다. 이 때 김백문은 심정의 고통이 너무 컸지만 마음을 다스려 부인을 용서하고 부부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1944년 6월 2일 이 수도원의 제1기생으로 입학하여 끝까지 남은 사람은 지용성, 박윤념(일명 박술남), 김정애(金正愛), 홍의선, O덕수, O영선 등이었다고 한다. 이때에 수도원 경영과 경제적인 생활은 수도생이었던 김정애 집안의 도움과 김백문의 추종자였던 지춘자와 그 친정어머니의 도움이 있었으며, 김헌(金憲)의 도움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1946년 3월 2일에 수도원에서 수도생들과 신도들이 특별기도회를 하고 있었다. 이 기도회는 2월 하순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기도회를 하던 중에 천지가 진동을 했다고 한다.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은 38명이었고, 수년 동안 초원 김백문이 집회를 가는 곳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매년 이 날 3월 2일을 수도원에서는 ‘개천(開天)의 날’로 기념하게 되었으며, ‘신조내의(信條內意)’라는 것을 발표했다. 이스라엘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여름에는 흰 적삼을 겨울에는 검정 저고리를 입고 다녔다. 부활절이나 성탄절이 되면 흰옷을 입었고 며칠씩 금식하고 철야를 했다. 둥글게 둘러서서 찬송을 부르면서 춤을 추었다. 또한 중앙에는 김백문이 흰 두루마기를 입고 찬송하며 서 있었고 신도들은 그 주변으로 춤을 추며 빙글빙글 돌았다. 춤을 추다가 어떤 사람들은 김백문의 볼에 입맞춤을 했으며, 대담한 사람은 입술에 입맞춤을 하기도 했다.

수도원을 시작한 지 2개월 쯤 되었을 때 문용명(현 문선명으로 개명함)이라는 20대 중반(25세)의 한 청년이 찾아왔다. 상도동 집회소가 생겼는데 간판은 ‘야소교(耶蘇敎) 이스라엘 수도원 서울교회’로 달았고, 문선명이 자신의 집에서 신혼살림을 했다고 말하는 임남순 여인에 의하면 그때 자신의 나이가 16살이었다. 상도동 집회소에는 40~50명 정도가 모였는데, 문선명은 집회 기간 중 발길로 성전 벽을 걷어차고서 아프다고 울고 불며 뒹굴고 소란을 피우니 초원 김백문이 다가가 ‘성령감화를 인격적으로 받아 자신을 다스려야지 제 몸 하나 주체하지 못하고 타인을 괴롭게 하는 것은 참신도가 아니며 참 신앙자가 될 수 없다’고 책망을 했다. 또한 문선명은 김백문이 1952년 부산 동래에서 피난 중 집필하던 원고 『타락, 복귀원리』를 보고 원고교정을 봐 드리겠다고 가지고 가서 6개월 이상 가져오지 않는 소동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2) 김백문의 종말
1947년 6월 2일에 제2기 수도가 시작되어 1950년 즈음에 김정옥, 이영호, 신의철이 입교하게 되고, 1950년 6월 2일에 김정옥과 이영호 등 5~6명을 수도생으로 한 제3기 수도가 시작된다. 김백문은 어느 날 김정옥과 이영호를 수도원 방으로 불러 스승 김백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았다. 그때 김정옥과 이영호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입니다’라고 했던 베드로와 같이 ‘선생님을 생각합니다’라는 고백을 하였다. 6.25전쟁이 일어나 제3기 수도는 중지되었고 초원 김백문은 부산 동래로 피신하게 된다.

1953년에 서울이 수복되자, 제자들과 함께 서울로 돌아 온 초원 김백문은 “이스라엘 자녀 된 맹세”라는 것을 선포하고, 목조 2층집에 ‘야소교(耶蘇敎) 이스라엘 수도원’ 간판을 걸게 된다. 그리고 12월 25일에는 제1기 수사인 김정애를 신부로 맞아 “어린 양(羊)의 혼인잔캇를 치른다. 김정애는 1925년생으로 경주 김씨이며 모친의 이름은 조경선이다. 전처 조선애와는 1962년 4월 20일에 이혼을 하였다. “어린 양(羊)의 혼인잔캇는 스승 백남주가 원산 신학산에서 거행했던 “천국결혼 잔캇에서 원형을 찾을 수 있으며, 초원 김백문 자신이 메시아임을 나타낸 것이다. 초원 김백문과 김정애 사이에서 아들 김택규(金宅圭)가 태어난다. 그로부터 9일이 지난 1954년 1월 3일에 김정옥, 이영호, 신현식 부부를 포함한 몇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고, 동란 전에 이미 준비했던 원고를 가지고 『성신신학(聖神神學)』의 출판을 비서 겸 수도원의 총무의 직책을 맡은 신현식에게 맡긴다.

재개된 제3기 정식 수도생으로 김정옥, 신현식, 이영호, 이근철(李根喆, 김금봉의 장남), 신임철(여자로 신현식의 처조카) 등 5명이었고, 수양생(일종의 청강생)은 양재식(신현식의 처남), 신의철 등이다. 김정옥의 입수 후견인은 조경선, 신현식의 입수 후견인은 원용신, 신임철의 입수 후견인은 신현식이었다. 제3기 수도가 진행되는 1955년 경 박태선의 부흥집회가 한국 개신교에 널리 퍼지고 있었다. 1957년부터 제4기 수도회가 시작되었는데, 통일교에서 이탈한 박상래(朴商來)를 비롯하여 김춘기(金春基), 고정곤, 조동천(趙東天; 중앙신학교 중퇴), 김응교(金應敎), 공성주 등 6명이 있었다. 제 4기 수도가 진행되는 1958년 3월 2일에 김정옥이 담당하여 『기독교 근본원리(基督敎 根本原理)』를 출판한다.

이리저리 옮겨 다니던 초원 김백문은 정릉 3동 산 1번지(현재는 정릉 3동 769의 5번지)에 있는 김정옥의 집으로 예배 처를 옮기게 되고, 간판을 “기독교 청수교회”로 명명하게 된다. 이곳에 온지 얼마 되지 않은 1970년 10월 3일에 초원 김백문은 『신앙인격론(信仰人格論)』을 박상래를 통하여 출판하게 한다. 이 무렵에 박상래의 권유로 통일교 초창기 핵심교인이었던 오승택 및 임승희가 청수교회에 입교하게 된다.

1975년 이후로 신현식의 부인 양재임이 사망하고, 오승택과 임승희도 청수교회를 떠났으며 1981년에는 양재억도 사망한다. 그리고 박상래가 1982년 8월 17일에 탈퇴하니 신현식이 청수교회를 이끌어 가게 된다. 신현식이 김백문에게 교인들의 입교, 직분, 제명처분 등이 기록된 교인들의 명부를 보여드리면서 재정리의 필요성을 제기하자, 초원 김백문이 교적부는 생명록이기 때문에 “신현식과 나 외의 어느 누구에게도 보여 주지 말라”고 명령을 내린다.

신천지 증거 장막성전 이만희도 김백문과 동일하게 교적부를 요한계시록 21장 27절에 나오는 생명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초원 김백문은 1990년 12월 20일 오후 5시 경에 사망하였고, 경기도 파주군 탄현면 축현리에 있는 기독교인 공원묘지에 묻혀(묘번 3456번)있다.

3) 삼각산 기도원
(1) 정득은의 출현, 계시, 피가름
정득은의 출생연도는 1897년으로 정득은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계기는 박태선 전도관이 ‘세계일보’에 폭로되면서 부터이다. 정득은은 1929년 33세의 나이로 남편과 이혼을 한 후에 신앙적으로 타락했다가 43세 때에 다시 독실한 신자로 돌아갔다. 정득은은 1945년 8월 15일에 광복을 맞이한 후에, 평양에서 살았다. 당시 나이는 50세이었고, 간판이 없는 ‘광해(廣海)교회’라는 곳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정득은은 H씨 등을 사귀게 되었는데, 어느 날 H와 입을 맞추라고 하는 이상한 계시를 받게 된다. 얼마 뒤에 H가 정득은에게 다가와 계시를 받았느냐고 물으니 사실 그대로 시인을 했다. 그 뒤에 정득은은 H와 성관계를 가졌고, H는 박흥식의 장모에게서 먼저 ‘영체(靈體)를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1946년 11월 경(음력) 월남하여 서울에 도착한 정득은은 김백문의 집회에 참석도 하고 이스라엘 수도원까지 찾아가기도 하였다. 이스라엘 수도원 서울교회(상도동 소재)에서 방호동(方好童; 1921년 생)의 모자를 알게 되었고, 이들의 후원을 받아 삼각산에 집회소를 마련하게 되었다. 정득은의 기도능력이 세간에 알려지게 되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연희대학교 신학부 학생 김한, 장로교인 이태윤, 남대문교회 박태선 집사 부부(후에 전도관을 세움)등이 전도되어 정득은을 추종하게 된다. 이 무렵에 정득은은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서 방호동으로 하여금 그 내용을 받아쓰게 하였는데 내용을 살펴보면, 성주교 김성도와 초원 김백문 그리고 통일교 문선명이 받았다고 하는 계시내용과 비슷한 점이 있다.

예를 들어 ‘인류최초의 죄는 천사장 루시퍼(루수벨)와 하와(해와)의 성관계를 통하여 발생했다. 창조 이래로 잃어버린 모든 것을 다시 찾는 복귀역사를 하느님이 하고 계신다. 생령의 사람, 영생할 수 있는 존재가 되면 에덴복귀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정득은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구원에 있어 천사장 루시퍼(루수벨)로부터 인류가 더러운 죄의 피를 받게 되었으니, 선악과를 다시 따먹어 새로운 피를 받아야 한다는 계시를 받게 된다. 그래서 정득은은 계시를 통해 하늘에서 택한 사람과의 영체교환(靈體交煥)을 통해 정화(淨化)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피가름 행사를 약 1개월 동안 진행하였다.

정득은은 6.25 동란이 일어나고 서울수복이 된 후에 서울 용산구 원효로 2가에서 ‘에덴 유치원’을 설립하여, 전쟁고아를 돌보며 굶주리고 있던 인근 주민들에게 쌀을 배급하거나 죽을 쑤어 나눠주는 구호사업을 하다가, 잠시나마 경기도 평택군 진위면 계시리에 있는 장로교회를 담임한 적도 있다. 1949년 4월에 정득은과 결별한 신도들 가운데 기성교회에 돌아간 이들도 있었지만, 박태선은 1955년 1월에 부흥사로 나서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 박태선은 자신을 ‘두 감람나무’, ‘두 증인’, ‘말세의 메시야’로 주장하였으며 실수인 ‘십사만 사천 명만이 구원 받는다’라고 함으로 구원의 숫자를 제한하고 있다.

이 교리는 신천지 증거 장막성전 이만희에게 그대로 전수되었다. 박태선과 정득은의 관계가 세상에 폭로되는 결정적 계기가 백영기 목사 사모인 장애삼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이탈하면서 이태윤과 영체교환(혼음)을 했음을 남편에게 실토하였다. 1957년 2월 9일에 백영기와 장애삼 부부는 정득은의 친딸이 인간이하의 짓을 하고 다니는 어머니에 대해 한탄하며 제재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는 소리를 듣고, ‘세계일보’ 김경래 기자에게 폭로하여 박태선과 정득은의 혼음사건 전말이 드러나게 하였다. 김경래 기자는 정득은을 직접 만나 당시 의학으로 손댈 수 없는 임질 매독에 걸린 것을 확인하였다.

3.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과 한국천부교전도관부흥협회

1)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통일교)
(1) 문선명과 통일교
통일교 창교주인 문선명은 1920년 1월 6일(음력) 평북 정주군 덕인면 상사리 2221번지에서 아버지 문경유와 어머니 김경계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문선명 나이 15세 즈음에 온 가족이 기독교로 입교(入敎)하게 되었다. 문선명은 7세부터 13세까지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였으며 1934년 평북 정주 오산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하였다가, 다시 1935년 4월에 정주 공립심상 소학교 4학년에 전학한 후 19세였던 1938년 봄에 졸업을 하였다. 문선명은 1936년 4월 17일 초등학교 4학년 되던 해에 환상 중에 예수가 나타나서 ‘인류구원 사업의 소명이요, 공식하명(公式下命)’이라고 하는, 즉 인류를 구원하는 메시야의 사명을 받았다고 한다.

서울로 상경한 문선명은 흑석동에서 경성상공실무학교 전기과에 입학을 하였다. 그러나 문선명은 학업보다는 이용도의 예수교회와 북아현동에 있는 오순절 교회에 출석하면서 신비주의에 심취하였다. 그 후에 와세다 대학에서 전기학(Electricity)을 전공했다고 밝혔으나 불분명하다.

1943년 귀국한 후에 1945년 10월부터 약 6개월 간 경기도 파주군 임진면 섭절리에 있던 김백문의 이스라엘 수도원에 문하생으로 들어가 교육을 받는다. 김백문의 영향을 받은 문선명은 이스라엘 수도원의 상도동 집회소의 인도자로 파송되기도 한다. 그 후에 문선명은 월북하여 평양에 정착한 후 정득은과 함께 ‘천사장 루시퍼(루시엘)가 하와(해와)를 유혹하고 성적으로 타락시켜 인류의 죄가 시작되었고 주장하였다. 성적인 타락으로 부터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가 모친 마리아와 모자협조(성교)를 해야 하는데, 모친 마리아가 거부하므로 구원이 실패하여 결국 예수가 십자가에 죽게 된 것’이라는 창조원리 내용을 가르쳤다.
문선명의 창조와 타락원리 그리고 복귀원리에 심취한 신도들의 모임은 매우 소란스러워 주민들이 경찰에 신고하였고, 문선명은 1946년 8월 2일에 약 100일 동안 대동보안서에 구속되었다.

그 후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고, UN군에 의해 10월 14일에 흥남감옥에 있던 문선명은 석방이 된다. 그리고 1950년 12월 4일에 흥남형무소에서 만나서 영원토록 생사고락을 함께 하자고 약속했던 박정화, 김원필과 함께 평양을 출발하여 남쪽으로 피난을 하게 된다. 24일이 지난 1950년 12월 27일에 서울에 당도하지만, 중국군의 개입으로 다시 1951년 1월 3일에 부산으로 피난을 떠난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문선명은 부산 동래에서 피난하던 시절에 김백문을 찾아가 집필하던『타락, 복귀원리』원고를 교정해주겠다고 가져갔고, 통일교를 창립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한 박정화도 자신의 고백서인 『야록 통일교회사』에서 ‘통일교 핵심교리인 「창조, 타락, 복귀」는 문선명이 김백문의 논리를 그대로 도용했으며, 문선명의 부인 최선길이 가지고 다니다가 후에 유효원에 의해 정리되어 책으로 출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1953년 5월 15일에 문선명은 신도들이 장만해 준 부산 수정동 집에 기거하면서 포교활동을 계속한다. 신도는 옥상현, 지승도, 이기환, 이봉운, 이수경과 그의 가족, 문선명의 처인 최선길과 장남인 문성진, 이요한 목사, 신정순, 김안실, 김재책, 김복순과 그의 가족, 오명춘 등으로 늘어났다. 이때부터 문선명(文鮮明)은 원래 본명인 문용명(文龍明)의 ‘용(龍)’을 ‘선(鮮)’자로 바꿔 사용했다고 한다. 탁명환(1996)은 ‘용(龍)자가 성서적으로 사탄을 의미하기 때문에, 선(鮮)으로 바꾼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1953년 12월 24일에 문선명은 양윤식의 질녀인 연세대학교 학생 김영희와 부산에서 복귀의식을 가졌고, 신성묵의 처 유신희는 서울에서 문선명과 복귀의식을 행한다.

1954년 2월쯤에 문선명의 지시를 받아 박정화와 유효원은 서울에 올라와 성북구 북학동 391번지에 거처를 마련한다. 그리고 한 달 전에 박정화는 청진동에서 문선명의 부인 최선길이 가지고 있던 원리원본을 뺏어 와서 김원필이 필사를 하고 박정화와 유효민이 수정을 하였다. 그리고 나서 일제시대에 경성제대 의학과(현 서울대학교)를 중퇴한 유효원이 구성하고 정리하여 1957년 8월 15일에 ‘원리해설’을 만들었다. 그 후 1966년 6월 1일에 ‘원리강론’이라는 이름으로 출간하였다. 이들은 1954년 5월 3일에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世界基督敎統一神靈協會)’를 창립하고 초대협회장에 이창환을 내정했다. 단체를 유지하는 비용과 포교비용, 그리고 생활비는 유효민이 만든 푸로마이드(공원이나 야외에서 찍는 사진)를 통해 충당을 하였다. 또한 유효민은 산탄공기총을 제작하였고 유효영은 다보탑을 축소, 제작하여 일본 판매를 통해 막대한 부를 끌어들였고, 통일교 재산형성에 기반을 다지게 하였다.

1955년경에는 서울 이화여자대학교의 음악교수 양문영의 입교를 필두로 기숙사 사감 한충화, 그리고 영문과 교수 최원복과 김영운, 이정호가 들어왔고 14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입교를 하였고, 연세대학교의 교수 박상래, 연세대학생인 유경규, 황환채, 오승택이 등록을 한다. 그러나 학교 측에 이 사실이 알려져 이화여자 대학교에서는 14명이 퇴직 및 퇴학처분 되었다. 또한 숭실전문학교 문과출신인 김덕진이 입교하여 통일교의 찬송가를 작사, 작곡 하였다.

(2) 통일교와 신천지 증거장막성전의 관계
통일교 신도였던 진진화가 이탈하여 만든 단체가 생령교회이다. 신천지 증거 장막성전의 최초의 교리서인 『신탄』은 생령교회 출신인 김병희와 김건남이 이만희와 만나서 1985년도에 신천지 증거 장막성전 이름으로 출간한 책이다. 『신탄』에서 주장하는 교리들은 통일교 원리강론의 내용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저자인 김병희와 김건남의 과거 행적이 문제가 되자, 이만희와 신천지 증거 장막성전 측에서는 김병희와 김건남이 이만희의 성서해석을 배제하고 일방적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담아『신탄』이라는 책을 출간했기 때문에, 즉시 이 책을 회수, 폐기처분하였다고 변론을 했다. 그러나 신천지 증거 장막성전의 주장과는 달리 1990년대 초반까지 『신탄』이라는 책은 신도들에게 배포되었다는 증언과 자료들을 찾았고, 현재까지도 시온기독교 신학원 강의 중에 『신탄』의 내용과 일치하는 부분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통일교의 원리강론은 신천지 증거 장막성전의 교리를 형성하는데 큰 공헌을 한 것이다.

2) 한국천부교전도관부흥협회(천부교)
(1) 박태선과 정득은의 만남
박태선의 1917년 11월 22일 평안북도 영변에서 부친 박영진(朴永鎭)과 모친 김천태(金天泰)와의 사이에서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집안은 방탕한 생활을 하는 아버지로 인해 매우 가난하였으며, 어머니는 박태선이 9살 되던 1925년에 별세하고 아버지는 재혼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별세하였다. 그때부터 박태선은 할아버지와 새엄마 슬하에서 우울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다.

박태선은 덕천군에 있는 덕천교회 주일학교에 다니면서 십계명에 입각하여 주일을 성수하였으며 십일조 생활을 하였다. 박태선은 고향에서 소학교를 마친 후, 형편상 상급학교로 진학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낮에는 우유배달을 하고 밤에는 야간 고등공업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생계는 안정되지 않아 며칠씩 끼니를 거르는 생활과 타국에서 받는 멸시와 천대의 삶은 어린 박태선에게 너무나 큰 고통으로 다가왔다. 결국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견디다 못해 여러 번에 걸쳐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방황하는 삶의 기로에서 자신을 바로 잡아 준 것은 어린시절 황귀학 목사의 은혜로운 임종의 모습과 비슷한 어떤 장로의 죽음을 목격하고 난 후였다. 평안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에서 박태선은 삶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되었다. 졸업을 한 후에는 일본에서 정밀기계공장을 경영하였으며, 동경 시내에 있던 대대목(代代木) 한인교회(韓人敎會)를 다니면서, 박정원(朴貞源)과 1941년 2월 8일에 결혼을 한다. 그러나 10월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44년에 귀국한 후 1945년 7월 1일 경에 첫 아들 동명을 낳는다.

박태선은 일본 동경시절 알고 지냈던 김치선 목사가 시무하는 남대문 장로교회를 출석하기 시작하였고, 성결교회의 부흥사로 유명한 이성봉 목사의 부흥성회에서 강한 불의 임재를 체험한다. 기계 부속품 공장을 경영하고 있던 박태선은 이 사건으로 인해 더욱 새벽기도와 노방전도, 그리고 헌금생활에 충실한 ‘열성교인’이 된다. 그러나 해방 후에는 한 때 통일교 문선명과 함께 김백문 이스라엘 수도원에서 수련을 했다는 주장도 있는데, 여기에 대한 정확한 자료나 증언이 필요한 상황이다.

박태선은 남대문교회에서 평안북도 정주군 출신인 이태윤을 만나, 1948년 말 아니면 1949년 초에 삼각산 기도원장 정득은을 소개받는다. 박태선은 ‘피가름의 교리’와 ‘두 감람나무’ 또는 ‘두 촛대’의 사상을 이어 받는다. 두 감람나무 사상은 박태선을 통해 신천지 증거 장막성전 이만희에게로 전수되며 통일교 문선명과 신천지 증거 장막성전 이만희가 공통으로 주장하는 ‘합성일체(合性一體)’나 ‘신인합일(神人合一)’ 교리는 정득은의 『生의 원리』에게서도 발견된다. 정득은과 결별을 한 박태선은 1950년 6.25 전쟁 당시에 공장을 정리했지만 피난을 가지 못하고 구들장 밑에 숨어 지내는 동안 ‘하늘로부터 오는 생수를 마시면서 버텼다’고 한다. 그리고 9월 28일 경에 서울 수복이 이루어졌지만, 1.4후퇴로 인해 피난길에 올라 평택에 당도했을 때 ‘온 몸의 더러운 피가 소변을 통해 나오고, 대신 옆구리와 손과 발에 흘리시는 예수님의 피를 자신이 받아먹었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박태선은 폐결핵으로 죽어가던 아이를 자신의 기도로 살리는 체험을 한다.

서울로 돌아 온 박태선은 1953년경 공장을 다시 경영하게 되고, 남대문교회 김치선 목사가 개척한 창동교회로 출석하게 된다. 경북 용문산 기도원 나운몽 장로(1914년 생)와 변계단 권사가 인도하는 신유집회에 참석하여 영향을 받는다. 어느 날 변계단 권사가 창동교회 집회 인도를 취소하게 되자, 박태선이 담임목사 김치선의 허락으로 집회를 인도하게 된다. 그 시간에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치유되는 기적이 일어난다. 이때부터 박태선은 공장을 형 박태국에게 맡겨버리고 나운몽 장로가 인도하는 부흥집회에 조력자로 따라 나서게 된다. 어느 날 나운몽이 박태선에게 성경통독과 기도생활을 권유했지만, ‘성경을 읽을 필요가 없다’고 말하면서, 기도대신 안찰하는 방법을 연습하였다. 대구에서 바브 라이스 선교사가 운영하고 있던 기독교부흥협회가 1개월간 전국을 순회하며 집회를 주최하기로 하였는데, 처음에는 나운몽을 강사로 내정했다가, 창동교회 김치선 목사의 권유로 박태선으로 변경한다. 1954년 12월경에 김치선 목사는 집회를 위해 박태선에게 장로 안수를 준다.

(3) 전도관과 신앙촌 건립
박태선은 창동교회와 1955년 1월 1일 무학교회를 시작으로 전국으로 순회하며 부흥집회를 인도하기 시작한다. 박태선이 사람들의 뇌리에 부흥사로 각인을 확실하게 남긴 집회는 남산공원 부흥집회였다. 1955년 7월 3일에 한강 백사장에서 열린 부흥집회에서는 ‘두 개의 불덩이가 천막을 비추는’ 신비한 일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1955년 11월에 대한 예수교 장로회 경기노회에서 김한이 1949년 2월과 3월에 걸쳐 행해졌던 혼음사건에 대해 박태선이 연루되었다고 폭로함으로 1955년 7월에 한국기독교연합회(NCC)에서 박태선을 이단으로 규정하였고, 그 후 창동교회와 1976년 2월 15일에는 경기노회에서 이단결정과 함께 제명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태선의 부흥집회는 계속되었고, 걷혀진 헌금과 귀중품으로 1955년 12월 25일에 원효로 3가 52번지에 2,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전도관(傳道館)’ 건물을 짓는다. 그리고 1956년 7월 3일에는 청암동에 ‘중앙 전도관’을 건설하였고 11월 11일에는 전도관 신도들이 전국에서 모여 박태선을 ‘감람나무’로 추대한다. 1957년에는 전도관 숫자가 17곳이나 되었다.

박태선은 1957년 11월 1일에 제1단지 ‘소사 신앙촌’을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일대지역 15만 평을 매입하여 건설하고, 신도들 7,467명을 입주시킨다. 그러나 1958년 8월 27일 전도관에서 안찰을 받던 신도가 숨지는 사건을 시작으로, 9월 10일에는 경기도의회의 신앙촌 조사사건, 9월 14일에는 가짜 성화사건, 폭행사건, 검찰협박 사건들이 일어났다. 결국 1958년 12월 27일에 검찰은 상해위증죄를 추가하여 박태선을 기소하게 된다. 1959년 1월 10일에 문교부에서 전도관을 사교(邪敎)로 규정하지만, 박태선은 1959년 당시 집권당의 자유당의 선거 승리를 도와줌으로써 1960년 3월 26일에 석방이 된다. 그러나 자유당의 부정선거를 도운 혐의가 결국 탄로가 나서 1961년 1월 27일에 제 2차 구속기소 된다.

1962년 1월 10일에 출감한 박태선은 ‘덕소 신앙촌’으로 명명한 제2신앙촌을 1962년 7월 21일에 경기도 양주군 와부읍 덕소리 한강변에 건설한다. 소사 신앙촌이 경공업 중심으로 운영되었다면 덕소 신앙촌은 경공업부터 중공업에 이르는 담요, 메리야스, 양재, 제강, 슬레이트를 제조하게 된다. 입주 신도는 6,000명 정도이다. 그리고 1970년 2월 28일에는 경남 양산군 기장면 죽성리 해변가(현재는 부산시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일대)에 제3신앙촌을 건립하고 약 5,000명 교인을 입주시킨다. 현재는 개발제한 구역으로 묶여 있으며 시온그룹으로 불리고 있다.

전도관 교인들을 바깥세상과 격리시키기 위해 만든 신앙촌은 내부에서 끊임없는 문제점들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1967년 1월 1일에 덕소 신앙촌에 화재와 대홍수 사건, 1968년에는 전도관 신도들이 ‘신앙촌 정화 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박태선을 규탄하는 사건, 기장신앙촌에서는 생수를 마시면 모든 병이 치료된다고 했다가 죽는 사람들이 발생한 사건, 1972년 4월 4일에는 국세청 직원 폭행사건, 1972년에는 세금 포탈 고발 사건, 1975년에는 아들 박동명이 연예인과 일으킨 스캔들 및 외화 유출 사건 등이다. 1972년 2월 26일에 박태선은 최대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는데 ‘신앙촌에 거주하는 신도들은 영생한다’고 했던 호언장담과는 달리 부인 박정원이 3남 2녀의 자녀를 남긴 채 사망을 하였다. 이 때 전도관 신도 이용세가 『격암유록』이라는 책에 ‘박정원은 죽게 되어 있으며, 후처로 최옥순과의 결혼이 예언’되어 있다고 주장하여 이 난황을 헤쳐 나간다.

김하원은 자신의 저서 『격암유록은 가짜, 정감록은 엉터리, 송하비결은?』에서 박태선과 전도관이 의도적으로 위서(僞書)인 『격암유록』을 이용하고 있다고 폭로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위대한 예언서’로 취급하는 분위기에 대해서 심한 우려를 표명하였다. 통일교 문선명이 『격암유록』을 사용하고 있으며, 불교계, 기독교계, 증산도계, 정역계, 단군계 등을 합쳐 300여 개의 단체가 『격암유록』을 이용하고 있는데, 신종교 중에 영생교 조희성이『격암유록』을 가장 잘 이용하고 있다. 박태선 전도관 출신인 이만희도 자신의 출현을 『격암유록』에서 예견하고 있다고 신도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전도관 신도들에게 영생을 선포했던 박태선은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자 실의에 빠지게 되는데 1977년경에 조성기(趙聖紀)라는 사람이 찾아와『격암유록』에 박태선이 ‘말세 성군’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말한다. 천군만마를 얻은 박태선은 다시 재기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지고자 하지만, 얼마 지나서 조성기는 자신의 이름이 『격암유록』‘진정한 성인’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말을 바꾸고 신종교를 창교한다. 이에 박태선이 크게 노(怒)하여 『격암유록』 사용을 전도관에서 금지시킨다.

(4) 한국천부교전도관부흥협회(천부교) 설립과 박태선의 사망
1980년 2월쯤에 두 사람이 박태선을 찾아와 ‘주역’을 보여 주면서, ‘박태선은 5,700년 전에 태어난 하늘의 사람이고 구원자이며, 부인 최옥순과 별거를 해야 한다’는 등의 이야기를 듣자 최옥순과 이혼을 선포한다. 1980년 4월 5일에는 전도관 간부들을 모아 놓고 ‘성서는 98%가 가짜이고, 성서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개XX이며, 예수는 마귀대장으로 바울을 조종하여 자신을 신격화 했다’고 주장하기 시작한다. 또한 자신의 나이는 ‘5,700세로, 이긴자이며 감람나무인 자신은 영생 한다’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1980년에 들어와서는 교단명을 ‘천부교(한국천부교전도관부흥협회)’로 변경하였고, 1980년 11월 1일에는 재단법인 ‘한국예수교전도관유지재단’에서 ‘한국천부교전도관유지재단’으로 법인 정관변경 승인신청서를 제출하였다. 그리고 간부와 교인들에게는 ‘부부생활 금지조캄가 내려졌다. 1990년 2월 5일에 박태선은 서울 백병원에서 셋째아들 박윤명을 후계자로 지목하고 사망한다. 영생불사를 외쳤던 박태선의 죽음은 신도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신도들의 이탈을 가져왔다. 현재 천부교는 시온그룹의 명칭을 가지고 재기를 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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