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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자유케 하라!
[고준석 문화 칼럼] 영화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을 보고
2008년 03월 26일 (수) 00:00:00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고준석 전도사 / 빛과소금교회 청년부
 

얼마 전 교황청은 ‘세계화 시대의 신(新) 7대 죄악’을 발표하고 이에 대한 회개를 촉구했다. AD 6세기, 그레고리 교황이 7대 죄악을 정리한 지 1500년 만에 교황청이 시대적 변화에 따라 7대 죄악을 새롭게 추가한 것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환경 파괴 △윤리적 논란을 부르는 과학 실험 △유전자(DNA)를 조작하는 유전 실험과 배아줄기세포 연구 △마약 거래 △소수에 의한 과도한 부의 축재로 인한 사회적 불공정 △소아 성애(性愛). 그리고 마지막으로 △낙태

한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1년에 시술되는 낙태 수술이 약 150만 건에 이른다고 한다. 하루에도 4천명이 넘는 태아가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채 사라지고 있는 셈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런 수치가 매년 태어나는 신생아 수의 두 배가 넘는다는 사실, 이 통계에는 비혼여성의 임신중절 시술은 제외된 것임을 감안하면(이것까지 포함하면 수치는 배로 뛴다), 소위 ‘낙태 천국’이라는 오명이 전혀 아깝지가 않다.

조금 뜬금없는 이야기지만, 영화의 배경이 되는 루마니아, 그런 의미에서 우리와 가깝다(?). 루마니아는 EU 가입국 중에서 가장 높은 낙태율을 기록하고 있는 나라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한국에는 상대도 안 되지만…. 그래도 약 30유로 정도의 비용이면 낙태 시술이 가능한 상황이니(한 달 평균 임금이 400유로 정도), 낙태에 대한 국민들의 생각은 범죄니 생명 파괴니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영화 <4개월, 3주… 그리고 2일>는 바로 이 루마니아의 낙태를 둘러 싼 이야기를 그렸다. 2007년, 전도연이 <밀양>으로 칸의 여신이 되었을 때, 그랑프리를 가져간 것이 바로, 크리스티안 문주 감독의 영화,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이었다.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조금 과거로 가서 1987년, 독재자 차우셰스쿠 시대, 그 암울한 말기다. 1968년 인구 증가를 목적으로 피임과 낙태를 법으로 금지시킨 차우셰스쿠는 낙태 사실이 발각될 경우, 산모는 물론 수술한 의사까지 감옥에 가뒀다. 60년대부터 80년대에 이르는 루마니아의 인구 증가는 여기에 기인한다. 그러나 경제적인 뒷받침이 없이 늘어난 인구는 곧바로 극심한 식량 부족을 가져왔다. 결국 생활고를 견디다 못한 여성들이 불법 낙태 시술소를 찾아갔고, 비위생적인 시술과 과다출혈로 인해 약 50만 명의 여성들이 목숨을 잃었다.

영화의 감독 크리스티안 문주는, 1968년생, 그러니까 낙태금지법이 시행되던 첫 해에 태어났다. 어둡고 무거운 공기 아래서 어린 시절을 보내서인지, 살벌하기 그지없는 독재 정권 말기를 배경으로 하는 그의 영화 속에는 이러한 어둡고 습한 느낌이 제대로 표현되어 있다. 영화는 '1987년. 루마니아 혁명 2년 전'이라는 자막과 함께 시작된다. 젊은 여자(오틸리아)가 화면 안 침대에 걸터앉아 있고, 프레임 밖에서 그녀의 룸메이트, 가비타가 그녀에게 “고마워”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 고마움의 대가가 그토록 큰 것이 될 줄을 두 사람 모두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낙태 수술을 위해 돈을 빌리고, 수술에 필요한 호텔방을 어렵게 예약하고, 다시 불법 낙태 시술자인 베베와 접선, 흥정에 흥정을 거듭하는 오틸리아에게 이제 친구 가비타의 낙태는 남의 일이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모자란 수술비를 채우기 위해 비열한 베베의 섹스 요구까지 들어주고, 정확히 '4개월, 3주, 그리고 2일'만에 엄마의 자궁으로부터 강제 적출된 태아를 쓰레기장에 버리는 일까지, 죄다 오틸리아의 동선 안에 들어있다. 그리고 그 동선은 단지 친구 가비타를 위한 우정의 몸짓을 넘어선다. 그것은 억압과 폭력의 시대에 저항하는 한 인간의 울분이자 자유를 향한 갈망의 씩씩거림이며, 카메라는 그런 그녀의 거친 호흡을 차분히 받아낸다.

   
자유란 원래 그런 것이다. 누군가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결국 누군가의 자유에 흠집이 가기 마련이다. 그것이 폭력과 억압으로 점철된 세상 속에서 자유의 공간이 단 몇 평이라도 늘어나는 변함없는 방식이다. 반대로 자유가 고삐가 풀리면 타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도구로 전락할 뿐임을 영화는 폭로한다. 그리고 그 극단에 살인과 죽음이 있다. 자유를 억압당한 생명은 초라하고 불편하다. 어미의 자궁으로부터 소외된 태아에게 남은 것은 절망뿐이다. 자유가 타락하면 죽음으로 귀결된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 우리는 굳이 창세기를 읽을 필요가 없음을, 화장실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생명 덩어리, 자유 덩어리, 그러나 이제 한없이 불편하고 공포스러운 그 물체(?)를 통해 확인한다.

   
힘은 그것을 조절할 능력이 있을 때, 비로소 '살리는 힘'이 된다. 조절 능력이 상실된 힘은, 그 자체로 이미 폭력이다. 막강한 펀치력을 가진 권투 선수가 상대를 KO 시킬 때의 그 힘을, 삶의 모든 자리에서 여과 없이 사용할 수밖에 없다면, 그는 보나마나 살인자다. 그것은 힘이 아니다. 그래서 절제가 빠진 자유, 곧 방종이라 일컬어지는 그것은, 이미 자유가 아니다. 스스로를 조율할 수 없는 존재는 이미 무언가로부터 억압된 존재이며, 이는 극중 유일한 남성, 베베에게서 명확하게 드러나는 바다. 그는 낙태 시술의 대가로 돈과 섹스를 요구한다. 그것이 무슨 특별한 기술이라고, 시큼한 자본의 맛을 본 이 남자는 순식간에 관계의 우위를 즐긴다. 하지만 그 역시 부자유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가장 강력한 권위와 자유를 가진 것처럼 보이는 베베. 그래서 두 여인과 한 생명에게 강력한 린치를 가하는 듯 보이는 베베이지만, 결국 그는 가장 근본적으로 억압된 존재임을 쓸쓸하게 드러낼 뿐이다.

   
그것이 타는 목마름에 헐떡이며 역사에 몸을 던진 열사들의 죽음으로 얻어낸 민주주의의 자유이든, 그리스도의 절대적 포기와 죽음으로 얻어낸 영생의 자유이든, 자유는 그보다 강력한 무언가에 의해 인도되지 않으면 쉽사리 폭력으로 타락함을 역사는 증거한다. 그렇다면 자유보다 큰 무엇. 그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믿는 십자가는 자유보다 큰 그 어떤 것의 정체에 대한 단서를 준다. 자유가 기대어 스스로를 비춰봐야 할 것, 자유가 진정으로 자유 되기 위해 끊임없이 갈망해야 할 그것은 다름 아닌 아름다운 구속, 곧 사랑이다. 십자가는 폭력과 비폭력이 만나는 곳이며, 생명과 죽음이 만나는 곳이며, 더욱이 자유와 억압 그리고 자유의 포기와 새로운 자유, 곧 자유의 잉여가 만나는 곳이기도 하다. 십자가 위에서 자유는 비로소 만민의 자유로 폭발했고, 그 폭발의 단초는 역시 사랑이었다.

성령은 생명의 영(요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이다. 이는 자유의 영이라는 말이며(고후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다시 사랑의 영이라는 말이다. 인간의 실존적 한계가 결국 피조성이라 할 때, 인간이 스스로 완전히 자유롭다는 것은, 결국 완전히 억압되어 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인간은 사랑의 영이신 성령 안에 거할 때 비로소 온전히 자유하며, 온전히 살아있다. 성령을 소멸한 사람, 그가 가진 자유란 한갓 '육신의 기회'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아니 내가 성령 안에 붙들어 놓지 못한 이른바 자유의 과잉은 결국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생명을 파괴하는 데 사용될 수 있음을 생각하면, 그처럼 대충 읊조릴 얘기는 아니다.

지금 당신의 자유는 참으로 자유한가? 당신은 매순간 당신의 자유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안에서 새로운 생명과 자유의 폭발을 경험하고 있는가? 당신이 누리는 사랑의 자유, 그 지경은 어디까지인가? 당신의 자유를 자유케 하라. 만민을 위해, 그리고 모든 살아 있어 자유를 갈구하는 생명을 위해, 당신의 자유가 참으로 살아 있게 하라. 태아의 탯줄, 그것이 불편한 것 같아도, 태아는 그것 때문에 산다. 그리스도인의 탯줄은 성령의 충만함이다. 태아는 어머니의 탯줄에 묶여있을 때 가장 자유롭고 가장 안전하다. 물론 우리도 그러하다. 그대여, 자유를 자유케 하라!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갈라디아서 5장 13절)


   
고준석

서울대학교 졸업 (BA)
장신대 신대원 졸업 (M.Div)
장신대 대학원 조직신학 전공(TH.M)
현재 빛과소금교회 청년부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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