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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한권/ <아름다운 빈손 한경직>을 읽고
2000년 09월 01일 (금) 00:00:00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김희진  집사/ 사랑의교회,  대한변호사협회 연구조사위원

 

 우리는 요즘, 참으로 오랫동안 기도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 실현은 아득히 멀리 있을 거라고 믿어왔던 일들을 경험하고 있다. 남북 정상의 만남과 이산가족들의 상봉이 그것이다. 전쟁을 직접 겪지 못한 나조차도 이게 꿈인가 싶을 만큼 감격스러웠고 이산가족들이 만나 얼싸안고 울 때 같이 울었다.

 "무찌르자. 공산당 몇 천만이냐"의 노래에 맞추어 고무줄 뛰기를 하고 가끔씩 공산당이 쳐들어오는 꿈 때문에 자다 깰 정도로 우리는 반공, 멸공을 삶의 중심에 놓고 살아왔었다. 그래서 이러한 화해무드는 더 더욱 놀라운 것이었고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절감할 수 있는 일이었다.

 지난 4월, 우리는 한국교회의 큰 별, 한경직 목사를 하나님 품으로 떠나 보냈다. 나는 막연히 알고 있는 그의 일생을 좀더 알고 싶어 이 책을 골랐다. 그런데 그의 일생은 개인적인 한 사람의 일생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파란만장했던 우리의 지난 100여 년, 그 역사를 그를 통해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역사의 굽이굽이, 상처받고 굶주린 많은 사람들을 감싸안고 치유하고 먹이는 일, 그 일의 다양한 분과들, 수많은 계획과 실질적인 활동, 그리고 그것을 위해 세워진 교회를 비롯한 여러 기관과 학교들 속에 거의 한경직이라는 이름이 빠진 적이 없다는 사실을 나는 이번에 확실히 알았다. 이것도? 이 일도? 이 학교도?, 하면서 이 책을 읽었으니까. 그는 어렵고 힘든 시기에 이 백성에게 예비되었던 하나님의 선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야기는 조선 땅 간리 마을에 복음이 들어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과정에서 선교사의 순교가 있었고 그것이 씨앗이 되어 복음은 더 힘있게 전파된다. 그렇게 전파된 복음을 받아들여 예수 믿은 집안에서 한경직 목사는 태어나고 성경적 가르침 속에 성장하게 된다. 오산학교와 숭실대학 그리고 미국의 프린스턴 대학에 이르기까지 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기 위한 준비를 착실히 다져간다.

 그는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폐결핵 3기의 진단을 받기도 한다. 의사들도 그의 치유 가능성을 확신하지 못할 만큼 심각한 것이었다. 그러한 그는 단 2, 3년 간이라도 내 겨레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사고 기도했고 하나님은 수십 배의 긴 시간을 그에게 허락하셨다. 그때부터 98세에 이르기까지 그는 정말 나라와 겨레를 위해 한 길을 걷게 된다.

 그가 조국으로 돌아온 것이 1932년이었다.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을 고스란히 겪어야 했고전쟁 후 잿더미에서 이 나라를 다시 세우기 위해 수많은 과제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과 자신의 가정을 이끌고 나가기도 어려운 상황 속에서 그는 이 겨레 모두를 책임져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 책임감에 눌렸다면 그는 아무 일도 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민족을 대표하여 하나님 앞에 무릎 꿇었다. 그것만이 해답이었다.

 그의 사역을 통해 목회의 범위를 본다. '오늘날 목사라는 이름으로 사회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범위는 얼마나 될까'를 생각해 볼 때 그의 활동은 실로 놀랍다. 그 당시 교회는 실제로 사람들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는 곳이었고 사람들은 우선 그 필요 때문에 교회로 몰려들었다. 절박한 상황이어서 그렇기도 했겠지만 그의 교회는 실향민들을 비롯한 어려운 사람들에게 예배드리는 장소로서의 교회였을 뿐만 아니라 하루를 쉬고 자는 숙소요 안식처였다.

 그는 자신의 사역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우리는 어려운 시기에 서로 돕고 생존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소년 소녀들을 위한 새 학교도 필요로 하였습니다. 우리는 또한 남한에 대학들을 재건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 선교와 교육과 복지사업이 이 시련의 과도기에는 너무나 필요한 일들이었습니다. 남한 사람들은 영적으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리고 모든 방면에서 도와주신 것은 전폭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의 사역 뒤에는 언제나 말없이 기다리고 수고했던 아내가 있었다. 그런 아내를 그는 1974년에 먼저 보냈다. 아내가 노환으로 몸져눕자 한경직 목사는 외부출입도 삼가고 아내를 돌보았다고 한다. 아내가 죽기 전 석 달 동안 누워있을 때 그는 손수 목욕시키고 지극 정성으로 간호했다. 그는 목회자는 돈과 여자와 검약에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신념으로 살았다. 공부와 피난 등으로 떨어져 지낼 때도 많았지만 한목사 부부는 더 높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하나되는 부부로 살았던 것이다. 

 그가 했던 말 중에 특별히 두 가지가 잊혀지지 않는다.

 하나는 템플턴상 수상기념 축하 예배에서 인사말을 하면서 "먼저 나는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나는 신사참배를 했습니다. 이런 죄인을 하나님이 사랑하고 축복해 주셔서 한국교회를 위해 일하도록 이 상을 주셨습니다"라고 고백했던 대목이다. 이미 90세를 넘긴 어른 중의 어른으로서 그의 평생의 사역을 돌아보더라도 당당하게 상을 받고 맘껏 축하와 찬사를 받아도 되는 입장에서 그는 신사참배의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했던 것이다. 불가피한 상황에서  행해야 했던 신사참배, 전쟁의 와중에 교회를 떠나 피난길에 올랐던 일들, 그는 마음에 걸리는 이러한 일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회개기도를 했겠는가. 그런데도 그는 그 단상에서 그 말을 했던 것이다. 그것은 죄책감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연약하고 죄 많은 인간을 통해 역사하시고 일하시는 하나님을 높이고 그분 앞에 작은 자로 서고 싶은 겸손한 마음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의 마지막 소원이 생각난다. 그것은 백두산의 튼튼한 소나무로 북녘 고향 땅에 교회를 지어 예배드리는 것이었다. 그는 비록 그의 생애에 그 소원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가 했던 모든 기도와 실천이 밑바탕이 되어 시작된 지금의 남북교류는 머지 않아 그의 마지막 소원을 이루게 할 것이다. 

 그의 삶을 돌아보면 그가 빈손으로 살았던 것은 어찌 보면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일 정도로 그는 하나님의 위대하고 충성된 종이었다.
(월간 <교회와신앙> 2000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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