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진 집사/ 사랑의교회, 대한변호사협회 연구조사위원

 어느 날, 고등학교에 다니는 앞집 아이가 집에서 갓 구워낸 맛있는 빵을 가져왔길래, 넌 참 좋겠다. 엄마가 항상 이렇게 맛있는 걸 만들어 주시니... 했더니 아이는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다.

"할 줄 아는 게 그것뿐인데요, 뭐."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유치원이 파한 우리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가던 중 잠깐 슈퍼에 들렸는데 한 아주머니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쯧쯧... 애 가방은 엄마가 좀 들어주지..." 얼떨결에, "아, 네.... "하고 웃었지만, 사실 우리 아이는 유치원 가방 메고 다니는 걸 너무 좋아해서 절대 엄마에게 건네주지 않으려 한다. 더구나 필통이나 물통 같은 내용물은 이미 가방에 챙겨 넣고 있는 상태였다. 그날 이후 가방 멘 아이와 손을 잡고 걸을 때면 눈치가 보였다. 결혼 한 여자들이 갖는 쓸데없는 죄책감 중 하나다.

 이것이 바로 우리 여성이 놓여 있는 위치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알고 있는 앞집 엄마는 파는 것보다 더 맛있고 예쁜 간식을 만들어 주고 시간 맞추어 아이들을 차로 태워다 주고 사소한 것까지 다 챙겨주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기로 매우 완벽한 주부이다. 그렇다고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많이 하는 타입도 아니고 늘 안정된 정서를 보여주는 편안한 사람이다. 나는 아이들이 '울 엄마 최고', 할 줄 알았는데 아이는 엄마를 그렇게 평가하고 있다니... 같은 여자로서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러나 아이 잘못만은 아니다.

 결혼을 하고 나서 갑자기 삶이 너무나 복잡해졌다는 여성들의 말들은 어제 오늘 듣는 이야기가 아니다. 결혼한 여성이 신경 써야 하는 일, 책임져야 하는 일은 끝이 없다. 이 책은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마르다의 그 분주한 마음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다. 주님이 오셨는데 미친 듯이 감자를 깎고 양파를 벗기는 일에 분주하고 염려하는 마르다...

 그러나 이 본문을 대할 때면 매번 우선적으로 마르다의 입장에 공감이 갔었다. 마르다에게서 나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본문은 주님이 실제 상황을 통해 말씀하고 있는 것이지 특정 교훈을 위해 비유를 사용하시는 경우가 아니다. 주님은 실제 생활 속에서 여성의 역할이라고 믿어지는 것보다 우선하여 주의 발 아래 앉는 것, 그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을 선택하라 하신다.

 가정적 역할에 충실한 여성이 예수님께 충실한 여성이라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많다. 마치 마르다가 음식을 준비하는 것이 예수님을 우선적으로 위하는 일이라 생각했듯이... 그러나 이 책은 현대인에게 있어 그러한 성향은 예수님의 음성이 아니라 오히려 러스킨의 영향이라 말한다. 계급의 유동성으로 인한 불안 속에서 영혼을 위한 닻으로서 가정을 성역화하고 여성을 가정의 천사로, 훌륭한 어머니로 제한시켰던 사회문화적 산물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어머니로서의 역할은 삶 전체를 요구하는 거대한 책임이 있다. 아이가 잘못되면 그것도 어머니 잘못이었다. 여성은 도덕적이고 작고 순수하고 가정적인 것에만 행복을 느끼고 신비감을 갖고 있는 존재로 인식되었고 그러한 인식은 1950년대에 절정을 이룬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성에 대한 어리석은 신비를 만드시는 일이 없으셨으며 다른 사람과 똑같은 인격으로 대하셨다. 당시 문화를 뛰어넘으셨다. 여성은 만드신 그분이 여성이 어떤 존재인지 정확히 아셨던 것이다.

 물론 저자는 성취지향적 삶, 사회생활에의 전폭적 헌신을 요구하는 슈퍼우먼이 되라는 외침도 거짓된 목소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가정의 역할수행에 과다 집중함으로 주님 주시는 소명을 바라보지 못하는 그리스도인 여성을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그것은 균형 잡힌 그리스도인으로 주님을 따르는 길이다. 이 책의 원제 역시 'Balancing Act'이다.

부제는 '여성이 그들의 역할에서 벗어나 소명을 찾는 방법'이라 되어 있다. 잘못 생각하면 소명을 발견하는 것이 주어진 역할을 버리는 것을 전체로 하는 것인가 의문이 들겠지만 책의 내용을 잘 살펴보면 소명을 발견한 여성은 가정에서의 역할을 더 성숙하게 수행하게 된다. 지나치게 뒷치닥 거리를 해줌으로 의존적인 아이로, 스스로도 행복하지 않은 아이로 길러내는 일, 의미 없는 사소한 일에 시간을 낭비하는 그런 역할을 벗어 던진다는 의미이다.

 저자는 목회자의 아내로만 살다가 자신의 소명을 발견하기까지는 경험을 바탕으로 소명을 따르는 삶에 대해 진지하고 친절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정체성을 찾는 것, 진정한 자아를 인식하는 것, 구체적으로 소명을 찾는 법, 소명을 따라 균형 잡힌 삶을 유지하는 방법, 의미 있는 일과 진정한 휴식 등에 대해서도... 몇 가지 원칙을 따라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다보면 그 결과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직업을 가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모두, 주신 은사를 활용한다는 점, 지속적인 성장이 있다는 점, 치뤄야 할 대가는 있으나 진정한 기쁨이 있다는 점 등은 공통적인 사항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표준화하여 우리와 다른 일을 하는 여성은 인정하지 않는 독선을 벗을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단순화시키고 여성들을 어떤 틀에 넣을 방법을 찾고 계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 기혼의 직업 여성 중, 자기 성취를 위해 직업을 가진 경우는 일부이며 대부분 경제적인 이유를 가진 저소득층 여성들이다. 그들에게 아이를 직접 키우지 못한다는 죄책감을 주어서는 안 된다. 각자가 처한 다양한 환경 가운데 우리는 소명을 발견할 수 있고 아이도 훌륭히 키울 수 있다. 그분의 부르심을 표준화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은 그분의 제자가 되라는 것, 그분 안에서 계속 자라가고 변화하라는 것뿐이다. 마리아의 '더 좋은 편'을 선택하는 것은 무슨 일을 하느냐 보다는 왜 그 일을 하느냐와 더 관련되어 있다.

 저자는 힘주어 말한다. 소명을 따르며 성숙하기로 결단하기에 너무 늦은 때는 없다고...
(월간 <교회와신앙>1998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