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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큐메니즘과 에큐메니칼 운동에 비추어 본 정통과 이단의 문제
통합측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 주최 '제11회 이단사이비대책 세미나'
2007년 06월 21일 (목) 00:00:00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이형기 교수(장신대 명예교수, 이단사이비문제상담소장)


Ⅰ. 이단 사이비의 도전이 교회들을 결속시키고, 기독교의 정통성 형성에 기여했다.

오늘날 문선명 집단, 이만희의 신천지교회, 안상흥 증인회, 여호와의 증인, 모르몬 교회 등 수 많은 이단과 사이비들이 복음을 바르게 전하고 세례와 성만찬을 합당하게 집례하며 성도의 교제를 나누는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오염시키고 위협하며 잘못된 길로 인도하려 한다. 하지만 이단들의 출현이 반듯이 교회를 잘못된 길로 인도한 것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고대 교회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고대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이단들은 기존의 교회를 결속시켜,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이루게 하였고, 바른 가르침을 가르치도록 자극하여 기독교 정통성 확립에 크데 기여한 예를 우리는 아래에서 살필 것이다.

초기 기독교 역사 중, 170-250년 사이에는 여러 가지 이단들이 출현하였다. 기독교의 유대주의 화는 기독교의 복음을 유대주의로 왜곡시키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령의 신성을 거부하였으며, 영지주의는 영들의 세계와 물질의 세계를 이분화한 나머지, 물질세계에서 일어난 동정녀 마리아를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지상에서의 하나님 나라사역과 부활을 거부하였고, 인간의 몸과 몸 적인 문화의 세계를 경멸하였고, 마르시온주의는 구약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바울의 복음만을 내세웠고, 몬타니즘은 사도적 복음 이외에 성령의 새로운 계시를 기대하면서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였으며, 군주신론은 아버지 하나님의 신성 이외에는 그 어떤 신성도 인정하지 않았으니, 역시 예수님과 성령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상과 같은 이단들의 도전들은 고대 기독교를 더욱 결속시켰고, 고대 기독교로 하여금 더욱 더 바른 가르침을 형성해 가는 데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환언하면 사도적인 보편교회는 교회는 이단들의 도전에 정통(orthodox = 바른 가르침)으로 반응하였다는 말이다. 곤잘레스는 이단들의 도전들에 대하여 정통교회는 여섯 가지로 반응하였다고 한다. 즉, 1. 사도적 승계에 대한 강조, 2. 신약성서의 경전 화, 3. 신앙규범의 확정, 4. 신조의 형성, 5. 고대 가톨릭교회의 형성, 6. 교부들의 신학활동이 그것이다. 고대 교회는 이단들의 가르침을 가늠하기는 표준으로서 복음의 사도적 승계를 강조하였고, 마르시온과 같은 이단적인 구약이해에 반대하여 신약성서의 경전화에 힘썼으며, 이단들을 대처하기 위한 “신앙의 규범들”(regula fidei)(사도신경보다 더 간결한 신앙고백)을 내세웠고, 이와 같은 역사를 배경으로 신조 형성을 준비하였으며, 고대 교회들을 결속시켜 고대 보편교회를 형성하였고, 이레네우스, 터틀리언, 클레멘트, 오리겐 등 고대 교부들의 활발한 신학활동을 생산케 하였다.

Ⅱ. 이단 사이비의 도전이 고대 에큐메니칼 공희회의 정통교리 형성에 기여했다.


4-8세기 어간의 고대 지중해 세계의 교회는 다섯 대관구(로마,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예루살렘)로 구성된 에큐메니칼 공의회를 통해서 그 당시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를 위협하는 이단들에 대하여 공동 대처하였다. 이 고대 교회의 일곱 에큐메니칼 공의희는 사도들의 예루살렘 공의회(행 15)를 뒤잇는 공의회로서 향후 이단의 문제들을 공의회를 통해서 해결해 나가야 할 구도를 마련하였다. 이 당시 공의회를 에큐메니칼 공의회라고 이름 한 것은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325년 니케아 공의회를 제1차 에큐메니칼 공의회라 부른데서 연원한다. “에큐메니칼”이란 말은 희랍어의 “오이쿠메네”(oikoumene)에서 유래하였고, 그 뜻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온 땅”(the whole inhabited earth)으로서, 그것은 아마도 그 당시 지중해 세계의 온 교회를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일곱 에큐메니칼 공의회에서 어떤 이단들을 물리쳤는가? 1. 325년 니케아 신조는 예수님을 아버지 하나님만큼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보지 않고, 인간보다는 우월하고 아버지 하나님보다는 열등한 그 어떤 존재로 본 아리우스의 이단의 도전에 대하여, 성부와 성자의 동일본질을 주장하여 정통 삼위일체론의 초석을 마련하였다(아직 크게 이슈화 되지 않은 성령론은 별로 다루지 않았고, 세 위격의 관계에 대하여도 개진하지 않았지만).

2. 381년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성령의 신성을 거부하는 성령 파괴론자들의 도전에 대한 응전으로서 성령의 주되심과 생명의 부여자 되심을 힘주어 말하고, 삼위의 관계성을 확립하였으며,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 이며 사도적인 교회에 대한 항목을 첨가하였다. 3. 431년 에베소 공의회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의 통일성을 무시하고, 이 양자 사이의 분리를 초래한 네스토리우스파 이단에 반대하여, 도 본성의 통일성을 강조하는 시릴의 기독론에 손을 들어 주었으니, 다음에 논할 칼세돈 정통 기독론을 위한 초석을 마련하였고, 구원론에 있어서 펠라기우스 주의를 정죄하였다.

4. 451년 칼세돈 공의회는 예수님의 신성만을 강조하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아폴리리나리우스의 단성론)와 예수님의 두 본성의 구별을 강조하다가 이 둘의 통일성을 놓쳐 버린 나머지 예수 그리스도를 두 위격으로 만드는 경향으로 나가는 네스토리우스 학파의 주장 사이에서 로마의 주교인 레오1 세의 Tome에 의해서 이 두 이단을 극복할 수 있었다. 즉, 칼세돈 공의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삼위일체 하나님 중, 두 번째 위격으로서(하나님의 아들) 자체 안에 신성과 인성을 조화롭게 통일시키고 계신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칼세돈의 결정에 따르면,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오, 참 인간”(vere Deus et vere homo)이시오, 이 두 본성은 서로 나뉠 수 없고, 동떨어져 나갈 수 없으며, 서로 혼동되거나 하나가 다른 하나로 변화될 수 없다.

553년 제5차 에큐메니칼 공의회(콘스탄티노플Ⅱ)는 네스토리우스 파 사람들의 기독론을 다시 정죄하면서 갈세돈 정통 기독론에 있어서 통일성을 더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갔고, 680-681년 제6차 에큐메니칼 공의회(콘스탄티노플 Ⅲ)는 예수께서 하나의 의지(意志)를 지니신 것이 아니라 두 의지를 가지신 것이라 하여 칼세돈의 “한 위격 안에 두 본성”이라고 하는 주장을 강화시켰다. 그러니까, 제5차와 제6차는 결국 정통 기독론에 대한 보강이라 보인다. 끝으로 787년 제 7차 에큐메니칼 공의회(니케아 Ⅱ)는 성화상에 대한 가르침을 확정지웠다. 즉, 이 공의회는 불가시적인 실재들을 아이콘에 의하여 표현하고 그것을 통하여 그것의 실재와 만난다고 하는 교리를 확정하였으니, 이는 성육신 교리에 근거한다.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아버지의 이미지(아이콘)이라고 하여, 이것에 근거한 성화상의 가치와 그것을 통한 그것의 실재를 존중한다. 이 교리는 아이콘이 가리키는 실재를 숭상하는 것(reverentia)이지 그것을 예배하는 것(adoratio)은 아니라고 하였다. 하지만 개신교는 거의 모두가 제7차 공의회가 결정한 이 성화상에 대한 존중을 거부한다.

이상과 같이 고대 지중해 세계 교회들은 이단들의 도전으로 인하여 지중해 세계 교회들을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로 결속할 수 있었고, 일곱 공의회를 통하여 이단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 우리는 이와 같은 고대 교회의 역사를 통하여 오늘날의 건강한 교회를 번거롭게 하고 어지럽게 하는 이단들이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하는 교훈을 얻는다. 교회는 이와 같은 이단들의 공격에 함께 대처하는 가운데, 교회의 결속을 더 공고히 하고 자신의 설교와 가르침을 더 바르게 해야 함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과연 오늘날 한국의 개신교회들은 이단과 사이비들의 도전으로 인하여 과연 더욱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로 결속하고 있고, 그와 같은 도전들에 대하여 에큐메니칼 공의회 차원에서 대응하고 있는가?

Ⅲ. 20세기 에큐메니칼 운동은 이단 사이비 교회들을 허용하는가? WCC의 회원 교회가 되는 진리 표준은 무엇인가?

1) 에큐메니칼 운동이란 무엇인가?: 사도행전 15장과 고대 일곱 에큐메니칼 공의회는 20세기 에큐메니칼 운동의 모태이다. 중세 말 서방교회의 “공의회 운동”(conciliar movement) 역시 동일한 원천에서 나왔다. 18-19세기 복음전도의 큰 파도를 타고 19세기 후반 개신교 안에서 전개된 에큐메니칼 운동은 직접적으로는 복음의 지리적 확장과 선교현장에서 요청되었던 교파협력과 교파초월의 필요성에서 나왔으나, 1948년 암스텔담 WCC로부터 2006년 알레그로 WCC에 이르는 “세계교회 협의회”란 전적으로 일곱 공의회 전통과 사도행전 15장으로 소급하는 공의회 운동이다(우리는 흔히 고대 교회의 “공의회”라는 말 대신에 오늘날엔 “협의회”라고 하는 말을 사용하지만).

오늘날 “에큐메니칼”이란 용어는 (1) 전통적인 의미로서 “전체로서 교회에 관하여”(concerning the Church as a whole), (2) 현대적인 의미로서 “교파들의 관계에 관하여”(concerning the relationship of different churches)와 “교회의 전체성에 대한 의식을 표현하는 데엽(expressing the consciousness of the wholeness of the Church) 사용되고 있다. 물론, 1970년대 이후로는 이 개념이 창조세계 전체와 타 종교와의 관계 까지도 포함한다.

20세기 에큐메니칼 운동과 관련된 “에큐메니칼”이란 뜻은 주로 교회들과 신학들의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을 추구하는 “신앙과 직제” 운동, 세계교회의 인류사회 이슈들에 대응하는 “삶과 봉사”운동, 그리고 세계교회의 선교와 복음전도에 힘쓰는 “선교와 복음전도 세계대회” 운동을 일컫는다. 이 세 운동은 하나의 에큐메니칼 운동으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다양성과 통일성의 유추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교회들과 신학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다양성 속에서의 코이노니아를 본받아서 다양성 속에서의 코이노니아(요 17:21)를 추구하면서, 하나님과 인류, 인간들 상호 간에, 하나님과 자연,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화해에 헌신해야 하고(골 1:15-20; 엡 1:10)와 복음전도(마 28:19-20)를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될 것이다.

2) WCC의 기원과 형성: “신앙과 직제”는 1927년에 로잔에서 제1차 세계대회를, “삶과 봉사”는 1925년 스톡홀름에서 제1차 세계대회를 가졌는데, 1930년대에 후자의 발의로 1937년 네덜란드의 유트레히트에서 “세계교회 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가 “WCC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모든 교회들의 공동체이다”라고 하는 헌장을 가지고 출범하였으나, 세계 제2차 대전의 발발로 10년이 경과된 1948년 암스텔담에서 제1차 WCC 총회를 열었다.

그리고 19세기 후반 에큐메니칼 태동의 원동력이기도 했던 “국제선교협의회”(이것의 전신은 “세계선교대회” = WMC)가 WCC에 합류한 것은 1961년 뉴델리 WCC 때였고, 이 때에 WCC 헌장이 보완되었으니, “WCC란 성경을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구세주로 고백하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교회들의 공동체”라 하였다. 대체로 이와 같이 확정된 WCC 헌장은 우리기 이미 언급한 칼세돈의 정통 기독론과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의 정통 삼위일체 하나님을 배경으로 하는 신앙내용으로서 WCC의 회원 교회들은 적어도 이와 같은 WCC 헌장에 전적으로 동의를 해야 WCC의 회원 교회 자격을 얻을 수가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가장 기본적인 기독교의 근본교리를 인정하는 교회들은 다음에 논할 신앙과 직제가 결정한 기독교적 가르침들에 대하여 전폭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혹은 긍정적으로 혹은 비판적으로 인정할 것이다.

3) 신앙과 직제 운동을 통해서 나타난 주요 에큐메니칼 운동의 진리표준들
이 글은 방금 위에서 언급한 WCC의 헌장과 다음에 논할 신앙과 직제의 신학전통을 기독교 정통성의 표준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고 가정하고, 오늘날 이단과 사이비들이 과연 WCC의 회원 교회들이 될 자격이 있을까를 함께 생각할 것이다.

(1) 복음에 대한 정의
1927년 로잔에서 열린 신앙과 직제 제1차 세계대회의 “복음”이해는 중국의 그리스도의 교회“(the Church of Christ in China)의 헌장에도 포함된 것으로서 에큐메니즘과 에큐메니칼 운동의 시금석으로서 복음에 대한 정의를 처음으로 내렸다. 다음의 ”복음“에 대한 정의는 향후 에큐메니칼 운동에 있어서 “복음”이 무엇인가라고 하는 논의가 나올 때 마다 길잡이 역할을 했다. 우리는 다음의 긴 인용에 유의하자.

세상을 위한 교회의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요, 항상 복음이여야 한다. 복음은 현재와 미래를 위한 구속의 기쁜 메시지인 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죄인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성령은 온 인류역사 속에서 활동하시사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였고, 무엇보다도 구약안에서 주어진 그의 계시를 통해서 그의 오심을 준비하셨는데, 때가 차서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 성육신하사 인간이 되신 것이다.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아들로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시다.

이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삶과 가르침, 그의 회개에로의 부르심, 그의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심판에 대한 선포, 그의 고난과 죽음, 그의 부활과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로의 승귀 및 그의 성령의 파송을 통하여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셨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충만함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한 없는 사랑을 계시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보이신 완전한 사랑에 호소하시사 우리들을 신앙에로 부르시고, 하나님과 인간을 섬기기 위한 자기 희생과 헌신에로 부르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신, 살아계신 분으로서, 구세주와 주님이신 바, 그는 사도들과 교회의 세계적 복음의 중심이다. ...

복음은 죄인들을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부르는 예언자적 부름으로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칭의와 성화의 기쁜 소식이다. ...

복음은 사회적 중생을 가능케 하는 힘의 근원이다. 복음은, 현재 사회를 짓밟고 있는 계층간 및 인종간 갈등으로부터 인류를 해방시켜, 국가별 행복과 국제적 우정과 평화를 누리게하는 유일한 방법을 선포한다. ...

이상과 같은 “복음”이해는 점차 삼위일체 하나님과 한 몸을 이루고 역사와 사회참여 쪽으로 나아간다. 즉, 탐바람은 “복음의 심장”(S.l.2)에서 예루살렘의 “복음”이해에서 진일보하여 삼위일체적 틀안에서의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를 역설한다. 그리고 본 보고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틀 안에서 복음의 정체성을 소개한 다음, “교회 - 그 본질과 기능”에서는 교회의 정체성에 대하여 바람직하게도 1937년 에든버러 “신앙과 직제”의 교회정의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교회란 그리스도의 몸이요 하늘에 있든지 땅에 있든지 성도의 교제로서 모든 믿는 사람들의 축복받은 무리들이다. 교회란 창조와 구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로운 목적을 계시함과 동시에 그리스도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성령의 역사로 계속해서 매개시키는 기관이다. 이 성령이야 말로 교회를 지배하는 생명이시요 항상 교회의 모든 부분들을 거룩하게 하신다.

그리고 본 보고서는 이어서 교회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편 교회는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터 위에 세워진 하나늬 분리되지 않은 교회요, 성려의 가르침을 받아 진리와 바른 삶의 스승이다. 이러한 교회는 믿음의 대상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려는 인간적인 시도로서 불완전하고 죄를 범한다. 그래서 교회는 인간본성의 제약성과 불완전성을 함께 나누고 있다. ...

교회의 정체성 학립에 힘쓰는 본 문서는 루터와 칼빈에 의해서 대표되는 종교개혁 전통이 주장하는 두 가지 교회의 표지(標識), 즉 “말씀설교와 성례전 집례” 이외에 6가지 정도를 더 언급하고 있다. 즉, 1. 기도와 중보기도, 2. 교회구성원들의 규칙적인 예배, 3. 자신들 사이에서의 희생적이고 개변시키는 사랑, 형제애에 넘치는 권징, 사회에 대한 헌신적인 봉사, 성경공부, 선교적 정신이다. 그리고 본 보고서는 교회의 두 번째 과제로서 교회의 역사와 사회와 문화에 대한 책임에 해당하는 하나님 나라 건설에 대하여 힘주어 말한다. 이러한 주장은 1928년 예루살렘 이래로 형성된 교회의 역사와 사회와 문화에 대한 책임이다.

교회의 본질적 과제는 그의 나라를 선포하는 그리스도의 대사가 되는 것이다. 교회는 보편적으로 타당한 정치적 혹은 경제적 프로그렘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국가와 사회 안에서의 실존 자체를 통해서, 사회생활에 있어서 기독교적 원리들을 강조하는 깨어있는 양심으로서 봉사하지 않으면 않된다. ...

교회는 예배와 증거하는 활동들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서의 궁극적 성취에 대한 소망에 의해서 지탱되어진다.

본 문서는 이어서 “복음전도에 있어서 교회의 자리매김”에서 18-19세기적 복음전도야 말로 교회의 본성에 속한다고 보면서도, 이것은 곧바로 “정의, 자유, 평화”의 사회적 실현을 동반하는 것으로 본다. 역시 여기에서도 18-19세기로부터의 패러다임 이동이 엿보인다.

세계 복음화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교회의 과제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생애와 가르침을 통하여 시작하셨고,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완성하신 사업을 이 세상에서 계속하도록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바, 이 세계 복음화는 바로 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의 본성안에 본유적으로 있는 것이다. 세상을 향한 선교사로서의 교회개념은 신약성서안에 주어져 있다. ...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회적 변혁에 대한 비전과 소망, 즉 정의, 자유, 평화와 같은 목적들의 실현에 대한 비전과 소망을 가져온다. 살아있는 교회는 사회적 여건들에 관한 예언자적이고 실천적인 활동들과 무관할 수가 없다. ... 인간사회를 섬기려는 적극적인 노력과 이 인간 사회를 구속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의지에 대한 믿음은 복음안에서 맺어지는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의 불가피한 결과들이다. 사회 프로그렘들은 복음에서 파생되어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프로그렘들 가운데 그 어떤 것도 기독교 메시지의 내용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2)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과 성화에 대한 정의
에든버러 신앙과 직제 제2차 세계대회는 제2 분과(II.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은혜와 구원에 관련된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축복으로 이 주제에 대한 우리의 모든 논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시는 일치의 영을 주신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면서 우리는 다음의 진술에 동의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주제와 관련하여 교회들 사이의 분열을 계속할 아무런 근거가 없음을 인식한다.

(ⅰ) 은혜의 의미

2.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고, 그가 행하시는 모든 것은 그의 의로운 목적들을 사랑하고 성취하시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은혜의 의미를 진실로 인식할 수 있다. 그의 은혜는 우리를 창조하셨고 보존하시고 축복하시는 일과,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한 우리의 구속과, 거룩하시고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파송 및 교회의 사귐과 말씀, 성례의 선물을 통해서 나타난다.
3. 인간의 구원과 부유함은 오직 하나님께만 그 근원이 있다. 그 하나님은 인간에게 인간 편의 어떠한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값없는 사랑에 의해 은혜로운 행위를 주신다.

(ⅱ) 칭의와 성화

4. 값없이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칭의하시고 성화시키신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데, 이 믿음 자체는 선물이다.
5. 칭의와 성화는 죄인과 관계를 맺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행동의 불가분리한 두 측면이다.
6. 칭의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그 자신과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 죄를 정죄하시고, 당신의 사랑을 죄인들에게 나타내시며, 세상을 자신과 화해시키신다.
7. 성화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와 전 교회를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의 세력으로부터 구해내시고, 우리를 그의 거룩함 안에서 자라게 하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삶에 동참함을 통해 우리로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만드신다. 우리를 지속적인 영적 행위와 악과의 투쟁으로 고무시키는 이러한 갱신은 하나님의 선물에 의해 유지된다. 거룩함에서의 우리의 성장이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하나님과의 교제는 항상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 위에 근거하고 있다.
8.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계시의 지적인 수용 이상의 것이다 ; 그것은 하나님과 그의 약속에 대한 전적인 신뢰이며, 우리의 구세주이며 주님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 자신을 위탁하는 것이다.

(ⅲ)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반응

9.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자유와의 관계에 관하여, 우리 모두는 성경과 기독교적 경험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주권이 최고라는 사실에 동의한다. 우리가 의미하는 주권이란 모든 개인과 인류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포용하시는 (all-controlling, all-embracing) 의지와 목적이다. 그리고 이 영원하신 목적이 하나님 자신의 사랑과 거룩한 본성의 표출이다. 이처럼 우리 인간은 우리의 전(全)구원을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의지에 빚지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인간 자신의 의지는 이 하나님의 은혜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하고, 인간은 이같은 수용의 결단을 해야 할 책임이 있다.
10. 많은 신학자들은 철학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라는 외견상 반대명제로 보이는 두 가지를 화해시키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이론들은 기독교신앙의 일부가 될 수 없다.
11. 우리는 이 어려운 문제에서 일치된 목소리로 말해올 수 있었고, 그래서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서 교회들 사이의 어떠한 분열을 계속할 아무런 이유가 없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쁘게 보고한다.

(ⅳ) 교회와 은혜

12. 우리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요, 모든 믿는 사람들의 축복된 사귐이요, 땅에 있건 하늘에 있건 성도들의 교제라고 하는 사실을 믿는다. 교회란 창조와 구속을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은혜로운 목적들의 실현이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성령을 통하여 계속 매개시키는 기관인데, 이 성령이란 교회 속으로 침투해 들어오신 생명이시요, 끊임없이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13. 교회의 기능은 자신의 삶과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인종과 국적에 관계없이 모든 믿는 사람들을 성령의 사귐과 생명 안에서 세워나가는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말씀설교와 성례전을 통하여 교회 안에서 그의 지체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성령의 항존 안에서 은혜를 베푸신다.

(ⅴ) 은혜, 말씀설교와 성례전

14. 우리는 말씀설교와 성례전이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교회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에 동의한다. 이 둘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는 나타나고, 주어지며, 신앙에 의해서 수용된다 ; 그리고 이 은혜는 나뉠 수 없는 하나의 은혜이다.
15. 말씀설교는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에게 알려지는 적절한 수단인데, 이는 사람들을 회개로 부르며, 그들의 사죄를 확신시켜주고, 그들을 순종으로 이끌며, 신앙과 사랑의 교제 가운데 세워준다.
16. 성례는 단순히 그 자체만으로 고려되어서는 안되고, 항상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성례로서 생각되어야 한다. 성례는 교회의 생명이신 성령의 계속적인 역사에 그 중요성이 있다. 성례를 통하여 하나님은 그 참여자들에게 영원한 교제의 삶을 발전시키시고, 이렇게 함으로 세상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현할 수 있게 하신다 ;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성례를 통해서 제한적으로 알려지는 것만은 아니다.
17. 우리에 의해 대표되는 교회들 사이에서 말씀설교와 성례전에 놓인 강조점의 차이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러한 차이들은 일치에 장벽이 될 필요가 없다는 데 우리는 동의한다.

(ⅵ) 오직 은혜로(sola gratia)

18. 어떤 교회들은 “sola gratia”를 강조하고, 어떤 교회들은 그것을 피한다. 이 구절은 논란을 불러일으켜왔으나, 우리 모두는 다음의 진술에 동의할 수 있다 ;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그의 은혜의 열매이다. 그것은 인간의 공로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 가운데 죄인에게 베푸시는 사죄와 성화에 달린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의 행동은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무시하지 않는다 ; 오히려 신앙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할 때, 우리의 참자유가 성취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한없으신 사랑을 거부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속박을 의미하고, 완전한 자유는 오직 선하고 수용할만하며 완전한 하나님의 의지에 전적으로 순복할 때 발견되는 것이다.

이제 필자는 이상과 같은 “복음”이해와 그것에 대한 “수용”(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1999년 10월 31일 로마가톨릭교회와 루터교세계연맹이 합의를 보았고, 2006년 7월 한국에서 열린 19차 세계감리교대회도 함께 서명 날인한 “칭의 교리에 대한 공동선언문”에 비추어 보려고 한다.

구원론의 역사를 돌아 볼 때, 16세기는 구원론의 문제로 서방교회 안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와 루터교를 비롯한 개신교회가 분열을 경험하였다. 하지만 1530년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서”가 나온 이래 계속해서 1530대와 1540년대에 로마 가톨릭 교회와 루터교 양측은 양자 간 신학 협의회들을 통하여 화해를 모색했으나 결실을 맺지 못하고 말았다. 이 양자 간 대화의 역사에 있어서 “레겐스부르크 회담”(1541년)이 가장 성공적 이였지만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1545-1563년 어간에 로마 가톨릭 교회의 “트렌트 공의회”의 교리 선언은 당시 루터교와의 결별을 선언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된 것이다. 따라서 1999년 10월 31일에 공동 서명날인은 “1541년의 레겐스부르크 회담“으로부터 꼭 458년만의 일이었다.

또한 에큐메니칼 운동을 통해서 1980년대 이후,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381)가 세계교회가 공유하는 사도적 신앙의 공동 표현과 고백으로 인정되어 오고 있고, 트렌트와 제2 바티칸 공의회 역시 이 신조를 동방정교회 및 개신교와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즉, 양측은 적어도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공동의 신앙을 갖고 있다. 따라서 세계교회가 공유하고 있는 ”복음“과 ”삼위일체 하나님“은 에큐메니칼 운동을 통하여 확인 된 바 “칭의”교리의 대전제이다. 이 전제는 “복음”에 대한 수용(appropriation)에 해당하는 “이신칭의”의 전제이다.

에큐메니칼 운동과 제2 바티칸 공의회 이래 1972년 이후 30년간의 양자(로마가톨릭교회와 루터교세계연맹) 간 대화를 통하여 “공동선언문”에 도달한 바, 이러한 새로운 기류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양측이 “복음”과 “삼위일체 하나님”을 성경의 통일성으로 보게 된 것이다. 그런 즉 양측은 서로가 공유하고 있는 “복음”과 “삼위일체론”을 재확인하면서 결국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役事)로 인한 이 복음의 수용(收容)인 “이신칭의”(以信稱義)에 있어서 합의를 도출해 낼 수 있었다. 루터교와 로마 가톨릭 교회가 ”구원론“에 대한 본질적 진리들에 관하여 합의를 보았고, 여타 차이점들에 있어서는 큰 문제가 없다고 하는 사실을 천명한 것이다. 양측은 서로가 서로를 더 이상 정죄하지 않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칭의”는 “복음”에 대한 수용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이 “수용”의 양태에 있어서, 양측이 그것의 기본 진리들에 있어서 합의를 보았다. 그리고 양측은 이 “수용”이 예수 그리스도(하나님의 아들)를 성령의 역사로, 말씀과 성례전을 통하여 수용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물론, 아버지 하나님과의 연합에 이른다고 하는 점에 일치하고 있다. “복음”이 “삼위일체 하나님”과 불가 분리하듯이, 이 “복음”의 “수용” 역시 삼위일체 하나님과 분리될 수 없다. “공동 선언문”이 선포하는 “a differentiated consensus”(상이성을 열어 놓는 합의)의 대전제는 바로 ”복음“과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그리하여 양측은 이번 서명식을 위해서 두 개의 문건을 만들었다. 하나는 “공식적인 공동 선언문”(Official Common Statement)이요, 다른 하나는 “추가 문서”(Annex)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선 결론에 해당하는 본문부터 인용하고자 한다. 양측은 전자에서 다음과 같은 “일캇(consensus)에 도달하였음을 주장하고 있다.

... 우리는 이신칭의 교리에 관한 기본적인 진리들에 있어서 일치(consensus)에 도달하였고, 이 교리에 관하여 16세기 종교개혁 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상호 교리적 정죄가, 더 이상 ‘공동 선언문'에 제시된, 이신칭의 교리에는 결코 적용될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후자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하였다.

우리는 오직 은혜로, 우리 쪽의 그 어떤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에 대한 신앙으로만, 하나님에 의하여 받아들여지고, 우리의 마음을 갱신하여 우리로 하여금 선행을 하게 하시는 성령을 받는다고 하는 사실을 함께 고백한다.

그리고 위의 인용문을 풀어서 선언하는 항목들(a-e) 가운데 a)와 e)는 다음과 같이 천명하였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은혜로써 죄를 용서하시고, 동시에 인간을 죄의 노예되게 하는 권세로부터 자유케 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함께 고백한다. ...

칭의에 의하여 우리는 무조건적으로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를 갖게 된다. 이것은 영생을 포함한다. ...

이상과 같은 에큐메니칼 구원론은 수많은 교파들의 구원론의 길잡이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431년 에베소 공의회가 “펠라기우스 주의”의 “구원론”을 정죄했다면, 오늘날 개신교들 내의 반(半)펠라기우스 주의나 알미니언니즘 계통의 구원론 역시 구원론의 다양성 차원에서 받아 드려져야 할 것이다.

(3) 사도적 신앙의 공동인정, 공동표현, 공동해석 및 공동고백
이미 1927년 로잔 신앙과 직제 제1차 대회는 제5분과에서 교회일치를 위한 “교회의 공동 신앙고백서”의 필요성을 언급하였다. 로잔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 사이에 있는 교리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경 안에 선포되었고, 니케아 신조라 불리는 에큐메니칼 신조와 사도신경에서 증거 되고 보존된 공동의 기독교 신앙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 이 신앙은 그리스도의 교회의 영적 경험 안에서 지속적으로 확증되었다.

아마도 1963년 몬트리올 신앙과 직제 제3차 대회의 제2 분과의 주제인 “성경, 전승, 전통들”에서 “복음전승”(the Gospel Tradition)이 가장 근원적인 사도적 전승으로 확정되면서, 그리고 이 “복음전승”이 성경뿐만 아니라 여러 교파들의 “전통들“(traditions)을 통해서도 전승된다고 하는 사실이 확정 된 다음부터 ”사도적 신앙의 공동 표현, 공동 인정, 공동 고백 그리고 공동 해석에 대한 문제가 크게 부각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것이 본격적으로 신앙과 직제의 의제로 떠오른 것은 1975년 이였다. 1975년 나이로비 WCC 총회는 “사도적 신앙에 대한 공동표현“(the common expression of apostolic faith)을 에큐메니칼 의제로 정하여, 신앙과 직제로 하여금 연구케 하였던 것이다. 나이로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사도들을 통해서 전달되고 수세기를 통해서 전수된 기독교 진리와 신앙을 받아들이고, 현대적 상황이 요구하는 대로 다시 수용하며, 함께 고백하려는 공동의 노력을 함께 할 것을 교회들에게 요구한다. 공동으로 인정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아래서의 자유롭고 포괄적인 노력으로부터 일어나는 그러한 공동의 행위는 교회의 삶과 선교에 적합한 일치와 다양성을 명백히 하고 구현하는 일 모두를 목적해야 한다(Section II, 19).

그리고 1975년 나이로비에서 개정된 WCC 헌장은 WCC의 첫째 목적 안에 “하나의 신앙 고백”을 삽입하였다.

예배와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으로 표현되는 하나의 신앙과 하나의 성만찬적 교제에 있어서의 가시적 일치의 목적으로 교회들을 초청하는 것, 그리고 세상이 믿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 일치를 향하여 전진하는 것(Art. III, 1).

1978년 벵갈로 신앙과 직제 위원회는 “사도적 신앙의 공동표현”을 논하기에 앞서 엡 1 : 3-15절에 나타나는, “송영”(doxology)이 이 사도적 신앙의 기본적인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면서, “사도적 신앙의 공동표현”에 대한 논의로 나아간다. 그러면 이 “사도적 신앙의 공동표현”으로서 무엇이 사용되어야 하는가?

1981년 제네바에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381) 제 1660주년 기념 예배를 계기로, 본래 “세례신조“(a baptismal creed)로 출발한, 사도신경이 아니라 에큐메니칼 공의회에서 결정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가 그것에 해당하는 것으로 간주되기 시작하여, 1981년 오뎃사 신앙과 직제 협의회에서 이 에큐메니칼 신조에 대한 에큐메니칼 해석(an ecumenical explication)을 출범시켜, 1991년 ”세계교회가 고백해야 할 하나의 신앙고백“(Confessing the One Faith : An Ecumenical Explication of the Apostolic Faith as it is Confessed in the Nicene-Constantinopolitan Creed, 381)을 내놓았다. 오뎃사는 이미 1971년과 1978년 벵갈로의 신앙과 직제에서 논의된 ”우리 안에 있는 소망을 설명하기“(Giving Account of the Hope within Us)를 무르익혔고, 몬트리올의 ”Tradition"을 보다 더 역동적인 개념으로 보면서 니케나-콘스탄노플 신조를 에큐메니칼 하게 해석할 것으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이 “사도적 신앙의 공동 고백”의 내용은 경험적이고 상황적이다. 그리고 “고백의 행위는 비록 그것이 공동체 안에서 행해진다 할지라도 인격적이다(personal). 또한 그것이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인격과 삼위일체 하나님의 인격적 실재에 관련되는 점에서도 인격적이다. 이것은 교회의 말씀설교와 예전, 특히 세례와 성만찬적 경험과 결부되어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공동체적이다. 그리고 ”사도적 신앙의 공동 고백“은 1971년 루벵과 1978년 벤갈로어가 의제로 삼은 ”Giving Account of the Hope within Us" 의 의미에 있어서도 경험적이고 상황적이다. 즉, 이 의제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우리는 다만 옛 에큐메니칼 신조를 그대로 되풀이 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마치 성경의 복음을 되풀이하는 것이 성경에 대한 배반행위인 것처럼, 고대신조를 되풀이만 하는 것은 그것에 대한 배반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오늘 우리의 상황을 분석하면서 이와 같은 에큐메니칼 신조를 풀이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1991년 ”세계교회가 고백해야 할 하나의 신앙고백“(Confessing the One Faith : An Ecumenical Explication of the Apostolic Faith as it is Confessed in the Nicene-Constantinopolitan Creed, 381)은 오늘 현대인의 문제들을 각 항목에 관련시키고 있어, 매우 훌륭한 에큐메니칼 해석을 시도하였다고 보여 진다.

그러면 “사도적 신앙“이란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계시 그 자체, 곧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역(the Person and Work of Jesus Christ)으로부터 나온 ”복음전승“(the paradosis of the Gospel) 혹은 몬트리올(1963)이 말하는 ”Tradition"으로서 이것은 이것에 대한 예언자들과 사도들의 원초적인 증언들인 성경을 통해서 전해 내려오고, 사도신경,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도, 설교, 세례, 성만찬, 신학, 기독교 교육을 통해서 전해 내려온다. 1983년 로마 보고서인 “성경과 초대 교회에 있어서 사도적 신앙”은 그 부록에서 “사도적 신앙”을 아래와 같이 정의하고 있다.

사도적 신앙이란 어떤 단 하나의 기록된 정식화를 가리키는 것도 아니요,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어던 특정 기간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기독교 신앙내용의 역동적 실재를 가리킨다. 이 신앙은 이 신앙은 구약 백성의 예언적 증거에 뿌리를 내리고 있고, 신약성경 안에 반사되어 있는 사도들 및 초기에 이 사도들과 함게 복음을 선포하였던 사람들에 규범적인 방법으로 뿌리내리고 있으며, 사도적 공동체의 증거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 사도적 신앙은 신조적 진술들, 공의회들의 결정들, 신앙고백 본문들 및 교회의 삶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신앙고백으로, 설교로, 교회의 예배와 성례전으로 표현된다.

따라서 우리는 위에서 정의된 “사도적 신앙”에 대한 정의를 염두에 두면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381)”가 이와 같은 사도적 신앙의 공동 표현으로서 채택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WCC는 이와 같은 사도적 신앙에 비추어서 이 사도적 신앙의 6가지 의미를 지적하였다.
1. 교회의 정체성은 사도적 전승과의 연속성에 의존한다.
2. 다면화된 사도적 전승 안에서, 사도적 신앙은 교회 정체성의 초석이다.
3. 사도성이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 의해서 고백되어지는, 역동적 실재로서 그리스도의 현존에 달렸다.
4. 사도적 신앙에 의한 통일성은 맥락의 다양성에 따른, 기독교 전통들의 다양한 형태들 속에 있다.
5. 사도적 신앙의 공동 표현에 대한 추구에 있어서, 교회들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탁월한 의미에서 에큐메니칼 신조로 인정할 것을 요청받고 있다.
6. 사도성에 대한 근본적인 표준(norma normans = 규범하는 규범)은 우리의 신앙이 성경에 기록된 대로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사도들의 증거와 일치하는가에 달렸다.

끝으로 왜 하필이면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가 사도적 신앙의 공동표현으로 채택 되었나? “세계교회가 고백해야 할 하나의 신앙고백”(Confessing the One Faith ... )은 그 이유를 세 가지로 본다.

- 그것은 그 어떤 다른 신조들보다도 사도적 신앙의 본질적 내용에 대한 규범적 표현으로 보다 보편적으로 받아 들여져 왔다.
- 그것은 오늘날 기독교의 역사적 유산의 일부이다.
- 그것은 교회의 하나의 신앙을 표현하기 위하여 수 백 년 동안 예전에서 사용되어 왔다.
그런데 이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다양한 역사적 상황에서 새롭게 작성되어 온 다양한 교파들의 다양한 신앙고백서들에도 불구하고, 사도적 신앙의 공동표현과 공동고백으로서 교회의 신앙적 통일성을 유지할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컨대, 루터교나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들은 그들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사도적 신앙의 공동표현이요, 공동고백인 이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 일치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신앙의 통일성은 에큐메니칼 차원에서의 세례와 성만찬과 직제를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4) 코이노니아의 한계
1991년 캔버라 WCC는 제3분과: “일치의 성령이시여! 당신의 백성을 화해시키소서”에서 코이노니아(koinonia)의 개념을 가지고 교파들의 다양성을 통한 일치를 설명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모든 기독교인들은 성령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 되고,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해하여 3위 1체 하나님과 친교를 갖는다(S.Ⅲ.58). “성령 안에서의 코이노니아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에의 동참에 근거하고, 교회 공동체의 삶에의 동참에 의하여 표현 된다”(S.Ⅲ.61). 세계의 대부분의 교파들이 이같은 수직적인 코이노니아와 수평적인 코이노니아를 공유하고 있다. 바야흐로 1990년을 계기로 에큐메니칼 공동체는 “다양성 속에서 일캇라는 말보다는 “다양성 속에서의 코이노니아”란 말을 더 선호하게 되었다. WCC가 지향하는 교회일치는 결코 획일적인 일치추구나 어느 한 교파로의 흡수 통합 같은 일치추구가 아니다.

“일치와 다양성은 기독교적 코이노니아에 있어서 한 쌍을 이루는 요소이다”(S.Ⅲ.62). 그러나 다양성은 한계를 갖는다. 적어도 WCC의 교리 헌장이 제시하는 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구주”(S.Ⅲ.62)로 받아들이는 교회(교파)로서 S.Ⅲ.66에 나타난 조건들을 갖춘 교회라야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사도적’ 교회를 구축할 수 있다. 진정한 코이노니아는 다음과 같은 교회론적 요소들을 요청한다.

교회의 일치는 사도적 신앙에 대한 공통된 고백 속에서 주어지고 또한 표현된 코이노니아로서 구현된다. 이 코이노니아는 하나의 세례를 통해 시작되었고, 하나의 성찬식 교제 속에서 함께 기념되는 하나의 공통된 성례전적 삶이며, 또 타교파의 교회 회원권과 직제가 상호 인정되고 또 화해되는 공동의 삶이며, 또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만민에게 증거하고 모든 피조물을 섬겨야 할 공동의 사명이다. 충만한 친교를 추구하는 목적은 모든 교회가 피차간에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사도적’ 교회를 충분하게 인정할 수 있을 때 실현된다. 이것은 행동을 촉구한다. 왜냐하면 특정한 조치를 함께 취하는 데 있어서 교회들은 기독교적 삶의 풍부함과 갱신을 표현하고 고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1993년 산티에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열린 신앙과 직제 제5차 세계대회는 다양성의 한계를 아래와 같이 주장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히 13:8) 하나님과 구세주로 함께 고백할 수 없고, 성경이 선포하였고 사도적 공동체가 설교한 구원과 인간의 궁극적인 운명에 대하여 함께 고백할 수 없는 다양성은 부당한 다양성이다. (S. Ⅱ. 17)

경전으로서의 성경은 복음진리(갈 2:5, 14)와 훗날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 안에 제세되었고 부연된 가르침들 위에 교회의 통일성(the God-given Unity)을 기초시키고 있다. 이 통일성과 이 가르침들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기독교인이 아니고, 교회가 아니다. 성경은 또한 교회의 다양성의 기초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성경은 다양한 메시지들과 가르침들을 제시하고 있으며, 이 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상황들이 다양하고, 이 성경에 대한 접근방법과 해석방법이 다양하며, 교회 공동체들의 입장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교회들은 자기들의 해석학적 원리들(예컨대, 전통, 예전적-성례전적 맥락, 이신칭의, 경험 등)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성경이라고 하는 하나의 경전이 그처럼 풍요로운 신학의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교회들은 전(全) 성서적 증언들을 자기 것으로 삼아, 보편성(catholicity)을 향해 성장하도록 도전을 받고 있는 것이다.(S. Ⅱ. 18)


나가는 말

1. 고대 초기의 기독교 정통성 확립: 한국개신교는 오늘날 교회를 위협하는 이단들의 도전에 어떻게 응전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우리는 고대 교회로부터 무엇을 배우는가? 우선 우리는 고대 초기의 이단들의 공격이 지중해 세계 교회들을 결속시켰고, 그 당시 교회로 하여금 바른 가르침을 가르치도록 자극하였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고대 초기 교회는 이단들의 도전에 대응하는 문맥에서 1. 복음의 사도적 승계를 강조하였고, 2. 신약성서의 경전 화에 돌입하였으며, 3. 신앙의 규범을 확정하였고, 4. 신조 형성의 초석을 마련하였으며, 5. 고대 가톨릭교회 형성에 기여하였고, 6. 교부들의 생산적인 신학활동을 경험하였으니, 우리는 이 과정에서 형성된 기독교적 가르침에서 정통성의 표준을 발견할 수 있다.

2. 고대 7에큐메니칼 공의회의 의미: 나사렛 예수께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 아니라고 하는 아리우스 이단, 성령의 신성을 거부하는 성령 파괴론자들, 자력구원을 주장하는 펠라기우스파의 주장,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신성에 흡수시키어 그의 신성만을 말하는 아폴리나리우스의 단성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두 본성을 통일성을 놓쳤던 네스토리우스파의 주장 등으로 이하여 그 당시 제국의 교회가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 이단들의 도전들은 대관구 중심의 지역별 지중해 교회들을 하나로 묶어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가 되게 하였고, 고대 7에큐메니칼 공의회로 하여금 에큐메니칼 신조들을 형성케 하여 당시 교회를 바른 길로 인도하였다.

우리는 이와 같은 과정에서 형성된 신조들을 오늘날에도 이단사이비를 판단하는 진리표준으로 삼을 수 있고, 무엇보다도 오늘의 우리 개신교회들도 협의회(공의회 = Council)를 통하여 이와 같은 이단사이비의 문제를 함께 풀어나가야 한다고 하는 교훈을 얻는다. 한국의 장로교단들 가운데 여러 교단들이 총회 차원에서 이 문제에 대처하고, 나아가서 “한국기독교총연맹” 차원에서도 이 문제를 풀어나가고 있으니, 이 둘 모두가 다름 아닌 협의회 차원의 대응이라 보이지만, 이와 같은 이단사이비 문제에 좀 더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개신교회들의 모든 대표들로 구성된 에큐메니칼 “협의회”가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3. 신앙과 직제의 진리표준들: 물론, 19세기 후반에 시작된 에큐메니칼 운동과 WCC를 도구로 하는 20세기 에큐메니칼 운동은 고대의 에큐메니칼 공의회처럼 이단 사이비의 도전 때문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 복음전도의 현장에서 요청되었고, 세계 제2차 대전 이후 전쟁으로 상처입고 찢겨진 인류사회를 향한 세계교회의 책임론에서 WCC 중심의 에큐메니칼 운동으로 발전하였으며, 이미 지적한 대로 교회들이 하나 되어(“신앙과 직제”), 인류사회에 참여하며(“삶과 봉사”), 복음전도와 세계 선교(“복음전도와 선교 세계 협의회”)에 함께 힘쓰는 하나의 운동을 지향하고 있다. 그리고 공의회 혹은 협의회를 통한 이단 규정과 이단 정죄는 17세기 개신교 정통주의 시대로 이미 끝났다.

하지만 이 글은 WCC의 회원 교회들로서 에큐메니칼 운동에 동참하고 있는 교회들을 그래도 건전한 교회들로 보고,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의 이단들을 이것에 비추어 보려고 하였다. 그래서 이 글은 WCC의 교리헌장(the Basis)의 배경을 고대 에큐메니칼 신조에서 찾았고, 이어서 “신앙과 직제”가 그 동안 내놓았고, WCC 총회에서 받아들여진 에큐메니칼 공식문건에 근거하여 교회 일치와 교회 연합의 진리표준들을 추적해 본 것이다. 적어도 이 글은 이와 같은 신앙과 직제 전통의 신학에서 교회가 나가야 할 바른 길을 찾을 수 있다고 하는 가정을 가지고 있다 하겠다.

따라서 우리는 1927년 로잔 신앙과 직제의 “복음”에 대한 정의, 1937년 에든버러 신앙과 직제의 은혜의 수용에 대한 정의와 교회론의 기본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1991년에 매듭져진 “하나의 신앙을 고백하며”에 나타난 “삼위일체론”과 “교회론”을 소개하였고, 그것에 대한 본문과 에큐메니칼 유권해석을 부록에 실었다. 물론, 부록이 보여주듯이 이 “하나의 신앙을 고백하며”는 창조론, 구속론, 교회론, 종말론 등 여러 주제들을 논하고 있다. 필자가 생각하기엔, 대부분의 이단사이비들이 이와 같은 진리표준으로부터 전적으로 빗나간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우리는 신앙과 직제의 신안내용들을 이단척결의 진리표준으로 삼기 보다는 사도적 신앙(“하나의 신앙을 고백하며”)을 고백하고, 세례와 성만찬과 직제에 관하여는 BEM Text를 표준으로 하여, 가시적 일치를 추구하면서, 교회의 본질과 목적을 위하여는 “교회의 본질과 사명”(2005)을 따라가야 할 것이다. 가시적 교회일치의 요건들.

4. 코이노니아의 한계: 끝으로 “코이노니아의 한계”를 서술한 이유는 WCC 중심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결코 아무 교회들이나 다 받아들이지 않고, 아무 교회하고나 친교를 갖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밝히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의 요점은 복음에 대한 바른 믿음과 구원,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한 바른 파악과 삼위일체 하나님을 성서의 다양성의 통일성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교파들과 신학의 다양성이 이와 같은 성서의 통일성에 위배되는 경우는 WCC의 회원 교회로서 WCC 중심의 에큐메니칼 운동에서는 제외 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직간접적으로 제도권 교회와 관계를 가진 그리스도인들의 여러 가지 사회참여 운동들과 복음전도 활동들이 있을 수 있고, 타 종교의 사람들이나 믿지는 않으나 선한 의지를 가지고 정의, 평화, 창조세계 보전 운동에 동참하는 사람들의 운들이 있을 수 있고, WCC가 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대체로 WCC는 100 개 나라와 세계 여러 지역들에 분포되어 있는 340개 이상의 교파들로 구성되어 있고, 5억 5천명의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동방정교회, 성공회, 루터교, 침례교, 감리교, 개혁교회 등을 그 회원 교회로 하고 있는 바, 이들 교회들의 신앙과 직제, 삶과 봉사, 그리고 세계 선교와 복음전도의 모든 것이 세계교회의 길잡이가 될 수 있다. 물론, 이와 같이 WCC의 정식 회원들이 아닌 로마가톨릭교회, 복음주의 교회들, 오순절 교회들 등이 이단이나 사이비 집단이라고 하는 말은 아니다.

5. 성서주의 교파주의적인 신앙고백을 너머서서: 성서의 문자적이고 명제적인 문장 하나하나를 절대적이고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는 성서주의(biblicism)와 개혁교회의 신앙고백들이 과연 정통성 시비에 있어서 절대 표준이 될 수 있는가? 우리는 장로교인들로서 성서주의를 지향하는 경향이고, 장로교 신앙 고백서들을 이단 사이비의 진리표준으로 삼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입장에는 한계가 있다. 우리가 단순히 성서의 모든 명제들을 진지표준으로 삼는 경우, 교회들과 신학들은 지리멸렬하게 분열되고 알알이 흩어지고 말 것이다. 제 가끔 성성의 이 명제 혹은 저 명제가 진리라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표준으로 상대 방 교파를 판단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지적한 대로 성성의 통일성(복음과 구원,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사역,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위격과 사역 등)에 의한 교회들과 신학들의 통일성이 중요하고, 그 다음에 성서의 메시지들에 근거한 그것의 다양성이 뒤 따라야 할 것이다.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들을 진리표준으로 보는 것도 문제가 있다. 물론, 이 신앙고백서는 고대 에큐메니칼 공의회에서 결정된 삼위일체론과 정통 기독론과 삼위일체론을 받아들이고, 구원론에 있어서도 431년에 정죄된 펠라기우스 주의를 따르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종교개혁 전통을 따라서 복음과 설교, 교회의 표지들과 구원론 등을 강조한다. 그리고 많은 부분에 있어서 루터교나 다른 개신교의 교리들과 공유하는 부분들도 포함한다. 하지만 이 개혁교회의 고백서들 가운데, 예컨대 “이중 예정론”이나 “성도들의 견인”이나 “장로교 정치체제”(presbyterianism)를 절대화하여 이를 따르지 않는 다른 교파들을 정죄해서는 안 될 것이다. 1934년 바르멘 신학선언을 계기로 여러 가지 역사적인 상황에서 작성된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들 보다 16-17세기 고전적인 개혁교회 신앙고백서들이 좀 더 편협한 개혁교회의 신앙 내용들을 담고 있다. 우리 개혁교회는 WARC의 신앙 고백 노선을 선호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미 언급한 신앙과 직제의 공식적인 신앙 진술들에 유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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