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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야드 운동과 그와 유사한 가르침에 대한 평가
한장총 '빈야드적 현상' 세미나
2007년 06월 20일 (수) 00:00:00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유해무 교수 / 고려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회는 처음부터 안팎의 도전을 받아왔다. 밖에서 오는 도전을 변증학과 같은 분야가 담당하였다면, 안으로부터 오는 도전은 이단 정죄로 교회의 정체성을 지켜왔다.

한국 교회는 양적으로 크게 성장한 교회이다. 이런 성장과 더불어 한국 교회는 안팎으로 많은 도전과 시련을 당하였다. 한국 교회 초기나 일제 치하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고, 그 이후에도 한국 교회 안에는 많은 이단이나 사설들이 준동하였다. 대부분은 이단으로 막을 내리기도 하였지만, 더러는 교회 속으로 들어와 이단성을 버린 경우도 있다.

특히 교회 성장 일변도의 목회 환경이 주도하던 80년대 이후, 한국 교회 안에는 수많은 목회 방법론이 소개되고 실험되었는데, 더러는 건재하고 더러는 사라졌다. 그중에서도 은사 운동에 속하는 빈야드 운동과 이와 유사한 운동은 한국 교회 안에 지속적으로 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성경적인 은사 이해를 출발점으로 삼아 이런 유의 운동을 살펴봄으로 건강한 교회를 세우도록 기여하겠다.

1. 성령님의 은사

하나님의 ‘한’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속사역에 있으며(롬 3:24), 하나님께서는 이 은혜를 죄인에게 주신다(롬 3:23, 5:10; 갈 2:17-21). 그리고 예수님을 입으로 시인케 하는 것은 성령의 사역이다(고전 12:3). 믿음은 은혜이며, 이 믿음을 일으키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다.

은혜는 때때로 은사(carisma)로 표현되기도 한다(롬 5:15이하, 6:23; 고후 1:11; 엡 4:7). 그런데 로마서 12장, 고린도전서 12장 등에서는 교회의 내외적 삶에서 나타나는 영적 섬김의 기능들을 특별히 은사(carismata)로 부르고 있다. 이 은사들은 성도 개개인들에게 주어졌다. 은혜로 구원받은 자가 구원과 동시에 성령님으로부터 받은 선물들을 은사라 할 수 있다. 각 성도는 먼저 하나님의 은혜에 참예하여 신자가 되고, 그 결과로 은사까지도 받는다(벧전 4:10). 예수 안에 있는 은혜로 인하여 우리에게 말과 지식과 은사들이 나타난다(고전 1:4-7). 이처럼 구원론적인 은혜는 성도의 삶에서 다양하게 표현되는데, 그 중에 은사도 있다.

신자인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는 각각 다르며(롬 12:6) 은사와 직임과 역사는 여러 가지이다(고전 12:4-6). 여기에서 신자의 시초인 믿음이 먼저 나오고(롬 12:3, 고전 12:3), 은사들이 뒤이어 언급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믿음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됨이 먼저요, 그리고 이들에게 은사들이 주어진다. 모든 신자들은 한 몸의 지체들이나, 직분과 은사는 각각 다르다(롬 12:5, 고전 12:11). 그리고 은사들의 목적은 교회와 교중들을 세우는 데에 있다(고전 12:7, 14:4.5.17; 엡 4:12-16).

이처럼 그 은사들이 활동하는 장소는 일차적으로 교회이다(롬 12:10, 13:10; 고전 13:1). 각 성도는 그리스도의 지체들이나 각자의 고유성을 지니며, 그것으로 다른 성도들을 섬겨야 함을 보여준다. 은사를 받은 성도는 덕을 세우려는 목적으로 모든 것을 써야 한다(고전 14:26). 은사를 받은 성도는 더욱 큰 은사 곧 사랑의 은사를 사모해야 한다(고전 12:31-13:13). 사랑은 덕을 세우기 때문이다(고전 8:1, 16:14). 교회 밖을 위한 은사도 있으니 곧 방언의 은사이다(고전 14:22이하). 이와 같이 신약교회 자체는 은사로 채워져 있다.

바울이 언급하는 은사들을 보면, 예언, 섬김, 가르침, 권위, 구제, 다스림, 긍휼 베품(롬 12:6-8), 믿음, 신유, 이적, 영 분별, 방언, 방언 통역, 사도, 선지자, 교사, 목사직, 서로 도움(고전 12:9,10,28; 엡 4:11) 등이 나타난다. 독신생활과 결혼도 은사이다(고전 7:7). 또 대접,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도 은사이다(벧전 4:10). 이 목록에는 너무나 평범하여서 은사로 불리기에는 뚜렷한 인상을 남기지 않는 것들도 있고, 방언이나 신유처럼 이목을 집중시키는 은사들도 있다.

그런데 교회가 은사들을 무시하거나 소멸한다는 비판을 종종 들을 수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열광적으로 나타나는 은사들이 없다는 뜻이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신약교회 자체가 은사적이요 영적임을 상기하면 이는 별 의미 없는 비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 교회는 세계교회사에서 유래 없는 성장을 이루었다. 여기에 많은 요인들이 언급될 수 있겠지만 열광적인 은사들과 성령 세례에 관한 관심이 교회 성장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이른바 ‘성령 운동’과 그중에서도 빈야드를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2. 성령님의 은사와 성령 세례

한동안 언필칭 성령 운동의 제 3의 물결이 한국 교회를 강타하였고, 지금도 그 여파를 느낄 수 있다. 이 운동의 모체는 윔버(John Wimber; 1934-1997,11)가 시작한 ‘능력 종교’(Power Religion)이다. 불신 가정에서 태어나 록 그룹에서 키보드를 연주하던 윔버는 1963년에 회심하여 1970년부터 퀘이커 교회(Yorba Linda, California)의 목회자로 사역하기 시작하였다. 1974년에는 풀러 전도 및 교회 성장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긴다. 오순절 운동과 은사 운동이 성장하는 것을 발견하고, 표적과 기사에 대한 관심이 증대한다. 그때부터 성경에 대한 관심보다는 현상에 대한 관심이 그의 사상과 사역을 주도한다. 1977년에 빈야드 교회를 개척한다.

윔버는 표적과 기사를 수반하지 않으면 복음은 무력하다는 입장에서 ‘능력 전도’와 ‘능력 치유’를 추구한다. 그는 자신이 저술한 책에다 ‘능력’을 넣기 좋아한다. Power Evangelism, Power Healing, Power Points, Power Encounter. 그가 말하는 능력은 성령님의 구체적 은사, 곧 치유와 축사와 예언 등을 말한다. 그는 전통적인 전도방법을 거부하지는 않지만, 능력 전도와는 비견할 바가 아니라고 말한다. 미국 풀러 전도 및 교회 성장 연구소의 와그너(C. Peter Wagner)는 윔버의 이런 특징을 들어 ‘제 3의 물결’이라 명명하였다.

윔버와 동역자로 사역하였으나 결별을 통보 받은 아노트(John Arnott)의 ‘토론토 축복’(Toronto Blessing)도 주목을 받았다. 1988년에 토론토공항 빈야드 교회를 개척한 아노트(John Arnott)는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나타나는 성령의 마지막 위대한 역사”를 펼치려고 전세계를 두루 여행하고 있다.

빈야드 운동은 근본적으로 성령 운동에 의한 복음 전파와 교회 성장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이들은 방법론적으로 교회의 수적 성장을 겨냥한다. 즉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님의 표적과 기사는 지금도 계속 일어나며, 이를 동반하는 복음전도의 능력을 강조한다. 이들은 설교를 통하여 영적인 각성을 호소하고, 分明한 회개와 告白과 함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기존의 전도 방법에 만족하지 않는다. 설교보다는 표적과 기사를 강조하고, 이것을 체험한 자들이 행하는 감정적인 표현이나 간증을 중시한다.

이들은 예수님이 행한 표적과 기사를 능력 대결로 본다. 이들은 예배와 집회에서 나타나는 통곡, 파안대소, 경련과 만취에 가까운 쓰러짐의 현상, 그리고 각양 동물 소리 등을 능력대결의 증거라고 말한다. 웜버나 아노트가 이 모든 현상들을 다 체험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체험들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며 성경적인 근거를 제시하려고 한다.

와그너는 치유의 방법론을 개발하여 훈련시킨다. 그는 1997년 오순절 운동, 은사 운동뿐만 아니라 빈야드 운동을 주도하는 교회들의 세계적인 연합을 촉구하며 자신이 ‘신사도적 개혁 운동’(New Apostolic Reformation Movement)으로 정의한 새로운 교회운동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피터 와그너는 1998년 미국 콜로라도 스프링스에 본부를 둔 ‘와그너 리더십 연구소’(Wagner Leadership Institute; WLI)를 설립하고, 한국에도 지부를 두고 있다.

신사도 운동은 빈야드 운동과 마찬가지로 예수님과 사도들과 초대교회에 일어났던 성령의 역사가 오늘날에도 그대로 재현될 수 있다고 믿는 운동이다. 따라서 이적, 신유, 귀신축출, 죽은 자를 살리는 일 등 초자연적인 것과 초대교회에 번성했던 방언, 예언, 통역 등 성령의 다양한 은사들이 오늘날에도 계속된다고 믿는다.

다른 점이 있다면 신사도 운동은 에베소서 4장 11절에 근거한 소위 ‘교회의 5대 직분 체제’ 즉, ‘사도’, ‘선지자(예언자)’, ‘복음전하는 자’, ‘목사’, ‘교사’가 오늘날의 교회 안에서 올바로 자리 잡아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원래 계획하신 대로 교회가 세워지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즉, 신사도 운동가들은 오늘날에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메시지를 받아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예언자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또한 이들은 특별한 집회로 성령의 은사를 秘傳(Impartation)할 수 있고, 과거와 같이 맹목적인 회개로 인한 죄의 고백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와 기름 부으심 앞에서 통회와 자복으로 본질적인 회개가 이루어진다고 주장하고 있다.

최근에 한국 교회 일각에서 ‘금이뺏 변화 사건이 관심을 끌고 있다. 유대인 출신 브라질 모아실 페레이라(Moacir Pereira) 목사가 이 금이빨 변화와 다른 형태의 신유적 사건의 주역이다. “썩은 이빨이 기도로 금이빨로 변하고 짧은 팔이 길어진다. 키가 작은 사람은 커지고 짧은 다리가 길어진다. 손바닥에 물권을 상징하는 금가루와 기름이 흐른다. 귀가 안 들리려 고생하던 어린이의 귀가 열린다. 그 자리에서 살이 빠져 입고 있던 옷이 흘러내린다. 심지어 얼굴 윤곽이 바뀌어 성형수술을 한 듯한 효과가 나타난다.”

또 알파코스를 관장하는 알파 코리아의 여러 집회에서도 금이빨 사건이 일어난다고 한다. 금이빨 변화는 1970년대 남미에서 처음 시작되어 남아공으로까지 건너갔다. 1990년대 초반 토론토 공항교회 담임목사인 존 아노트가 남아공 집회에 갔다가 이것을 보고 본국의 집회에 적극적으로 도입한 것이 미국과 캐나다의 빈야드 교회들에 확산되었다. 빈야드 교회가 알파코스와 합력 사역을 시작함으로 이 금이빨 변화는 영국의 은사주의 교회들에서 실시되었다. 금이빨 변화는 얼마간 지속되었으나, 1990년 초반 이후로는 이에 대한 보도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 금이빨 변화가 한국에서는 알파코스를 도입한 이후, 2000년대 초반부터 급작스럽게 교계에 화제의 대상이 되기 시작하였다. 알파코스나 알파코스의 내용 중 금이빨 변화와 빈야드적 쓰러짐의 현상 모두 외국에서 들어온 것을 실시하는 것이다.

빈야드 운동이나 신사도 개혁 운동은 미국의 복음주의 교회로부터 지지 세력을 규합한다. 토론토와 안하임 현지집회에 참여한 상당히 많은 보수적 경향의 목회자들을 통하여 이 운동은 한국 교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또 후자는 한국에 지부를 두고 있다. 금이빨 운동은 부흥회의 형태로 한국 교회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 이들의 공통점은 성령님의 나타나심을 무엇보다도 치유에다 두고 있다.

3. 방언과 치유

금세기의 성령운동은 방언과 치유를 중생이나 성령 세례의 표적으로 앞세운다. ‘고전적’ 성령 운동은 성령 세례와 방언을, 빈야드와 이와 유사한 운동은 치유를 포함한 사도행전에서 나오는 모든 은사들이 지금도 나타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1) 성령세례와 방언

성령 세례의 특징으로는 성결, 하나님과의 직접교통의 체험, 증거의 능력, 성령으로 기도함, 일반신자와 구분되는 고상한 체험, 기쁨, (마약)중독에서의 해방 등이다. 그런데 신앙은 이를 받는 조건이며, 사도행전 2장 등은 예외가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이를 받을 수 있다는 본보기이다. 성령 세례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때문이 아니므로, 성령을 특별히 간구해야 한다.

그들은 성령의 모든 은사들이 지금도 교회 안에서 나타나야 한다고 보면서, 은사들 가운데서 특히 방언을 성령 세례의 가시적 증거로 제시한다. 사도행전 2장, 19장을 예라고 말한다. 초기 오순절주의자들은 방언을 생면부지의 언어로 보았으며,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언어기관을 사용하는 성령의 자기현시로 이해했다. 이것이 후기에 가면 인간의 영이 발하는 방언을 뜻하게 되었다. 더러는 성령 세례 시에 나타나는 단회적인 현상으로 보기도 하고, 더러는 지속적인 은사로도 본다. 어떤 이들은 방언의 표적의 의미를 상대화하기도 한다. 더러는 방언을 배울 수 있다고도 한다.

방언을 비롯한 오순절의 은사관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무엇보다도 이들은 성경의 증거보다는 경험을 중시한다. “오순절 운동의 최대 특징은 어떤 구체적인 체험이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데에 있다. 체험이 오순절 운동의 발생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기 때문에, 이것이 성경해석의 열쇠일 뿐 아니라, 그 체험이 없는 자는 대화의 상대도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강림의 의미에 대한 이해가 같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사도행전 등에 기록된 특별은사들은 사도 시대에 교회 설립과 설교의 확립을 위하여 필요했다고 여긴다. 특별은사들은 구속역사의 진전을 알리는 증거이다. 우리가 위에서 이미 지적한 대로 복음이 사도행전 1:8에 예언된 것과 같이 예루살렘에서 땅 끝까지 증거됨을 사도행전의 뒷부분은 보여준다. 특히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은 구원역사의 진전을 이스라엘에게 공표하는 표적이다(사 28:11 이하; 고전 14:21에 인용). 8장에서는 사마리아교회를 통하여, 아브라함에 약속된 모든 족속의 축복(창 12:3)이 실현되었음을 보여준다.

10장의 이방인 교회(고넬료)에 임한 동일한 성령과 방언은 구원의 진전으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경계가 성령 안에서 무너졌음을 보여준다. 19장에 나오는 에베소 교회의 방언은 이 구체적 집단이 성령님을 통하여 그리스도께 연합되었음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시위이다. 이와 같이 하나의 교회가 되었다는 구원역사적인 진전의 표시로 방언이나 예언이 증거로 주어졌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자들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담대하게 말했고(행 4:31), 마음에 기쁨이 충만했다(행 13:52). 또 방언을 말하기도 했고(행 10:46), 예언도 했다(행 19:6). 성령 세례를 받은 자들에 대하여는 성령 충만이라는 표현이 계속 사용되고 있다(행 6:3, 7:55). 사도행전 8장, 10장과 19장에는 성령 세례의 증거들이 나타나지만, 묘하게도 성령 충만이라는 표현은 없다. 즉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은 이처럼 서로 밀접하여 사실상 일치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기쁨과 담대함을 이 증거들에 포함시킬 필요는 없으며, 반대로 방언과 예언을 성령 충만의 표적으로 칭할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성령 운동의 기조를 이루는 배타적인 先중생, 後성령 세례의 도식은 수용할 수 없다.

2) 빈야드와 그와 유사한 운동들의 치유 사역

빈야드 운동에 대해서도 우리는 같은 입장을 취한다. 치유를 포함하는 열정적인 은사를 사역자와 성도의 표지로 삼는 것은 이 운동이 과거의 성결운동과 오순절 운동 및 은사 운동과 맥을 같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굳이 사도행전의 표적과 기사들이 지금도 나타나야 한다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빈야드 운동은 오순절 운동이나 은사 운동보다는 더 전통적이며 대부분의 교리들을 따른다. 가령 중생과 구별되는 성령 세례를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들은 치유나 사역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직접 말씀하신다고 주장하며, 예언의 은사 등을 강조한다. 이런 주장은 계시 이해에 문제를 안고 있다. 즉 이들은 표적과 기사는 직통 계시라고 주장한다. 그런데도 이들은 이런 계시나 은사가 성경을 대치하거나 동등한 권위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고 본다. 은사들은 성경 말씀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전통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이 은사에 나타나는 표적과 기사를 강조하고 체험을 중시하기 때문에, 성경 말씀이 지닌 판단적 권위는 항상 위협받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들이 추구하는 집회는 감정을 앞세우며, 직접 계시를 갈망하는 열광주의적 경향을 늘 수반한다. 성경이 아니라 체험이 판단적 권위를 장악할 위험이 상존한다.

쓰러짐이나 금이빨 변화 사건 등을 과연 성경적인 은사로 볼 수 있을까. 특히 금이빨 변화 현상은 오순절 운동이나 은사 운동 등에서 나타났다는 보고는 거의 없다. 유독 빈야드 운동이나 이와 연관된 운동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지만 넘어짐이나 금이빨 변화를 성경적 신유의 은사라고 보기 어렵다. 아무리 능력 전도를 말하고, 사악한 세대는 이런 획기적인 사건이 아니면 믿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하여도, 이런 현상은 성경적으로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없다. 성경적인 은사 목록에 이런 현상은 나타나지 않는다.

한국 교회 역사의 초기부터 성령님의 역사들이 많이 일어났다. 즉 이런 역사들은 오순절 운동 및 은사 운동과 제 3의 물결이 주도하는 전유물은 아니었다. 이런 운동들이 단지 교회 성장을 위한 방법론에 불과하다면, 이는 성령님의 자유를 훼방할 수 있다. 게다가 인간은 본래 표적이나 기사에 대한 맹목적인 호기심을 가진다. 자연인들이 지닌 일반적 태도는 “기사를 베풀라 그러면 저들의 교훈에 귀를 기울이리라.”는 1蒐?같다. 예수님께서도 자기의 교훈에는 상관하지 않고 표적과 기사만을 추구하는 유대인들을 책망하셨다(요 4:48). 바울 사도도 유대인들이 표적을 구하지만, 자신은 십자가의 그리스도만을 전하겠다고 단언한다(고전 1:22-23).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교회와 성도는 십자가와 부활만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 위에 성령님께서 표적과 기사를 더해 주실 수는 있지만, 성령님의 자유를 방법론적 훈련으로 제한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 부활의 주님(마 28:18)께서 자기가 만드신 세계를 변화시키시는 일에 자기에게 속한 백성(마 1:23!)을 투입하실 것이다. 한국 교회가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다거나, 교회와 성도들이 무능하고 부패하여 실력을 올바르게 행사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지만, 이것은 표적과 기사를 체험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이 권세를 가지신 주님의 참된 백성과 교회로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직 말씀으로만 가능할 것이다(마 28:19-20 上).

한국 교회사에는 건전한 사경회를 통하여 일어났던 많은 회개운동들이 있고, 신유나 전도, 대사회적인 절제운동과 신사참배 거부 운동도 일어났다. 그 이후 일어난 방법론적 성장 운동은 교회의 부흥을 가져왔지만, 동시에 많은 문제까지도 수반하였다. 이 과정에서 무엇보다도 말씀 곧 “복음의 순수성”이 훼손당했다. 예수님께서는 표적을 구하는 이들에게 자기가 사흘 동안 매장 당해 있는 표적 아닌 표적을 말씀하셨다(마 12:38-40). 우리도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라고 고백한 베드로의 고백에 걸맞은 믿음을 갖게 될 것이요, 표적과 기사에 대해서도 균형을 이룬 태도를 취할 수 있을 것이다.

4. 성경적 은사 이해와 적용

우리는 지금도 성령님의 주권에 따라 은사들이 교회의 덕과 유익을 위해 주어질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 하여 성경에 언급된 ‘모든’ 열광적 은사들이 지금도 나타난다고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덕을 세울 수만 있다면 고린도전서 12장의 방언에 대해서는 유연한 입장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교회에 나타나는 은사들 중에는 교회를 세우기보다는 도리어 파괴하는 사단의 역사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령님의 주권을 오히려 무시하는 것이다. 그렇다 하여 이런 역작용 때문에 일부 은사들이 사라졌다고도 말할 수 없으며, 아무런 제한 없이 모든 은사들이 지금도 주어진다고 확언할 수도 없다. 선물인 은사들은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자유에 속하므로 허용적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오순절 사건의 구속사적 특성을 전혀 고려하지도 않고 그 재현 가능성만을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욕을 보임(히 6:6)에 비견되는, 성령님의 자유를 제한함이다.

은사는 교회의 표지가 아니다. 설교와 성례에 주어지는 복음전파에 교회의 생사가 달려있다. 교회가 내외적인 복음 전파를 위하여 간구할 때, 성령님께서는 자기의 기쁘신 뜻대로 여러 은사들을 주실 것이다. 그러나 몇 가지 혹은 모든 은사들의 부재가 교회의 성장을 저해하는 절대적인 원인이라고 단언하지 말아야 한다. 현대 교회가 무능력하고 침체되어 있다면, 우리는 그 원인을 은사가 아니라 참된 복음 설교의 부재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 교회들의 관심이 은사문제에 지나치게 쏠려 있다면, 우리는 먼저 우리 교회 중에 하나님의 말씀이 순전하고 능력 있게 설교되며, 우리가 그대로 살고 있는가를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관심 있게 살펴야 할 것이다.

바울 사도는 은사들을 사모하라고 권면한다(고전 12:31, 14:1). 고린도전서 12장 31절에서는 가장 큰 은사들을 사모하라고 한다. 바울이 이미 12장에서 여러 은사들을 언급한 것을 고려할 때, 이 권면의 의도가 잘 나타난다. 그가 말하는 큰 은사들은 사랑(13장)과 예언의 은사(14장)이다. 우리가 기도로 은사를 간구할 수 있으나(고전 14:13), 모든 은사들이 아니라 위 두 은사들을 우리는 사모해야 한다. 교회를 세우는 데에 특별히 어떤 은사들이 중요함을 알아야 할 것이다(고전 14:6 참고).

무분별한 성령, 은사 운동들이 보여주듯이, 교회의 질서를 깨거나 특정 은사나 또는 그것에 입각한 은사 교리만을 강조하는 것은 바울 사도의 교훈에 위배된다(고전 14:40). 이는 성령님의 자유를 제한하면서 은사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교회를 단조롭게 만들 뿐 아니라 특정 은사를 얻기 위한 방법론의 횡포를 초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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