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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영으로 이미 재림하셨다고?
장운철 목사의 신천지 교리서 <요한계시록의 실상> 분석⑧
2007년 06월 05일 (화) 00:00:00 장운철 기자 kofkings@ame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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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희 씨와 관련된 이슈가 기독교계 신문 지상은 물론, 인터넷 사이트 등을 통해서 끊임없이 오르내리고 있다. 아마도 지난 5월 8일에 MBC TV에서 방영된 PD수첩 영향이 적지 않은 모양이다. 최근 필자에게 기독교계 신문 기자라고 자신을 밝힌 몇몇 기자들이 전화를 걸어왔다. 필자의 ‘이만희 씨 교리 분석 시리즈’ 글을 보고 전화를 걸었다며 그들은 최근 이어지는 이 씨와 관련된 사건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물었다. 필자의 원고 인용 허락에 대한 전화도 있었다.

본 사이트(www.amennews.com) <교회와신앙>에 게재된 앞선 원고 중 ‘성경공부 제대로 하자’는 단락이 있었다. 이만희 씨의 책(천국비밀 요한계시록의 실상, 도서출판 신천지, 2005)을 분석하려고 들춰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성경공부’는 차치하고 ‘성경읽기’라도 제대로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 필자의 마음이다. 필자가 이만희 씨에게 ‘성경을 사심없이 있는 그대로 읽으십시오’라고 말하면 그것이 무례한 것일까?

 

   
 
 
왜냐하면 필자도 섬기는 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있다. 그때 제일 강조하는 말 중의 하나가 ‘성경 읽기를 잘 하십시오’이다. 그 말은 성경을 오해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어처구니없게도 가장 기본적인 ‘성경 읽기’를 제대로 안한 것에서 기인되기 때문이다. ‘가능하다면 다른 번역 성경도 꼭 보십시오’라는 필자의 주문도 바로 그와 같은 이유에서다. 성경 읽기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 말이다. 바로 한국교회에서 대체로 보고 있는 <한글개역성경>이 번역 성경의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성경은 제대로 읽기만 해도 큰 은혜를 받게 된다. 바로 그것을 위해서 성경이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수수께끼와 같은 책이 아니다. 일반인이 함부로 읽을 수도 없으며 또 아무리 읽어도 알 수 없는 그런 책이 아니다. 누구든지 읽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으며 또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책이다. 종종 성경을 읽다가 스스로 교회를 찾아왔다든가 또는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이들을 만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물론 성경 이야기가 약 2천년 이상의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오늘 우리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에 그에 따른 사회, 문화에 대한 공부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또는 성경의 내용 중에는 간혹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다)”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벧후 3:16). 그 어려운 내용에 대해서는 ‘억지로 풀지 마라’는 권면도 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 중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읽지 못하였느냐”라고 반문하시는 경우가 종종 있다(마 12:3 등). 무슨 말인가? 나름대로 율법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바리새인들에게 “율법의 내용을 읽기라도 해보았느냐”며 그들의 율법 오해를 질책하고 있는 장면이다. 즉, 율법을 있는 그대로 잘 읽기만 해도 알 수 있는 진리를 왜 모르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만희 씨의 예를 들어보자. 그는 요한계시록 1장 7절을 해설한다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먼저 성경 본문의 내용이고 그 다음에 이 씨의 해설이다.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계 1:7).

“베드로전서 3장 18~19절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영으로 살리심을 받고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가서 전도하신다고 한다. 이 말씀에 비추어 볼 때 구름 타고 오시는 예수님은 영이시다. 사실 재림 예수님의 모습은 초림 때 이미 제자들에게 공개된 적이 있다(마 17장). 구름 속에서 변형된 예수님의 모습은 성령체였으며 육체가 아니었다. ···한편 구름이 가린 채 하늘로 올라가심을 본 그대로 다시 오신다고 하셨다(행 1:9). 이로 보건대 주께서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것은 영으로 오신다는 뜻이다”(이 씨의 책, p.55).

이 씨는 특히 ‘구름 타고 오시는 예수님’이라는 소제목을 붙이며 위와 같은 해설을 했다. 이 씨의 해설 중에 여러 가지 논할 것이 많이 있지만 핵심은 그가 반복해서 언급한 ‘예수님이 재림할 때는 영으로 오신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예수님의 재림의 모습은 이 씨의 주장대로 ‘영’으로 오신다는 것인가? 성경을 잘 읽어보자. 이 씨가 해설한 요한계시록 1:7을 자세히 읽어보자. 본문의 전후 문맥까지 살펴보아도 이 씨 주장의 근거를 발견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재림의 모습은 어떠한 것인가? 이를 위해 다른 성경을 읽어보자. 요한복음 20장이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 말씀하신 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그런 후 예수님은 그 부활체의 몸으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예수님께서 12제자 중 한 명인 도마에게 나타나셨을 때(20:24), 도마는 ‘그럴 리 없다’며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 도마는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20:25)고 말했다. 무슨 말인가? 내 눈으로 보고 또 손으로 만져봐야만 믿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닌가? ‘영’이 아닌 직접 자신의 눈과 손으로 보고 만질 수 있는 그런 ‘몸’이어야 한다는 것 아닌가? 그래서 예수님은 도마가 원하는 대로 그렇게 다가오신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신령한 몸’(Spiritual body, 고전 15:44)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의 우리 육체와 같으면서도 다른 그런 신령한 육체의 모습으로 말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다시 하늘로 승천하셨다. 사도행전 1장 9~11절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흰 옷을 입은 두 사람’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언급을 했다.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1:11, Jesus will come back in the same way you have seen him go into heaven)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예수님의 재림의 모습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의 모습 그대로란 것 아닌가?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영’(Spirit)으로 승천하셨나? 사도행전 1장 9절은 위에서 이 씨가 자신의 교리를 설명하기 위해서 예를 든 본문이기도 하다. 성경 구절을 인용해 놓고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른다는 말인가? 마치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해 “~읽지 못하였느냐”라고 책망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문맥을 따라 읽기만 잘 해도

성경은 문맥을 따라 있는 그대로 읽기만 잘 해도 큰 은혜를 받게 된다. 성경을 오해하게 되는 근본 원인은 읽기를 잘 못해서이다. 하나님을 발견하려는 것이 아닌 다른 목적을 가지고 읽으면 성경을 오해하게 된다.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지 않아도 마찬가지다. 슬픈 마음을 갖고 성경을 읽으면 그렇게 보인다. 불만스러운 맘으로 읽으면 또 성경이 불만스러운 사건으로 보이기 쉽다. 성경을 경건한 마음으로 올바르게 읽지 못하면 견강부회(牽强附會), 즉 도리나 이치에 상관없이 자신의 주장이나 감정에 빠지게 되는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사야 34:16절을 읽을 때 잘 나타난다. 일부 이단자들이 자주 자신의 목적을 위해 곡해하는 구절 중 하나다. 그 구절을 살펴보자.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사 34:16).

이단자들은 ‘그 짝이 없는 것이 없다’는 위의 구절을 뽑아내어 성경끼리는 모두 짝이 있다는 식으로 해석을 한다. 그래서 주로 신구약을 넘나들면서 마치 같은 그림 짝 맞추 듯이 같은 단어들을 찾아내어 희한한 해석을 만들어 내곤 한다. 듣는 사람은 성경을 사용하기 때문에 아닌 것 같으면서도 특별히 반론을 못하게 된다.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위에 예를 든 사도행전 1:9 본문의 이야기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에 구름이 예수님을 가렸다. 그래서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다. 이단자들은 이때 그 ‘구름’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을 받게 되면 순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동안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이단자는 위의 사 34:16을 언급하며 성경의 다른 ‘짝’을 제시한다. 히브리서 12:1이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히 12:1)

히 12:1의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라는 구절을 뽑아내어 ‘구름=증인들’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것을 다시 행 1:9에 대입시킨다. 그런 후 다음과 같이 해석을 한다. ‘예수님께서 구름에 가리워 승천하신 그대로 오신다는 것은 많은 증인들 사이에서 재림한다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그래서 신도들 사이에 둘러 쌓인 교주 자신이 바로 재림주가 된다는 식이다.

위와 같은 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짝’을 찾는 방식인가? ‘구름=증인들’이란 뜻이라면 처음에 언급한 계 1:7의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는 성경구절의 이해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님께서 증인들을 말이나 당나귀처럼 생각하고 등이나 어깨를 타고 다니신다는 것인가? 생각만 해도 정말 망측하다.

그렇다면 이사야 34:16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는 이사야 34장 1절부터 잘 읽기만 해도 알 수 있다. 무슨 내용인가? 하나님의 진노가 에돔에 임하게 된다. 그래서 에돔은 황무하게 된다. 사람이 살 수 없고 대신 짐승들이 짝을 이루며 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에 많은 사람들은 코웃음을 치게 된다. 이에 하나님의 선언대로 동물들이 빠짐없이 그 짝을 이루며 살게 될 것임을 선지자의 시각에서 확실하게 선언하고 있는 말이다.

성경은 이처럼 문맥을 따라 읽기만 잘 해도 오해하지 않고 오히려 큰 은혜를 받게 된다. 성경의 직접적인 예를 찾아보자. 먼저 창세기 13장의 내용이다. 아브람은 조카 롯과 함께 벧엘과 아이 사이 지역에서 지내게 됐다. 각각의 식구들과 가축들이 많아지게 되어서 그 두 사람은 좁은 그 지역에서 계속 같이 살기 힘들게 되었다. 급기야 각 소속의 목자들의 다툼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래서 아브람과 조카 롯은 헤어지기로 했다. 가족이 헤어진다는 것이 마음이 아픈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브람은 넉넉한 어른의 마음으로 지역 선택권을 조카에게 양보했다. 조카 롯은 풍족해 보이는 땅인 소돔과 고모라 지역을 택하고 그곳으로 떠나겠다고 했다. 그래서 롯은 속한 식구들과 가축들을 몰고 그곳으로 떠나고 말았다.

가족과 헤어지게 되는 아브람의 마음이 어떠할까? 가족과 헤어져보지 못한 사람은 아마 그 마음을 쉽게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브람은 떠나가는 조카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오랫동안 쳐다보며 슬픔을 달랬을 것이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창12:1)는 언약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하소연하였을 수도 있다.

이때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위로의 말씀을 하셨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라)”(창 13:14~16)며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해주신 언약을 상기시키면서 말이다.

이때 하나님께서 드신 비유를 생각해보자. 자손을 많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확실하게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비유가 무엇인가? ‘땅의 티끌 같게 하겠다’("If anyone could count the dust" - NIV)는 것이다. 셀 수 없이 많게 하겠다는 것인데, 왜 하필이면 ‘티끌(dust)’을 예로 들었을까? 많음을 나타내 줄 수 있는 것들 중엔 모래알도 있고, 하늘의 별도 있고 그리고 사람의 머리카락도 있는데 말이다.

이는 조카 롯과 헤어질 때의 아브람의 상황을 이해하면 도움이 된다. 아브람은 떠나가는 조카 롯과 식구들이 자신의 눈에서 사라질 때까지 쳐다보았을 것이다. 그때 아브람이 본 것은 그들과 함께 그들이 일으킨 먼지들이었다. 하나님은 바로 그것을 활용한 것이다.

계속된 이야기를 하나 더 살펴보자. 아브람은 자식이 없어서 근심이 많았다. 그나마 가족이었던 조카 롯까지 떠나고 나니 적적하기 그지없었다. 그 걱정 때문에 밤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무거운 마음을 갖고 있는 아브람에게 하루는 하나님께서 찾아오셨다("the Lord came to Abram in a vision" - NIV). ‘걱정하지 말라’며 위로하기 위해서다. 그런 후 하나님은 아브람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다. 하늘의 수많은 별들을 보여주시며 역시 ‘네 자손이 이와 같이 많아질 것이다’고 약속을 다시 상기시켜 주신다. 그것으로 보아 그 시각은 한 밤중이었을 것이다. 그때 ‘먼지와 같게 하겠다’고 한다면 얼마나 이상할까. 하나님은 바로 아브람이 최고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리고 믿을 수 있도록 자신의 약속을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성경을 문맥을 통해 읽기만 잘 해야 하는 이유를 예수님의 사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요한복음 6장의 소위 ‘오병이어’ 사건 후 그 의미를 설명해 주면서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고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드러내셨다. 다시 말해 먹는 사건이 있은 후 그것을 상기시키면서 먹는 ‘떡’을 비유로 든 것이다. 요한복음 9장에 간음하다 잡힌 여인과 대화하면서도 마찬가지다. 예수님께서는 결론적으로 “나는 세상의 빛이(다)”고 선언하셨다. 왜 ‘빛’이라는 비유를 들었을까? 이는 간음 중 붙잡힌 여인 재판 사건이 감람산에서 새벽(at dawn)에 일어났다는 1절의 기록과 연결해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게 된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비난하기 위해 밤새도록 간음현장을 찾아다니다 현행범을 붙잡았다. 예수님이 감람산에 계심을 알고 그곳으로 그 여인을 끌고 왔다. 예수님은 그들을 말씀으로 물러가게 하셨고 그 여인에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새벽의 붉은 태양 빛이 그곳을 환하게 비취고 있지 않았을까? 예수님은 바로 그 상황을 잘 활용하신 것이다. 우물가에서 ‘샘물’을 비유로 든 것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 4:14).

‘예수재림=영’이라는 이 씨의 교리

이만희 씨는 요한계시록 1:7을 해설한다고 하면서 뜬금없이 ‘예수님의 재림은 영으로 임하신다’고 주장했다(위에 언급). 아무리 계 1:7을 읽고 또 읽어도 그와 같은 해설에 황당해 할 수밖에 없다. 소리 내서 읽고 누워서 읽고 어떻게 읽어도 마찬가지다. 더욱 당황스러운 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이미 재림하셨다는 것처럼 주장한 이 씨의 뒤따르는 해설 때문이다. 살펴보자.

“영이신 하나님께서 초림 예수님과 함께 하셨듯이 영으로 오시는 재림 예수님은 사도요한의 입장에 있는 목자와 함께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권세 받고 증거하며 예수님을 대신하여 행하는 목자를 찌르는 것은 재림 예수님을 찌르는 자가 된다”(이 씨의 책, p.56).

위의 이 씨의 해설을 있는 그대로 읽으면, 예수님이 이미 영으로 재림하여 이만희 씨와 함께 하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예수님이 정말 이 씨의 주장대로 벌써 임하신 것일까? 그리고 이 씨는 재림주의 영을 덧입은 육신이란 말인가? 갈수록 태산이다.

갑자기 이만희 씨와 한동안 함께 일(?)했던 홍종효 씨의 주장이 생각난다. “내가 재림예수다”라고 했던 것 말이다. 두 사람 모두 자칭 재림예수 유재열 씨에게 영향을 받은 이들이다. 그것으로 보아 비성경적인 재림예수 타령이 후대에 계속 이어지지나 않을까 염려가 된다.

이 씨는 ‘재림예수=영’이라는 비성경적인 주장을 펼치기 위해 베드로전서 3장 18~19절의 성구를 인용했다. 그 성구 중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가 이 씨에게 ‘재림예수=영’이라는 자신의 교리를 뒷받침해주는 결정적인 구절로 이해된 모양이다.

그 구절이 이 씨의 주장대로 ‘재림예수=영’이라는 의미를 나타내 주는 것일까? 그렇다면 위에서 언급한 사도행전 1:9의 구절과 서로 모순을 일으키게 되지 않은가? 성경은 스스로 모순을 갖고 있는 것인가? 어떻게 이해를 해야 옳은가?

스케프(J.A. Schep)는 그의 책 <부활체의 본질>(The Nature of the Resurrection Body, 기독교문서선교회, 1991)에서 그 부분을 깊이 있게 잘 다루었다(pp.113-119). 스케프는 위 구절에서 ‘육체’(σαρκι)와 ‘영’(πνεύματι)은 서로 대조되어 있음을 먼저 지적했다. 그런 후 이 두 단어가 모두 특정한 관사나 선행하는 어떠한 전치사도 사용되어 있지 않음을 언급했다. 이것은 그 단어를 ‘여격’(주격, 소유격, 목적격 그리고 여격 중에서)으로 취급해야 한다는 뜻이다. 즉 ‘~에 관하여는’이라는 의미로 풀이해야 한다는 말이다. 흠정역 성경(KJV)의 ‘육체로’, ‘영으로’라고 주격의 의미로 번역된 것은 그런 점에서 재고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한글개역성경도 마찬가지다.

스케프는 계속해서 관사없이 사용된 ‘육’과 ‘영’은 속성을 강조하는 말로 예수님의 부활 전 상태와 후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몸과 영혼을 소유한 ‘육체’였던 자로서, 즉 우리의 죄 때문에 수치스러운 상태에 있는 자로 죽음을 당하신 것이다. 그러나 부활에서 그는 몸과 영혼을 소유한 ‘영’이셨고 또 영이신 자로, 즉 성령의 능력과 생명과 영광이 충만한 자로 다시 살아나시게 된 것이다.

스케프는 성경해석에 있어서 문맥의 흐름을 강조했다. 또한 부활의 다른 성구들과 조화를 이루어야 함을 중요하게 취급했다. 당연한 것이다. 성경이 스스로 모순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상 말이다. 스케프는 위에 언급한 벧전 3:18~19은 고전 15:45~46과 벧전 4:6 그리고 관련된 다른 성구들과 함께 연결해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림예수가 이미 영으로 임했다고 하는 이만희 씨의 교리는 아무리 따져 봐도 ‘영-’ 아닌 것임이 분명하다. 그것은 성경만 잘 읽기만 해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참고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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