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하 목사/ 남부 사랑의교회 담임

 나에게 아주 좋은 친구가 한 사람 있다. 이구광 목사. 총신 신대원을 함께 다녔고 학교신문을 함께 섬겼다. 서로가 잘 되는 것을 진심으로 기도하고 축복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좋은 친구임이 확실하다. 그는 지금 개척교회를 하고 있다. 개척교회를 하면서도 늘 얼굴이 밝고 환하다. 그러나 그에게는 오랫동안 몰랐던 숨겨진 아픔이 있었다. 우물가선교회의 월간지인 <목마르거든> 75호에 소개된 이목사의 아픔을 옮겨본다. 

남은 10년
쿨럭이며 기침을 해대고, 기저귀에 볼일을 보곤 소리를 질러대는 노인들 사이에 맑은 얼굴 하나. 강남시립병원 5층에 가면 하경이를 만날 수 있다. 말도 하지 못하고, 사람도 알아보지 못하는 하경이는 올해 열 살이 되었다. 대여섯 살 정도의 몸집 여기저기엔 수술로 꿰맨 자국이 나 있고 목 부분엔 구멍이 뚫려 있다. 그 곳으로 유동식을 공급받고 그렁거리는 가래도 뽑는다.

심장에서 가까운 부분만 온기가 있고, 한 번도 땅을 디뎌 본 적 없는 발, 한 번도 무얼 잡아 본 적 없는 손은 싸늘하기만 하다. 준뇌사. 그것이 하경이의 상태를 나타내는 단어다. 뇌사와 다른 점은 스스로 호흡이 가능하다는 것 뿐.

뜨고는 있지만,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는 하경이의 두 눈은 호수처럼 맑았다.
하경이 아버지 이구광 목사님이 하경이를 낳을 때는 목사 안수 받고 1년쯤 되었을 때다. 몸이 약한 사모님은 큰아이 하은이를 제왕절개수술로 낳았기 때문에, 하경이 때도 수술을 원했었다. 제왕절개 수술 경험자의 자연분만 유도가 자신의 전공분야 라면서.

결과는 너무나 참담했다. 극심한 산고와 난산으로 아이가 산소 공급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것이다. 큰 병원으로 급히 옮겼지만, 대부분 죽어 버린 아이의 뇌를 살려 내지는 못했다. 오히려 이틀, 일주일을 넘기기 어렵다는 말만 들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어린 생명은 용케 버티고 있었다.

병원측에서는 실수를 인정하고, 지속적인 치료와 한시라도 남의 손길이 없으면 살 수 없는 하경이를 맡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하경이는 집에 한 번 와보지도 못하고, 줄곧 병원에서 8년을 넘게 살았다. 병원측은 하경이에게 무성의했다. 오랫동안 손가락에 묶어 놓은 줄 때문에 피가 통하지 않아 오른손 검지의 한 마디를 잘라내야 했다.

그외에도 가족들의 마음 고생은 심했지만, 1년 전에는 더 큰 일에 부닥치고 말았다. 파업과 IMF로 병원이 문을 닫은 것이다. 아이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맡기로 한 약속은 헌신짝처럼 버려졌다. 다른 어떤 병원에서도 하경이를 받아 주지 않았다.

아이의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사회적인 문제로 부각될 것이 두려워진 보건소에서 지금의 병원에 입원토록 힘을 써 주었다. 하지만 치료비와 간병비는 고스란히 보호자의 책임으로 돌아왔다. 1년여 동안 밀린 입원비가 천 몇 백만 원이 넘자 병원측은 소송을 걸기 위한 내용 증명을 보내왔다.

30여 명이 모이는 작은 교회를 이끄는 하경이 아버지는 그것을 해결할 능력이 없다. 생활비조차도 몸이 약한 사모님이 시간제 아르바이트로 상당 부분을 감당하고 있는 형편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장애인에 대한 관심은 그래도 나은 편이죠. 하경이와 같이 평생을 누워서 남의 도움 없인 하루도 살 수 없는 중증 장애인은 거의 사회적으로 외면당한 상태입니다."

이 목사님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 하경이를 통해 인간을 위해 그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내어주셨던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체험할 수 있었다. 또한 장애인사역에 대한  꿈을 갖게 되었다. 누워만 있어야 되는 중증 장애인과 그 가족이 함께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그런 곳. 물댄동산과 같은 복지재단을 만드는 일이다.

그 비전을 알게 된 어떤 분이 그 사역을 위해 포천에 있는 약 400평의 땅을 무상 임대해 주겠다고 했지만, 농지 전용법에 의해 올해안으로 가건물이라도 짓지 못하면 모두 물거품이 될 지경이다. 이 목사님의 꿈인 '물댄동산'이 한낱 이름으로 끝나지 않도록, 이십 년 정도의 수한인 하경이의 남은 십년이 치료비 때문에 위협받지 않도록 우리가 도와야 할 때다.

 그의 아픈 이야기를 듣자 가슴이 저려왔다. 어떻게 하면 친구를 도울 수 있을 것인지 막막하고 답답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목마르거든>의 "여기에"가 나의 뇌리를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여기에"는 <목마르거든>의 고정란인데 현장의 생생한 신음 소리를 담아내는 르포인 셈이다. 처음에 부랑자이며 알콜 중독자인 한 형제의 이야기가 나갔을 때 한 자매가 5만원을 들고 와서 사랑의 손길은 시작되었다. 몇 년이 지나자 제법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참여해 주었다.

내가 왜 그 생각을 진작하지 못했더란 말인가? 언제나 길은 가까운 곳에 있는 법이다. 길이 없다고 생각될 때 당신의 발 밑이나 장애물 아래를 들추어 보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홍해 바다는 그들의 생명을 재촉하는 장애물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상은 그 바다 밑에 하나님께서는 길을 예비해 놓지 않았던가. 적들을 완전히 따돌리는 완벽한 길을! 내가 이 목사를 도울 수 있는 방법도 너무나도 가까운 곳에 그 길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 목사의 이야기를 <목마르거든>에 실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후원에 참여해 주었던 것이다.

나는 작은 책자 <목마르거든>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다. 작다고 위대하게 쓰임 받지 말란 법은 없다. 나는 지금 <목마르거든>을 가슴에 안고 사랑의 키스를 퍼붓는다.
(월간 <교회와신앙> 2000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