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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 바르게 가르쳐 줄 사람 없다"?
장운철 목사의 신천지 교리서 <요한계시록의 실상> 분석⑥
2007년 04월 26일 (목) 00:00:00 장운철 기자 kofkings@ame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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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인순이의 ‘거위의 꿈’이라는 노래를 들어봤는가? 최근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대중 가요 중 하나다. ‘난, 난 꿈이 있었죠’라는 노랫말로 시작하는 서정적인 곡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 가수가 노랫말처럼 자신의 인생을 꿋꿋하게 살아왔다는 점에서 듣는 이의 마음을 뭉클하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노랫말 조금만 인용해보자.

“난, 난 꿈이 있었죠. 버려지고 찢겨 남루하여도 내 가슴 깊숙이 보물과 같이 간직했던 꿈. 혹, 때론 누군가가 뜻 모를 비웃음 내 등 뒤에 흘릴 때도 난 참아야 했죠. 참을 수 있었죠. 그 날을 위해···. 언젠가 나 그 벽을 넘고서 저 하늘을 높이 나를 수 있어요. 이 무거운 세상도 나를 묶을 순 없죠. 내 삶의 끝에서 나 웃을 그 날을 함께해요.”

흑인 혼혈아로 한국 땅에서 살아온 가수 인순이의 삶이 어떠했는지 머리 속에서 그려지지 않은가? 특히 민감한 시기인 청소년기 시절의 모습들 말이다. 그래서 원곡을 부른 가수가 따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 노래가 인순이의 곡처럼 쉽게 기억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누구나 꿈(vision)을 꾼다. 자신의 삶이 순탄하건 그렇지 않건 상관없이 말이다. 오히려 자신의 삶이 힘들고 어렵다면 어려울수록 그의 꿈은 인생 중에 더욱 진한 향기를 내뿜게 될 것이다. 그것밖에 의지할 게 없으니까.

필자도 꿈이 있었다. 초등학교 때 만화가게 주인 아들인 친구를 바라보며 만화가의 꿈을 꾼 적이 있었다. 아버지가 고물상을 하는 친구네 집에 놀러갔다가 놀란 적이 있었다. 그 집에는 소위 없는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표준전과’로 불렸던 당시 유명 참고서가 그 친구 집에는 언제나 4~5권씩 시리즈로 있었다. 비록 1년 전 것이었지만 모든 게 그 집엔 차고 넘쳤다. 그래서 꿈을 바꿔 버렸다. 하하하. 지금 생각하니 정말 재미있는 추억이다. 그 후 우주과학자, 오케스트라 지휘자 등으로 필자의 꿈은 학창시절 성장기에 맞추어 계속 발전(?)했다.

이만희 씨의 책(이만희, 천국비밀 요한계시록의 실상, 도서출판 신천지, 2005)을 분석하면서 그의 꿈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누구나 꿈을 향해 달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오랜 인생길을 걸어오면서 가져온 이 씨 자신의 꿈 즉, 그가 주장하고 싶은 바를 그의 책을 통해서 한 번 살펴보자. 먼저는 성경 본문이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

“···그러나 이 세상에는 계시록의 말씀을 아는 사람도 없고 그 실상을 본 자도 없는데 어느 누가 바르게 가르쳐 줄 수 있겠는가. 본문에서 말하는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는 ‘그 뜻을 아는 사람’이지 단순히 읽는 자가 아니다. ···책을 받아먹은 요한은 읽는 자가 되고 그에게 배우는 나라와 백성과 방언과 임금은 듣는 자들이 된다”(이 씨의 책, p.50).

이 씨는 요한계시록 1:3을 해설한다며 주어진 성경 본문 자체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려기보다는 자신의 어떠함을 드러내려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본 원고가 6차례를 거듭해 오면서 그 사실을 파악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 씨의 성경 해설에는 큰 특징이 하나 있다.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해 줄만한 ‘근거’가 매우 부족하다는 점이다. “이 세상에는 계시록의 말씀을 아는 사람도 없(다)”고 주장한 근거가 도대체 무엇인가? 또한 “어느 누가 바르게 가르쳐 줄 수 있겠는갚라고 말한 것은 요한계시록을 바르게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이만희 자신을 언급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러한 주장의 일말의 근거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계 1:3의 성경본문을 설명하면서 펼친 주장이니 그 성경의 올바른 주해를 통해서 그의 주장이 옳은지 틀린지를 살펴보자.

먼저 같은 본문의 다른 번역본 성경을 살펴보자. 먼저 의역, 즉 오늘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의미를 충분히 살려 번역한 <공동번역>과 그것보다는 역동적으로 원문의 의미를 조금 더 살린 <표준새번역>과 <쉬운성경>이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이 책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실천하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이 일들이 성취될 때가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공동번역).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사람과 듣는 사람과 그 안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지키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그 때가 가까웠기 때문입니다”(표준새번역).

“이 계시의 말씀을 읽는 자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 또한 이것을 듣고 그 가운데 기록된 것을 지키는 자들 역시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이 모든 말씀이 이루어질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쉬운성경).

모든 번역 성경에서 풍기는 이미지는 ‘복이 있다’는 긍정적인 면이다. 이 씨가 언급한 대로 '아는 사람이 없다', '누가 … 있는가' 등의 부정적인 그림을 그리기가 힘들다. 성경을 접하는 이들과 ‘복’의 긴밀한 관계의 이유에 대해서 ‘때가 가까웠기 때문’이라고 정확히 언급하고 있다. 성경을 접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읽고, 듣고 그리고 그것을 지키는 것 등이다.

 

   
 
   ▲ '복'을 선언하고 있는 마5:3의 헬라어성경
 
보다 원문(헬라어)에 충실하게 문자적으로 번역한 영어성경(NRSV)와 그것에 비해 오늘의 의미를 역동적으로 살린 영어성경(NIV)를 계속해서 살펴보자.

 

Blessed is the one who reads aloud the words of the prophecy, and blessed are those who hear and who keep what is written in it; for the time is near”(NRSV).

Blessed is the one who reads the words of this prophecy, and blessed are those who hear it and take to heart what is written in it, because the time is near”(NIV).

흥미로운 사실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 첫 번째로, ‘복이 있도다’라는 선언적인 의미의 단어인 ‘Blessed’가 문장 맨 앞에 먼저 나온다는 것이다. 이는 그 단어를 강조하겠다는 저자의 의도다. 대부분의 한글 번역 성경은 ‘···하는 사람은’이라는 식으로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한글성경은 복 받을 사람이 되기 위한 조건을 설명하는 것처럼 이해되기 쉽다. 즉, 이러이러한 일을 해야 복된 사람이 된다는 식이다. 그러나 영어성경의 구조는 먼저 복에 대한 선언에서 시작된다. 어떠한 사람의 모습이 아닌 하나님의 무조건 적인 복이 우선되고 있다. 우리의 모습은 그 다음이다.

헬라어성경에서도 이 부분이 잘 나타나 있다. ‘마카리오스’(μακάριοϛ)라는 ‘복되도다’라는 단어에서부터 본문이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향해 일방적으로 복을 선언하고 있는 장면이다. 우리가 그것을 위한 어떠한 행동을 하기 이전에 말이다. 이 단어는 마태복음 5장의 소위 ‘팔복’ 본문에서도 잘 나타난다. 구약의 시편 1편도 마찬가지다. ‘마카리오스’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에쉐르’(רשא)라는 말로 문장을 시작하고 있다. 히브리어성경의 헬라어번역본인 70인경(LXX)을 보면 ‘에쉐르’를 역시 ‘마카리오스’로 번역해 놓고 있다. 신구약성경을 통해 흐르고 있는 개념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복이 있는 존재임을 먼저 선언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어떠한 모습 때문이 아닌 하나님의 일방적인 손길이다. 이것이 은혜가 아닌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된 우리가 복 받을 만한 어떤 행동을 할 수 있겠는가? 또 그렇게 할 수는 있는가?

 

   
 
   ▲ 히브리어성경(시1:1). 오른쪽에서부터 읽는다
 
다시 요한계시록을 살펴보자. 이러한 감격적인 복의 선언이 요한계시록에서 한 번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무려 7번이나 등장한다.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David Aune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David Aune, Revelation. W B C 52a. word books, publisher. Dallas, Texas. 1997. p.19).

 

“1.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이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1:3) 2.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14:13) 3.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16:15) 4.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된 말씀이라 하기로’(19:9) 5.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20:6) 6.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22:7) 7.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22:14).”

두 번째로, 수(數)의 문제다. 계 1:3의 영문번역본을 자세히 보면 ‘읽는 자’(단수)와 ‘듣고 행하는 자’(복수)의 수가 각각 다르게 구분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단수와 복수 문제는 눈을 크게 뜨고 성경을 꼼꼼히 읽지 않으면 놓치기 쉽다. 한글성경 중에서는 <쉬운성경>이 그것을 잘 표현해 놓았다. <개역성경> 역시 이 부분을 나타내고 있다.

이만희 씨는 그의 해설에서 이 수(數)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개역성경>만 잘 봐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인데 왜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을까? 그 의미를 잘 몰라서일까 아니면 자신이 의도하려는 요한계시록 해설과 그 방향이 달라서일까?

이 씨가 본문의 수에 대해 전혀 몰랐다고 보기 힘들다. 그는 그의 책 <천국비밀 계시록의 실상>(1993년 도서출판 신천지)에서 이 부분을 언급한 바가 있다. 역시 계 1:3을 해설한다면서 말이다. 직접 살펴보자.

읽는 자는 단수로써 처음으로 깨달은 자를 말하는 것이니 본문 1, 2절과 10장에서 하나님의 책을 받아먹고 나라와 백성과 방언과 임금에게 전하라고 명을 받은 사도요한이다. 듣는 자들은 모든 나라, 백성, 방언, 임금들이요, 그 가운데 지키는 자들은 구원받을 종들 곧 144,000인이며, 기록한 것은 계시록 전장의 내용들이다”(위의 책 pp.35~36).

 

   
 
   ▲ 이 씨의 글(천국비밀 계시록의 실상) 중에서
 
이 씨는 분명히 단수와 복수의 개념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지적했다. 그러나 그의 해설은 성경이 스스로 말하고자 하는 바에 대한 관심보다는 자신의 어떠함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다음은 단수와 복수를 언급하면서 내린 그의 결론 부분이다.

 

“그러므로 나라와 백성과 임금과 방언들(계 10)은 오늘날의 사도 요한격인 사명자의 말씀을 예수님의 말씀으로 여기고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만일 자기의 구습에 젖은 전통이나 권위나 지식으로 대언자의 증거를 무시하면 지옥의 판결을 면치 못한다”(위의 책 p.36).

마치 성경의 ‘읽는 자’의 단수 표현은 사도 요한격의 사명자라고 주장하는 자신을 가리키는 것처럼 해설을 하고 있다. 그 근거로써 그는 ‘읽는 자는 처음으로 깨달은 자를 말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읽는 자’라는 뜻이 그것인가?

만에 하나 이 씨의 주장이 옳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이 씨의 스승격인 유재열 씨가 ‘처음 깨달은 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만희 씨는 자칭 재림예수 유재열 씨를 따랐던 사람이다. 이 씨뿐 아니다. 유재열 씨의 잠적(?) 이후로 여러 핵심 추종자들이 이 씨처럼 독자적인 단체를 설립해 분가했다. 홍종효(증거장막성전), 심재권(무지개장막성전), 정창래(성남장막성전) 등이다(장운철, “장막성전의 후예들”, 월간<교회와신앙> 1995년 4월호). 이 씨는 자신의 동기생이나 선후배 중에 자신만이 ‘처음 깨달은 자’임을 설득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위의 수(數)는 어떤 의미를 나타내는가? 먼저 첫 단어에 언급된 ‘복되도다’의 선언에 수혜자들이 바로 그들이 된다. 일방적인 복의 선언에 대해 해택을 받는 이가 바로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지키는 자들’ 전체인 것이다.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복수 단어다. ‘듣는 자들’(ἀκούοντεϛ)과 ‘지키는 자들’(τηροῦντεϛ)은 접속사 ‘그리고’라는 뜻의 ‘카이’(και)로 연결되어 있으며, 또 앞의 하나의 관사(οἱ)에 모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같은 사람들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즉, ‘듣고 행하는 자들’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문맥상 훨씬 부드럽다.

그렇다면 단수인 ‘읽는 자’(ἀναγινώσκων)는 누구인가? 분명한 것은 그 ‘읽는 자’도 복의 수혜자라는 사실이다. 결코 복의 선언자나 주체자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성경 본문 자체가 그렇게 설명하고 있다. 위의 이만희 씨의 주장처럼 어느 특정인이나 심지어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을 해설한다면서 성경 자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거나 또는 그럴 마음이 없을 때나 나올 수 있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왜 ‘읽는 자’(단수)와 ‘듣는 자들’(복수) 그리고 ‘지키는 자들’(복수)의 수(數)를 다르게 표현했을까? 그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예배의 모습을 그리면서 편지를 썼기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요한계시록의 저자 요한은 자신의 편지를 한 사람이 일어서서 크게 읽고 회중이 그것을 잘 듣는 모습을 머리에 그렸을 것이다. 또 그것이 일반적인 모습이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Philip E. Hughes, Revelation, 오광만 역. <요한계시록> (서울: 여수룬, 1993) p.23). 위의 영어성경(NRSV)에서 ‘크게 읽는 자’(one who reads aloud the words)라고 번역해 놓은 것은 그런 의미에서 본문의 뜻을 잘 살려주고 있다.

헨드릭슨은 “예언들은 손으로 썼기 때문에 그 양이 한정되어 있었다. 책이 많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쉽게 구해 볼 수 없을 정도로 비쌌다”며,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이 내용을 읽을 수 없었기 때문에 예배드리는 성도를 위해 큰 소리로 읽어주도록 낭독자를 임명했었다”고 했다(William D Hendricks, Revelation, <요한계시록>, 아가페출판사, 1895, p.57). David Aune도 “이 절(계1:3)은 저자가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인 기독교 회중들 앞에서 자신의 작품이 소리내어 읽혀지도록 의도하고 그렇게 꾸몄다는 것이 명백하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고 말했다(David Aune, p.344).

필자는 고등학교 시절에 꿈이 사라졌다. 아니, 꿈을 생각해 볼만한 시간적, 마음적 여유가 없었다고 하는 게 더 옳을 것 같다. 대학입시라는 것 때문이다. 많은 한국의 고등학생들이 그와 같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대학 입학 후 다시 꿈이 생겼다. 그리고 그 꿈은 지금까지 동일하다. 바로 ‘내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잘 드러내겠다’는 것이다. ‘무슨 일’은 특별히 거짓이나 악한 일이 아닌 이상 ‘어떠한 직장에 속하든지’라는 개념으로 이해했고, 하나님을 잘 드러내기 위해서는 주어진 성경을 또한 꾸준히 연구하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마틴 루터 킹 목사도 꿈이 있었다. 흑인인권운동가였던 그는 ‘I have a dream’이라는 제목의 위대한 연설을 남기기도 했다. 흑인 인권 차별에 대항하며 인권의 동등권이 이루어질 날을 기대하는 내용이다. 다음은 그의 연설의 일부다.

“ I have a dream that one day every valley shall be exalted, and every hill and mountain shall be made low, the rough places will be made plain and the crooked places will be made straight and the glory of the Lord shall be revealed and all flesh shall see it together”(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모든 골짜기들이 솟아오르고, 모든 언덕과 산들이 낮아지며, 거친 곳이 평지가 되고, 굽은 땅들이 곧게 되며, 주의 영광이 드러나, 모든 육체가 함께 그것을 보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꿈을 ‘하나님의 꿈’과 연결시켰다. 즉, 하나님의 영광이 자신의 삶을 통해서 드러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자신이 고생하고 희생당해도 좋다는 적극적인 의미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1964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그러나 4년 후인 1968년 암살당하면서 생을 마쳤다.

서두에 언급한 가수 인순이가 가스펠 음반(CD)을 냈다.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라는 찬송가의 가사 일부를 음반 타이틀로 정했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등의 찬송가는 물론 ‘Dolorosa’ 등의 우리 귀에 익은 가스펠 송을 그만의 특유한 창법으로 소화를 했다. 그는 음반 설명서를 통해 ‘저는 행복한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했다. 진흙과 같은 보잘 것 없는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께서 꽃처럼 아름답게 만드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은혜를 많은 이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서 찬양을 한다고 했다. 그의 꿈이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가수 인순이의 가스펠 음반
 

 

 

 

참고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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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막성전의 후예들’, 월간 <교회와신앙>, 1995년 4월호
------, ‘이만희 이단성 밀착확인’ , 월간 <교회와신앙>, 1995년 5월호
------, ‘이단사이비문제 종합 1’ , 월간 <교회와신앙>, 2000년 1월호
------, ‘이단사이비문제 종합 2’, 월간 <교회와신앙>, 2000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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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iam D Hendricks, Revelation, <요한계시록>, 아가페출판사, 18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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