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하 목사/ 남부 사랑의교회 담임

  나이가 들고 세월이 가도 소녀 같은 사람이 있다. 성은이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성은이의 나이는 서른에 다가서고 있지만 그녀의 속 사람은 마냥 어린아이처럼 순진무구하다. 언젠가 제자훈련 시간에 있었던 일이다. 자라오면서 부모님들에게 가장 듣기 싫었던 말이 무엇인가를 공개하는 시간이었다. 어떤 형제는 아버지로부터 "내가 왜 이런 고생을 하는지 아니?

 바로 네 놈들 때문이다"라는 말을 그렇게 듣기 싫었다고 했고 또 어떤 형제는 "곰 사촌"라는 말을 들은 것이 그렇게 싫었다고 했고 어떤 자매는 어머니로부터 "넌 어쩌면 그렇게 네 아버지를 닮았니?"하는 말이 그렇게 듣기 싫었다고 했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말은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듣기 싫었다고 했다. 그때 성은이는 어머니로부터 "그렇게 해서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래?"라는 말을 종종 들었다고 한다.

 그렇다. 사실 성은이는 이 사악한 세상을 살아가기에는 부적합하게 보인다. 그렇다고 어리석다든지 바보스럽다는 뜻이 아니다. 어떻게 살면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며 어떻게 행동하면 손해를 보지 않게 될 것인지를 모르는 사람은 아니다. 단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며 그렇게 살기에는 마음이 전혀 모질지 못하다.

남을 괴롭게 하면 자신이 더욱 괴로운 사람이다. 누구에겐가 험한 소리 한 마디 했다가는 밤새 가슴을 끙끙 앓는다. 그래서 그런지 성은이를 보면 요즘 사람 같지가 않다. 바닷가에 누워 쏟아지는 별을 보는 것 같다. 세상에 막 모습을 드러낸 제비꽃 봉우리 같다. 그 제비꽃 이파리에 수줍게 맺힌 이슬 같다.

 지난 1월이었다. 하루는 성은이가 나에게 봉투 하나를 쑥스러운 듯 건넨다. 내 방으로 들어와 봉투를 열어보니 만원 권 스물 다섯 장이 들어있다. 편지도 있다. 그 내용을 여기다 자세히 옮길 수는 없지만 대충 이렇게 적혀 있었다.

 '목사님 저의 1월 사역비예요. 사랑하는 주님께 나의 사랑을 어떻게 고백할까 하다가 이렇게 하기로 결정했어요...'

 나는 그 편지를 잃어내려 가다가 눈물이 울컥 쏟아졌다. 성은이는 우물가의 풀타임 사역자다. 그는 오직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자신을 몽땅 바쳤다. 그녀는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25만원을 가지고 한 달을 살아가야 한다. 25만원을 가지고는 저축이란 상상할 수 없는 실정이다. 그런데도 99년 첫 달 사역비를 통째로 주님께 드리다니 그것은 전 재산을 주님께 드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때 나는 그 봉투를 붙잡고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다.
 '주님! 성은이가 재정적인 문제로 고민하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비록 성은이가 통장에 돈이 쌓이지는 않게 된다 할지라도 필요할 때마다 주님께서 즉각 응답하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성은이의 순수하고 온전한 재물을 기뻐 받으셨음이 틀림없다. 금년 8월에는 중국에 우물가선교회에서 집회를 나가게 되었다. 성은이는 중요한 일원이었다. 그러나 각자가 부담해야 하는 경비는 거의 70만원, 직장을 가지지 않은 풀-타임 사역자들에게는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처음 해외 집회를 나가는 것도 아니고 매년 나가는 것이니 만큼 더욱 그랬다. 그런데 놀라웁게도 성은이의 구좌는 순식간에 채워졌다. 아니 넘쳤다. 그래서 부족한 지체들을 도와줄 수 있었다.

 나는 성은이가 헌금한 돈을 가장 가치 있게 쓰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과부의 전 재산과도 같은 것이며 마리아의 향유같이 향기로운 것이니 함부로 사용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우물가선교회의 사역자들 가운데 30명 정도는 중국으로 선교를 나가지만 나머지는 남아서 우물가를 지키게 되었다. 우리는 8월 10일 공항에 모였다. 남는 형제들과 자매들이 환송을 하러 나와주었다. 나는 출구로 향하면서 리더 간사에게 성은이가 헌금했던 25만원을 건네주며 이렇게 말했다.

 "함께 데리고 가지 못해서 무척 미안하구나. 이 돈 가지고 남은 사람들 삼겹살이라도 한 번 실컷 먹으렴!"
 리더 간사가 싱끗 웃었다. 아마 하나님도 씽끗 웃으셨을 것이다.

 성은이는 내 생일날 이런 편지를 보냈다.
 "하루는 가냘프고 외로움에 지친 새 한 마리가 잘 펴지지도 않는 날개로 우물가에 앉았습니다. 그 새는 물을 마시며 물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때론 미칠 듯이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렇게 우물가에서 보내는 가운데 새는 점점 강해졌고 날개에는 깃털이 빗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깨달았습니다.

 자신을 쭈-욱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새는 그 사람이 무섭고 어려웠습니다. 춥고 어두운 밤, 작은 새는 몹시도 앓았습니다. 추위와 외로움이 사로잡았습니다. 그 때 그 사람은 그 작은 새에게 다가와 따듯하게 보살펴 주었습니다. 그 작은 새는 마구 울었습니다. 그 사람은 무서운 사람도 다가가지 못할 사람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후로 작은 새는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믿게 되었습니다. 따르게 되었습니다."

 나에게 어떤 것보다도 값진 선물이 되었다. 목회자에게 그가 아끼는 성도들이 성장하고 행복해지는 것보다 더한 기쁨은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세월은 살같이 빠르게 흘러갈 것이다. 세상은 더욱 악해 질 것이다. 세상은 인간들이 쏟아놓는 공해로 짜증나는 환경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성은이처럼 무공해 같은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있는 한 이 땅에 사는 것은 행복할 것이다.
(월간 <교회와신앙> 1999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