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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의 중심인물이 과연 '이만희'인가
장운철 목사의 신천지 교리서 <요한계시록의 실상> 분석②
2007년 03월 14일 (수) 00:00:00 장운철 기자 kofkings@amennews.com

<요한계시록의실상> 분석① [지난기사보기]

필자는 축구경기를 좋아한다. 야구나 농구보다 더 좋아한다. A매치, 즉 국가대표팀 경기는 가능하면 꼭 보려고 노력한다. 그중에서도 일본과의 경기는 모든 계획을 취소할 만큼 반드시 챙기려고 한다. 그것이 어디 필자만의 마음이겠는가? 한국 사람이라면 대체로 그렇지 않을까? 요즘은 축구의 본가인 영국에서 뛰고 있는 한국 선수들의 모습을 보면서도 그러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축구는 재미있다. 왜 그럴까? 알게 모르게 학습되어져 온 마음 속의 그 무엇이 민족심을 은근히 자극하는 요소도 있겠지만, ‘스포츠’ 그 자체가 우리네 인생과 매우 흡사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특히, ‘빠름’, ‘정확성’의 조화로 만들어지는 결정적인 순간들은 감동 그 차제인 것이다.

필자가 기자로 처음 입문해 교육을 받을 때의 일들이 새삼 생각난다. ‘잔잔한 호수와 같은 평온한 감동이 배어있어야 한다’, ‘몽둥이로 후려치는 것과 같은 긴장감이 있어야 한다’는 등의 기사 작성에 관한 교육이 있었다. 병아리 기자로서 감당할 수 없을 만한 내용들이었다. 그저 숙제를 제출하듯 기사를 작성하곤 했다. 틀리지나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사실 그 당시엔 전부였다. 그러한 것이 선배들의 글들을 베껴 쓰고 참조하면서 하나둘씩 마음 속에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이단문제를 취급하는 특성(?)으로 인해 필자의 글쓰기는 ‘정확성’과 ‘긴장감’으로 보다 강화된 면이 없지 않다. ‘사실 확인’을 위한 이중삼중의 노력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타날 수 있을 상대방의 반격까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마치 전쟁이라도 치르려는 군인의 마음과도 같았다. 명예훼손이라는 법적인 문제에서부터 전화와 직접 방문을 통한 항의성 상담까지 수시로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 며칠 전에도 한 단체의 추종자가 필자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자신이 모시고 있는 분에 대해 필자가 부정적으로 기사를 썼다며 법적으로 제재를 가하겠다는 등 협박성 항의를 한 것이다. 이쯤 되면 논리적인 설명은 사실 무용지물처럼 된다. 그 단체의 대표자가 왜 비판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더 이상 그의 귀에는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듯 좀 더 심하게 표현하자면 이단문제를 취급한 대부분의 기사는 ‘사느냐 죽느냐’ 하는 긴장감 속에서 작성된 것이다.

이단문제를 포함해서 글을 쓸 때마다 필자의 마음 한 구석에는 항상 빈그릇이 있었다. 무엇인가를 아무리 담으려고 해도 잘 채워지지 않는 그릇이었다. 요즘에 와서 그것이 ‘잔잔한 호수와 같은 평온한 감동’을 위한 그릇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축구경기가 재미있었던 이유는 단지 훌륭한 선수의 표면적으로 드러난 멋진 경기 모습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 선수와 얽힌 여러 가지 사연들, 어렸을 때의 모습이나 가정 형편, 실패했을 때의 이야기 등이 오늘의 모습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 것이지 않을까.

이번 이만희 씨의 <요한계시록 실상> 분석 기사를 쓰면서 ‘감동’까지 은근히 스며들게 하려는 것은 무리일까? 전투화 끈을 조여 매며 그런 도전을 해 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제부터 성경 본문의 주해 접근을 통해 이만희 씨의 이단성을 밝혀보도록 하겠다.

요한계시록의 중심인물은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요한계시록 1:1)

지난 시간에는 요한계시록의 주제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만희 씨가 의미하는 바와 성경 자체가 말하고 있는 바가 상당히 거리가 있음을 발견했다. 물론 정통 학자들의 의견도 이만희 씨의 그것과 차이가 많았다. 이 시간에는 성경 본문을 통해서 요한계시록의 중심된 인물이 누구일까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먼저 이만희 씨의 주장을 살펴보자.

“계시록이 응할 때에는 이미 죽은 지 오래인 사도 요한이 이 땅에 살아나서 자신이 기록한 말씀과 그 실상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요한과 같은 입장의 목자’가 나타나 실상 계시를 보고 듣고 증거하게 된다. 계시록 성취 때 필요한 계시는 계시록 전장에 약속한 말씀대로 나타난 사건을 증거하고 알려주는 실상 계시이지 환상 계시가 아니다. 그러므로 계시록 성취 때에는 모든 성도가 사도 요한의 입장으로 오는 대언의 목자에게 계시록의 실상을 증거받아야 한다”(이만희 씨의 책 <요한계시록의 실상>, 2005. p.45~46. 이하 ‘이 씨의 책’).

 

   
 
   ▲ 자신을 드러내려는 이 씨의 책 일부.
 
위의 글을 보면 이 씨는 사도 요한과 자신을 같은 저울 위에 올려놓고 직접적으로 비교했다. 요한계시록의 첫 번째 장, 첫 번째 절의 해설에서 이 문제를 언급한 것은 그 만큼 비중있게 말하고 싶다는 의도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사도 요한보다 자신이 더 훌륭하다는 식으로 언급하고 있다. 사도 요한의 어떠함보다는 자신을 더 드러내려는 방식이다.

 

급기야 이 씨는 자신과 구원 문제를 직접적으로 연결시키기까지 하고 있다.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구원’을 자신의 어떠함과 연관시켜 ‘개인 우상화’의 단초를 마련하려고 한 것이다. 그의 책을 계속 살펴보자.

“계시록에 예언한 말씀이 이루어질 때는 계시록에 약속한 구원의 처소와 구원의 목자를 찾아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 그 구원의 목자는 니골라당과 싸워 이기는 자이며 구원의 처소는 그가 인도하는 장막이다”(이 씨의 책, p.40).

 

   
 
   ▲ 신도들로부터 선서를 받고 있는 이만희 씨(가운데 흰 옷)
 
이와 같은 이 씨의 논리는 그의 책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이 씨가 오래전에 발행한 <새하늘과 새땅>이라는 전단지에서도 같은 논리의 글을 만날 수 있다. 직접 살펴보자.

 

“필자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모든 성령의 이름으로 묻는다. 왜, 말씀을 믿지 않느냐, 또 신천지 예수교를 믿지 않느냐, 그리고 증거장막성전을 믿지 않느냐 하겠다. 그러면 믿지 못할 이유를 말해야 할 것이다. 본인은 증거하노니 말세에 약속한 신천지 예수교 증거장막성전은 진리의 성읍이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성전이므로 만방은 이곳으로 와야만 구원이 이루어진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약속이다”(<새하늘과 새땅> 1991년 1월호).

이 씨는 요한계시록의 결론도 그와 같다는 식으로 해설했다. 즉, 자신의 단체와 자신을 만나야만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요약한 요한계시록의 결론은 약속한 목자와 약속한 성전을 찾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이 씨의 책, p.499)

이전에 기록했던 이 씨의 다른 책에서도 같은 식의 내용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이것이 그가 어쩌다가 한 말이 아닌, 그의 사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찾고 만나야 할 사람은 사도 요한격인 야곱(보혜사:이스라엘) 곧 승리자를 만나야 아버지와 아들의 계시를 받게 되고 영생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이만희 씨의 책 <계시록의 진상 2>, p.52)

필자는 오래된 이 씨의 설교 테이프를 가지고 있다. 직접적인 그의 육성으로 요한계시록을 해설한 것이다. 이 씨의 사상을 그의 육성을 통해 직접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1차 자료라 생각된다. 필자는 이미 그의 설교 녹취록을 월간<교회와신앙>(95년 5월호)에 게재한 바 있다. 이 씨의 설교 녹취와 분석을 언론사 중 유일하게 보도했다는 점은 적지 않은 개가라 여겨진다. 일부를 살펴보자.

“계시록에 보니까 2장, 3장에 보면 예수님의 오른손에 있는 일곱 사자마저도 다 떨어지고 밥이 되어 더러운 성경이 다 되어 버렸는데, 누구에게 칭의를 듣겠느냐 이겁니다. 그래서 다시금 사도요한적인 한 사명자를 택해서 하늘로 불러 올려서 모든 것을 보여주고 그 다음에 7장에서 책 주고 11장에서 뭐 줍니까. 지팡이 주고, 그러고 17장에 가서 시험을 거칩니다. 또 마태복음 4장에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은 것처럼 또한 광야에 나가서 7머리의 마귀에게 시험을 받고 그 다음에 이긴자가 되어가지고 그 다음에 그를 통해서 만국을 다시릴 철장을 이기는 자에게 준다고 계시록 2장에 약속을 하지 않았느냐 이겁니다. 그러면은 그분이 왔다, 그러면은 만나봐야 되겠습니까, 아니고 나는 감람나무 믿으니까, 나는 저 통일교 누굴 믿으니까, 나는 뭐 누가 체격이 좋으니까, 그러면 되겠습니까”(이만희 씨의 1989년 4월 16일 설교 녹취)

이쯤 되면 이 씨가 요한계시록을 해설한다면서 결국 ‘누구’를 드러내려고 하는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누구인가? 이만희 그 자신이지 않은가? 지난 시간에도 언급한 것처럼 이 씨의 논리대로 요한계시록을 해설한다며 한 인물을 유별나게 드러내려고 하는 곳이 이 씨측 외에 여러 곳이 있다는 점이다. 이 씨와 같은 인물도 여러 명 존재하고 있는 셈이다. 아니 각 단체는 이 씨보다 자신의 교주가 더 뛰어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 요한계시록
 
얼마 전 이 씨측 단체로부터 이탈해 올바른 복음으로 다시 신앙생활을 시작한 한 청년의 생생한 간증을 시청했다. 또 그와 같은 이들을 직접 만나보기도 했다. 그들의 한결같은 반응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믿음을 다시 갖게 된 것에 대해 “하나님께 무조건 감사합니다”라는 것이었다. 또한 과거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 “왜 그렇게 그 사람들의 말만을 믿었는지 모르겠다”며 안타까워했다. ‘눈에 무엇인가 씌었던 것 같다’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그러나 눈물을 글썽이는 이들도 있었다. 과거 자신의 모습이 아무리 생각해도 답답하기도 하고 아쉬웠었던 모양이다. 그들이 전하는 이만희 씨에 대한 내용은 위에 언급한 내용들보다 더 노골적이었다. 신도들은 대체로 이만희 씨를 독특한 존재로 믿고 있다는 것이었다.

 

과연 그런가. 성경은, 특히 요한계시록은 이 땅에서의 한 특정인을 드러내기 위해서 기록된 책일까? 더욱이 그 특정인이 ‘이만희’라는 사람일까?

성경(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라는 말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는 요한계시록의 기원과 목적 그리고 축복까지 담고 있는 중요한 서두 문장이다. 다시 말해 요한계시록의 첫 문장은 이 책이 누구에서부터 시작되었으며, 그 주된 목적이 무엇이고 또 그로 인한 축복이 무엇인지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요한계시록) 스스로가 말하고 있는 성경의 그 중심 인물이 누구라는 말인가? 성경 내용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요한계시록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이곳과 2:5에서만 쓰였다(홍창표 p.122). ‘예수’가 그리스도, 즉 구원자임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성경 스스로 증거하고 있는 구절이다. ‘예수’라는 용어는 9번 사용되었으며, ‘주 예수’가 2번(계 22:20, 21) 그리고 ‘주’(계 14:13)라고만 쓰인 곳은 1번이다. ‘예수’만이 우리의 ‘주’(Lord, 主)가 되신다는 역시 직접적인 증거다. 그리고 ‘그들의 주님’이라는 말도 1번(계 11:8) 사용되었다. ‘그리스도’라는 말이 단독으로 사용되었을 때는 그 앞에 항상 정관사가 붙었다(계 11:15, 12:10, 20:4, 6). 이는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명확히 가리켜 주고 있다는 의미다. 과연 누구를 가리키고 있는가? 그분은 바로 ‘예수’시다.

‘예수’, ‘그리스도’, ‘주’라는 직접적인 용어는 아니지만 ‘예수’를 지칭하는 구절들은 요한계시록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계 1:18 등). 그 한 구절만 살펴보자. “곧 산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계 1:18).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확증하는 구절 중 하나다. 구원뿐 아니라 심판의 주권도 그에게 속해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예배 때마다 고백하는 사도신경의 내용과도 연결이 된다. 바로 예수님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이라고 단언한 말이다. 이 신경은 악인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 될 것임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며 그분만이 구원자이시며 심판자이심을 증명하고 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도 이를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예수님 외에는, 다른 어떤 이에게서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에 우리가 구원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행 4:12 쉬운성경). 누가 예수님 이름 대신에 자신의 이름을 집어넣으려고 하는가?

 

참고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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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희 이단성 밀착확인’ , 월간 <교회와신앙>, 1995년 5월호
------,  ‘이단사이비문제 종합 1’ , 월간 <교회와신앙>, 2000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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