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하 목사/ 남부 사랑의교회 담임

수요일이었다. 나는 몹시 힘들어 하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불안하고 두렵고 조급하였다. 사람과 사역에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런 증상은 내 영혼의 붉은 신호인 것이다. 나는 성령충만한 은혜를 받아야만 했다.

오후 6시쯤 되어서 박옥규 씨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목사님 잘 지내셨어요? 건강하세요?"
"그럼, 박옥규 씨는?"
나는 의례적으로 인사를 받았다.
"저두 잘 지내요."
그러나 겉모습을 보니까 잘 지내고 있지가 않은 것 같았다. 그의 옷은 꼬죄죄했고 몸에서는 고약한 냄새가 났다. 그 냄새는 어찌나 독한지 골이 다 아팠다. 뿐만 아니라 입에서는 술냄새까지 푹푹 풍겼다.

그는 부랑자였다. 4년전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그는 40여 일을 유치장에 들어갔다 나온 후에 나를 찾아왔었다. 그와 만나서 대화를 해 보니까 행색과는 다르게 의외로 대화가 되었다. 조금만 도와 주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방도 얻어 주고 일도 시켜보았다. 그는 일어서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다시 그를 무너뜨린 것은 술이었다. 그는 일어섰다가는 무너지고 부축해서 일으켜 세워놓으면 그놈의 술 때문이 또 무너졌다.

박옥규 씨가 알콜중독자가 된 데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가정환경이 그다지 좋지 못한 집안에서 자라났다.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계모에게서 자라났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되었다. 둘 사이에 결혼 이야기가 오고갔다. 그녀를 위해 그는 중동 근로자로 나갔다. 그런데 돈을 벌어가지고 돌아와 보니 결혼을 약속했던 여자는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땅을 치면서 울부짖었다. 그러나 분노와 절망을 삭일 수가 없었다.

그는 주머니에 돈도 있고 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술을 마셔대기 시작했는데 돈이 바닥이 날 때쯤 되어서는 알콜중독자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 상처 때문인지 그는 여성들에게 대해서 옷이 야하다느니 바람끼가 엿보인다든지 하면서 비아냥거리기를 잘한다. 그러나 그의 비아냥거림은 남에게 상처를 낸다든지 해치지는 않는다. 어찌보면 박옥규 씨는 천성이 그렇게 모질 수는 없는 사람인지 모른다.

얼마전에 박옥규 씨는 무슨 광고회사에 입사를 했다며 전화를 했었다. 내심 축하를 받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아마도 사람들에세 이렇게 자기를 축하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보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회사로 축전을 띄어 주었다. 그랬더니 박옥규 씨는 대번에 전화통에 대고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은 목사님밖에 없다는 등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그가 그 광고회사의 판촉 및 영업 사원으로서 오래 견뎌주기를 기도했다.
나는 그를 건너다 보며 물었다.

"직장에 들어갔다는 사람이 몰골이 그게 뭐요?"
" ··· "
그는 내 질문에는 대답을 않고 지금은 기억도 되지 않는 엉뚱한 질문을 내게 건냈다. 말이 궁하다는 뜻이리라. 나는 더 이상 그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저녁 먹었어요?"
"괜찮아요."

나는 저녁 식사시간도 되고 해서 박옥규 씨를 데리고 음식점으로 들어가 도가니탕을 사먹었다. 그는 몇일동안 굶기라도 한 듯이 허겁지겁 먹는다. 식사를 끝낸 후에 나는 예배를 드리러 교회로 향했다.

내가 막 교회 로비로 들어서는데 박옥규 씨가 뒤쫒아와 나를 붙잡는다. 언뜻 보니까 그의 손에는 교회에서 발간하는 신문 <우리>와 우물가선교회의 <목마르거든>이 들려 있었다.
우물가 선교회의 소책자인 <목마르거든>은 박옥규 씨에 대해서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목마르거든>에는 매 호마다 특별히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나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한 꼭지씩 소개되고 있다.

이 글을 읽는 많은 사람들이 후원금을 보내 주신다. 어떤 사람은 수술비를 충당하기도 하고 또 거리에 나앉게 된 어떤 사람은 조그만한 전셋집을 얻기도 하는 것이다. 추석 못미쳐서도 나는 두툼한 후원금 봉투를 들고 두 집을 다녀왔다. 한 집은 장애인 가정인데 남편은 곱추고 아내는 하반신를 사용하지 못하는 가정이었다다. 또 한 분은 젊어서 남편에게 버림을 받은 여성이었는데 서초동 꽃동네에 살고 있었다. 그 분은 음식도 만들 수 없을 만큼 심한 무기력증에 빠져 있었다. 당뇨라고 했다. 나이가 마흔을 갓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송곳니 하나만을 남기고 죄다 빠진 상태였다. 이들에게 후원금은 너무나도 절실한 것이었다. 피나 살같은 것이었다. 후원금을 전달하고 오면서 얼마나 기뻤는지···. 하나님은 아신다.

<목마르거든>에서 후원금 사역이 발전되게 된 것은 전혀 의도된 일이 아니었다. 수 년전에 박옥규 씨의 이야기가 <목마르거든>에 실린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글을 읽은 어떤 성도가 그에게 오만원을 전해 달라고 보내 주었다. 나는 돈을 박옥규 씨에게 전한 다음 그 다음호 <목마르거든>에 그 미담을 몇 줄 적게 되었다. 그런데 그 때부터 독자들은 어려운 사람들의 이야기가 소개되면 후원금을 보내 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 액수가 점점 높아갔다. 어떤 때는 천만원을 넘는 경우도 있었다.

박옥규 씨가 나에게 말했다.
"목사님 돈 좀 주세요?"
"돈?"
"꼭 필요해요."
그러나 나에겐 돈이 없었다.

"돈 가진 것이 없는데… 2만원 가지고 있던 것 저녁 먹는 데 다 써버렸잖아."
나는 지갑을 흔들며 말했다. 그러나 박옥규 씨는 물러서지 않았다. 돈을 좀 달라고 계속 졸라대는 것이 아닌가? 나는 좀 귀찮은 생각도 들었으나 한편으로는 나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 고맙게 느껴졌다. 그래서 주변을 둘러보았더니 안타깝게도 아는 사람이 눈에 들어오지를 않았다. 그렇다고 아무 성도에게나 돈을 빌릴 수도 없고, 사무실 직원은 이미 예배를 드리러 예배실로 내려간 후였다.

나는 박옥규 씨에게 사정을 했다.
"박옥규 씨 지금은 돈이 없어. 돈이 있어야 주지!"
그러나 박옥규 씨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돈을 요구했다. 예배는 이미 시작이 되었다. 짜증이 났다. 나는 그에 약점을 건드려서라도 그의 요청을 봉쇄하기로 마음 먹었다.
"또 술마실려고 그러지?"
"아, 아니예요! 돈이 꼭 필요해요."
"어디에 쓸려구?"
"글세 필요해요."

피로감이 나를 덮쳤다. '박옥규 씨 내게 돈 맡겨 놓은 것 있어' 하고 쏘아 주려는 순간인데 문득 나에 대한 박옥규 씨의 믿음이 참 좋다는 생각이 퍼득 들었다. 박옥규 씨는 나한테 간청하면 결국 나올 수 있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같은 것이 무엇인데!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그의 요청을 들어 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한 묘한이 떠 올랐다. 우물가선교회에서 운영하는 <아름다운땅>(커피숍)에서 돈을 빌려 주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운땅>으로 전화를 걸어 박옥규 씨를 보낼테니 오만원을 주라고 부탁했다. 그는 싱글벙글 사라졌다. 나는 박옥규 씨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박옥규 씨, 그 돈 가지고 술마시면 안돼!"
예배를 드렸다. 개인기도 시간이 되었다. 누가복음 11:5～13절 말씀이 나를 사로 잡기 시작했다.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 내 벗이 여행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저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내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그 소용대로 주리라.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 너희 중에 아비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생명을 주시지 않겠느냐?"

이 말씀속에 한밤중에 벗에게 가서 떡 세 덩이를 달라고 강청했던 밝혀지지 않는 인물 '누가'와 박옥규 씨가 겹쳐졌고 마침내는 나도 그들속에 겹쳐졌다. 나는 가슴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도 필요했던 나는 하나님께 성령을 구하는 강청의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께서 충만한 은혜를 부워 주셨다. 나는 박옥규 씨에게 돈 몇만원을 주었지만 박옥규 씨는 나에게 돈으로 계산될 수 없는 엄청난 영적인 부요함을 깨닫게 해 주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 주변에 나에게 도움을 구하러 나타나는 모든 사람들의 실상은 나에게 무엇인가를 주기 위해 나타나시는 변장한 그리스도인지도 모른다.
(월간 <교회와신앙> 1997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