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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무게
2007년 01월 18일 (목) 00:00:00 김기홍 목사 khk0725@hanmail.net

철학적으로 신학적으로 지난 세기를 지배했던 단어가 있다. “실존주의”이다. 주제문장은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이다. 백만 원이란 본질은 사람과 시간과 장소라는 실존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 가난할 때와 부할 때 은행에 있을 때와 내 지갑에 있을 때 느낌이 전혀 다르다. 그러니까 “진리는 주관이다”는 말이 나온다.

“나”라는 개념은 언제나 같다. 하지만 살고 있는 실존의 “나”는 그렇지 않다. 하루 종일 일 년 내내 같은 사람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변하고 있는데 어떤 게 정말 나인가? 분명한 것은 실존의 나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으며 무엇인가 계속 선택을 해야 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실존의 나는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

심지어 나는 언제라도 없어질 수 있다. 그 점은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 먹고 쉬고 편안해야 하고 번식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짐승이 아니다. 그렇다고 신도 아니다. 그 중간쯤 된다. 그대로 있는 게 아니라 잘못하면 짐승보다 못한 수준으로 떨어진다. 그러니까 불안하다. 성경적으로 볼 때는 죄 때문에 영혼이 불안한 것이다.

1. 세상적인 실존

이 불안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어디 있을까? 모든 문제가 이 근본적인 실존의 문제에서 나온다. 세상 속에 홀로 던져졌다. 하지만 완전히 수동적이기만 한 존재는 아니다. 어느 정도 자유가 있다. 자유가 있으니 무언가 선택해야 한다. 선택한 뒤에는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은 더욱 불안하기만 하다.

<이것이냐 저것이냐>란 책에서 키엘케고르는 인간 실존을 세 단계로 본다. 심미적, 윤리적, 종교적인 단계이다. 실제로 이것은 그의 생애의 세 단계이기도 했다. 심미적 단계는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충동적이다. 책임이나 의무감은 없다. 반성도 없다. 그냥 관능을 따라 산다. 그러나 이러한 삶은 결국 실망 속에 좌절하고 만다.

물위에 조약돌을 튀겨보라. 물을 차고 몇 번 솟아오른다. 그러나 결국 힘을 잃고 물에 빠진다. 인생이 그렇다. 좌절의 물속에 빠진다. 이리해도 안 되고 저리해도 안 된다. 절망이 밀려온다. 어떻게 할까? 술에 빠져 보낼까? 그렇게 미리 죽을까? 이것은 참된 실존이 아니다. 짐승 수준이다. 그렇게 평생을 보내는 사람이 많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 다음은 윤리적 단계이다. 피할 수 없는 자신의 운명을 바라본다. 모든 자원은 제한 되어있다. 우리 몸도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사는 건 힘들다. 늙고 병들고 가난하다. 그러나 절망하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인간의 존엄성을 가지고 운명을 대할 수 있다. 나누고 사랑하고 의롭게 당당하게 망해간다.

까뮤가 쓴 <페스트>가 그런 내용이다. 페스트가 퍼진다. 사람들은 죽어간다. 사람들이 탈출을 시도한다. 못가는 사람들은 두려워 술 마시며 될 대로 되라 한다. 그러나 한 의사는 사람들을 돌보며 페스트와 싸운다. 그러다가 자신도 쓰러진다. 이런 식이다. 실존을 변화시키지는 못하지만 존엄한 인간으로 망해가는 것이다.

이러한 결단은 삶의 여러 분야에서 영웅시되었다. 예수의 죽음도 그렇게 보여졌다. 약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로마제국과 그들에게 빌붙어서 사는 지도자들을 대항해서 정의를 선포한다. 결과는 의로운 청년 예수의 죽음이다. 그 죽음을 본받아 노동운동이 나온다. 경제적 착취에 대항해 분신자살한 청년이 영웅이 된다.

힘없는 노동자들을 깨우치기 위해 대학생들이 위장 취업했다. 노동자들에게 재벌과의 투쟁을 가르친다. 그러다가 감옥에 간 사람들도 많다. 노동자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결과는 계층 간의 투쟁이다. 그렇게 해서 노동자들의 권익이 향상되기도 했다. 하지만 삶은 여전히 고통스러웠다. 고통의 원인이 훨씬 더 깊었기 때문이다.

재벌이나 노동자나 누구에게나 뿌리 깊은 것은 욕심이요 죄이다. 그것을 가진 채로 실존은 고통을 벗어나지 못한다. 사람들은 질문을 던진다. 과연 이것이 더 나은 실존인가? 복지가 좋아지고 분배가 잘 이루어지면 더 나은 실존이 되는가? 일본이나 미국이나 더 나아가 스웨덴처럼 되면 다른 지역 사람들보다 더 행복한가?

2. 종교적인 실존

유한한 존재인 인간 노력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다른 선택을 시도한다. 아무렇게나 쾌락을 찾아 그날그날 살다가 죽을 수는 없다. 비극적 영웅주의 역시 좌절 속에 망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리하여 이제 키엘케고르가 말한 실존의 세 번째 단계로 도약하게 된다. 하나님을 의지해 영원한 의미를 추구하는 종교적 단계이다.

이 단계도 둘이다. 첫째가 율법적 신앙이다. 자기를 절대자에게 맡긴다. 하지만 자신의 노력, 자신의 의, 자신의 선행을 통해 구원을 얻으려고 한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예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

여기서 자기를 부인하는 방법이 요점이다. 누구 힘으로 하는가? 예수의 복을 받으려면 나를 비워야 한다.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 자신의 욕심과 목표를 버리고 예수의 뜻을 따라야 한다. 이게 쉬운가? 옳은 일인 줄은 알지만 사람들은 싫어한다. 제자들을 보니까 너무 비참했던 것이다. 그중에 출세하고 부자 된 사람 있는가?

뿐만 아니라 십자가 지고 따르란다. 이 십자가가 무엇인가? 인간이 경험하는 실존 상황이다. 누구나 한계 속에 태어난다.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다. 더 잘 생기고 더 젊고 건강하기 바란다. 더 부자고 실력 있기 바란다. 더 좋은 집안에서 더 좋은 환경에서 사랑과 존경 받기 바란다. 그러나 현실은 안 그렇다. 이게 십자가이다.

그뿐이 아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십자가는 사명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는 것이다. 사람들을 사랑하고 돕고 구원하라고 한다. 자신을 희생하고 세상을 밝히라고 한다. 남의 짐도 지고 걸으란다. 내 재산도 시간도 힘도 주어야 한다. 예수처럼 살아야 한다. 이것이 제자의 길이다.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

내 힘만으로는 십자가 지기가 쉽지 않다. 교회마다 사람이 넘친다. 그러나 뜨거운 가슴을 가진 <페스트>의 의사는 드물다. 세상 사람과 차이가 없다. 교회는 나오지만 자기 부인도 십자가도 없다. 내가 교회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 봉사도 아무 것도 안 하는데. 남 위해 무슨 고난을 받았는가? 내 가족 돌보기도 벅차다.

사람들은 신자들에게 행동을 요구한다. 얼마나 많은 작은 영웅들이 요구되는지 모른다. <페스트>의 의사가 되라고 한다. 노동운동하는 이들만큼도 열정이 없다면 제자라고 할 수 있는가? 교회 나와 구원 받았다 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구원의 능력이 없다. 빛깔만 신앙인이다. 불안을 벗어나지 못한다. 좋은 실존이라 할 수 없다.

3. 주 안에서의 실존

분명 십자가는 우리의 실존이요 사명이다. 우리는 쾌락만을 위해서 태어나지 않았다. <페스트>의 의사처럼 의미 있는 삶을 살도록 운명지어 졌다. 그것은 힘들다. 정말 영웅의 길이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를 지라고 명령을 받는다. 그것이 실존이다. 그래서 이제 키엘케고르는 두 번째 종교적 단계를 소개하고 있다.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이것은 피할 수 없는 명령이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그 일을 할 힘을 주신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나님의 일을 사람의 방법으로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자신을 부인할 수 없다. 아무리 부인해도 나는 그대로 있다. 내 환경과 내 실력도 내 성질도 그대로이다. 오직 예수가 내 안에 들어와 나를 변화시켜야만 부인이 된다. 더 크고 더 좋은 것이 들어와야 나쁜 것이 나간다. 예수를 받아들이라. 예수만을 믿고 의지하라. 그것이 소위 “주 안엽 있는 것이다.

어떻게 내 성질을 부인하나? 어떻게 내 병을 부인하나? 어떻게 내 무능과 내 한계를 부인하나? 주 안에서 한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 “내게 능력 주시는 주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주 안에서란 예수를 믿고 의지해 그의 힘으로 산다는 말이다. 실존은 주 안에 있을 때 온전해진다. 은혜와 영광으로 충만해진다.

내가 불안하고 고통하는 순간은 주 밖에 있다는 증거이다. 항상 자기를 부인하라. 주를 인정하라. 그런 다음에야 나는 십자가를 질 수 있다. 삶의 십자가, 가정의 일원으로 가족들의 십자가를 진다. 사회와 국가의 일원으로, 교회에 속한 주의 몸으로 우리는 편하려고만 해서는 안 된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라.

이제 하나님의 힘으로 영웅의 길은 열린다. <페스트>에 나오는 의사처럼 비장하게 망해 가는가? 나 혼자 고생만 하며 외롭게 스러져 가는가? 희생은 아무런 대가도 알아주는 사람도 없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생명을 받았고 그 힘으로 십자가를 진다. “주 안에서”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현재와 미래에 영원한 상을 받는다.

바울의 말이다. “언제나 은혜의 시간이요 구원의 날이다. 나는 매사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환난, 궁핍, 고난, 매 맞음, 억울함, 수고로움의 십자가를 졌다. 주께서 힘을 주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죽는 자 같으냐? 영원히 산다. 근심하는 자 같으냐? 기쁨으로 넘친다. 가난한 자 같으냐?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한다. 모든 것을 가졌다.”

어떤 것이 현재 나의 실존인가? 심미적 나, 윤리적 나, 율법적인 나, 그리고 복음적 나. 우리는 네 단계를 오고 가고 한다. 최상의 실존을 선택하라.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오늘도 주는 말씀하신다. “나를 믿고 의지하라. 내가 지배하도록 자신을 부인하라. 사명의 십자가를 져라. 나와 함께 진다면 많이 질수록 가벼우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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