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순 전도사/ 멤피스 주립대학 교육학 박사 수료, 현 서울침례교회 아동부

어린이 상담은 가정과 교회에서 부모님이나 교사들이 해야 할 가장 근본적인 책임 중 하나다. 많은 성인들은 자신들의 아동기 시절에 정신적 위기나 상처, 외로움, 소외감, 열등감 등으로 아픔을 겪었으며, 그러한 사이에 누군가 따뜻하게 내 말을 들어주거나 어깨를 두드리며 "나는 널 믿어"라고 한 마디만 해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하고 바랐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인이 된 현재 부모님들이나 주일학교 교사들은 나의 자녀 혹은 나의 학생들에게 그러한 영적, 정신적, 심리적, 신체적, 사회적 위기가 진행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어린 시절 건전한 가족 대화를 통한 상담을 받으며 성장한 어린이는 성인이 된 후에도 훌륭한 상담가의 역할을 가정이나 교회 혹은 사회생활에서 감당해 낼 수가 있다.

어린 딸을 소아암으로 잃은 목사님이 있었다. 목사님의 딸과 친구였던 한 소녀와 그 부모님은 목사님을 위로하러 갔다. 너무나 상심한 목사님은 모든 문상객을 거절하고 자신의 딸이 사용했던 방에서 나오질 않았다. 실망감과 무거운 마음으로 목사님 댁을 나오려는데 그 소녀가 느닷없이 친구의 방으로 혼자 걸어갔다. 부모님이 말릴 사이도 없이 소녀는 방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방에는 죽은 친구의 아버지만이 있었다. 그리고 한참만에야 소녀가 나왔다. 놀랍게도 그 목사님의 손을 잡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어머니는 소녀에게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어보았다. 소녀의 대답은 의외에도 간단했다. "전 그냥 Ann이 너무 보고싶어 Ann 아빠의 목을 껴안고 '나도 Ann이 너무 보고싶어요'하고 둘이 함께 울었을 뿐이에요"

소녀의 간단한 행동은 훌륭한 상담가의 역할을 해낸 것이다. 목사님은 소녀에게서 자기와 같은 'Ann을 향한 그리움'을 읽은 것이다.

모든 상담이 그렇지만 가정과 교회에서 어린이 상담의 첫걸음은 상대방의 입장에 서는 것이다. 소녀가 Ann 아빠의 입장에 선 것처럼….

경쟁 사회가 심화되며, 직업을 가지고 사회생활을 하기를 원하는 가정주부의 숫자가 증가하면서 방과 후의 어린이들의 스케쥴도 바빠진다. 자연히 부모와 자녀들 간의 대화가 줄어들고, 공통 관심분야도 사라진다. 어린이들은 집에 있어도 컴퓨터라는 또 다른 세계 속에 살아가며 자신의 의견을 표현한다든가 부모의 마음을 읽는다든가 하는 의사소통에 적신호가 번쩍이게 되는 것이다.

필자는 미국유학 10년 동안 매 토요일마다 한글학교에서 이민 2세들에게는 한글과 한국을 가르쳤고 성인 이민자들에게는 영어를 가르쳤다. 많은 이민자 부모들은 낮에는 식당이나 공장에서 일하고 집에 와서 저녁을 먹었다. 또한 저녁 때도 청소 대행업 등으로 부부가 함께 일을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자녀들의 보장되고 윤택한 미래를 위해 자신을 희생시키는 한국 부모들은 많았다. 

이민 온 후 1-2년이 지나면, 어린이들의 유창했던 한국말은 유창한 영어로 바뀌어간다. 불행한 것은 부모들의 영어는 전혀 또는 아주 조금씩 발전을 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L의 아버지는 오랫동안 당뇨병으로 병원을 드나들었고 L의 어머니는 3남매의 앞날을 위해 밤낮으로 일하였다. 어느 날 L의 어머니가 필자를 찾아왔다. 함께 L의 학교에 가줄 수 없겠느냐는 것이었다. L의 학교에서 전화가 오는데 영어가 서툰 부모를 부끄럽게 여긴 L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딴청을 피운다는 것이다.

L은 7학년(중1) 여학생으로 6년전에 이민와 한국말을 알아듣기는 하는데 말하는 것은 상당히 서툰편이었다. 필자는 L에게 엄마를 모시고 선생님과 면담을 갈 것이라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L은 필자 혼자 오라고 했다. L의 방에서 장시간 L과 대화하며 무엇이 문제인지, 사태의 발생은 언제부터 일어나고 있었는지 서서히 간파하게 되었다. L의 아버지는 용접공이었고, 어머니는 브라우스 공장에서 일을 하셨다.

부모들은 자신들이 많이 배우지 못하였고 또 먹을 것을 얻기 위해 고생하며 자랐기에 그들의 생각으로는 자신들이 10대라면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를 짐작해 그것이 바로 그들이 자녀들이 원하는 것일 거라고 단정지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결정이 자녀들이 더 나은 미래를 가져올 것이라고 믿고, 병을 얻을 정도로 자신들을 바쳐 희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L과 형제들이 원했던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어른들이 미국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애쓰고 있을 때 L과 형제들 역시 학교에서 '친구들 사이의 압력'을 느끼며 친구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고민하며, 자신들을 '미국화'하기 위해, 전심전력을 다했던 것이다.

그때 그들은 부모들이 그들의 고충을 들어주고 함께 고민해 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부모들은 퇴근 후에는 막대걸레와 청소도구를 챙겨 저녁 일자리로 출근하였고 L과 형제들은 고민을 해결하는 방법을 스스로 배우게 되었다. 그럴수록 부모와의 관계는 멀어만 갔다.

토요일 한글학교에서나 주일학교에서 L은 부모에 대한 반항적인 태도를 스스럼없이 표출하였고, 이제는 더 이상 자유롭게 대화도 통하지 않게되자 부모는 더욱 안타까워하였다(필자의 생각에 L은 부모의 한국말 꾸중을 다 알아듣는 것 같았다. 단지 못 알아듣는 척 하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늦은 후회를 하였다. 한 명이라도 집에 있었으면 아이들에게 한국말 할 기회를 놓치지 않아 적어도 한국말은 잊어버리지 않았을 거라고 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문제는 더 심각한 데 있었다. 어머니는 L이 도대체 뭐가 부족한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L은 어머니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L이 원하는 대로 필자 혼자 학교를 갔다. 부모 소환장을 벌써 2번이나 보냈었는데 부모에게서 연락이 없었다고 한다. L이 없앴던 것이다. 사유없는 결석이 잦다는 것이다. 어머니에게는 일단 비밀로 하고, L과 대화를 나누었다. 학교를 빼먹고는 쇼핑몰(shpping mall)을 배회하기도 하고 정학 당한 친구들과 어울리기도 했다. 그래도 토요일 한글학교와 주일은 부모의 손에 이끌려 빠지지 않고 교회에 출석을 잘 하였다. 토요일과 주일을 최대한 이용하여 L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정학 직전에 대리인으로 사인을 하고 L을 구제하였다.

L이 부모의 입장에 서서 부무를 이해하기 위해서 필자는 우리 나라 근대 역사와 그 시기에 자란 어른들의 궁핍함, 한국 부모들의 일반적인 자녀관에 대해 시간을 두고 조금씩 L에게 이해시켜 주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도 미국에서 자녀를 양육하고 미국 학교에 자녀를 보내려면 미국 학부모들이 자녀를 존중하듯이 어머니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조금씩 나누었다. 실제로 L이 부모의 입장에 서는 것보다 부모를 이해시키는 것이 더 어려웠고 시일도 오래 걸렸다.

나폴레옹이 헬레나 섬으로 유배 가 있을 때 생긴 일이다. 나폴레옹이 병사 하나와 산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 산에서 한 농부가 나무를 해서 끌고 내려오고 있었다. 길을 비키지 않는 농부에게 나폴레옹 옆의 병사는 화를 내었다. 비록 유배생활을 하고 있지만 황제 앞에서 무례하게 길도 비키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때 나폴레옹은 이렇게 말했다. "그냥 두어라 그 사람의 입장에 서 보아라 무거운 짐을 가진 사람이 비켜주어야겠나 짐이 없는 사람이 비켜 주어야겠나 우리가 비켜주어야 하지 않겠나."

교회에서 어린이 상담을 위해서는 어린이의 입장에 서야 한다. 어린이의 입장에 서기 위해서는 어린이를 잘 알아야 한다. 어린이를 잘 알기 위해서는 평소 꾸준한 관심과 대화로 어린이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상대방의 입장에 선다는 것을 상담의 첫걸음이다. 상대방의 입장에 올바로 선다는 것을 상담의 50% 성공이다.
(월간 <교회와신앙> 2001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