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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레스디아스와 한국교회 영성훈련의 과제
1995년 06월 01일 (목) 00:00:00 류영모 ryuym@amennews.com

류영모 목사(한소망교회 담임)

한국교회는 100주년이 지나면서 정체성의 위기를 느끼게 되었다. 이유는 세계 교회가 놀랄만큼 양적 성장의 축복을 누리게 되었으나 한국교회가 이러한 성장에 대처하기 위한 신학적, 실천적 준비를 충분히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는 데 있다. 이는 마치 몸집은 어른의 수준에 도달했으나 정신적으로는 자기 정립이 되지 못하여 정신적 위기를 경험하고 있는 청소년의 모습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 미성숙의 구체적인 모습으로 한국교회는 복음을 율법주의적으로 이해해왔고 윤리만을 강조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개인주의적 구원만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외면한 채 화해 대신 분열을, 영서 대신 미움을 사랑 대신 이기심만을 조장해 왔다.

 이러한 갈등과 혼란을 부정적인 의미로서보다는 긍정적인 요소로 받아들이려는 노력들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혼란은 한국교회가 과거 아동기적인 신앙의 자세를 포기하고 성숙한 신앙으로 탈바꿈하려는 몸부림을 낳게 된 것이다. 이러한 와중에 등장한 단어가 영성(Spirituality) 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바람직한 것이었고 희망적인 조짐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영성이라는 문제는 개념정립조차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신학적인 검증도 진지하게 거치지 못한 채 한국교회의 보편적인 용어가 되어버렸다. 그러다보니 영성, 영성신학, 영성훈련에 대한 상이한, 아니 양극단적인 이해와 평가가 상종하게 된 것이다.

 이에 발을 맞추어 오랜 영성훈련의 전통을 가진 천주교의 터전에서 준비되고 검증되고 실시되고 있던 꾸르시오(Currssillo)라는 프로그램으로 전해지게 되었고, 그것이 개신교 전통신학에 근거한 성서적, 신학적 검증이나 목회적, 교회론적 거름도 없이 한국교회에 전해지게 되었다.

 때문에 본 <교회와신앙>지에서도 '뜨레스디아스 대점검'이라는 주제 아래 한국교회 안에 조용히 영성훈련 프로그램으로 자리잡음을 해 가고 있는 뜨레스디아스에 대한 바른 평가와 분석 및 논의를 통하여 무엇이 한국교회를 유익하게 하며 무엇이 한국교회를 해롭게 하는가를 밝혀보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본 주제는 세 가지 가설을 가능케 한다.
 첫째, 뜨레스디아스 운동은 그 원리와 목적 및 진행 방법이 복음적이지 못하여 한국교회를 해치고 있는 것인가.
 둘째, 과연 이 운동은 성서적이고 복음적인 프로그램으로 한국교회 2세기를 섬길 수 있는 훌륭한 영성훈련, 제지훈련 프로그램인가.
 셋째, 이 운동은 단순한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이 운동을 추진하고 관리하는 사람들의 신학과 영성 여하에 따라 한국교회를 해칠 수도 있고 유익하게도 할 수도 있는 열려진 프로그램인가.

  영성훈련
 어떤 문제든지 그 문제를 객관적으로 다루고자 할 때에 하나의 과제가 있게 마련인데, 그것은 '가치 중립성'의 문제이다. 주어진 문제에 대한 편견이나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고 다룰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치 중립성의 가능성 여부를 논하기 전에 본 논제를 접근함에 있어 최대한 그렇게 하려고 노력은 해보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것을 판단하는 준거가 있어야 하는데 그 준거를 영성신학, 영성훈련에서 찾고자 한다. 왜냐하면 뜨레스디아스는 이론신학이나 교리신학이 아니요, 생활훈련이요, 프로그램이기 때문이다.
 
 첫째, 영성이라고 할 때 한자어로 품성 성(性)자를 쓰기 때문에 영적인 품성을 개발하는 것이 영성훈련이라고 쉽게 오해를 한다. 물론, 동양 종교의 영성들은 자기를 비우고 내면의 어떤 품성을 개발하는 것이 주 목적이었다. 그러나 성경이나 기독교적인 전통은 다르다.

 기독교 영성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생활이요, 예수 그리스도에게 충성하고 헌신하는 삶이요,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자 하는 실천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적인 영성훈련은 아래와 같은 세 단계의 통합과 조화를 이룰 때 참된 영성훈련이라고 말한다.

 첫째 단계, 초월적인 전재인 하나님을 만나는 것.
 둘째 단계, 그분을 만나므로 내 존재가 거듭나고 변화되는 것.
 셋째 단계,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고 세상으로 파송받아 거기서 헌시하고봉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기독교 영성훈련이다.

 그래서 오성춘 교수는 영성훈련을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이 세상 한 복판에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정의했고, 박홍 교수는 "믿는 신앙을 실천하는 실천적 영적 지혜"라고 말한다.

 둘째, 영성훈련이 어디서 이루어지는가 하는 장의 문제이다.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한국교회는 성전 중심으로, 모든 훈련이 이루어져 왔다. 예배, 교육, 선교, 봉사, 선교 등 모든 활동이 교회 중심이었다. 그것은 강력한 정점을 가지고 있음과 동시에 한계점도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영성훈련의 다른 장으로 일상생활을 떠나 산이나 기도원 등에 들어가 훈련하는 퇴수회 중심의 훈련이 있어왔다. 이것 또한 그 나름대로 공헌점이 있었지만 이런 운동은 교회를 돕고 섬기는 보완이 되어야지 독자적 운동으로 흐를 때 한국교회를 유익하게 하지 못했음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근간 영성훈련의 새로운 장으로 가정이 부각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사회 전반이 영성훈련의 실천의 장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들 한다. 한국교회가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여야할 영역이라고 생각된다.

 셋째는, 영성훈련의 영역의 문제이다. 사람에 따라 달리 나눌 수 있겠으나 리챠드소스터는 영성훈련을 묵상과 기도와 공부 등으로 분류되는 내면 훈련, 순종과 섬김 등으로 분류되는 외면 훈련, 고백과 예배와 경축 등으로 분류되는 공동훈련으로 나누었다. 영성훈련의 장의 문제든, 영역의 문제든, 심지어 원리의 문제까지도 한국교회의 허점은 그 통합성의 결여에 있다. 통전적이지 못하다고 하는 것이다. 기도와 삶이 통합되고, 교회와 사회가 통합되고, 예배와 인격이 통합되고, 개인과 공동체가, 개인 구원과 사회구원이 통합되어질 때 온전한 기독교적 영성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는 개인에게서도 마찬가지이다. 아는 것이 감격으로 이어지고, 느끼고 체험한 것들이 인격과 삶으로 이어지고 그 체험과 삶이 다시 신학화되고 체계화되어지는 순환과 조화를 이루어갈 때 온전한 기독교적 영성으로 발전해 갈 수 있게 된다.

 뜨레스 디아스의 기원
 뜨레스디아스는 천주교회의 꾸르시오 운동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이 운동은 1949년 1월 7일 스페인 마조르카의 헤르바스주교와 보닌주교, 그리고 그의 동료들이 순례자들을 안내하는 일을 맡고 있는 천주교 지도자들을 양성하기 위한 프로그램으로 개발한 제자훈련의 한 모델이었다. 이 프로그램이 33차의 훈련을 거치는 동안 여러 시도 끝에 대략 오늘날과 같은 꾸르시오 운동이 1951년 3월에 완성이 되었다.

 1966년 교황이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후 이 운동을 격찬함으로 이 운동은 요원의 불길처럼 세계 천주교회에 번져갔다. 한국천주교회에는 1967년 5월 4일 필리핀 남자 성도들이 와서 처음 실시하게 되었고 1971년 8월 12일에는 필리핀 여성도들이 와서 시행을 함으로 도입되게 된다. 현재 한국천주교 14개 교구 전체에서 이 꾸르시오 운동은 실시되고 있으며 서울 교구에서만 1년에 20차례씩 지금까지 약 300회 정도 실시했다고 이 운동을 맡고 있는 어느 주임신부는 말한다. 이만큼 꾸르시오 운동은 천주교회 영성운동으로 활발히 시행되고 있다. 이 운동이 최근 천주교 성령운동의 한 몫을 담당하고 있다고 신부는 귀뜸해 주었다.

오늘날의 뜨레스디아스인 당시의 꾸르시오 운동은 1950년대 말까지 스페인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꾸르시요를 경험하고 미국 텍사스에서 훈련 중이던 스페인에 공군 몇몇 사람이 기도회를 갖던 중 미국에서 처음으로 꾸르시오 행사를 거행하게 되었다. 스페인어로 실시한 이 꾸르시오 운동은 미국전역으로 퍼져나갔다. 1960년 초기에 처음으로 영어로 실시한 꾸르시오 행사가 거행되었다.

개신교들이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자 로마가톨릭은 이 행사가 신교돋르에게도 제도적으로 가능한 행사가 되게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어 급기야 이 운동은 초교파적인 뜨레스디아스가 된 것이다. 초교파적으로 실시된 최초의 뜨레스디아스는 1972년 11월 2일-5일 뉴욕 뉴버그에서 개최되었다. 여기에서부터 뜨레스디아스는 뉴일글랜드 뉴저지, 그리고 펜실베니아로 퍼져 나갔다. 1980년 7월 11일 미국 전역의 뜨레스디아스 공동체는 전체 뜨레스디아스 조직을 구성하기 위하여 연합하였다.

뜨레스디아스 목적과 단계

 목적
 꾸르시오 운동은 그 목적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꾸르시오 운동은 크리스천 생활을 쇄신하고 세상을 그리스도화 하기 위한 교회 운동이며 3일간의 꾸르시요를 통해 참된 크리스천이 되는 기본적인 것을 생활화하는 데 필요한 실질적이고 능동적인 방법을 체험하게 한다."

여기서 두 가지의 큰 목적을 말하고 있는데, 첫째는 내면생활의 갱신이며, 둘째는 이웃을 섬기는 훈련이다. 그런 점에서 뜨레스디아스 운동은 서술용어나 문잔상 차이는 있을 지 모르나 꾸르시오 운동의 목적과 정신을 받아들이고 있다.

 뜨레스디아스와 꾸르시요로부터 프로그램을 배워 비천주교적, 한국적 개신교 정통신학에 적합한 영성훈련으로 자리잡았다고 자처하는 한 운영당국은 그 목적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이 운동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새롭게 하고 세상을 복음화하기 위한 한국교회의 영성훈련이며, 삼일간의 사랑의 영성훈련을 통해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고 그 앞에서 철저한 자기 변화를 경험하며 교회와세상으로 파송받아 헌신하고 봉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하여 필요한 실질적이고 능동적인 방법을 체험하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꾸르시요와 뜨레스디아스는 이러한 동일한 목적이데 불구하고 그것을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서는 그 강조점이 다르다. 꾸르시요는 주관적이고 내면적 체험을 위한 묵상을 중시하는 반면에 뜨레스디아스는 예배와 찬양을 중시하고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말씀에 강조점을 둔다.

 그리고 꾸르시요는 미사와 그 해설이 많은 시간을 차지하는 반면 뜨레스디아스는 영감 있는 찬양과 토의 및 발표 그리고 섬김을 위한 훈련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이 훈련에는 어떤 사람이 참여할 수 있는가? 꾸르시요는 수강자의 자격을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첫째, 장차 크리스천 지도자로서 사도적 활동에 헌신할 수 있는 자질을 가진 사람.
 둘째, 영세한 지 3년 이상 지났고 견진을 받은 사람.
 셋째, 고등학교 이상의 학력을 가진 사람.
 넷째, 나이가 남녀30-60세인 사람.

 그러나 인격적 결함이 있거나 질병으로 인해 집중적 교육을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이나 고질화된 악습(노름 등)에 젖어 있는 사람 등은 지교회에서 치료와 변화를 체험한 후에 참여하도록 권유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는 뜨레스디아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꾸르시요처럼 까다로운 규정을 하고 있지는 않으나 세례받은 장년 그리스도인으로, 교회 지도자로 봉사할 수 이쓴, 담임목사의 추천을 받은 사람으로 제한하고 있다(담임목사의 추천을 필수조건으로 하지 않고 있는 운영국들도 많이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 운동은 중생체험 운동이나 신유 등을 위한 기도원 운동이 아니라 제자훈련의 차원에서 시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단계
 뜨레스디아스는 보통 세 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 수련회를 준비하는 퇴수회 이전 단계
 * 3박 4일 간의 퇴수회
 * 퇴수회 이후의 단계

 첫째, 수련회를 준비하는 과정은 보통 8주 정도를 요한다. 이 기간 동안 3박 4일을 봉사하게 될 팀멤버를 구성하고 3박 4일을 경험하게 될 후보자(케디데이트 혹은 주바라기 등으로 불려진다)들을 지원받고 선정한다. 이 8주 동안 주 1회 정도 모여 기도회를 가지며 프로그램을 점검하고 퇴수회 기간 동안 필요한 각종 준비물 등을 각 파트별로 나누어 준비하기도 한다.

 둘째, 3박 4일 간의 퇴수회는 양질의 한국교회 제자를 양성하기 위한 사랑의 영성훈련으로서 현대인이 당면하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한 기독교 복음적인 해결책을 찾아내기 위해 마련된 집중적인 교육과정이며 이 운동의 핵심이다. 다시 이 3박 4일은 아래와 같이 네 단계로 이루어진다.

 셋째, 퇴수회 이후의 격려 단계이다. 삼일간의 퇴수회를 마치고 벅찬 감격과 궅은 결심을 하고 돌아온 뻬스카로르(퇴수회를 마친 사람을 지칭하는 말)들은 계속되는 제 4일의 삶을 승리의 생활로, 즉 참된 은혜의 생활을 영원히 계속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을 것이다. 퇴수회 이후는 바로 뻬스카도르(스페인어 '어부'라는 뜻)로서의 생활을 지속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 마련된 단계이다.

 뜨레스디아스 교육과정
 뜨레스디아스의 교육과정은 마치 한 사람이 믿음의 집을 짓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 좋은 집을 짓기 위해서는 반석 같은 주춧돌이 있어야 하고 그 위에 기둥과 뼈대를 세운 다음 살을 붙이고 장식을 함으로써 집을 완성하게 되는 것과 같다.

 첫째는 반석이다. 이 반석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첫째날 주제는 '나는 누구인가? 하나님은 누구인가'인데, 그 대답을 성부 하나님의 속성에서 찾는다. 둘째날 주제는 '은혜의 생활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인데, 그 대답을 성자 예수그리스도의 사역에서 찾는다. 셋째날 주제는 '주님의 제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인데, 그 대답은 성령의 도우심과 성령의 열매 안에서 찾고 있다.

 둘째는 기둥과 뼈대이다. 이 뼈대를 세우는 일은 강의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뜨레스디아스에서는 이 강의들을 로요(Rollo)라고 하는데, 이 말은 스페인어로 통나무라는 뜻이다. 이 말은 영성훈련의 기둥 뼈대라는 뜻이 되기도 하고, '굴러간다'라는 동사형으로 쓰일 때는 지루하게 매시간 쉬임없이 굴러가는 강의, 그러나 믿음의 뼈대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는 인상을 심어주고 있다.

 이 강의의 내용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제자들의 사랑과 섬김의 삶'을 중심으로 다루어지며 평신도와 목사가 번갈아가며 맡게된다. 평신도 로요는 질문적 성격을 띠며, 목사 로요는 대답적 성격을 띤다. 평신도 로요가 간증적 이라면 목사 로요는 신학적이다.

 셋째는 살을 붙이는 작업이다. 이는 주로 예배와 묵상을 통해 이루어진다. 넷째는 장식하는 일인데 각종 기도 프로그램, 영감있는 찬양 수련장의 구석구석 잘 준비된 의미를 지닌 장식을 통해 시청각적 교육을 시도하고 있다.

 뜨레스디아스 평가

 컬리 교수는 그의 책 '영적 성장을 위한 교육'에서 "영성훈련은 명상과 묵상과 기도와 예식과 성경공부와 영성자료 등을 통해서 조직적으로 깊이 있게 영적인 삶을 개발하는 것이요, 그 영성을 표현하여 찬양과 감사로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며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공동체 속으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며 실천하는 삶이다"라고 했다.

 컬리 교수는 영성개발과 영성의 표현으로서의 하나님을 찬양하며 이웃에 봉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과정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뜨레스디아스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묵상과 기도와 성례전, 그리고 섬김의 훈련을 구체화한 프로그램이요, 이 찬양의 삶과 섬김의 삶을 주어진 환경 속에서 지속케 하고자 하는 하나의 노력이다.

 뜨레스디아스 운동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 신앙인으로 하여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다 친밀하게 하고 주어진 환경 속에서 교회 지도자로서의 자질과 사명을 일깨워주고 세상에 보냄받은 자로서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운동이다.

 뜨레스디아스는 하나의 도구이며 하나의 방법이며 하나의 기술이다. 뜨레스디아스는 신앙생활의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이 운동은 신앙생활을 돕는 하나의 도구요, 영성훈련의 하나의 방법니요, 제자훈련의 하나의 기술이다. 신앙인이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를 때까지 끊임없이 시도하고 때로는 실패하고 또 훈련하고 노력하는 존재이지 한두 가지의 경험으로 완성되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경험의 덩어리인 동시에 무한하고 풍요로운 미래의 경험으로 초대된 존재이다. 이런 점에서 뜨레스디아스는 신앙인에게 하나의 신앙적 경험을 제공해주나 이 한 번의 경험으로 모든 것을 기대하면 무리다.

 뜨레스디아스는 로마가톨릭에서 시작된 꾸르시오 운동의 원칙과 방법과 가르침을 토애로 하여 출발했으나 이미 개신교 영성훈련으로 자리잡았고 좀더 확실히 개신교 전통과 신학에 적합하도록 자리잡아 가는 과정에 있다. 뜨레스디아스에서 행해지는 강의 내용이나 신학은 복음적이고 성경적이다. 설사 그 속에 신학적 문제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거기 참여하는 영적 지도자(뜨레스디아스에서는 신학적 문제를 책임지고 인도하는 목사를 영적지도자라고 부른다)가 바른 신학과 신앙과 영성을 지닌 사람이라면 잘잘못을 가려 바른 길로 인도해 줄 것이다. 그런데 왜 뜨레스디아스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뜨레스디아스는 신학적으로 건전하고 영적 훈련 차원에서 거의 완벽하게 준비된 영성수련 프로그램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적지 않은 거부감과 문제점이 노출되고 있다. 열매가 좋지 않다면 나무 자체가 잘못된 것 아니냐하는 강한 반론이 제기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왜 이처럼 원리와 현실 사이에 괴리가 생겼는가?

 교회론의 문제
 뜨레스디아스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교회론'을 지적하고 있다. 미국 등 해외오에슨 뜨레스디아스에 참석했던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 뜨레스디아스를 실시하는 교회로 옮기게 되고 이 과정에서 감정적인 비판까지 오고 간 것 같다. 이 뜨레스디아스는 세계도처 200여 개 이상의 지국을 통해 실시되고 있는데, 유독 한국교포교회에서만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이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고 그 사람들의 편협된 교회론이 바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 운동의 기본 지침이 교회를 섬기는 제자를 양성하여 개교회로 파송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 사실을 망각한다면 교회에 유익을 주기보다는 해를 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뜨레스디아스를 제자훈련의 한 모델로 소개한 R목사는 이 문제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이 훈련은 강력한 능력을 지닌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건전한 영적 지도자를 통해 교회 안에서 교회를 위해 이루어져야 한다. 만약 선교단체(Para-church)들이 교회 멤버들을 모아 훈련하게 디고 거기에 건전한 교회론이 뒷받침되지 못한다면 교회의 자원을 선교단체에 헌신하게 함으로 교회를 분열시킬 위험이 있다. Para-church는 교회와 선교를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교회를 분열시키는 것이라면 그 존재 가치를 상실하고 만 것이다"(교회교육. 1992년 5월호, 장로회신학대학 기독교교육연구원)

 목회론적 문제
 두 번째는 목회론적 문제로 목사와 평신도와의 문제이다. 뜨레스디아스 운동은 원래부터 성직자의 적극적인 참여를 필수적으로 하고 있으나 분명히 평신도 운동으로 시작이 되었고 지금도 평신도 운동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 평신도 운동이 바른 교회론을 전제로 한다면 권장할만하다. 그러나 개신교 신학 특성상 특별히 한국적 상황에서 이 점은 충분히 문제를 낳을 수 있다.

 때문에 일부 뜨레스디아스에서는 뜨레스디아스의 본질을 어기면서까지 이 운동을 교회중심운동으로 전개하고 있다. 평신도를 십분 기동화하되 목사들이 주관하고 계획하고 점검하여 실시한다. 여기 참석하는 모든 교회복사들이 함께 운영하는 공동사역으로 추진하기 때문에 오히려 교회의 폭을 넓혀주고 협력 목회의 아름다운 면을 과시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뜨레스디아스를 목회에 활용하고자 할 때는 먼저 담임목사님과 사모가 경험을 하는 것이 좋다. 아무리 좋은 훈련프로그램이라고 할지라도 담임목사의 체질이나 목회방향과 맞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때문에 담임목사 가정에서 함께 경험을 한 후 이 운동의 효용성을 평가해 보는 것이 좋다. 그러나 부부가 같은 시간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좋다. 가족이 함께 참여하게 되면 서로가 서로를 의식하게 되므로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는 시간에 서로 방해를 받게 된다. 평가에서 이 운동이 교회 제자훈련 프로그램으로 적합하다고 판다니 되었을 때 교회에서 지도자적 역량을 가진 사람을 차례대로 훈련시켜 교회를 섬기게 하고 계속교육을 위한 모임에도 담임목사가 훈련된 교인들을 함께 인솔하여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프로그램 비공개성의 문제
 세 번째 지적하는 문제점은 참여한 사람들이 '쉬쉬'하고 프로그램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어떤 비밀스런 단체처럼 오해된다는 점이다. 이 문제에 대해 극단적 표현을 쓰는 사람들도 없지 않다. 이에 대해 이 모임을 지도하는 한 목사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성찬식 때문에 식인종으로 오해되었던 때를 생각하며 실소를 짓게 된다"고 말한다. 계속해서 그는 뜨레스디아스에서 "양념으로 실시되는 프로그램을 Surprising Program이라고 한다. 감격이 부족한 현대인들에게 영적인 각성을 주는 프로그램들이다. 참여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이것을 영적인 수수께끼 게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수수께끼 게임에 참여하는 사람에게 답을 알려준다고 생각해보자. 얼마나 재미없는 게임이 되겠는가? 이 프로그램은 영성훈련 이론에 따라 잘 선정되고 준비된 프로그램들이다"라고 말해주었다.

프로그램의 원형을 유지하기 위해서 이 모임 외의 다른 곳에서 변질되어 운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프로그램을 공개하지 않는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성경적으로 충분히 그 근거와 타당성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공개하지 못하는 점은 없는지 당사자들에게 묻고 싶다.

 뜨레스디아스의 천주교성 문제
 일부에서는 '영성'이라는 말 자체가 천주교적인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또 '영성'이란 말이 성경에 없기 때문에 비성경적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영성'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영성이란 '...누구누구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란 의미이다. 그러므로 불교엔 불교의 영성이 있고 무속종교엔 무속의 영성이 있고, 기독교엔 기독교적 영성이 있는 것이다. 영성이란 말은 중성적인 것이다. 그리고 삼위일체란 말이 성경에 없지만 그 사상과 신학적 내용은 성경에서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고 또 그것은 성경적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영성이란 말이 성경에 없지만 그 정신과 신학은 성경적이고, 천주교에는 천주교적인 영성이 있을 것이고 개신교엔 개신교로서의 영성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뜨레스디아스가 천주교에서 개발된 꾸르시요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개신교 정통신학과 성경에 근거한 검증과 개혁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천주교적인 흔적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천주교적인 것이 반드시 나쁜 것이냐? 그렇지는 않다. 천주교로부터 충분히 배워야 할 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것과 다른 것들이 천주교 안에는 많이 있다. 그것들이 건전한 평가와 검증의 과정 없이 그냥 뜨레스디아스 안에 남아 있다면 그것은 포기되거나 수정되어져야 마땅하다고 생각된다.

 가령 많은 강의들 가운데 하나이기는 하지만 '사도적 행동(The Apostolic Action)'이란 강의가 있다. 이 용어나 이 용어 속에 숨어있는 신학은 천주교적이다. 개신교에서는 '제자의 삶'이란 말로 이미 자리잡음을 하고 있다. 또 '제자의 삶이'이 신학적으로 옳다. 그 외에도 사소한 것이기는 하지만 촛불을 밝혀 성령의 임재를 상징한다고 말하다. 개신교도 입장에서는 웬지 어색하고 천주교 냄새가 너무난다. 뿐만 아니라 모든 뜨레스디아스 진행 지국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강의 전후에 성경을 봉독하고 기도하는 아름다운 순서를 생략하는 지국들이 있는 모양이다. 이에 대해 뜨레스디아스란 이름을 쓰지 않은 모 지국에서는 용어 및 강의 내용, 그리고 천주교적 흔적들을 한국적으로 개신교 정통신학적으로 바꾸어 사용하기도 한다. 뜨레스디아스 각 운영 당국은 섬세한 것 하나까지도 신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해야 하리라고 본다.

 결론 및 전망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뜨레스디아스는 영성훈련 차원에서 퇴수회 중심의 잘 준비된 프로그램이다. 뜨레스디아스는 하나의 수단이요 그릇이다. 그 그릇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맛을 낼 수 있다. 만약 바른 목적, 바른 신학을 갖지 않은 어떤 개인이나 교회가 이 그릇을 이용하여 자신의 사욕을 담는다면 분명 개인의 영성이나 교회를 해칠 우려가 있다. 경건을 더러운 이익의 도구로 사용하고자 하는 자들이 오늘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른 목적과 바른 신학을 가진 교회와 목회자들이 이 그릇을 활용한다면 교회에 생명력과 활기를 더해 줄 수 있다. 한국교회가 대형화 되어가고 또 일부에서는 물질주의, 세속주의의 흔적을 보이고 개교회주의와 분열주의의 아픔을 안고 있는 이때에 강력한 영적 능력을 지닌 그룹 제자훈련은 한국교회에 새로운 한 공현을 감당해 주리라 믿는다.

 뜨레스디아스 당국자들도 이런 차원에서 한국교회를 섬기기 위한 주님의 도구라는 인식과 사명 하에 기도하면서 진실하게 영적훈련을 감당해야 하리라고 본다.

 앞으로 이 뜨레스디아스 운동은 교회 바께 평신도 운동으로, 그리고 교회 내 제자훈련 프로그램으로 이름 그대로 불꽃처럼 번져갈 것이다. 때문에 이 운동이 교회간에 선교 및 목회협력적 차원에서 교회 내 운동으로 번져갈 수 있도록 힘을 써야 할 것이다. 현재 상황에서 뜨레스디아스 자체는 영성훈련 차원에서 하나의 예리한 칼과 같다. 이것을 선하게 사용할 것이냐, 바람직하지 못하게 사용할 것이냐 하는 것은 이것을 활용하는 사람이나 공동체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신학적 문제가 있는 단체에 이것을 맡겨놓고 교회에서 금기시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건전한 교단, 건전한 교회들이 잘 활용해 주었으면 좋겠다.

 뜨레스디아스가 하나의 칼이라면 이 칼은 이단성이 있는 사람, 잘못된 목적을 가진 사람, 바른 신학을 갖지 못한 사람이나 공동체에 맡겨둘 수는 없다. 이 칼을 잘 써서 개인의 영성과 교회를 살릴 수 있는 사람이나 교회가 이 칼을 맡아야 한다.

 뜨레스디아스 운동이 교회에 해를 끼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그 원리를 잘못 이용한 탓이었으며 또한 교회 밖 운동단체들이 개인 이기심 내지는 집단 이기심에 영성 운동을 이용(이것은 악용이라고도 할 수 있다)했기 때문이다.

 한 가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뜨레스디아스는 목적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전하는 수단이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신학적인 차원에서 그리고 교회론적이고 목회론적이고 선교론적인 차원에서 검증, 수정될 수 있고, 되어야 한다. 그때에 비로소 뜨레스디아스는 한국교회를 위해 소중히 봉사하는 사명을 다하게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몇 가지 제안을 한다.

 첫째, 지원 자격 가운데 담임목사의 추천을 필수 요건으로 해야 한다. 교회 밖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신앙훈련 모임도 목양적 통제 아래 있어야 한다. 어떤 성경연구 모임이나 기도회도 마찬가지이다.

 둘째, 뜨레스디아스 각 지국은 자신들이 이 훈련을 실시하는 목적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영성훈련이요, 제자훈련이다. 그러므로 훈련을 마친 사람들을 교회 밖을 배회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교회를 잘 섬기는 주님의 제자, 교회의 일꾼으로 양육해야 한다.

 셋째, 뜨레스디아스는 물론 교파 운동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파간 차이점은 감싸주고 공통점은 서로 격려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에서 공인된 이단 교회들과는 그 단절을 분명히 하고 교류를 삼가는 것이 오염을 막을 수 있다.

 넷째, 뜨레스디아스는 영성훈련, 제자훈련 차원에서 끝내야 한다. 그들이 받은 은혜와 감격을 끈으로 하여 선교라는 미명 아래 다시 조직화한다든지 헌금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끝으로, 이 논의가 계기가 되어 맹종적 추종도 아닌, 감정적 비판도 아닌, 창조적이고 건설적인 논의가 있었으면 한다. 유독 뜨레스디아스 뿐만 아니라 'Para-church'로서의 선교 단체, 성경연구모임, 기도회, 각종 선교회 등도 어떤 경우에 교회를 유익하게 하고 또 유해한가의 문제가 밝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월간 <교회와신앙> 1995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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