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재덕  목사/ 한빛교회

흰 양말
 나는 흰 양말만 신는다. 나는 안다. 그런 나를 쳐다보는 사람들의 심상치 않은 눈빛의 의미를 안다. 그렇지만 한때는 흰 양말 신는 나를 보는 눈빛은 멋쟁이를 보는 눈빛이었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나의 흰 양말을 부러워했었다. 나는 70년대 중반쯤부터 흰 양말을 신기 시작했다. 그때 흰 양말은 멋이었다. 나는 걸을 때마다  검은 구두와 검은 바지 사이로 살짝살짝 흰 양말이 보이면 뿌듯했었다. 그렇게 흰 양말을 뽐내면 처음에는 사람들이 그저 부러워만 하더니 어느새 너나 없이 흰 양말을 신었다.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에 우리의 온 거리는 백의민족답게 흰 양말 투성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흰 양말은 부조화라고 계몽되기 시작했다. 외국에서는 흰 양말을 신지 안는다고 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거리에서, 나의 조국 대한민국에서 흰 양말이 사라졌다. 부러움을 받던 흰 양말이 일순간에 부끄러움을 받게 된 것이다. 그때와 똑 같은 양말이건만 지금은 흰 양말이 촌스럽다. 이제는 흰 양말을 신으려면 경멸의 눈빛을 감내해야 한다. 그래서 걸을 때 바지와 구두사이로 흰 양말이 보이는 것이 부담스럽다. 그런데도 나는 아직도 흰 양말만 신는다.

 내가 신는 양말은「타월」양말이다. 20대 중반부터 갑자기 발에서 땀이 주체할 수 없게 나기 시작했다. 그때 나를 구해준 것이「타월」양말이었다. 다른 양말들은 값이 아무리 비싸고 고급스러워도 땀으로 인해 발이 신에서 미끄러지는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했다. 그러나「타월」양말은 발에서 샘물처럼 땀이 나도 발을 뽀송뽀송하게 유지해준다. 그런데 무엇 때문인지「타월」양말은 흰색뿐이다. 간혹 유색도 있지만 구하기 힘들다. 그래서 자연적으로 흰 양말만 신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사유와 기능성을 고려하지 않아도 흰색은 화려하고 멋있는 색이다. 흰색은 어떤 색과도 어울린다. 지난 역사 속에서 흰색 와이셔츠는「화이트칼라」들의 품위의 상징이었다.

 사람들의 변덕은 염치가 없다. 자신들도 멋을 부리던 흰 양말이었건만, 마치 그런 적이 없었던 것처럼 흰 양말을 우스꽝스럽게 여긴다. 영광과 부러움을 받던 흰 양말이 지금은 부끄러움과 경멸을 받는다. 과연 어떤 권세가 부러움과 부끄러움을 판결하는 것일까?

 나는 예전에 다양한 색의 체크무늬가 있거나, 분홍, 검정, 파란, 노란색 등의 와이셔츠만을 입었다. 흰 양복에 까만 색 와이셔츠를 입고 밝은 색의 넥타이라도 매면 무척이나 돋보였다. 그러나 그때 사람들은 흰 와이셔츠가 아닌 유색 와이셔츠를 촌스럽게 여겼으며, 그렇게 멋지게 입으면 오히려 핀잔을 주기도 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지명도가 높으신 목사님들도 색깔 있는 와이셔츠를 입으신다. 그러면 성도들은 멋있는 목사님이라고 가시는 걸음걸음 환호성를 뿌려드린다. 도대체 어떤 세력이 촌스런 유색 와이셔츠에게 품위의 특권을 주었을까?

 언제부터인가 의류점에서 소매와 바지의 길이가 짧아 입지 못할 옷을 버젓이 팔고 있다. 그리고 여인들은 그런 동강난 옷을 주저하지 않고 즐겨 구입한다. 왜냐하면 지금은 9부 또는 8부의 바지나 상의소매가 멋의 최고위치를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 전만 해도 그것은 입지 못할 옷이었다. 무엇이 입지 못할 동강난 옷을 멋진 옷으로 탈바꿈시켰을까?

 그것은 유행이다. 그것은 환경이다. 사람들은 환경에 지배를 받는다. 환경의 위력은 대단해서 촌스런 옷도 대번에 멋지게 만들어 버리고, 멋스러운 흰색을 촌스럽게 만들어 버린다. 유행은 부러움을 부끄러움으로 만들고, 부끄러움을 부러움으로 만드는 권세가 있다. 이처럼 환경의 위력은 대단하여 모든 사람들의 생각을 단번에 바꿔버린다. 유행은 멋이며, 생활의 활력이다. 그러나 때로 환경은 심술궂은 악동이 되기도 하며 거대한 괴물로 돌변하기도 하여, 악을 선으로 위장시키고 선을 악으로 누명을 씌운다. 작게는 지금은 범죄인 서리를 즐겁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만들었고, 심각하게는 한 개인을 파멸시킬 수도 있는 '왕따'를 유행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세계사 속에서 인류의 비극인 '민족청소'와 학살을 유행시키기도 했다.

롯 가문의 그림자
 천사들이 나그네로 소돔 성에 이르렀다. 그곳에 사는 롯은 나그네들을 강권하여 초청해서 극진히 대접하였다. 그런데 소돔 사람들은 나그네들을 해치고자 롯에게 내놓으라고 행패 부렸다. 소돔 사람들이 나그네들을 원하는 것은 남색 때문이라고도 한다. 오늘날 쓰이는 남색(sodomy)이라는 단어는 소돔(sodom)에서 왔다. 롯은 나그네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소돔 사람들에게 희한한 조건을 제시한다. 청결한 딸 둘을 나그네들을 대신 넘겨주겠다고 했다. 나그네 대용으로 자신의 딸들을 마음대로 하라는 것이다. 베드로 후서에서 롯을 의인(2:7)으로 호칭하고 있다. 따라서 롯이 위협적인 상황에서 생면부지의 나그네들을 보호하려는 것은 대단한 의(義)이다. 하지만 딸들을 불한당들에게 넘겨주겠다는 것은 극단적인 불의이다.

 마침내 소돔 성이 유황불로 잿더미가 됐다. 그때 딸들과 정혼한 롯의 사위들도 소돔 성과 함께 사라졌고, 롯의 아내는 소금기둥이 되었다. 그 일로 딸들은 가문의 후손을 걱정했다. 결국 그녀들은 아버지에게 술을 먹이고 차례로 아버지에게 들어가서 후손을 이었다. 롯의 가문은 그런 부끄러움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어찌 롯의 가정은 왜 이 모양인가? 아버지는 청결한 딸들을 서슴치 않고 불한당에게 넘겨주려고 하고, 딸들은 아버지와 동침했다.

하지만 그것은 롯이 패역하고 딸들은 음탕하기 때문이 아니다. 흰 양말을 멋있게 만들기도 하고, 단번에 촌스럽게 만든 환경의 세력 때문이다. 소돔의 윤리와 도덕적인 환경에서는 딸들을 불한당들에게 넘기는 것이 의였으며, 후손을 두지 못하는 것이 아버지와 동침하는 것보다 심각한 죄였다. 환경은 수치와 멋을 애교스럽게 결정할 뿐 아니라, 선과 악을 추악하게 혼동케 하는 힘을 가진 괴물로서 때로는 사람을 괴물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므로 환경을 경계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환경에 지배받지 않아야 한다. 오히려 환경을 지배하고, 관리하며 이끌어야 한다. 성령의 사람들은 그렇게 한다.

병든 성자?
 그런데 사회의 도덕, 윤리, 유행의 환경뿐만 아니라 육체적 환경도 마음에 미치는 영향력이 만만치 않다. 육체라는 환경은 마음을 다스리고 지배한다. 세상에 병든 성자가 없는 것과, '병신 육갑'이라는 악한 말이 있는 것은 인격이 몸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사람은 세월이 흐르면 누구나 겉 사람이 후패한다. 야속하지만 인생은 별수없이 늙어가며 쇠약해지고 병든다. 뛰어난 사람도 이 인생의 법칙에 순응해야 한다. 그런데 후패한 몸은 마음도 후패케 한다. 대개 사람이 늙으면 철없는 어린아이처럼 되어 관용하지 못하고 작은 일에도 섭섭해하고 이해가 없어지며 무리하게 자신만을 위해 줄 것을 투정한다. 그리고 욕심스럽게 되어 하찮은 걸레조차 욕심 내기도 한다.

 갑상선질환에 시달리는 분이 있었다. 그분은 "제가 갑상선입니다. 이 병은 짜증을 내는 병입니다. 그러니 이해하세요." 하고서는 마음껏 짜증을 낸다. 그분의 짜증과 시비는 대단하여 아무도 곁에 가려고 하지 않는다. 그분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누구에든지 시비를 걸고 불 같이 화를 낸다. 그분은 갑상선 비대증에 지배받는 것을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마음은 몸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몸이 불구이면 마음도 불구이기 십상이다. 육체의 사람은 대개 몸이 병들면 마음도 병든다.

그리스도인의 겉과 속
 한편 그리스도인들도 별수없이 겉 사람이 후패한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은 겉 사람이 후패 할수록 속 사람은 오히려 새로워진다. 그래서 낙심하지 않는다(고후 4 : 16). 그리스도인은 환경을 지배할 뿐 지배받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이 몸을 지배할 뿐 몸이 마음을 지배하지 못한다. 세상에는 병든 성자 없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몸이 병들수록 마음이 거룩해 진다. 세상 사람들은 몸이 불구면 마음도 불구이기 십상이지만 그리스도인은 몸이 불구일수록 마음은 더욱 온전해진다.

그리스도인은 약할 때 강해진다. 고집과 아집과 욕심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사랑하며 용서하고 충성하며 감사하고 관용하며 베풀고 겸손하며 이해하고 배려하며 포용하고 인내하며 자비하고 온유하며 섬기고 소망에 넘친다. 믿음의 연륜이 쌓일수록 더욱 그렇다. 만약 그리스도인에게 믿음이 있다면 몸은 늙어도 마음은 이렇게 날로 새로워진다. 장로는 더욱 장로다워지고, 목사는 더욱 목사다워진다. 혹 평생 서리집사 한 번 되어 보지 못했었어도 평생 믿으면 목사 같아진다.

어떤 그리스도인
 그런데 마음이 몸에 영향을 받고 지배를 받는 그리스도인도 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몸이 늙으면 세상사람들처럼 마음이 철없는 어린아이같이 되고, 몸이 병들면 마음도 병든다. 또한 교회나 교계에서 명예를 얻거나, 직책에 오르거나, 특별한 은사가 있거나, 교인이 많아지거나, 경륜이 쌓이면 마음이 그런 환경에 지배받는다. 그래서 회장 같으며 두목 같고 연예인 같이 되어 거들먹거리고, 화려하며, 사치스럽고, 군림하며, 대접받기를 즐기고, 교인을 하나님의 양이 아닌 자신의 양으로 만들며, 기고만장하고, 권력을 누리며, 서슬이 시퍼래진다. 심각한 경우 윤리와 도덕과 상식과 하나님의 공의까지 포기한다. 능력은 경륜이 싸일수록 주님 같아지는데 그 심성은 점점 더 주님에게서 멀어지기도 한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천국을 향하여 출발은 했으나 중도에 주저앉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으로 이 땅에 자신의 천국을 건설하여 안주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과 권력과 명예로 자신의 천국을 만든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의 부모님이 예수님을 잃어버린지도 모르고 여행을 계속한 것처럼, 처음에는 믿음으로 출발했지만 복을 받은 후에 믿음을 흘려 버리고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주름살
 세례요한은 제사장, 레위, 바리새인,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가 아니가 하는 추측을 받을 만큼 권세가 있었다(요1장). 또한 주님에게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 보다 큰이가 없도다'(눅 7:28) 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최고의 영예와 지위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지위와 영예 때문에 결코 주님의 영광을 탐내지 않았고, 가로채지 않았다. 더욱 겸손하였고,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려 드렸으며, 자신의 이름을 증거하지 않고 주님의 이름만을 증거 했다. 요한은 영예의 환경에 지배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명예를 지배했다. 성령의 사람은 그렇다.

 환경의 세력은 거의 무적이다. 마음은 몸에게 지독히도 영향을 받는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그런 환경들을 지배한다. 그리스도인은 몸이 늙어 갈수록 그 마음은 더욱 어른스러워지며 이 세상의 것에 대한 욕심은 점점 더 없어진다. 그리스도인은 늘어난 주름살만큼이나 마음이 아름다워지고, 쇠약해진 몸만큼이나 속 사람이 거룩해진다. 이마의 주름살이 늘어날수록 마음의 주름살은 펴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얼굴의 주름살을 고민할 것이 아니라, 마음과 믿음의 주름살을 고민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불쾌지수 따위에 지배받지 않는다. 성령의 사람은 세월이 지나면 혹 능력은 무디어지더라도 그 마음만큼은 주님 같아진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은 세월이 흘러 겉 사람이 후패하면 속 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
(월간 <교회와신앙> 2000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