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용일 / 직장사역연구소 부소장

지난 글에도 이야기했지만 좋아하는 지휘자가 있다. 함신익. 세계적으로 더욱 이름이 나 있는 지휘자이지만 대전 시립교향악단의 음악감독으로 5,6년 활동하면서 멋진 능력과 인격을 보여준 사람이다. 지난 6월 20일 밤에 한 FM 라디오 방송에 나와 인터뷰를 하면서 멋진 말을 했다. 대전시향의 비약적 발전의 원인이 무엇인가 질문을 받자 role, expectation, responsibility라고 간단하게 정리해 이야기하기도 하고 ‘지방(地方)’이라는 말은 일본식 표현이지 ‘서울과 대전’이라는 도시라는 말도 인상적이었다.

가장 가슴에 다가온 말은 자기가 대전시향을 떠날 때 울면서 헤어지는 것을 아쉬워할 수 있는 사이가 될 수 있기 위해 노력한다는 말이었다. 우리나라 교향악단과 지휘자 간의 관계가 거의 끝이 좋지 않은 것이 안타깝다면서 끝이 좋은 사람이 되겠다는 이야기였다.

일하던 직업인이 죽을 때 그 끝이 아름답다면 얼마나 멋질까 생각하다가 다음 날 오래된 한 영화를 보았다. 1991년에 나온 영화로 ‘소방수 영화’ 중 클래식이랄 수 있는 <분노의 역류>다. 형제 소방수의 형인 스티븐이 화재 현장에서 동료를 구하려다 중상을 당하고 죽으면서 동생에게 말한다. “사이렌 소리 질렸다. 나는 피곤해…”. 이게 뭐, 아름다운 인생의 끝인가!

소방수였던 아버지가 화재를 진압하다 산화하고 난 후 방황하는 동생과 달리 일찌감치 소방수의 길을 걸은 스티븐은 그의 방화복 등에 써넣은 대로 “BULL”과 같은 사람이다. 마스크도 쓰지 않고 황소같이 저돌적으로 불에 돌진하고 동료들도 그렇게 자주 불 속으로 밀어 넣는다. 눈앞에서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했던 브라이언은 형이 그렇게 목숨 걸고 일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소방 호스가 올라오기 전에 불타는 집에 갇힌 아이를 구하기 위해 뛰어드는 ‘미친 짓’을 하는 형은 영웅 심리에 사로잡힌 일 중독자처럼 보이는 것이다.

스티븐은 스티븐대로 갈등이 있다. 그는 그저 아이가 불난 집 안에 있으니, 그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본능적으로 뛰어든 것이다. 그것이 자기 방식이고 아버지의 일하는 방식이었다. 불을 꺼야 하는 소방수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충성심을 가지고 일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일하는 방식을 소대원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푸념한다. “다들 나를 안 믿어! 대원들이.” 그래서 외롭다. 아내와도 함께 지내지 못하고 아버지의 보트에 거처를 마련해 혼자 지내면서 괴로워한다. 사고라도 날까봐 노심초사하는 아내를 이해하지 못하는 그 자신도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싶어 얘기 상대를 찾는다. 그에게는 어릴 적의 상처에 대한 치유가 필요하다.

이런 갈등을 겪으면서 날마다 불과 싸우는데 의문의 방화사건이 연속적으로 일어나고 결국 시의원의 탐욕과 연관된 동료 소방수의 응징이었다는 결론이 난다. 불의 역류현상을 이용해 큰 불이 나지도 않으면서 관계된 사람들을 차례로 죽였다고 동료 애드콕스는 고백한다. 그러나 그 순간 건물이 무너지고 불속에 떨어지는 애드콕스를 구하려다 스티븐도 같이 떨어질 위기에 빠진다. 아래 매달린 애드콕스가 자기 손을 붙잡고 있는 스티븐에게 말한다. “가게 놔 줘.” 그러나 끝까지 놓지 않는 스티븐, “네가 가면.... 우리도 가는 거야.”(소방관들의 팀워크와 동료애를 담은 관용구인 듯하다. 영화 첫 부분에도 등장한다) 결국 손을 놓지 않은 스티븐은 함께 떨어져 애드콕스는 순직하고 스티븐은 중간에 난간에 걸리지만 치명상을 입는다.

소방대를 건드리지 못하게 애드콕스가 범인인 것을 밝히지 말라며 숨을 거두는 스티븐은 행복했다. 형인 자신과 동료를 구하기 위해 불길을 돌파하며 임무를 완수한 동생의 분투를 보았기 때문이다. “저것 봐. 내 동생이란 말이야.” 형제는 화해한다. “형을 의심해서..... ” “알고 있어. 불을 이겼어.” “누가 형이지?” “스티븐이 내 형이야.”

그리고 말한다. “사이렌 소리 질렸다. 나는 피곤해…”. 이 푸념 섞인 마지막 말은 결코 인생을 실패한 사람의 넋두리가 아니다. 자기 삶을 희생하면서 피곤한 직장생활을 해온 한 직업인이 자신의 직업에 사명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온 후 동료를 구하려다 함께 죽으면서 쏟아놓는 한 맺힌 찬사이다. 아버지의 방화모를 물려받은 형을 뒤이어 동생이 또 소방대원으로 복귀하며 계속 이어가야 할 그 처절한 사명의식이 담겨 있는 표현이다.

일하다 죽더라도 그 끝이 아름다울 수 있다면 정말 멋진 직업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사람에게 하듯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해 주께 하듯 하는 일의 자세가(골 3:23) 바로 이런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