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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말, 시한부 종말론의 기승을 바라보며
1999년 03월 01일 (월) 00:00:00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조덕영 목사/ 참기쁜교회, 한국 창조과학회 전 대표 간사


성경에는 가끔 사람의 접근을 거부하는 것들이 있다.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절대적(비공유적) 속성과 관련된 것들이다.

 그 중에 핵심은 시간이다. 하나님은 시간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말씀의 첫 마디를 태초(히브리어의 베레시트)라는 시간의 단어로 시작하셨다, 이것으로 하나님은 시간에 대해서 사람이 개입할 여지를 없애셨다. 시간의 주관자는 오직 하나님이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시간의 어떤 부분에 대해 사람들의 접근을 늘 막아 놓고 계신다는 것은 성경을 통해 우리들은 쉽게 발견을 할 수 있다.

 먼저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셈과 함과 야벳의 서열이 불분명하다. 한글 성경에는 셈이 장남인 듯하나 영어 흠정역을 보면 야벳은 셈의 형으로 소개된다. 연대기적으로 보면 야벳이 서열상 우위인 것이 좀더 성경적인 듯 여겨진다. 그럼에도 우리 개역한글성경에는 셈을 야벳의 위로 소개하고 있다(창 10:21). 하나님께서는 사본(寫本)들의 인간적 실수를 통해 서열을 의도적으로 숨기신 면이 있다고 보여진다.

 인간은 서열을 중시하므로 인간의 족보에는 사실 이런 실수가 잘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성경에서 이런 경우가 생겼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데라의 아들 아브라함과 나홀과 하란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 경우를 찾을 수 있다. 우리 성경에는 아브라함이 장남인 듯 표현되고 있다(창 11:26, 31). 사본과 성경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꼭 그렇게만 볼 수 없는 난관이 있다. 물론 성경의 원본이 존재한다면 그 서열은 명확히 드러날 것이다. 아브라함의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숨기신 것으로 여겨진다. 서열을 중시하는 인간 사회에서 하나님은 육적 서열이나 육적 장남보다 영적 장남을 찾고 계신 듯하다.

 이렇듯 하나님은 인간이 이 부분에 접근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막고 계신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모든 삶은 시간과 늘 공유되어 있다. 탄생과 죽음, 삶의 역정이 그러하고 진보와 서열의 구분이 모두 시간으로부터 온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간을 궁금해  한다.

 창조의 연대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창조의 시기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성경이나 과학을 통해 명확하게 알려 주실 듯도 한데 전혀 그렇지를 아니하다. 성경과 과학은 이 부분에 대해 모두 침묵한다. 하나님이 그렇게 설정해 놓으셨다.

 성경이 좀더 짧은 연대를 지지하는 듯하기는 하다. 그렇다고 우리들이 언제쯤이라고 확정할만한 근거는 주지 않는다. 창세기 11장과 누가복음 3장에는 셈과 아담까지 이르는 계보가 기록되어 있다. 그중 누가복음에는 창세기의 계보에서 볼 수 없는 아르박삿과 셀라 사이에 가이난이라는 인물을 첨가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를 혼란에 빠뜨린다. 창세기에 보면 분명 아르박삿은 셀라를 삼십오 세에 낳았다고 하였는데 셀라의 위에는 아르박삿이 아니라 가이난이라니!

그렇다면 창세기 11장에 나타난 셈의 후예들의 나이는 다른 의미란 말인가? 혹시 연대기를 말한단 말인가? 가이난 단 한 사람으로 인하여 큰 혼돈이 일어난다. 그래서 보수적인 학자들까지도 가이난은 필사자들의 실수로 첨가되었을 거라고 주장할 정도이다. 사본적 실수이든 원본에 기록된 인물이든 이 한 사람의 첨가로 인해 연대의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가 쉽지 않게 되어버렸다.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숨기신 것이다.

 과학은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창조의 연대에 있어 오직 침묵한다. 창조의 시기에 있어 짧은 창조와 긴 창조 어디에도 과학은 문을 열어 놓고 있는 것이다. 과학이 드러낼 수 있는 부분은 제한적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6천 년 설을 고집하고, 어떤 이들은 1만 년 설을 고집하고 어떤 이들은 진화론적 연대를 고집하며 그것을 가지고 서로를 불신하기도 하니 참으로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다 부질없는 일이다.

 시간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의도는 예수님의 탄생까지도 숨기셨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당연히 AD(Anno Domini-'주의 해에서'라는 뜻) 1년에 탄생하셨다고 간주하나 그렇지 아니하다. 하나님은 생애를 태양력(BC와 AD=주전 및 주후)으로 표시하였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숨기시려는 의도를 엿보게 한다.

 마태에 의하면 예수는 헤롯왕 때에 유대 베들레헴에서(마 2:1) 태어났다. 역사의 명확한 기록은 헤롯이 BC 4년에 사망하였으므로 예수님의 탄생은 분명히 그 이전이 된다. 최소한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 태양력은 이미 4년 이상 비껴나 있다는 결론이 된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탄생이 기원 전 4년이라는 확신도 없다.

 마태복음 2장에는 동방의 박사들을 인도한 베들레헴으로 향한 별에 대한 기록이 나와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별이 역사적으로 어떤 별이었는지 기록으로 확인이 불가능하다. 금성이었는지, 시리우스별이 움직였는지, 대유성이 떨어졌는지, 갑자기 혜성이 나타났는지, 신성(新星) 혹은 초신성(超新星)이 출현했던 것인지, 행성(목성과 토성)의 접근으로 인한 소동이었는지 불분명하다.

 아마 이런 천문학적 현상 중에 하나가 베들레헴의 별이었다면 역사적 기록과 함께 생각할 때 BC 7년으로부터 4년 경 사이가 아마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해일 것이다. 물론 12월 25일이 성탄일이라는 확신도 없다. 하나님은 이 귀중한 날까지 숨기셨다. 하나님은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게 해 놓으셨다(벧후 3:8).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수 없도록 해 놓으신 하나님의 섭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벧후 1:20).

 그런데 최근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시간을 다시 건드리기 시작했다. 새로운 1천 년이 시작되는 문턱에 왔기 때문일까? 사람들은 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가 예언했다는 1999년 7월이나 2038년이나 새로운 밀레니엄의 시작이니 하면서 소란을 떨기 시작했다. 시한부종말론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전에도 종말을 무서워하고 종말의 혼돈을 두려워하던 때가 많았다.

 주후 999년, 1천 년, 1948년, 1984년, 1992년, 1998년 등은 모두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주목했던 해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늘 시간을 숨기고 계셨다. 예수님은 BC 4-7년 경 탄생하셨으므로 사실 이미 2천 년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 지나가 버렸다. 역사의  기준이 예수님이라면 진정한 2천 년은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이다. 예수님이 부실 때 21세기는 이미 시작이 되었다. 하나님은 늘 이렇게 우리들의 시간 계산을 거부하신다.

 물론 과학이 검증할 수 있는 가능한 범위가 존재한다. 천체 예측 같은 부분이다. 그러나 오늘날 난무하는 노스트라다무스나 애드가케이시나 점쟁이, 시한부종말론자들의 예언이란 것들은 분명 하나님께서 정하신 비공유적 속성의 구분을 침범하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사람들은 기독교인을 포함해서 미래에 대한 예측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미래적 예측이 아닌 미래적 예언이라면 분명히 거부하시는 분이시다. 시간은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은 아무도 죽음의 문에 들어가는 순서를 모르는 것이다.

 무엇 하러 사람들은 그리 종말에 관심이 많은 것일까? 위선적으로 종말을 거부하기 위함이 아닐까? 사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지혜로운 청지기로 늘 종말의 삶을 살고 있는 자들이다. 굳이 종말의 때에 관심을 둘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웬 '예수 점쟁이'들이 그리도 많아졌는지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시간의 의미에 무지한 자들이다. 예수님의 이름을 팔지 말아야 한다. 점을 치려면 그냥 점쟁이로 나설 일이지 예수님을 팔아서는 안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얄팍한 예언가들과 점쟁이들을 유난히 경계하신다. 아니 혐오하시며 저주하신다(레 19:31, 신 18:9-12).

 "이제 너는 젊어서부터 힘쓰던 전언과 사술을 가지고 시험하여 보라 혹시 유익을 얻을 수 있을는지, 혹시 원수를 이길 수 있을지는, 네가 많은 모략을 인하여 피곤케 되었도다. 하늘을 살피는 자와 별을 보는 자와 월삭에 예고하는 자들로 일어나 네게 임할 그 일에서 너를 구원케 하여 보라. 보라. 그들은 초개같아서 불에 타리니 그 불꽃의 세력에서 스스로 구원치 못할 것이라 이불은 더웁게 할 숯불이 아니요, 그 앞에 앉을 만한 불도 아니니라(사 47:12-14).

 세기 말이다. 그릇된 시한부종말론을 경계하자!
(월간 <교회와신앙> 1999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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