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희 / 고양 홍익교회 사모

몇 달 전 중국을 여행한 일이 있었다. 그곳을 다녀오면서 공항 면세점에서 남편이 내게 자그마한 화장품을 하나 선물로 사 주었다. 평소에 내 손으로는 좀처럼 사지 못하던 것이라서 남편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집에 와서 짐을 풀고 아이들에게 줄 선물들을 꺼낸 뒤 옷가지들을 정리하는데 내게 큰 기쁨을 주었던 그 선물이 눈에 띄지 않는 것이다. 부피가 작기 때문에 이곳저곳 뒤지고 짐들을 다시 확인해 보아도 어디에도 문제의 그 화장품은 찾을 길이 없었다. 아마도 공항에서 선물 사는 걸 구경하며 어딘가에 흘리고 온 모양이라며 안타까워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놓친 고기가 더 커 보인다고 모처럼 여행을 통해서 얻은 여유와 기쁨이 그 자그마한 화장품의 분실로 황당함과 허전함으로 바뀌고 말았다. 그러자 남편은 그런 나를 보고 똑같은 것을 다시 사 줄 테니 잃어버리라고 위로를 해 주었다.

 그리고 두어 달이 지났다.

 화장을 할 때 더러 그 립스틱이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나기는 하였지만 그 뿐이었다.

 그런데 몇 칠 전 남편이 영성훈련에 참여할 일이 생겨서 짐을 꾸리려고 중국에 다녀오면서 현지에서 산 배낭을 꺼냈다. 옷가지를 그 안에 집어넣고 앞 주머니에 세면도구를 넣으려는데 무언가 작은 것이 만져지는 게 아닌가!

 지퍼를 열고 손을 안으로 집어넣었다. 뜻밖에도 그곳에서 나온 것은 그 동안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화장품이었다. 마침 남편은 거실에서 설교를 준비하고 있었다.

 여보, 세상에! 여기에 있었어요. 그러면서 그것을 들어 보였다. 우리 부부는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제 거기에 집어넣었을까? 완전히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가격으로 환산하면 이 만원 남짓 하는 하찮은 것일 수 있는데 그 반가움은 그것을 훨씬 뛰어넘고도 남았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남편의 선물이라는 사실에 의미를 더 부여해서 그런지도 몰랐다. 상실감이 컸던 만큼 다시 찾은 기쁨도 그 이상이었다.

 그러면서 그 하찮은 화장품 하나를 다시 찾은 기쁨도 이렇게 클진대 탕자와 같은 우리가 하나님 품으로 다시 돌아올 때 아버지 하나님의 기분을 얼마나 크실까 하는 것이 순간 오버랩 되는 것이다. 큰아들이 보기에는 아버지가 둘째 아들을 맞이하는 모습이 호들갑스럽게 보이고 이해되지 않더라도 아들의 귀향은 아버지의 하루도 쉬지 않으신 간절한 소원이었으리라.

 기대하지도 않았던 그 립스틱 하나를 손에 들고 다시 찾은 감격에 흥분하면서 아주 조금,  아버지 하나님의 그 마음을 맛보게 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포기한 뒤에 얻어진 기쁨이었기에 그 기쁨이 더욱 크게 느껴진 듯하다. 당연히 남편이 값을 치르고 산 물건이기에 내 소유가 분명하지만 그 동안 그것을 포기한 뒤에 다시 주어진 기쁨을 남편이 처음 그것을 선물했을 때의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을 안겨 준 셈이다.

하나님께선 태초에 인간에게 영생을 주셨지만 그것을 잃어버렸다가 다시 그분께서 값을 치르시고 되찾게 해 주셨기에 구원의 감격 또한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받았던 약속보다 더 감격스러운 것이 아닌가.

 오늘 하나님은 실물을 통해 어리석은 나 자신에게 말씀해 주심을 듣는다. 그러니 결국 잠시 동안 잃어버린 것도 감사할 일이오. 다시 찾은 것도 더더욱 감사할 수밖에.

 그 일과 함께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신혼 초 신학생 신분이었던 남편은 교육 전도사로 섬기면서 한달 책값 정도의 작은 사례비를 받았다. 그때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함께 생활을 꾸려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양가의 도움 없이 살아가는 살림살이는 늘 아슬아슬하였다. 저금통장에 비축된 돈이 있을 리도 없고 오직 그 달 그 달 간신히 은혜의 법칙을 딸라 지내고 있을 때였다.

그러다가 가끔씩은 지갑이 텅 비는 날이 생겼다. 카드도 전화도 없던 우리 부부에겐 즉시 SOS를 청할 데도 없었다. 그럴 때면 옷장 문을 열고 으레히 하는 일이 있었다. 걸어 둔 옷들의 주머니를 차례로 수색하는 일이다. 그러다 보면 뜻밖에 바지 주머니에서 또는 코트 속에서 접혀진 지폐를 발견할 때가 있다. 많으면 만원이 넘어 갈 때도 있고 천원 짜리 지폐 대여섯 장, 동전을 얼마 수확하곤 했다.

 가난한 우리 부부로선 그 정도면 며칠은 버틸 수 있다는 사실에 우리 부부는 회심의 미소를 짓곤 했다. 추수 후에 이삭을 줍는 기분을 주머니 수색을 통해 느끼곤 하였다. 그때 발견한 그 몇 천원의 이삭은 얼마나 반가운 것이었던지. 분명히 우리 소유였지만 거저 얻은 것처럼 마냥 기뻐했던 철없는 부부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러나 요즘에도 가끔씩 주머니 속에서 뜻밖의 지폐들을 찾아내지만 그 기쁨은 그 시절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요즘에는 급하면 현금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카드도 지갑에 꽂혀 있고 지갑이 텅 빌 만큼 궁핍함도 벗었고 이젠 훨씬 더 많은 것을 소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걸 보면 가난한 날의 행복이란 말은 결코 감상적인 용어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월간 <교회와신앙> 2000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