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전화를 하다가 중간에 끊어지면 교환에게 전화를 걸어 전화가 잘못되었으니 앞의 전화는 요금에서 제해주고 다시 연결하여 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데 그러면 묻지 않고 그렇게 해준다. 하와이 한 호텔에서 버튼을 잘못 눌러서 보지 않은 영화를 본 것으로 되었다. 그래서 영화를 보지 않았다고 했더니 비록 컴퓨터에는 영화를 본 것으로 나타났지만 내 말을 믿어주고 그 요금을 제해 주었다. 기계보다 더 사람을 믿어준다는 말이다.

그런데 언젠가 우리 나라에서 국제 전화를 하다가 3초 동안 연결되었다가 끊어져 다시 전화를 하였는데 고지서에 보니 3초의 통화를 한 통화의 요금으로 고지하였기에 그것을 해결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얼마 되지 않는 돈 때문에 무려 두 번이나 전화국에 직접가야 했고 사유서를 글로 써야 하는 등 복잡한 절차를 밟은 후에야 그것도 유쾌하지 않은 자세로 어쩔 수 없이 해결해 주는 것을 경험한 일이 있다. 무엇을 말해 주는가? 믿어주려고 하는 사회와 믿어주지 않으려는 사회의 차이라고 본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어주어야 한다고 했다. 우리처럼 믿을 수 없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고, 믿어서는 안 되는 사회 속에서 살던 때가 없었다. 우리는 믿지 않고 살아가는 데 익숙해져 있다. 믿으면 손해 되고 믿으면 망하고, 반대로 믿지 않아야 손해가 적고 안 믿을수록 똑똑한 사람이 되는 사회 속에 살고 있다. 그런 점에서 모든 것을 믿어야 한다는 성경의 말은 우리에게 많은 갈등을 낳게 한다.

  두 사람의 전직 대통령이 천문학적인 돈을 착취해 국민을 속였다는 그 사실 자체보다 이 민족으로 서로 믿을 수 없는 불신을 만들었다는 점이 더 분노스럽다. 진짜 애국자가 나와도 믿기 어려운 세대가 되었다. 돈을 안 받았다고 해도 믿을 수가 없고 안 받겠다고 해도 믿지 못한다. 이것이 그들이 이 민족에게 끼친 가장 큰 악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사랑은 모든 것을 믿어야 한다는 말의 뜻은 무엇일까? 속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속는 때가 종종 있는데 모든 것을 믿어준다면 항상 속고 살지 않겠는가? 다 진짜만 있고 하나만 가짜라도 나에게 그 가짜가 나타날까봐 의심해야 할 것 같은데, 가짜가 가득 찬 세상에서 어떻게 모든 것을 믿어 주어야 한다는 말인가? 가짜를 진짜로 믿어 주어야 한다면 가짜와 진짜는 어떻게 구별해야 하는 것인가?

농약으로 범벅이 된 식품을 어떻게 의심하지 말고 그냥 믿고 먹어야 하며, 어떻게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운 정치인들을 그냥 애국자로 믿어주어야 한다는 말인가? 모든 것을 믿어야 한다면 은행은 아무나 믿고 아무에게나 돈을 빌려주었다가 파산하게 될 것이요, 성도들은 사이비나 이단의 말을 믿고 스스로 영혼은 죽이고 말 것이다. 이 성경 말씀을 도둑이나 사기꾼들이 알고 이용할까 두려울 정도이다. "성경에서는 모든 것을 믿으라고 했는데 왜 믿지 못합니까"라고 할 것이다.

  모든 것을 믿으라는 말은 무조건 다 믿어서 속아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농약이 가득 찬 식품도 없다고 믿고 먹어서 암에 걸려 죽어야 된다는 말이 아니다. 다 믿으란 말은 도둑 믿고 강도도 믿고 매국노도 믿고 이단도 믿으라는 말이 결코 아니다.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사랑의 속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으로 믿어라'는 것이다. 이 말에는 믿게 해야 한다는 의미와 믿어주어야 한다는 의미가 다 들어 있다.

 먼저, 우선 믿게 해야하는 것이다. 신뢰도란 상대적인 것이다. 믿어주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믿어줄 수 없는 것도 문제다. 스승을 믿지 못하는 학생도 불행하지만, 학생으로 믿어지지 못하는 스승도 불행하다. 자식을 믿지 못하는 부모도 불행하지만, 부모에게까지 믿어지지 못하는 자식도 불행하다. 남편을 믿지 못하고 사는 여자도 불행하지만, 역시 아내에게 믿어지지 못하는 남편도 불행하다. 그런 점에서 먼저 중요한 것은 믿어지게 해야 한다. 먼저 스승이 믿게 해야 하고, 자식이 부모에게 믿어지도록 해야 하고, 목사가 교인들에게 믿어지도록 해야한다.

  불란서에서는 학부모들이 자신의 아이를 맡고 있는 선생님께서 사심이 없이 양심적으로 자신의 아이를 가르칠 사람으로 믿는 사람이 95%라고 한다. 이것이 불란서의 위대한 점이라고 한다. 미국 사람들도 내 자녀를 맡은 선생님이 자녀를 빌미로 돈을 받으려고 한다고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나라 경찰들은 사람들이 경찰을 믿어주지 않는다고 불평을 한다. 그러나 그 동안 경찰 스스로가 믿어지도록 행동하지 못했다. 백성들이 믿을 수 있도록 해야할 책임이 경찰 스스로에게 있다.

  자식들은 부모가 자신들을 믿어주지 않는다고 불평을 하는데 한 마디로 그들은 효자가 아니다. 자식을 믿지 못하는 부모도 불행하지만 부모에게조차 믿을 수 없는 자식이 더 불행할 것이다. 옛 말에 고슴도치도 제 새끼 털은 곱다고 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런 부모에게조차 믿어지지 못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믿어질 가능성은 없을 것이다. 먼저 내 부모로부터 믿어지는 사람이 되는 것이 효자의 첫 걸음이다.

  다른 사람이 나를 믿도록 하려면 어떻게 할까? 두 가지이다. 첫째는 진실이 있어야 하고, 둘째는 희생이 있어야 한다. 하나는 진실의 문제요 다른 하나는 희생의 문제이다. 진실하지 못하니까 믿지 못한다. 그리고 이기적이니까 믿지 못한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려고 해야한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믿지 말라고 해도 믿어준다. 은행에서는 가만히 있어도 돈을 써달라고 요청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쓰겠다고 해도 주지 않으려는 일도 있다. 이 진실과 희생이 함께 나타나야 한다. 희생적인 사람도 진실하지 보이지 않으면 다른 숨은 목적이 있는 것 같아서 믿지 못한다. 진실하며 희생하고, 희생하며 신실성이 있을 때 믿어지는 사람이 된다.
(월간 <교회와신앙> 2000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