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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의 한국교회
전국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 주관 '제3차 죄책고백심포지엄'
2005년 12월 07일 (수) 00:00:00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 일제의 기독교에 대한 정책과 한국교회의 변질·개편 및 부일협력을 중심으로

김승태(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연구실장)

1. 머리말

성서에 따르면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를 용서받은 죄인들의 공동체이다. 그리고 교회는 완성된 것이 아니라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이 점은 한국교회도 다르지 않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거룩성을 그 본질로 하지만, 용서받은 죄인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역사와 현실에서 자주 오류를 범하고 잘못에 빠지기도 한다. 그 때마다 교회는 성서의 말씀에 비추어 거듭거듭 회개하고 용서받고 새로워져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교회가 오류를 범하고 잘못에 빠지는 것은 교인들이 영적으로 깨어있지 못하고, 나약하기 때문이다.
가톨릭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94년 11월 10일자〈2000년 희년 준비에 관하여 주교들과 성직자들 그리고 평신도들에게 보내는 교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교회는 자기 자녀들이 참회를 통하여 과거의 과오와 불충한 사례들, 항구치 못한 자세와 구태의연한 행동에서부터 자신을 정화하도록 격려하지 않고는 새로운 천년기의 문턱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과거의 나약함을 인정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을 강화하도록 도와주는 정직하고 용기있는 행동입니다. 그것은 오늘날의 유혹과 도전에 직면하도록 우리를 각성시키고 이를 극복하도록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일제강점기에 한국교회는 나라를 잃고 실의에 빠진 우리 민족에게 복음을 통해 희망을 주고, 각종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에 참가했으며, 그 지도력을 양성하여 제공하는 등 민족과 역사에 많은 긍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더욱이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항거하여 많은 사람들이 수난을 당하였고, 순교자들까지 배출하였다.

그러나 일제 말기에 가혹한 일제의 탄압과 강요에 못 이겨 우상숭배적 신사참배를 결의․실행하고,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하는 등 부정적인 부일 협력 활동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일반적으로 한국교회가 이러한 과거의 오류와 잘못과 나약함을 회개하거나 반성하기는커녕 그런 사실을 인정하기조차 꺼려해 왔다는 사실이다. 이제라도 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은 한국교회를 위하여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이 글에서는 일제의 기독교에 대한 정책과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전후한 시기부터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기까지 한국교회의 변질ㆍ개편 및 부일협력 활동을 유형별로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필자의 다른 글에서 상세히 정리하였으므로 여기서는 이 시기에 관한 ‘죄책 고백’에 포함해야 할 내용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질정을 바란다.

2. 일제의 기독교에 대한 정책

일제는 기본적으로 기독교에 대해서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첫째로, 천황숭배와 신사신앙을 축으로 하는 그들의 정치적․ 문화적․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기독교와는 조화․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초기 식민지 교육정책 수립에 영향을 주었던 호즈미(穗積八束)는 기독교계 학교와 관련하여 이 점을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야소교(耶蘇敎)의 본의(本義)는 원래 국체(國體)와 도덕의 근본과는 서로 합일(合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충효(忠孝)의 대의를 근본 축으로 한 도덕과 박애 인도를 대본(大本)으로 한 도덕과는 근저에 차이가 있다. 인간을 평등이라 하여 존귀의 차별을 비리(非理)로 하는 교의(敎義)와 황위(皇位)를 신성한 것으로 여기고 군부(君父)를 존경하며 조상에 예배하는 교의와는 전혀 그 주의(主義)를 달리한다.”

즉 기독교의 교의와 일본 ‘국체’(國體)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 때문에 일제는 항상 기독교에 대해서 의구심을 품고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다년간 신사행정에 관여하였던 오야마(小山文雄)도 그의 저서에서 “국체는, 즉 신황신앙(神皇信仰) 위에 서 있다. 고로 국민으로서 국가적 신도(神道)를 거부하는 것은 국체를 무시하는 것이요, 국민으로서 의무를 거부하는 것이라 단정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으로서 수입교(기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국체신도를 받들지 않는 자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반국민적(反國民的)이다”라고 하여 기독교의 반일성(反日性)을 지적하였다.

1940년 10월 7일 감리교 양주삼 총리사의 사회로 총회 중에 이른바 ‘애국일’ 행사를 치르고, 참석자들과 함께 총독부를 방문하여 미나미 총독의 ‘고사(告辭)’를 들었는데, 이 때 행한 미나미 총독의 다음과 같은 ‘고사’도 기독교계에 대한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위협이었다.

“현재 우리나라(日本)는 동양 평화 옹호의 대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국민총동원 하에 시국에 대처하고 있는 때인데 대일본국민인 자는 그 신앙하는 종교의 여하를 불문하고 일제히 천황폐하를 존숭하여 받들고 선조의 신기(神祇)를 숭경하고 국가에 충성을 다해야 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바로써 신교(信敎)의 자유는 대일본국민인 범위에서만 용인되는 것이며, 그러므로 황국신민(皇國臣民)이라는 근본정신에 배치되는 종교는 일본 국내에서는 절대 그 존립을 허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비상시와 평시를 불문하고 국민으로서 힘써야 할 당연한 의무입니다. 여러분은 이 점을 아시고 이른바 종교보국(宗敎報國)의 길에 매진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일제는 이러한 한국의 기독교에 대하여 ‘백방(百方)으로 박멸책(撲滅策)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둘째로, 한국교회가 민족운동 내지 독립운동과 깊은 연대를 가진 가장 큰 배일적 세력이었다는 데 있다. 이 점은 기독교 탄압의 선봉에 섰던 조선총독부 검사국의 다음과 같은 보고서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한편 조선인 기독교도에는 왕왕 종교의 영향에 빠져서 민심을 움직여 불온사상(不穩思想)을 고취하는 등 민족운동의 지도자로 자임(自任)하는 풍조가 있고, 메이지(明治) 43(1910)년 데라우치(寺內) 총독 암살사건에는 평북 기독교도가 중심이 되어 책동하였고, 다이쇼(大正) 8(1919)년 만세소요사건은 평양․ 원산․ 정주․ 의주 등의 기독교도들이 천도교도와 함께 획책한 데에 기인하여 전조선(全鮮)을 모두 소요케 하였으며, 그 후에도 각종 민족운동에 그들이 개재되지 않음이 없고, 전도회․ 사경회 등에서도 누누이 불온의 언동을 하는 자가 있고, 또 그들은 최근 농촌의 교화를 표방하고 지방 농민을 그 손안에 넣어 훗날에 대비하고, 혹은 장로파 미국인 선교사 등이 그 경영 학교 생도의 신사참배를 거부케 하는 태도 같은 것은 통치상 경시(輕視)하기 어려운 것으로 항상 주의 중에 있다.”

즉 현실적으로도 기독교가 각종 민족운동 내지 항일독립운동과 관련을 가짐으로써 일제의 미움을 사 철저한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셋째로, 기독교가 선교사들을 매개로 그들과 경쟁 내지는 적대 관계에 있는 영․ 미 등 서구 여러 나라들과 연결되어 있고, 세계 여론에 연결되어 있어 통제 내지 예속화하기 어렵다는 데 있었다. 1930년대 이전의 일제와 선교사와의 관계는 반드시 적대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20세기 초 한국을 식민지화하던 과정에서나, 식민지 지배체제를 확립해 가던 과정에서는 일본이 서구 여러 나라들과 협력관계에 있었고, 선교사들의 도움이 필요했으므로 이들을 후대하여 회유, 이용코자 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에 들어 영․ 미와의 관계가 악화되고, 외부의 지지 없이도 식민지 경영이 가능하다고 판단되자 선교사는 오히려 짐이 되었다. 이에 따라 차츰 선교사들을 적대시하여 한국교회와 분리시키려는 분열정책과 탄압정책을 실시하였다. 한국교회에 대한 선교사의 영향력을 배제시킴으로써 그들의 통제를 강화시키고, 이미 통제에 순응하는 일본기독교에 예속시키고자 한 것이다. 특히 이러한 과정에서 신사참배문제는 결정적인 탄압의 단서를 제공하였다.

1930년대 선교사 경영의 기독교계 학교에서 신사참배 거부가 문제화되자, 일제는 이를 선교사들의 사주에 의한 것으로 몰아 ‘완미(頑迷)한 외인 선교사’라 비난하면서 반선교사 여론을 부추겼다. 한편, 1920년대 이후 선교사들의 교권적 횡포에 염증을 내어 일어난 이른바 ‘조선적 기독교’의 수립을 표방하던 한국교회 내의 자생적인 반선교사운동까지 부추기면서, 한국교회와 선교사간의 친밀한 유대관계를 분열시키고자 하였다. 중일전쟁 이후 이러한 경향은 더욱 뚜렷해져 각 교단 기관에 압력을 가하여 선교사들의 활동을 배제시켰다.

이러한 일제의 방해․분열 공작은 선교사들의 활동에 제약을 가져와 교육활동과 선교활동이 부진하게 되었고 겨우 의료 활동에서만 그 명맥을 이어갔다. 그러나 이러한 의료 활동마저 1940년부터 탄압을 받아 대부분의 기독교병원이 문을 닫았다. 뿐만 아니라 미․ 일, 영․ 일 관계의 악화로 점차 모든 외국인들을 적성(敵性) 국민으로 취급하여 감시⋅탄압하였고, 일부 선교사들을 간첩 혐의로 구속하여 허위 자백까지 강요하였다. 결국 일본의 미국에 대한 전의(戰意)가 표면화되자, 1941년 11월 본국 정부의 훈령에 따라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철수하였다. 잔무 처리를 위해 이후까지 남아있던 몇몇 선교사들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제에 억류되어 갖은 탄압을 당하다가 1942년 6월 포로 취급을 받아 일본인과 교환되었다.

이와 같이 한국교회에서 선교사의 영향력을 완전히 배제시킨 일제는 교회에 대한 예속과 통제를 강화하여 그들의 통치에 이용코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굴복한 친일적 기독교 지도자들을 포섭하여, 이른바 ‘일본적 기독교의 확립’이라 하여 기독교의 변질을 강요하고 ‘종교보국’이라 하여 전쟁협력을 강요하였다.

신사참배문제가 절정에 이르렀던 1938년 2월 총독부 경무국은 이른바 “기독교에 대한 지도 대책”이라는 것을 마련하였는데, 이는 기독교에 대한 그들의 정책이 어떤 것이었나를 잘 보여주고 있다. 요컨대 일제의 기독교에 대한 정책은 탄압과 회유로 그들의 시책에 순응하게 하고 거부할 경우에는 처벌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른바 ‘국체에 적합한 야소교’를 만들게 함으로써 기독교의 변질을 강요하여 그들의 침략정책 수행에 이용코자 하였다.

일제의 이러한 기독교에 대한 정책은 1940년에 일제 검찰이 마련한 “기독교에 대한 지도방침”으로 더욱 강화되었다. 이 두 자료를 비교해 보면 우리는 그간의 상황 변화를 쉽게 알 수 있다. 우선 기독교에 대한 정책의 명칭부터 앞의 것은 “지도대책”이요 뒤의 것은 “지도방침”으로 “대책”에서 더욱 확고한 “방침”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 내용에서도 뒤의 것이 앞의 것보다 훨씬 상세하고 강제적인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두 자료의 내용상 강요나 상세함의 정도에는 차이가 있지만 그 근본적인 의도가 기독교에 대한 억압과 통제의 강화라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

이런 정책은 모두 기독교를 노골적으로 억압하여 서구 선교사와의 관계를 끊게 하고 고립시켜 일제의 황민화정책 및 침략전쟁 수행에 순응․ 협력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제는 이러한 정책을 바탕으로 이 시기에 ‘일본적 기독교’라 하여 기독교 신앙의 본질까지 변질시키고, 기구와 조직을 개편하게 하여, 기독교를 그들의 정책을 원활하게 수행하도록 충실히 순응․ 협력하는 일종의 어용 교화기구로 삼으려는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1945년 7월에는 모든 교파들을 통폐합하여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을 조직케 하였으며, 심지어 일제의 패전 직전에 일본 군부 지도부는, 연합국 군대가 상륙하여 공격할 때 한국 기독교인들과 지식인들이 연합군을 도와 줄 것을 두려워하여 한국 기독교인들을 포함한 지식인들을 1945년 8월 중순경에 학살할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다.

이러한 일제의 강압적인 기독교에 대한 정책은 결국 수많은 희생과 상처만을 남긴 채 실패로 끝났다. 그들은 해방 후에 정리한 자료에서 “일본은 조선에서 일본적 기독교의 건설에 노력하였지만 지나치게 정치적 강압을 하여 국가적 영합을 요구하였기 때문에, 국가의 패퇴(敗退)와 함께 그 성과는 영(零)이 되고, 일본에서 건너 온 일본기독교는 일본인만의 것이었기 때문에 일본인의 철퇴(撤退)와 운명을 같이하였던 것이다”라고 하여 그들의 실패를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3. 한국교회의 변질·개편과 부일협력 - ‘죄책고백’에 무엇을 포함시킬 것인가?

1) 우상숭배적 신사참배와 신도의식을 공인하고 실행한 죄
조선총독부에서는 1930년대 초부터 관공립학교는 물론 기독교계 사립학교에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하면서, 다시 적극적인 신사정책과 종교 통제 정책을 펴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중일전쟁 이듬해인 1938년 초부터 일제는 일반 기독교인들에게까지 경찰력을 동원하여 신사참배와 국가의식을 강요하고, 개 교회는 물론 장로회 노회와 총회에 압력을 가하여 신사참배를 결의․ 실행하도록 강요하였다.

가장 먼저 노회적 차원에서 신사참배 실시를 가결한 곳은 1938년 2월 3일부터 선천읍남예배당에서 열린 제53회 평북노회에서였다. 이 노회에서 종교교육부가 제안한 “신사참배는 종교가 아니요, 국가의식임을 시인하기로 한 일”을 여타 제안과 함께 가결하였던 것이다.

이때부터 같은 해 8월 31일 사이에 국내 23개 노회 가운데 17개 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였다(신사참배 결의 날짜를 알 수 있는 노회는 평북노회(1938.2.9), 용천노회(1938.4.17), 순천노회(1938.4.25), 제주노회(1938.4.27), 전남노회(1938.5.6), 경성노회(1938.5.6), 충청노회(1938.5.8), 전북노회(1938.6.8)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제 경찰의 치밀한 각본에 따라 1938년 9월 10일 제27회 장로회 총회에 평양, 평서, 안주 3노회 연합 대표 박응률이 “신사참배 결의 및 성명서 발포”를 제안하여 당시 총회장 홍택기 목사가 선교사들의 반대 발언을 무시하고 불법적으로 가결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 부회장과 각 노회장들이 총회를 대표하여 즉시 평양신사에 참배를 하기로 가결 실행하였다. 그리고 그해 12월 12일에는 장로회 총회장 홍택기와 부회장 김길창이 감리교 총리사 김종우와 전 총리사 양주삼, 성결교 이사장 이명직과 함께 일본의 이세신궁, 메이지신궁, 가시하라신궁, 아쓰다신궁, 야스쿠니신사 등을 두루 참배하려고 일본으로 떠났다.

감리교회는 이미 1930년대 중반부터 조선감리교회의 수장이었던 양주삼 총리사가 “신사참배는 종교가 아니다”라는 총독부의 설득을 문자 그대로 수용하여 1936년 4월 10일자〈감리회보〉에 “신사문제에 대한 통첩”을 게재함으로써 신사참배를 문제 삼지 않았다. 양주삼 총리사는 1938년 9월 3일에도 이를 다시 한 번 확인하는 통고문을 보냈다. 그리고 이를 입증이나 하듯이 그해 10월 5일부터 열린 제3회 조선감리회 총회에서 공식순서에 “애국일 실시”를 넣고 총회 제3일째인 10월 7일 오후에 배재중학교 운동장에서 양주삼 총리사의 사회로 ‘애국일’ 행사를 치른 다음 참석자 일동이 조선신궁을 참배하였다.

구세군에서도 1938년 7월 29일자로 토마스 윌슨 사령관이 각지 소대장들에게 ‘구세군률을 초월한 통첩’을 내어 국민정신총동원운동에 적극적으로 ‘매진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에 대해서 구세군 서기관 황종률 중좌는 “지금까지 구세군에서도 국민정신총동원에 참가 안한 것은 아니었지만, 지방에서 아직 완고히 고집을 세우고 있는 곳이 더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최고 지령을 내렸으니까 이로써 1만 8천 명이 완전히 통일되어 가령 지금까지 개인적으로 신사참배 하던 것도 이제는 단체적으로 하게 되었습니다”라고 발언하고 있다.

미나미 총독이 총재로 있고 오노 정무총감이 부총재로 있던 ‘국민총력 조선연맹’에서는 1941년 초에 ‘지도위원회’를 열어 신도(神道)의 ‘미소기하라이’[禊祓]를 철저히 보급하여 “정신운동의 근간으로” 삼고자 결정하고, 1월 16일자로 ‘조선연맹 사무국 총장’이 각도연맹 회장과 참가단체장 앞으로 “미소기하라이의 점진적 보급에 관한 건”이라는 공문을 보냈다. 그러자, ‘장로회 총회연맹 이사장’은 각 노회 연맹장과 각 교회 애국반장 앞으로 2월 26일부로 이 공문을 첨부하여 같은 제목의 공문을 보내고 있다.

정춘수 통리가 이끌던 감리교단 상임위원회도 1944년 4월에 수천 엔의 돈을 들여 상동교회에 황도문화관을 설치하기로 하고 그 회장은 정춘수 통리자, 부회장은 이동욱 목사, 관장은 갈홍기 목사가 맡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1944년 9월 26일에서 29일까지 황도문화관 개관 특별행사를 갖고 기념행사 기간 동안 매일 신도의 결례의식인 ‘미소기’를 실시하였다.

2) 거룩한 예배의식에 세속국가의 이른바 ‘국민의례’를 도입․ 실시한 죄
1938년 3월 22일부터 25일까지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열린 제34회 평양노회에서는 특별순서로 “1. 국기게양, 2. 황거요배, 3. 출정군인 위해 기도, 헌금 일금 100원, 4. 애국예배, 5. 출전황군 위문문 발송” 순서를 가졌다. 이 노회는 노회장이 박응률이었고, 부노회장이 주기철 목사였으며, 주기철 목사가 시무하던 교회에서 개최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1939년 5월 3일부터 정동제일예배당에서 열린 감리교회 제7회 서부, 중부, 동부 합동연회에서도 총리사와 각 지방 감리사 일동이 개회에 앞서 조선신궁에 참배하고, 개회식에서 국기게양, 황국신민서사 제송, 궁성요배, 전몰상이장병 유족을 위한 묵도 등 이른바 ‘국민의례’를 실시하였다. 감리교회는 이듬해인 1940년 2월 11일 이른바 ‘기원절’에도 전 교회가 ‘국민의례’가 포함된 “애국기념주일 예배”를 드리도록 성서 본문과 설교 주제까지 정한 순서를 회보에 게재하고 있다.

성결교회도 1939년 9월 20일부터 경성성서학원에서 개최되었던 제2회 연회의 결의에 따라 그해 10월 8일 경성 성서학원 대강당에서 ‘국민정신총동원성결교회연맹 결성식’을 가질 때 예배의식 첫 부분에 ‘국민의례’의 순서를 넣고 있다.

구세군에서도 앞에서 언급한 대로 1938년 7월 29일자로 토마스 윌슨 사령관이 각지 소대장들에게 ‘구세군률을 초월한 통첩’을 내어 국민정신총동원운동에 적극적으로 ‘매진할 것을 명령’하면서 “1. 매주일 아침 장년집합 직전에 황국신민 서사를 엄숙히 제송할 것, 2. 국기게양을 할 것, 3. 국가를 제창할 것, 4. 황거요배를 할 것” 등을 지시하고 있다. 이러한 이른바 ‘국민의례’는 처음에는 특별행사에서만 행해졌지만, 1940년대에는 일반 예배의식의 맨 앞에 넣어 매 예배 때마다 실행하였다.

3) 찬송가를 삭제하거나 가사를 개사하여 하나님의 통치권을 부인한 죄
1940년에 일제 검찰이 마련한 “기독교에 대한 지도방침”에서 그들은 “성서 찬송가에 대하여 재검토할 것”이라 하여 성서와 찬송가의 내용에 대해서도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총독부는 장로교의 변질과 협력을 촉진하기 위하여 1940년 10월 3일 장로교 상치위원 7명과 경기도 경찰부 고등경찰과장 기타무라[北村留吉]를 소집하여 간담회를 개최하고 이러한 그들의 의도를 보이며 이른바 ‘지도’라는 것을 하였다.

그 후 총회장 곽진근 목사는 장로회 총회 간부들과 함께 이른바 “조선예수교 장로회 혁신요강”이라는 것을 정하여 상치위원들의 의견을 구한 다음 11월 10일 총회장의 담화와 함께 이를 발표하였다. 이 혁신요강의 제5조 3항에 “찬미가 기타 모든 기독교 관계 서적 출판물의 검토를 하여 국체에 배반되는 자구를 개정할 것.”이 들어있었다. 이러한 요강에 따라 진행된 찬송가 가사 개정․ 삭제는 1942년 초에 마무리되어 1월 20일부로 종교교육부 총무 정인과 목사의 명의로 “신편찬송가 정정 사용 주지의 건”이라는 긴급통고문을 발표하여 실행되었다.

신정찬송가를 사용하고 있던 감리교에서도 1940년 10월 2일 감리교 이사회에서 결의한 “혁신조항”에 따라 교단본부에서 찬송가의 개정 작업에 들어가 총독부의 출판허가를 얻어 발간하려 하였으나, 서회에 재고가 많이 남아 있고, “전시하 용지절약의 국책에 순응”하여 기존 찬송가책을 고쳐서 사용하기로 하고, 100여 곳의 삭제 또는 정정할 곳을 1942년 4월 1일자 회보에 게시하고 있다.

이렇게 찬송가 가사를 개정하거나 삭제한 예를 들면, 일제의 “천황-신민”이라는 천황제 이데올로기에 위배된다고 생각되는 “왕, 대왕, 만백성, 백성, 임금, 구주, 구세주, 만유의 주재, 다스리시네” 등 하나님의 통치권과 관련되는 단어는 ‘주, 주님-사람, 보살피시네’ 등으로 바꾸고 있다. 또한 영적인 전투, 군사와 관련된 단어인 “군병, 충성, 싸우라” 등은 “일꾼, 정성, 일하라” 등으로 바꾸고, “십자가 군병”이나, “내주는 강한성”, “믿음이 이기네”, “믿는 사람들은 군병같으니”, 심지어는 주기도문 영가까지도 전장을 삭제하도록 하였으며, 재림과 악마, 세상의 혼란, 등을 표현한 문구도 삭제하도록 하였다.

4) 신구약 성서를 축소․ 배제하고 잘못 해석․ 선포한 죄
앞에서 1940년에 일제 검찰이 마련한 “기독교에 대한 지도방침”에 “성서 찬송가에 대하여 재검토할 것”이라는 항목이 들어 있어 성서와 찬송가의 내용에 대해서도 간섭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은 언급하였다. 이에 따라 성서 본문과 해석, 설교에 대한 제한을 결의한 것은 1942년 12월 2일부터 개최된 조선감리교단 제2회 총회 때였다. 여기서는 “총회 선언 조항”을 통해 “2. 말세 심판 재림론을 영적으로 해석하고 미신적 사상을 제거할 것, 3. 복음서에서 그리스도의 교훈 및 시범을 신앙생활의 기초로 하고 일체 유대사상 및 그 유전을 배제할 것, 4. 하나님 나라(天國)는 신의 평안이 각자의 마음속에 임재하는 것으로서 현세적 정치 형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할 것” 그리고 “설교는 그리스도의 복음 해석에 중점을 둘 것”을 결의하여 사실상 구약성서와 종말론의 폐기를 선언하였다.

변홍규 통리가 이끄는 감리교단은 이듬해인 1943년 4월 초 새문안교회에서 모인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구세단, 일본기독교조선교구의 대표로 구성된 제2회 교파합동위원회에서도 합동될 교단의 명칭을 “일본기독교 조선혁신교단”이라 하고, “교단의 경전은 신약성서로 하고 구약성서에 있는 유대사상을 제거하기 위해 구약해석교본을 발간”할 것 등을 제안하였다. 여기에 전필순이 노회장으로 있던 경기노회가 찬동하여 4월 2일 전필순을 통리로 하는 조선혁신교단이 출범하였다.

그러나 이 교단은 각 교파의 외면으로 한 달도 버티지 못하고 유야무야되었다. 일제 경찰의 비호를 받은 정춘수가 다시 통리에 복귀한 감리교단에서는 1943년 10월 총회의 결의에 따라 “교단 혁신의 정신을 반영하여 유태사상을 배제하고 순복음으로서 교의를 선포하기로 교단규칙”을 개정 실시하기로 하였는데, 이후부터는 “예배 설교 또는 교의를 선포할 때에 구약전서와 신약의 묵시록은 사용치 아니하고〈4복음서〉에 기인해서 교의선포를 하기로 각 교회 주관자에게 교단 통리로부터 통첩”이 있었다고 하면서 개정된 규칙 조항을 덧붙이고 있다.

이러한 성서 본문에 대한 축소 배제와 그 해석과 설교에 대한 제한이 감리교단이나 혁신교단만의 일이 아니었음은 1943년 5월 5일에 출범한 채필근을 통리로 하는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의 “실천요목”에 “(12) 말세․ 심판․ 재림 등은 세상적․ 물질적 해석을 고쳐 그것을 종교적․ 심령적으로 해석할 것. (13)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비기독교적 유대사상을 시정하기 위하여 그 적당한 해석 교본을 편찬할 것.” 등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5) 교회의 규범을 개악하고, 조직을 개편하여 교회의 전통을 문란시키고, 일제의 강제 통폐합에 응한 죄
앞에서 언급한 1940년의 “기독교에 대한 지도방침”의 “2. 정신적 방면에 대한 지도”라는 항목에 “2) 각 파에 상설적 집행기관을 설치하게 하여 감독 지도의 철저를 기할 것.” “4) 각 파의 교헌(敎憲) 교규(敎規)를 재검토하여 적정한 개혁을 하게 할 것.”이라는 소항목이 들어 있다. 일제는 이러한 방침에 따라 교회의 규범을 개악하고, 조직을 개편하여, 결국은 모든 개신교 교파를 하나로 강제로 통폐합하여 이용하려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물론 이러한 정책은 한국교회가 워낙 교파성이 강하여 우여곡절 끝에 1945년 7월에야 이루어졌지만, 그 이전에도 교파별로 이러한 작업이 추진되었다.

장로교 총회장 김응순은 1943년 4월 10일자 공문을 통해 5월 4일 신문내교회당에서 임시총회 소집함을 통보하였다. 총회소집 이유는 “일본기독교 조선교단 창립(5월 5일)에 당하여 교단규칙 비준과 기타” 논의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통합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4월 2일 감리교회와 경성노회가 연합하여 조직한 조선혁신교단(통리 전필순)의 출현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응순은 5월 4일부터 7일까지 상치위원회를 열고 총회를 불법적으로 해체하고, 통합할 교단의 규칙으로 검토해 오던 ‘교단규칙’을 그대로 사용하는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통합된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이 설립되면 사용하려고 미리 준비하였던 ‘실천요목’도 제목만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 실천요목”이라 하여 그대로 채택 발표하였다. 이 교단의 통리자로는 당시 후평양신학교 교장이던 채필근 목사를 선임하고, 김응순은 부통리를, 조승제는 회장을 맡았다. 이 ‘교단’은 종래의 노회제를 폐지하고 새로 제정한 ‘교단규칙’에 따라 교구제로 개편하였으며, 각 교구장도 상치위원회에서 임명하고, 교구장을 중심으로 교구조직을 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날인 5월 7일에는 통리 취임식까지 거행하였다. 또한 곧 이어 포교규칙에 따라 교파명칭 변경 및 포교자 변경계도 총독부에 제출하여 1943년 6월 25일자 관보에 그 내용이 게재ㆍ공시됨으로써 공식적인 신고ㆍ등록절차까지 마쳤다.

그러나 이러한 처사에 불만을 품은 평북노회는 1943년 7월 14일 그 교단을 합법적으로 조직되지 않았다고 보고 총회 소속 노회를 유지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김응순 총회장이 총회 해소를 선언한 것은 불법임으로 총회장을 탄핵한다는 “탄핵문”을 김응순 목사에게 발송하였다. 장로교회가 “총회”를 유지하기로 한 “조선예수교장로회 평북노회”와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으로 분열된 것이다.

이러한 장로교 내부의 분열과 갈등은 1년여 계속되었으나, 1944년 8월 11일 장로교단 대표 채필근, 김응순과 평북노회 대표 김진수, 그리고 동의자 정인과, 김종대 사이에 “타협안”이 성립되어 해소되었다. 이 타협안에 따라 평북노회는 무조건 교단에 다시 들어오고, 김응순은 총회장으로, 정인과는 총회 총간사로 복귀하였으며, 총회 중앙상치위원회를 중심으로 교단조직을 다시 하였던 것 같다.

그러다가 1945년 6월 25일에 정무총감 엔토가 장로교, 감리교, 구세군 지도자 55명을 초대하여 기독교계를 통합하여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을 만들 것을 종용했다. 2년 전에 시도하였다가 이른바 ‘조선혁신교단’의 출현으로 실패했던 교파 통합을 이제 총독부 주도로 다시 시도하려는 것이었다. 그날 저녁에 학무국 직원 2명, 장로교 대표 9명, 감리교 대표 7명, 구세군 대표 2명 등 20명으로 된 통합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들은 그 다음날부터 29일까지 학무국에서 회합을 갖고, 교단 규칙을 만들고, 교단 이름을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하기로 하고, 통합 총회 일정을 비롯한 상세한 계획을 작성하였다.

그리하여 7월 19일에서 20일까지 통합위원회에서 자의적으로 선임한 교파 대표들을 소집하여 총회를 열고, 교단규칙을 통과시키고, 통리자에 장로교의 김관식 목사, 부통리에 감리교의 김응태 목사를 지명하고, 통리자와 부통리자, 학무국 대표가 모여 각국 국장을 비롯한 각 지역 교구장 등 임직원을 선임하여 1945년 8월 1일부터 시무하게 하였다. 결국 해방 직전에 일제의 의도대로 한국 개신교 교파가 하나로 통합된 것이다.

감리교의 정춘수 감독은 1940년 10월에 발표한 “혁신안”의 실천을 위해서 1941년 3월 10일 정동예배당에서 임시특별총회를 소집하고, 새로운 “교단규칙”을 제정하여 감리교를 ‘교단’ 체제로 개편하였다. “기독교조선감리회”의 명칭도 “기독교조선감리교단”으로 고치고, 감독도 통리자로 고쳤다. 서부 중부 동부 3부와 그 밑에 여러 지방으로 나누었던 지방조직도 통폐합하여 10개의 교구로 나누고, 각 교구장을 임명하여 관리하게 하였다.

정춘수 통리자는 1942년 10월 1일부터 3일까지 인사동 중앙예배당에서 기독교조선감리교단 제2회 정기총회를 열고 2일에는 “교단혁신 2주년 기념식”을 가질 예정이었다. 총회는 예정대로 10월 1일 오전 9시에 개회되었으나, 개회 초기에 정춘수 통리의 부적절한 행동 때문에 불신임 탄핵안이 제안되어 25대 0으로 통과되었다. 그래서 임시 회장을 선임하여 회의를 계속하려고 하였으나, 그 다음 날 일제 경찰이 개입 방해하여 정춘수 통리가 회의의 연기를 선언하게 하였다.

일제 경찰의 비호를 받은 정춘수 통리는 그 해 12월 2일부터 3일까지 감리교회신학교에서 제2회 총회를 다시 열었으나, 예상치 않게 변홍규 목사가 통리자에 선임되었다. 신임 변홍규 통리자는 “소감과 포부”를 통해 “시국대응”, “신앙보국”, “도의 생활”에 힘쓰겠다고 약속하였으나, 일제 경찰은 그의 선출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변홍규 통리자는 정춘수 전임 통리자의 ‘혁신노선’에 따라 일제에의 협력과 교파 통합, 신학교 통합에 적극적이었다. 그리하여 1943년 4월 1일에는 감리교단 특별총회를 열어 장로교 경성노회와 연합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총독부 경무국의 비호 하에 전필순을 통리자로 하는 이른바 ‘조선혁신교단’이 조직되었다.

그러나 며칠 후 경성노회원 몇몇이 감리교단과 합동은 결의한 바 없다고 선언하고 전필순을 탄핵하였다. 그러자 변홍규 통리자도 감리교단의 환원을 주장하여 한 달여 만에 경무국에서도 통합은 없었던 것으로 인정하여 ‘조선혁신교단’은 분해되고 말았다. 이 일로 일제 경찰은 변홍규 통리자를 결국 사임시켰다. 결국 그 해 10월 3일에야 경무국의 비호 하에 감리교단 특별총회를 열고, 일제 경찰이 원하는 대로 정춘수를 다시 통리자로 선임하였다.

그는 다시 통리자로 선임되자, 교단 명칭을 ‘일본기독교 조선감리교단’으로 바꾸고, 1943년 11월 11일부로 각 교회 주관자에게 “교단규칙 실시하도록 통달의 건”이라는 공문을 보내, 1943년 10월 14일 일본교단 임시총회에서 새로 제정된 교단규칙(일본기독교 조선감리교단 규칙)을 만장일치로 가결하여 당일부터 실시하기로 하였으므로, 이 규칙에 따라 조속히 실시하도록 통달하였다. 그러다가 결국 감리교단도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1945년 7월 19일 출범한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에 통합되었다.

성결교회도 일제의 사주에 의한 교파합동과 신학교합동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1943년 5월 5일에는 이른바 기구를 ‘쇄신’하여 ‘일본기독교 조선성결교단’이라고 명칭을 바꾸고, 이명직 목사가 통리를 맡았으며, 전국을 경기, 함북, 함남, 황평(黃平), 충호(忠湖), 영남의 6교구로 나누었다.

그러나 성결교회는 그 무렵 재림신앙을 문제삼아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서 1943년 6월 17일부터 3회에 걸쳐서 통리 이명직 외 20명의 간부를 잡아들이고, 지방에서도 대구지방검사국에서 8월 20일 천세봉 외 2명의 목사를, 광주지방법원 검사국에서 9월 9일 2명의 목사를 잡아들여 수사에 착수했다. 그 해 9월에는 성결교회의 예배와 집회를 금지시켰으며, 12월 29일에는 ‘해산성명서’를 발표하게 하고 해산시키고 말았다.

영국 구세군 본영과 영국인 선교사의 지휘를 받던 구세군 조선본영도 일제가 영국과 적대관계가 됨으로써 1940년 가을부터는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 즉 총독부 당국은 구세군 영국 본영과의 의존관계를 청산하고 교파의 군사적인 색채를 없애도록 여러 차례 압력을 가해왔다. 그러다가 결국 1940년 10월 29일 조선본영 사령관 토마스 윌슨 소장은 영국 본영의 지령에 의하여 사령관직을 사임하였다. 그리고 그 후임으로 한국인 사관 황종률[檜原正義]을 대표자로 임명하고, 그와 일본인 사관 사카모토[坂本雷次]에게 구세군 ‘개혁’ 방법을 맡기게 되었다.

특히 일본인 사카모토는 일제 당국의 지도에 순응하여 10월 30일부로 “조선구세군 혁신 선언”을 발표하여 교파 명칭도 조선구세군에서 조선구세단으로 바꾸고 본격적인 체제 ‘개혁’과 부일 협력에 나섰다. 그러다가 구세단도 앞에서 서술한 바 있는 1945년 7월 19일에 출범한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통합되었다.

6) 교회를 통폐합하거나 교회의 재산을 처분하고, 교인들에게 ‘헌금’ ‘헌납’을 강요하여 일제
의 침략전쟁에 협력한 죄
일제 경찰의 요청과 제29회 총회의 결의에 따라 조직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중앙상치위원회’는 1941년 8월 14일 서울의 총회사무실에서 위원회를 열고, “전시체제 실천성명서”를 결의․ 발표하였다. 이 성명서에 부수된 “실천사항”에서 “시국봉사의 실천”으로 ‘애국기 헌납’, ‘금속품 공출’, ‘폐품 회수’ 등의 항목을 넣었는데, 그 가운데 ‘애국기 헌납’을 실행하기 위해서 ‘조선장로교도애국기헌납기성회’을 조직하여, 그 해 말까지 최단 기간에 완수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결의에 따라 8월 20일 상치위원들이 추천한 발기인들이 모여 ‘조선장로교도애국기헌납기성회’를 조직하고, 총독부로부터 기부금모금 허가를 얻어 그해 10월부터 본격적인 모금활동에 들어갔다. 총회 상치위원회는 10월 9일에도 회의를 열어 “애국기 헌납금 모집에 관하여는 각 노회에 명하여 각 교인 비례로 1인당 1원씩 헌납하기로” 결의하고, 10월 22일에 각 노회장회를 신문내예배당에서 개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노회장 회의는 예정대로 모여 만찬 후에 애국기헌납기성회 회장 정인과 목사로부터 “애국기기금과 애국운동기금 헌납”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정인과 목사는 기성회회장과 총회연맹 총간사의 자격으로 장로회 각 교회 책임자에게 “장로교회애국봉사기금 조달에 관한 건”이라는 공문을 보내 “11월 중에 일제히 애국운동기금연보를 실시”하여 총회로 송금하고 보고서를 보내도록 지시하고 있다.

이렇게 모금한 금액으로 이듬해인 1942년 2월 10일에 “육해군에 애국기 1대와 육전기관총 7정의 자금으로” 15만 317원 50전을 헌납하였다. 그리고 그 후에 수입된 잔금으로 1942년 6월 19일 총회연맹 이사장 최지화와 기성회 위원 대표로 정인과ㆍ백낙준ㆍ이용설ㆍ오문환 등이 조선군사령부를 방문하여 육군환자용자동차 2대의 기금으로 2만 3천 221원 28전을 헌납하였다.

총회연맹은 1942년 4월 24일에도 각 노회연맹 이사장에게 공문을 보내 4월말 현재로 교회 종을 ‘헌납’한 상황과 종을 가지고 있는 교회에 대해서 조사하여 5월 5일까지 도착하도록 급히 조사 보고서를 보내도록 독촉하고 있다. 5월 11일에도 총회연맹 총간사 정인과가 직접 각 노회연맹 이사장에게 “헌종보고서 독촉의 건”이라는 제목의 공문을 보내고 있다. 이렇게 하여 떼어 바친 종은 총회연맹에 보고된 것만도 1942년 10월 15일 현재로 1,540개, 금액으로는 약 11만 9천 832원에 이르렀다.

이 무렵에 ‘신체제’에 적응한다고 하여 교회의 종을 떼어 바칠 뿐만 아니라 교회의 통폐합도 널리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 같다. 경북노회 노회장이자 상무위원장이던 송창근 목사는 1942년 5월 7일자로 교회 폐지 및 병합에 관한 공문을 각 교회 및 교역자 앞으로 보내, 폐지 병합되는 교회에서는 “쇼와 17년 5월 말 주일(일요일)까지만 예배회로 모일 것”을 지시하고 있다.

장로회 제31회 총회는 1942년 10월 16일부터 평양 서문외교회당에서 모였는데, 이 총회에서는 김응순 목사가 총회장에 피선되고, 전필순 목사가 부회장에 유임되었으며, 김종대 목사가 서기에 피선되었다. 이 총회에 경남노회장으로 참석하였던 김길창 목사는 경남노회 상황보고서에서 교회 상황은 “통제에 의하여 교회의 폐합을 실시한 결과 335교회 중 108교회의 감소를 보았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러한 교회 상황은 다른 노회들도 예외가 아니었던 듯하다. 회의록에 첨부되어 있는 통계표에 따르면 장로교회 총수는 전년도 3,624개 교회에서 2,543개 교회로 30%가 줄고, 신도총수도 전년도 355,754명에서 249,666명으로 30%정도 줄었다.

김진수 목사가 노회장으로 있던 평북노회도 1944년 1월 12일에는 산하 각 교회에 “제2차 애국기헌납기금 모집의 건”, “징병제 실시에 따른 국민태세를 정비하는 운동에 관한 건” 등의 공문을 보내고 있다. 1944년 2월 2일부터 3일까지 선천남교회당에서 열린 제64회 평북노회에서는 제2차 애국기 기금이 76개 교회분 11,141원으로 보고하고 있다.

국민총력 조선감리교단연맹은 1941년 10월 21일 이사회를 열고 5개항을 결의하여 “전시하 황국신민으로써 종교보국에 충성을 다하기로” 하였는데 그 가운데 제4항은 “각 교회 소유의 철문과 철책 등을 헌납할 것”이었다. 감리교단연맹 이사장 정춘수 통리자는 1941년 12월 8일에도 각 교회 주관자에게 “긴급공시”문을 보내 “오는 14일 아침예배 후 영미응징승전기원을 하고, 애국헌금을 성의껏 하여 본부로 즉시 송금할 것” 등을 지시하였다.

이듬해인 1942년 1월 31일에도 공문을 보내 매월 8일에는 “대조봉대식”을 거행하고 “필승기원”을 하며, 예배와 기도회를 주일 아침에 한 번, 수요 저녁에 한번을 원칙으로 하고, “애국헌금 기타 국민의 의무이행에 성의를 다하고” 그 결과를 본부에 보고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2월 13일에도 각 교구장에게 “황군 위문 및 철물헌납 건”이라는 공문을 보내 “교회종도 헌납하야 성전(聖戰) 완수에 협력”하도록 지시하고 있다.

정춘수 통리는 1944년 3월 3일에 개최한 교단상임위원회에서 경성, 제물포, 송도, 해주, 평양, 진남포, 원산, 강릉, 강경 등지에 있는 34개의 교회를 폐쇄하여, 그 재산을 팔아 비행기 3대의 헌납 기금으로 바칠 것을 결의하고 3월 7일자로 그 시행에 관한 공문을 발송하고 있다. 1944년 5월 1일자〈기독교신문〉에 실린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 “통보”에서도 “애국기 헌납 결의와 신도의 헌금” 및 “교회의 병합과 구역정리의 실시”를 통해 애국기(감리교단호) 3대를 헌납하기로 결의한 것과 그 대금은 신도의 헌금전액과 교단소속 교회의 병합에 의해 폐지된 교회의 부동산을 매각처분한 대금으로 충당하기로 하였다고 알리고, 교회병합은 4월 2일 예배일까지 실시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성결교회는 다른 교파와 마찬가지로 그 교세만큼 국방헌금 등 각종 부일협력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재림신앙을 문제삼아 1943년 12월 29일에 ‘해산성명서’를 발표하고 해산하고 말았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 해산이 일제에 의한 강제해산이라고 해서 수난으로만 해석해야 할 것이냐는 것이다. 물론 이 사건은 일제의 박해에 의한 교회의 수난사건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 절차가 강제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자발적 해산의 형식을 취하였고, 성결교의 이사장 이하 간부들이 잔무처리위원으로 남아 일제 당국의 지도에 따라 교회의 재산을 처분하여 일제에 모두 ‘헌납’하였다는 점에서 자발적인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일종의 부일협력 행위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강제로 빼앗기는 것과 어떤 형식으로든 ‘헌납’하는 것은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7) 강연․ 언론․ 좌담회 등을 통하여 일제의 그릇된 ‘교화운동’에 참여한 죄
앞에서 언급한바 있는 1938년 2월 총독부 경무국의〈기독교에 대한 지도 대책〉의 제 일항은 “1. 시국 인식의 철저를 위하여 예수교 교역자 좌담회를 개최하고 지도 계몽에 노력하여, 이를 통하여 일반 교도의 계몽을 담당하게 할 것.”이었다. 이에 따라 중일전쟁 이후부터 점차 강화시켜 가던 시국강연회를 경찰을 동원하여 교회에도 강요하였다.

1940년에 보고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장로회연맹의 “시국대응 제실시에 관한 건 보고서(1937~1939)”에 따르면 장로교회에서 실시한 시국강연 횟수는 1937년에 294회, 1938년에 456회, 1939년에 605회로 해마다 급증하고 있다. 1942년 제31회 총회에 보고한 총회연맹 보고에 따르면 1942년 2월중에 “대동아전쟁의 목적 관철과 기독교도의 책무를 재삼 격려하기 위하여” 철도노선에 따라 5대로 나누어 다음과 같이 중앙에서 연사를 파견하여 “지방시국강연회”를 개최하게 하였다.

“(1) 호남선 : 이종순, 박준승, (2) 경부선 : 구라시게(倉茂周藏) 소장(초청), 김락영, 오문환, (3) 함경선 : 전필순, 조승제, (4) 황해선 : 김응순, 최지화, (5) 경의선 : 가와키시(川岸文三郞) 중장(초청) 백락준, 한석원 제씨”

장로회 총회장 김응순 목사는 1943년 1월 11일에 중앙상치위원회를 열어서 이른바 “일본적 기독교”와 관련하여 “(1) 2월 11일, 12일 기원절을 기하야 이틀 동안 일본정신 체득을 목적으로 남자교역자연성회를 개최하기로 함.......(3) 3월 10일, 11일 육군기념일을 기하여 이틀 동안은 징병제취지 철저를 목적으로 부녀자연성회를 개최하기로 함. 등 몇 가지 사항을 결의하고 실천에 옮겼다. 이러한 결의에 따라 2월 11일, 12일에 서울 승동교회에서 열린 장로회 총회 연맹 주최 “노회대표자연성회”에는 22개 노회 회장, 서기, 회계 3명씩 70여 명이 참석하여 첫날 아침 총회연맹 이사장 김응순 목사의 인솔로 조선신궁을 참배한 후 개회식을 갖고 각종 시국강연을 하였으며, “전시포교지침 선포식”을 갖고 군부대견학도 하였다.

총회연맹 주최의 “여자대표자연성회”도 3월 5일에서 8일까지 경성 대화숙에서 이른바 “징병제도 취지철저”를 목적으로 열렸다. 전국 22개 노회 여성대표와 장로회여전도회연합대회 임원들까지 80여 명이 참석하였다. 첫날인 5일 저녁에 열린 개회식에서는 총회장 김응순이 훈사를 하고, “장로회 전시포교지침”에 대한 선서가 있었다. 이튿날 새벽에는 총회장의 인솔로 도보로 조선신궁에 참배하고, 새문안교회당에서 “지구절(地久節) 봉축식”을 갖고, 각종 시국강연을 들었으며 군부대방문도 하였다.

‘교단’ 산하 경남교구회에서도 1943년 12월 15일부터 16일까지 “제2회 경남교구회 및 연성회”를 개최하고, 교구장인 김길창 목사가 “대동아전쟁과 기독교”, 권태희 목사가 “결전하의 신앙생활”, 김동선 목사가 “결전하 교역방침”이라는 제목으로 시국강연을 하였다.

평북노회장 김진수 목사도 1943년 9월 22일자부터〈기독교신문〉에 “참된 일본기독교 수립운동 고안(考案)”이라는 글을 게재하고, 이듬해인 1944년 8월 1일에는 평북노회 임시회를 평북노회 상치부가 대행하여 “노회 관하 각 교회는 쇼와 19년 8월 13일 저녁부터 16일 저녁까지 ‘성전필승기원 기도회’를 할 것, ‘징병제실시 기념 강연회’를 쇼와 19년 8월 28일부터 9월 1일까지” 개최할 것을 결의하고, 8월 1일부로 노회장 김진수 목사는 관내 각 교회에 각 구역별 일정과 장소, 집합할 교회명, 강사 등을 기재한 표를 첨부하여 보내고 있다.

국민총력 조선감리회연맹의 이사장 정춘수는 1941년 2월 1일부로 각 지방연맹 이사장과 각 교회 애국반장 앞으로 “기원절 봉축에 관한 건”이라는 공문을 보내 2월 11일 이른바 ‘기원절 봉축 행사’에 참여하도록 독려하고 있다. 그리고 같은 해 3월 4일부터 5일까지는 이 연맹 주최로 부민관 강당과 정동제일예배당에서 시국대응신도대회를 열고, 조선신궁 참배와 애국헌금을 비롯한 이른바 ‘애국행사’를 하고, 혁신요강의 실천과 고도국방국가 완성에 매진할 것을 선언한 선언문을 채택한 다음 각종 시국강연을 들었다.

그는 1942년 5월 일제의 “징병제 실시” 예고와 관련해서도 “공시”를 통해 철저한 준비와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 5월 18일에는 감리교단 경성교구 주최로 인사동 중앙예배당에서 ‘부인강연회’를 열어 “징병제도 실시에 대한 부인들의 인식을 계몽”하였다. 공덕동 감리교회 부인회에서도 5월 26일부터 30일까지 매일밤 “징병제 실시 기념 부인강연회를 개최하고 있다.

감리교단 산하에 각 지방 부인회 대표로 조직된 연합여자대회는 제2회 대회를 1942년 6월 17일부터 18일까지 이틀 동안 인산동 중앙예배당에서 열었는데, 회원 300여 명이 참석하여 첫날 아침에 전원이 조선신궁에 참배하고 돌아와 정춘수 통리의 ‘고사’와 총독부 관리들의 시국강연을 듣고, 징병제 실시에 대한 “감사 결의 및 애국헌금”을 하였다.

국민총력성결교회연맹도 다른 교파의 단체들과 마찬가지로 1943년 12월 성결교회가 해산되기까지 각종 시국강연회를 열며 일제의 충실한 협력단체로 활동하였다. 예를 들면 1942년 5월 16일자로 이사장 이명직이 각 교회 주임자에게 “반도에 징병제도 실시 축하의 건”이라는 공문을 보내 징병제가 공포된 것을 알리고, “아 성결교회에서는 여좌한 순서로 각 축하회를 개최하되, 당국에 문의하야 그 지도를 받을 것이며, 시일은 편의를 따라 속히 행하고, 강사는 할 수 있는 대로 당국에 의뢰”하기 바란다고 통지하고 있다.

5월 17일 밤에는 경성 성결교회 연합으로 경성신학교 강당에서 신도 천여 명이 모여 징병제실시축하 성결교신도대회를 열고, 구라시게[倉茂周藏] 조선군보도부장의 징병제에 대한 강연을 듣고, 성명서를 채택하고, 일본 내각 총리대신과 육군대신, 척무대신 등에게 감사전문을 보내기로 결의하였다. 1942년 12월 1일부터 3일까지는 경성신학교 강당에서 ‘국민총력성결교회연맹 연성회’를 개최하고, 첫날 오전 6시에 개회하여 국민의례와 대조(大詔)봉독식을 갖고, 7시 반까지 이명직 목사 인도로 필승기도회를 갖고, 이어서 조선신궁을 참배하고 궁성요배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이에 이어서 시국강연회를 갖고 있다.

구세단도 이 무렵 징병제실시 발표와 관련된 모임을 교파 연합으로 혹은 단독으로 개최하고 있다. 예를 들면 1942년 5월 11일 밤 승동예배당에서 있었던 ‘징병제실시감사 전 경성기독교도대회’에 감리교의 정춘수, 박연서, 장로교의 전필순, 김영주, 성결교의 이건 등과 함께 구세단의 단장 사카모토가 참석하여 ‘감격사’를 하고 있다. 5월 17일에는 재경성 구세단연합으로 아현회관에서 ‘징병제실시감사 강연 및 영화의 밤’을 개최하고, 국가의식을 거행한 후 국민총력연맹 우에다[上田龍雄]의 강연을 듣고, “감사결의문”을 채택하고, “히노마루(일본국기)”, “피의 전령” 등 영화를 상영하였다. 그리고 그 이튿날 오전에는 구세단 각부 대표자가 조선신궁을 참배한 후 총독부를 방문하였다. 5월 22일에는 구세단 원산지부에서도 ‘구세단북선지방본부’ 주최로 ‘징병감사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이러한 일제말기 한국교회의 변질․개편과 부일 협력 활동은 교회의 본질을 훼손하고, 당시 교인들에게도 큰 손실과 상처를 주었음은 물론, 교인이 아닌 일반인들에게도 잘못된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큰 죄악을 범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부수적인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8) 박해받는 성도와 형제 교회에 대해 무관심한 죄, 9) 불의에 대한 예언자적 사명을 망각한 죄, 10) 이상의 모든 죄와 허물을 즉시 공개적으로 회개하지 않고 지연한 죄 등이 이 시기에 대한 한국교회의 ‘죄책 고백’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4. 맺음말

이상에서 일제의 기독교에 대한 정책과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전후한 시기부터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기까지 한국교회의 변질ㆍ개편 및 부일협력 활동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과거 청산 작업은 과거사의 진상규명과 정리부터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만 평가와 반성과 성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시기 기독교계의 “변질ㆍ개편 및 부일협력”은 일제의 외압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어떤 이유와 명분으로든 기독교계 내부의 “협력자”가 없었더라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협력자”들은 모두가 자타가 공인하는 기독교계의 ‘지도자’들이었다. 물론 당시 모든 기독교계 지도자들이 일제의 “협력자”는 아니었지만, 당시 직위를 유지하고 있던 대부분의 지도급 인물들은 자의든 타의든 간에 일제에 협력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욱이 이러한 협력행위는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했다고 하지만, 결국은 그러한 행위가 세속 권력에 영합ㆍ추종하여 교회의 교회다움을 상실하게 하고, 교회의 사회 공신력을 떨어뜨리게 했으며, 교인들은 물론 다른 일반인들까지 잘못된 길로 내몰았다. 더욱이 그러한 행위가 기독교의 이름으로 행한, 일제의 침략 전쟁 협력 행위였다는 점에서 하나님 앞에는 물론, 우리 민족과 역사 앞에서도 용서를 구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된 지 60주년이 되는 지금까지도 그 실상의 정리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이제라도 이에 대한 정리와 한국교회 전체의 반성과 ‘죄책 고백’이 요구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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