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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례할 수 없는 사랑
1999년 07월 01일 (목) 00:00:00 최삼경 목사 sam5566@amennews.com

어떤 아버지가 뜨거운 욕탕에 들어가 콧노래를 부르며 "시원하다, 시원하다"는 말을 연발하고 있다. 시원하다는 말을 들은 아들이 그 욕탕 속으로 첨벙 뛰어들어갔다. 아들은 시원하다는 물이 뜨거워 기겁하고 뛰어나가며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네, 이 뜨거운 물을 시원하다고 하다니…"라고 말을 했다. 이 말을 들은 아버지가 자식의 무례함에 기가 막히고 화가 나서 자식을 실컷 두들겨 주었다고 한다.

아버지와 아들이 목욕을 다 하고 집으로 가다가 아들을 때려준 아버지의 마음이 아파, 빵 세 개를 사서 아들에게 하나 주고 아버지가 두개를 먹으며 "배부르지?" 그랬더니 이번에는 아들이 하는 말이 "하나 먹은 놈 배부르면, 두개 먹은 놈은 배 터져 죽겠네" 그랬다고 한다. 더 화가 난 아버지가 몽둥이로 아들을 때리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아들이 "죽여라 죽여, 네 아들 죽지? 내 아들 죽느냐?"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이 세대를 풍자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 말 속에 현대인의 무례함이 극에 달했다는 것을 알게 한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다"라고 했다. 왜 사랑하면 무례히 행할 수 없는 것일까? 왜 무례함은 사랑이 아닐까? 오히려 사랑하는 사람끼리 너무 예의를 지키면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겠는가? 친한 친구가 처음 만난 사람처럼 예의를 갖추어 말을 하거나, 부부가 연애하던 때처럼 깍듯이 대한다면 얼마나 불편하겠는가? 오히려 예의는 존경의 관계에 어울리는 행위요, 친근함은 사랑에 어울리는 행위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사랑은 한없이 가까워지는 것이라면, 예의는 알맞은 거리를 유지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오히려 예의는 사랑을 방해하고 사랑을 무너뜨리는 행위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왜 성경은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라고 했을까? "무례하다"는 말은 "아스케모네오"라는 말로서 품위 없이 행동하는 것과 영예롭지 못하게 즉 비겁하게 행동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속된 말과 행동, 저속한 말과 행동 등은 모두 예의가 없는 행동을 가르친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아야 한다는 말을 해결하려면 두 가지가 전제되어야 가능하다.
 첫째, 사랑의 출발과 그 대상이 하나님이란 사실을 알아야 한다. 사랑이 인간만을 대상으로 한다면, 이 땅에는 하나님이 없어도 예의 바른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을 터인데 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것으로 이미 사랑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본문은 그 대상을 인간으로 하고 있을지라도 그 출발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야한다는 것이다.

즉 누가 무례한 인격을 가졌다면 그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예의 바른 사람이 아니란 것이다. 예컨대 가인을 보자. 동생을 죽이고, 하나님께서 아시고 동생 아벨에 대하여 물으실 때 회개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오히려 하나님에 대하여 대항하듯 "내가 동생을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묻지 않았는가? 얼마나 하나님에 대하여 무례한 말인가? 한마디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보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본다면 이렇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람에게 무례한 사람, 무례한 인격을 가진 사람들을 살펴본다면, 다 하나님에 대하여도 무례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자기 부모에게 무례하게 행동하는 사람 중에 다른 사람에게 예의바르게 행하는 사람이 없는 것과 같다. 우선 하나님께 무례한 사람은 무엇보다도 회개하지 못한다. 회개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여기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만이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회개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여기는 예의 바른 행위이다.

둘째, 무례하지 말라는 말은 그 근본이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행동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동양의 예의는 다분히 사랑의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네가 인사를 안 하면 저 사람이 너를 나쁜 사람이라고 한다"는 말은 자신의 명예와 평판과 관련되어 있는 교훈으로, 상대에 대한 사랑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다. 때로 예의에는 위선과 거짓이 많이 있다. 그러나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다'는 말은 어디까지나 도덕이나 예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말이다. 이 말은 위선적인 예의도 아니오, 자기 유익을 위한 예의도 아니오, 그리고 상대방을 불편하게 만드는 예의가 아니라 사랑의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예컨대 직장에서 상관에게는 온갖 아부를 다하고 온갖 예의를 다 갖추어 행동하다가 집에만 들어오면 아내에게는 폭언을 하고 무시하고 반말로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둘 다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연애 때는 그렇게 예의 바르게 행동하다가 일단 결혼을 하고 나면 서로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행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참 사랑이 아니다.

종합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에 대한 예의가 하나님이나 진리를 앞서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예의롭게 행동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 때문이요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요, 진리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하나는 예수님께서 가나의 혼인집에서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대할 때의 자세다. 가나의 혼인집에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에 대하여 오해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래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로 보기보다 자신의 아들 예수로 본듯하다. 그래서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예수님께 보고했던 것이다. 예수님이 능력을 발휘해서 해결해 주시리라 믿었던 것 같다.

예수님은 인간 어머니의 잘못도 깨닫게 해주어야 하고 순종도 해야 하는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려 주어야 하고, 효도도 해야 하는 순간이다. 물론 예수님은 두 가지 다 조화 있게 행동하셨다. 그러나 그 때 예수님께서 어머니 마리아에게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말했다. 여기 "여자"라는 말은 황후를 부를 때 칭하는 말이라고 주석한 신학자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요구를 거절하시는 자세를 보인 것은 분명하다. 진리의 문제가 더 앞서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예를 바리새인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찾아보자. 아무리 보아도 예수님은 바리새인에게 예의 있게 대했다고 볼 수 없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에게 세상에서도 할 수 없는 욕설을 다 하셨으니까 말이다. 무엇을 말하는가? 진리 문제는 예의 문제를 앞선다는 것이다
(월간 <교회와신앙>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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