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홍 , 신천지
전체기사 | 상담제보 | 후원신청 | 배너달기
> 뉴스 > 목회·신학 | 최삼경 목사의 사랑론
       
온유의 사랑
1999년 01월 01일 (금) 00:00:00 최삼경 목사 sam5566@amennews.com

분명히 사랑에는 온유가 있어야 하며, 온유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그렇다면 사랑과 온유는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온유의 본질은 무엇인가?

 사람들이 어떤 사람을 온유하다고 말할 때는 비교적 말이 적고 화를 내지 않으며 대하기에 쉬운 상대를 온유하다고 평가한다. 그것이 과연 온유일까? 예를 들어 주인의 말을 잘 듣는 짐승을 온유한 것인가?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온유란 "성도가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맡기고 진리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 겸손하고 친절하고 부드럽고 인내하는 등의 적극적인 성품"을 말한다. 그런 점에서 온유란 그 덕이 믿음에서 나와야 한다. 정치적인 흥정이나 영웅적이 공명심이나 자기 시위심에서 나오는 것은 결코 온유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온유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없어야 한다.
 먼저, 온유한 자는 자기를 의지해서는 안 된다. 내 힘, 내 지혜, 내 실력, 내 경력을 의지함으로 온유하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온유가 아니다. 온유는 하나님이 주시는 초자연적인 덕인 것이다. 소위 도를 닦아 얻어지는 덕이 온유가 아니다.

 다음으로, 온유란 자기로 시작하고 자기로 끝내지 말아야 한다. 비록 하나님의 일이라도 자기가 하고 자기가 끝맺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온유가 아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는 것이다. 오직 성령의 도움과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온유이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의 사랑이 약자의 윤리가 아닌 것처럼 기독교의 온유도 약자의 윤리가 아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약자의 윤리 같지만 사실은 강자의 윤리다. 온유는 약자의 자기 포기가 아니오, 자기 비하도 아니오, 오직 하나님과 진리에 대해 넘치는 확신 속에 나타나는 최고의 강자의 윤리이다.

  아브라함을 보자. 조타 롯에게 '네가 좌 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 하면 나는 좌한다'고 했다. 이 말이 약자의 윤리로 들리는가? 아니다. 그야말로 강자의 윤리이다. 경건한 성도들도 자녀에게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게 살면 못 산다고 말한다. '내가 좌 하면 네가 우하고, 내가 우 하면 네가 좌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얼마나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고 진리에 대한 확신이 넘치면 그렇게 행동할 수가 있겠는가? 자녀에게 온유를 가르치는 사람이 진짜로 온유를 아는 사람일 것이다. 온유가 나에게 좋은 것이요 복된 것이라면 그것을 자녀에게도 가르칠 수 있을 것이다.

  성도의 온유는 그 근본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헌신에서 나오는 것이다. 즉 늘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고 처서 복종시키는 사람만이 온유할 수 있다. 또한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만이 온유할 수 있다. 바라는 것들의 실상으로서의 믿음을 체험한 사람만이 온유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온유란 다른 사람에 대한 덕으로 생각하기 쉽다.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부드럽게 대하고 다른 사람에게 참고 복수하지 않고 하는 등을 가리켜 온유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온유란 먼저 내 속에 이루어야할 덕인 것이다. 즉 자신을 스스로 온유하게 대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온유하게 대할 수 있는 것이다.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괴롭게 한다. 자기 속에 온유를 이룬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자연히 온유하게 대한다. 그런 점에서 온유란 내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온유한 자는 다른 사람 사이에 화평을 구하는 사람이다. 온유한 자는 인내심이 있다. 또한 온유한 자는 불평하지 않는다. 불평 많은 사람 중에 온유한 사람은 없다. 불평과 온유는 함께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고, 불평은 약자가 하는 것이지 강자가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온유한 사람들이 많이 나온다. 다윗의 온유함도 귀하고 요셉의 온유함도 귀하다. 자신의 목을 치려는 자의 머리를 치지 않고 옷자락만 자르는 다윗의 온유는 천군만군을 거느리는 용사보다 더 위대한 장수의 모습이다. 충성한 자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워 감옥에 보냈는데도 복수심에 사로잡히지 않고 그리고 복수할 수 있는 기회가 왔지만 그래도 복수하지 않는 요셉의 온유는 얼마나 아름답고 위대한 것인가?

 사사기에 나오는 기드온의 온유를 하나 더 살펴보자. 기드온이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부터 기드온의 마음에는 오직 위태한 나라를 살리려는 겸손한 마음 하나로 전쟁터로 나아갔고 결국 기드온은 미디안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였다. 그런데 기드온이 미디안과 싸울 때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도 그 싸움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기드온에게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은 시비를 걸었다.

그 전승의 공로를 기드온에게 돌리고 싶지 않던 것이다. 그래서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은 왜 미디안과 전쟁을 할 때 자신들을 부르지 않았느냐고 따지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분노스런 일이요, 따지고 보면 악한 자들의 악한 동기에 의한 터무니없는 시비인 것이다. 목숨 걸고 싸워 나라를 구한 공로를 칭찬해도 못할 터인데 생트집을 잡는 저들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기드온이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 무엇이었는가?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이제 행한 일이 너희의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삿 8:2)고 말했다.

너희의 끝물 포도가 나의 맏물 포도보다 낫다고 자신을 비하하여 그들을 위로한 것이었다. 기드온은 바보였는가? 아니면 약자였는가? 아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말하였는가? 온유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확실히 알기 때문에, 표면적 승리가 승리가 아님을 알기 때문에 보인 온유의 극치였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온유인 것이다. 온유는 약자의 윤리가 아니라 강자의 윤리이다
(월간 <교회와신앙> 1999년 1월호)

최삼경 목사의 다른기사 보기  
ⓒ 교회와신앙(http://www.amennew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최근 많이 본 기사
김기동 씨, MBC ‘PD수첩’
이재록 대행 이수진, 돌연 사퇴
‘김하나 청빙 무효’ 재심판결문을
만민개혁파 성도들 “빛과소금 역할
“기억하라, 기억하라”
명성 노회 김수원 목사 ‘면직,
벳새다 위치 밝혀져..옛 교회당
   <교회와신앙>소개걸어온길만드는 사람들광고안내후원안내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주)한국교회문화사  /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아01814  /  등록일자 2011년 10월 28일 / 발행일 2011년 10월 28일
제호 : 교회와신앙  /  발행인 : 장경덕 /  편집인 : 최삼경  /  청소년보호책임자 : 양봉식
서울 종로구 대학로 19, 303호 (연지동, 한국기독교회관)  /  Tel 02-747-1117 Fax 02-747-7590
E-mail : webmaster@amennews.com
Copyright 2005 교회와신앙.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ame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