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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만한 온유
1998년 12월 01일 (화) 00:00:00 최삼경 목사 sam5566@amennews.com

"사랑은 온유하며"(고전 13:4).
사랑의 중요한 속성 중의 하나는 온유다. 과연 온유란 무엇인가? 그리고 왜 온유가 사랑의 속성 중의 하나일까? 온유가 사랑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무엇인가?

 성경에는 온유에 대한 가르침이 많다. 그 중에 사랑의 속성과 관계를 가지고 살펴볼 만한 곳은 세 군데다. 먼저는 성령의 열매 중에 한 가지이며(갈 5:23), 그 다음으로는 팔복 중에 세 번째 복이고(마 5:5), 그리고 바로 사랑의 구체적 속성 중의 하나인 것이다.

 왜 이렇게 온유가 성령의 열매도 되고, 팔복 중에 하나도 되고, 사랑의 속성도 될까? 모두 그 뿌리가 같기 때문이다. 산상수훈의 팔복부터 생각해 보자. 산상수훈에 나오는 모든 덕들은 기독교인과 세상사람을 구별시키는 것들이다. 즉 세상 사람에게는 비슷해 보이는 어떤 요소가 있다고 해도 본질적으로 불신자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다. 즉 이 여덟 가지 복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없는 것으로 오직 성도에게만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성령의 열매는 어떠한가? 마찬가지이다. 성령의 열매도 오직 성령으로만 맺어지는 초자연적인 열매들이다. 인간의 노력과 도덕과 철학으로는 결코 맺을 수 없는 열매들인 것이다. 이 말은 성령을 받고 성령을 체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말로도 이해시키기가 어려운 것들이다.

 그렇게 볼 때 참으로 재미있는 결론을 얻게 한다.  팔복의 복과, 성령의 열매로서의 온유는 오직 성령의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요, 그리스도인에게만 있는 것들이다. 더욱이 성령의 9가지 열매는 한 마디로 말하자면 하나의 열매 즉 사랑의 열매에 따르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팔복 중에 하나가 온유요, 역시 성령의 열매 중에 하나가 온유라면 사랑의 속성 중에 하나가 온유가 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런 일이다.

 온유는 기독교인이냐 아니냐를 나누는 기준이 된다. 즉 예수 믿고 온유해지지 않는 사람은 없다. 예수를 믿고 온유가 없다면 가짜 그리스도인이란 뜻이다. 성도는 스스로도 요소를 느껴야 하여, 세상 사람에게도 느껴지도록 해야 한다. 비기독교인이 기독교에 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그리스도에 대하여, 교회에 대하여, 진리에 대하여 관심을 보일 때는 온유한 성품을 체험했을 때이다. 복수해야 할 때에 복수하지 않고, 화를 내야할 때 화를 내지 않고, 인내할 수 없을 때 인내하고, 참을 수 없을 때 참을 수 있을 그 때에 그들은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렇다면 온유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하여 먼저 온유가 아닌 것부터 살펴보자.
 일반적으로 온유라고 판단되는 모습들은 무엇인가? 그 사람이 우유부단하든, 자기 확신이 없든, 아부하고 타협을 잘하든, 기회주의적이든 상관없이 나에게 잘해 주고 내가 상대하기가 쉽고 편하면 그를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온유의 성격이 아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성격을 온유라고 말하지 않는다. 선천적으로 좋은 성품을 타고 난 사람이 큰복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선천적으로 성격이 침착하거나 조용하다고 해서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성령의 열매로서의 온유나, 사랑으로서의 온유는 아닌 것이다.

  또한 도를 닦아서 얻어지는 성품도 역시 성경이 말하는 온유가 아니다. 재미있는 얘기가 있다. 이미 고인이 된 가나안 농군학교의 김용기 장로에 대한 일화다. 가나안 농군학교 관계자 중에 한 사람이 태국의 잠롱 시장을 만났을 때, 김용기 장로의 청빈과 금욕성 내지는 절약성을 소개했다고 한다. 그런데 기독교인인 김용기 장로보다 불교인인 잠롱은 비교가 안될 만큼 더 청빈하고 더 가난하고 더 금욕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인인 잠롱이 크리스천인 김장로보다 더 온유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다. 바로 여기에 큰 오해가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은 청빈해야 하지만 청빈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요 성령에 대한 순종이란 점이다. 예컨대 중도 도를 잘 닦으면 편안함과 초연함이 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온유란 그런 것이 아니다. 로이드 죤스는 이렇게 말했다. "내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스스로 자기가 기독교인이 아님을 선언하는 셈이다"라고 말이다.

  또한 무조건 화를 안 낸다고 해서 그를 온유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성경에 보니까 가룟 유다가 화를 내었다고 말한 곳이 없다. 그러나 베드로는 화를 잘 내는 사람이었다. 모세를 보자. 모세를 가리켜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고 하였다. 그런데 모세만큼 전쟁을 많이 한 사람이 없었으며 때로는 모세만큼 불의와 거짓에 대하여 엄하고도 무서운 사람이 없었다. 무엇을 말해 주는가?

  오히려 이기적 계산에 의해서 보이는 인내심은 온유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기적인 동기에 의해서 화를 내듯이 이기적 동기에 의하여 인내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기적인 계산 속에서 화를 내지 않는 그 인내 죄가 되어도, 불의에 대하여 내지 않는 화는 오히려 죄가 된다. 보라. 이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자가 있다면 예수님이실 것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베고 내게 배우라"(마 11:29)고 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향하여 욕하시고 성전에서 비둘기 팔고 돈을 바꾸어 주는 자들을 향하여 행하시던 모습은 오히려 온유하고는 거리가 멀어 보이지 않는가? 그러나 누가 예수님을 온유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월간 <교회와신앙> 1998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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