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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 달리신 예수님
2001년 04월 01일 (일) 00:00:00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소재열 목사, 말씀사역원장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라고 할 때 우리 글에는 잘 나타나 있지 않지만 원래 두 가지의 의미를 담고 있다. '나를 대신하고', '우리 모두를 대표해서'라는 의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를 믿는 나 개인을 위하면서도 예수를 영접한 모든 자들을 대표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래서 예수님의 한 번 죽으심으로 그 효력이 믿는 모든 자에게 미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신 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위해서이다. 고난 주간은 우리가 고난을 당하므로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는 것이 고난 주간의 의미가 아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예수님의 고난을 동정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들로 하여금 어떤 상태에서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 그리고 구원 받은 우리들에게 주어진 그 영생의 대가가 어떤 것임을 알게 한다.

십자가는 로마에서 가장 잔인한 죄인에게 사형을 집행하는 방식이었다. 원래 이 같은 사형 집행은 로마인들이 최초가 아니다. 이미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왔다. 당시 십자가 처형 방식은 중대한 범죄자들을 십자가에 못으로 박았다. 손바닥은 뼈가 얇아서 쉽게 찢어져 나갈 수 있음으로 못을 손바닥에 박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래서 큰 뼈들로 결합하고 있는 더 튼튼한 손목 관절부에 박아 넣었다. 그 다음에는 발을 지지대라는 명칭의 나무 블록에 못으로 박아서 몸무게에 의해 아래로 끌어당겨져 떨어지는 것을 막았다. 이렇게 비참한 십자가 처형방식에 의해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다.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신 예수님

갈라디아 3:13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한다.

첫째,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므로 의도했던 것은 무엇인가?
유대인들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를 기다렸다. 모세와 같이 애굽에서 자기 민족을 구출할 위대한 왕을 기대했다. 또한 다윗과 같은 위대한 국가를 건설하여 자기 민족에게 풍요와 번영을 가져다주는 왕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을 기다렸다. 이런 메시아가 오시면 로마의 속박에서 구원해 주시고 자기 민족을 세계에서 일등 가는 국가로 만들어주기를 기대했다.

그런 기대를 가지고 구약에 예언된 하나님의 아들, 즉 메시아를 기다렸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구약에 예언된 그 그리스도(메시아)로 오셨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볼 때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생각하고 기대했던 것처럼 풍요와 정치적 해방을 가져다주었는가?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볼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음을 선포했다. 그리고 구약에 예언된 말씀이 곧 자신으로 말미암아 성취되었다고 말씀한다. 이런 하나님 나라 복음 선포로 많은 제자들과 무리들이 따랐다. 여기서 유대인들과 충돌이 일어난다.

예수님이 진정으로 구약에 예언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 그 예수님을 거부하고 반대했던 유대인들이 가짜가 될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가짜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가짜라고 해야 한다. 결국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가짜가 되지 않기 위하여 음모를 꾸민다. 그들은 구약에 이런 모세의 율법을 알고 있다.

신 21:23에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이 말씀을 인용하므로 예수님을 가짜로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음이라는 말씀대로 예수님을 나무에 달아 죽임으로 예수님은 자신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으로 나타내려고 했다. 이런 이야기는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제자들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 보라.

하나님의 아들인 줄 알고 따라 다녔는데 어느 날 갑자기 유대인들이 말하기를 예수님은 자기 죄 때문에 저주를 받아 죽었다는 말에 얼마나 낙심이 되었겠는가? 이것이 바로 유대인들이 의도했던 음모였다. 그러나 바울은 본문을 통하여 유대인들과 정 반대의 이야기를 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 때문에"(갈3:13),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한다.

그렇다. 예수님은 "나를 대신하여" 죽으셨다. 예수 믿는 사람이 10억 명이라면 10억 번 죽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나를 대신하면서도 "우리들을 대표해서" 죽으셨기에 예수님의 단 한 번의 죽으심은 우리 모두에게 효력이 있는 것이다.

둘째, 왜 예수님은 우리들을 대신하고 대표해서 죽으셔야만 하는가?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인류는 하나님께 죄를 범하여 불순종하였다. 이 같은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저주가 임한다. 따라서 우리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저주의 형벌을 받았다. 하나님의 저주와 형벌에서 구원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그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받아야 할 진노와 저주를 대신 받으신 것이다. 그래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들에게 구원이 있게 된다.

셋째,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사망과 저주의 대가를 하나님께 지불하셨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죄의 대가를 마귀에게 지불한 것은 아니다. 마귀는 예수님에게 그 어떤 것도 요구할 권한이 없다. 그런데 한 동안 우리 한국교계에 홍역을 치렀던 "류광수 다락방 전도운동"은 예수님께서 사탄에게 죄의 대가를 지불했다는 잘못된 말을 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의 대가를 하나님께 대신 지불해 주신 것이다. 이것을 어려운 한자 표기로 "대속(代贖)"이라고 한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 살아갈 때 단 돈 10만원이라도 대신 갚아주면 참으로 감사한 일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런 돈의 이야기가 아니다. 죄로 인하여 죽었던 나를 대신해서 예수님은 나 대신 죽어주심으로 내가 받아야 할 형벌의 지옥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이것을 어찌 '감사'라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정말 이 땅에서 표현할 언어가 없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예수 십자가의 효능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갈3:14)고 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우리들을 위한 대속의 죽음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

첫째,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이 예수 그리스도로 성취되면서 이방인에게 미친다.
구약 창세기에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통하여 복을 주셨다. 그리고 그 자손에게 복을 주셨다. 그 복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두에게 주어질 것에 대한 약속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이 유대인의 담을 뛰어넘어 모든 이방인들에게 비칠 것을 말씀하셨다. 그런데 예수님을 통해서 그 말씀이 성취된 것이다.

갈라디아 3:16에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고 했다. 롬 4:9에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고 했고 4:16에서는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고 했다.

둘째, 믿음으로 약속된 성령을 받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이후 부활 승천하여 지금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다. 예수님께서 지금도 천상에서 지상을 다스리신다. 어떻게 다스리시는가? 성령님을 통해서이다.

요한복음 15:26에서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라고 했다. 그 성령이 오셔서 어떻게 하신가? 사도행전 2:33에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고 했다. 이런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십자가를 통해서 가능해진 것이다. 갈라디아서 3:2에서는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라고 반문하면서 믿음으로, 약속한 성령이 우리들에게 오신 것이라고 한다.

성령의 역사는 십자가 복음과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다. 어떤 자가 성령에 충만한 자인가? 자신을 포기하고 죄를 회개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붙들고 있는 것 자체가 성령 충만한 결과이다. 성령 충만함을 이상하게 설명하면 안 된다.

우리들은 무엇 때문에 고난 주간을 지키는가?

우리들은 예수님의 고난을 깊이 음미해야 한다. 십자가 고난의 의미는 내가 대신 고난을 경험한 것도 아니요, 밥 한 끼 굶은 다음에 그 돈으로 이웃을 돕는 것도 아니다. 물론 이런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런 것을 생각하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신가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할 때 우리들의 정성과 노력은 무용지물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만이 하나님의 저주에서 구원받는다. 구원뿐만 아니라 구원 그 이후 역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우리 신앙생활을 이끌어 간다. 그 십자가 복음 앞에서 우리 자신을 쳐 복종시켜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우리들은 우리들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들은 그 동안 어떻게 살아왔는가? 하나님을 섬기며 복을 누리며 산다고 자랑했는데 알고 보니 그것은 복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사업이 잘되고 자녀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우리 가정이 건강하다는 것으로 모든 복을 설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런 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에게도 얼마든지 있다.

맺는 말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 죽으셨는가? 그것은 나의 허물과 죄로 가득한 모든 죄악을 용서하시고 자비를 베풀기 위해서이다. 지금도 여전히 허물로 가득하다고 한다면 제아무리 밥을 많이 굶어 가난한 이웃을 돕는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 회개하고 통회하는 심정으로 우리들의 생활을 반성하자.

고후 1:5에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고 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한 위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시기를 기도하자. 벧전 4: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아멘.
(월간 <교회와신앙> 2001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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