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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퍼스트레이디’의 죽음, 그 이후
김정일 위원장 부인 고영희 사망과 북한체제 전망
2004년 09월 08일 (수) 00:00:00 이영종 yjlee@joongang.co.kr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부인 고영희(51)가 프랑스 파리에서 암치료 중 숨진 것으로 확인됐다. 북한 최고위층의 내밀한 문제라는 점과 남북관계에 미칠 부정적인 영향을 우려해 정부는 이에 대한 공개적인 언급을 피하고 있지만 사망설은 일단 사실로 굳어져 버렸다.
고영희를 둘러싼 신변 이상설이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은 지난 4월말. 일본 언론이 고영희가 프랑스에서 신병치료를 하기 위해 머물고 있다고 보도하면서부터다. 여기에 지난달 말 ‘프랑스제 고급관이 북한으로 반입됐다’는 설과 함께 ‘8월 13일 숨졌다’는 비교적 구체적인 이야기들이 베이징 외교가를 중심으로 퍼졌다.

그렇지만 우리 정부 당국자들은 한결같이 ‘사실을 확인중이지만 아직 사망여부를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던 중 지난달 31일 정부의 한 고위 당국자가 언론인들과의 모임에서 “석달 전쯤 숨졌다”고 언급하면서 사망은 기정사실로 굳어졌다. 우리 정부 당국자로서는 첫 고영희 사망 확인인 것이다.

당국자들의 비공식 언급을 종합하면 사망시기는 지난 6월께. 나머지 구체적인 사항들은 대부분 베일에 가려져 있다. 현재까지 드러난 사실을 바탕으로 고영희의 사망에서 운구까지를 재구성해 보면 이렇다.

신병 치료차 파리에 머물던 고영희가 숨지자 북한은 고려항공 특별기 편으로 시신을 평양으로 운구했다. 그러나 철저하게 보안에 붙여져 최고급 관의 반입이 고영희의 신상변화와 관련 있을 지 모른다는 설 수준에 그쳤다.

북한은 고영희의 장례식을 가족과 핵심 권력층만 참석한 가운데 극비리에 치렀다는 게 우리 정보기관의 파악이다. 당국자는“북측은 고씨 사망이 이른바 최고지도부(김정일 위원장)와 관련된 사안이란 점에서 함구해온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북한이 고영희의 사망을 외부에 공개할 수 없는 건 나름대로의 사정 때문이다. 북한은 그동안 김 위원장의 공식활동을 보도하면서 부인의 동행사실을 보도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또김 위원장의 부인과 자녀 등 가족사항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비밀에 부쳤다.

김 위원장은 외국방문이나 방북한 외국 정상과 만날 때 한 번도 부인과 동행하지 않아왔다.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평양을 방문한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부인 이희호 여사와 함께 김 위원장을 만날 때도 마찬가지였다.
김 위원장에게는 고영희 외에도 모스크바에서 사망한 성혜림과 김영숙· 홍일천 등 여러 여자가 있었다.

김 위원장의 여자관계는 성혜림의 조카 고(故) 이한영 씨,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 김 위원장의 요리사를 지낸 일본인 후지모토 겐지(藤本健二) 씨 등 가까이서 생활했던 인물이나 고위층 탈북자의 증언을 통해서만 단편적으로 알려져 왔다. 김 위원장이 여러 여자 중 실제로 누구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는지 조차 확인되지 않고 있다. 최근 북한 군부가 고영희의 아들을 후계자로 내세우기 위해 군인들을 대상으로 고 씨를 ‘존경하는 어머님’ 등으로 우상화하는 강연을 진행하기도 했지만 부인의 실체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극소수 권력층에 불과한 것으로 전해졌다.

70년대 중반 이후 김 위원장과 함께 살아온 실제적인 퍼스트 레이디인 고영희지만 선뜻 공개하기 어려운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고영희는 김정일 위원장과 사실상 부부관계를 맺어온 성혜림·김영숙과 달리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해왔다. 일본에서 태어난 고영희는 제주출신인 아버지를 따라 60년대 초 북송선을 타고 평양에 갔다. 만수대 예술단 무용수로 활약하던 70년대 중반 김 위원장의 눈에 들어 줄곧 함께 살았다.

김 위원장과 사이에 두 아들과 딸 여정(17)을 뒀으며 고영희의 여동생 영숙은 90년대 말 서방으로 망명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고영희의 사망이 관심을 끈 것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후계구도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다. 이 때문에 사망여부와 시기가 엇갈리는 각종 설이 증폭됐다.

일부 북한 전문가들은 김 위원장의 신임을 받고 있는 고영희의 두 아들 정철(23)·정운(21)이 후계자로 부상한다고 주장해왔다. 김 위원장과 성혜림(2002년 사망)사이에 태어난 아들 정남(33)이 가짜여권으로 일본에 입국하다 국제적 망신을 사는 등 눈밖에 났다는 것. 북한 군 내부에서 고 씨를 ‘존경하는 어머님’으로 내세우는 우상화 작업이 진행중이라는 첩보도 한 근거가 됐다.

일각에서는 고영희의 유선암이 지난해 재발해 건강이 악화된 것을 계기로 북한 내부의 권력투쟁이 심화됐다는 설도 내놓는다. 이에 따르면 고영희는 1980년대 아들을 잇따라 낳고 자신의 아들 중 한 명을 후계자로 내세우기 위해 김 위원장의 측근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데 전력을 다했다는 것이다.

군 수뇌부를 형성하고 있는 조명록 군 정치국장, 김영춘 군 총참모장, 김일철 인민무력부장 등과 당내 실권을 행사하는 이제강·이용철 노동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등 대부분이 고씨의 측근들이란 분석이다. 이들은 고영희의 아들이 성장함에 따라 후계작업을 위해 1990년대 말부터 군부대를 중심으로 고영희에 대한 우상화 작업을 여러 차례 추진했으나 그 때마다 김 위원장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중단됐다는 설도 있다. 특히 고영희측 세력은 고 씨의 병이 악화되자 아들의 권력승계에 유리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장성택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을 ‘김정일의 권력을 노리는 인물’로 몰아 사실상 ‘근신처벌’ 상황을 이끌어냈으며 그의 측근들을 제거하는 데 성공한 것이란 얘기다.

고 씨 세력이 장성택 제1부부장을 견제한 것은 그가 권력내 2인자였고 김 위원장의 여동생으로 장성택의 부인인 김경희 당 경공업부장과의 사이도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이란 게 이런 설의 배경이다.

그렇지만 정부 당국은 후계문제와 관련해 신중한 입장이다. 통일부 고위 당국자는 “북한 내에서 권력승계 문제는 아직 논의되지 않고 있다”며 “김 위원장은 1964년 노동당 사업을 시작으로 30년간 후계수업을 거친 뒤 권력을 넘겨받은 자신의 사례와는 다른 형태를 취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정부도 국가안전보장회의(NSC)상임위를 통해 고 씨 사망에 따른 북한 권력내부의 변화 가능성을 검토한 후 추이를 지켜봤으나 특이한 징후는 없다고 결론 내렸다고 한다. 한 당국자는 “최근의 남북 당국관계 경색이 고 씨의 사망과 관련됐다는 관측은 근거가 없다”고 말했다. 그 동안 고 씨가 사실상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해왔고 북한 권력층에 고 씨의 세력이 넓게 포진돼 있는 만큼 당장 북한 권력구도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관측이 우세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폐쇄적인 북한 체제의 내부, 그것도 김정일 위원장의 가계나 핵심층의 권력구도를 들여다 보기는 쉽지 않다. 결국 권력승계 문제는 최고 권력을 한 손에 거머쥐고 있는 김정일 위원장의 몫이다. 고영희 사망설은 우리에게 이런 점을 다시 한 번 확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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