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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2001년 11월 01일 (목) 00:00:00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소재열 목사(말씀사역원장)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다양한 내용을 취급하고 있으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 모순되지 않는 일관된 내적 통일성을 이루며, 그러한 다양한 내용들은 결국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같라는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 모든 사건과 역사가 집중되며, 그 계시하신 하나님을 중심으로 성경 66권이 조직적으로 체계를 이루고 있다. 성경의 어떠한 부분을 해석할 때에도 이러한 원칙과 원리를 염두에 두어야 하며 이러한 원칙과 원리를 무시한다거나 평가절하할 때에 그 진정한 의미가 상실되거나 왜곡된다.

성경을 성경대로 이해하고 묵상하는 일을 통해 우리들의 삶의 자리에 바르게 적용하여 그 말씀대로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유지할 것인가는 매우 중요하다. 마 7:7~12 말씀을 통하여 무엇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말씀인지를 알아보면서 그것과 하나님의 나라 선포가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이 글의 주된 목적이 될 것이다.

성경 이해에 있어서 전후문맥의 중요성
루이스 벌코프는 그의 성경해석학(Principles of Biblical Interpretation)에서 “성경의 뜻이 여러 가지가 있다고 믿는 이런 잘못된 생각은 성경에 나오는 비유적인 말, 신비적이고 불가해적(不可解的)인 요소, 상징적인 요소, 의식 및 행위, 이중 혹은 삼중으로 성취되는 예언, 장차 실현될 예표 등을 오해하는 데서 기인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마 7:7~12로 가서 “구하라“라고 했을 때 그 단어 객체로 놓고 볼 때에는 얼마든지 다른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구하라“라는 단어가 어떤 문맥 속에 들어갈 때에는 “구하라“는 의미는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의미는 문맥 속에서 찾아야 한다. 그럴 때에 “구하라“는 내용의 의미가 밝혀질 것이다. 그러면 마 7:7~12의 전후 문맥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가? 그것은 5장 1절부터 7장 29까지이다. 이것을 가리켜 산상보훈이라 한다.

5장 1절에 보면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 가셔서 가르치심으로 시작된 문맥은 가르치심을 마치고 산에서 내려오신 것으로 끝나는데 그 끝나는 지점이 7장 29절이다. 7:28에서는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29절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반응과 해설이라고 할 수 있고, 8장 1절에서는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라고 기록함으로써 지금 우리들이 살펴보는 말씀의 내용은 5장 1절에서부터 7장 29절까지의 전후문맥이다. 이 문맥 속에서 그 의미를 살펴야 한다.

산상보훈(5:1~7:29)의 말씀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논리적 구조로 “그러므로“라는 접속사가 10여 차례 정도 등장하고 있는데 모두가 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선포하신 다음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를 사용하시면서 말씀에 대한 어떤 결론을 유도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말씀을 살펴서 무엇을 “구하라“는 것인지를 살펴야 할 것이다.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 성령을 주신다
마 7:11 말씀에 “…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라는 말씀에서 과연 “좋은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 말씀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누가는 누가복음 11:9~13까지에서 “성령“으로 기록하고 있다. “…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 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보편적으로 구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아무것이나 구하라는 말씀이라고 한다면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는 논리가 성립되지 않는다. 오히려 자동차를 구하는 자에게 자동차를 주신다거나, 무엇이든지 구하는 그것을 주신다고 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 성령을 주시겠다고 한다.

오히려 본문의 전후 문맥은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31~32)라고 말씀한다. 이러한 말씀을 하고 계시는데 그것도 몇 절 후에 “구하라“는 말씀이 나왔다고 해서 이 세상적인 것을 구하면 이루어주신다는 해석과 “우리들도 무엇이든지 구하자“라는 식으로 적용한다면 스스로 본문 말씀을 번복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물론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들어주신다. 또한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 예수님의 “구하라“는 가르침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사실을 확인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마 6:32 그 이전에서는 구하지 말아야 할 것을 이야기하고 32절에서는 무엇을 구해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있는데 그것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한다. 여기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란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 자기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 이것은 누가복음 17:20~21에서 더욱 확인된다.

눅 17:20~21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라고 말씀한다. 게할더스 보스(G.Vos)는 여기서 “너희 안염를 “너희 안에(in you)“라는 말이 아니라 “너희 가운데“(among you)로 해석하고 있다. 문자적 의미도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둘러 쌓여 있는 무리 가운데 계시면서 자신이 하나님 나라의 임함으로 설명하신다. 예수님 자신의 인격과 사역이 바로 천국의 현재성을 계시해 주고 있다. 또한 “의를 구하라“라고 했을 때 그 “의“에 대한 개념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구원을 계시한 그것을 가리켜 “의“라고 한다.

결국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으로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통치를 구하고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구원의 문을 찾고 두드리라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구하는 자는 이미 성령께서 내주하신 결과이다. 그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즉 예수 그리스도와 그 안에 계시된 구원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성령의 사역 없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이 같은 말씀은 구약에 유대인들이 그토록 대망하던 그 메시아가 지금 오셨는데 그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한 그들에게 자신이 진정한 구원자로서 메시아, 즉 그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고 있다. 그 메시아를 통해 현재성으로 임한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의 구원을 구하라 그리하면 구원의 문이 열릴 것이라는 뜻이다.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에서 “좋은 것“의 개념을 하나님의 아들이 가지고 오는 생명의 풍성한 기업을 두고 말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살아라
“그러므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인 너희들은 남에게 대접이나 섬김만 받으려 하지 말고 이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결론으로 선포한 말씀이 12절의 말씀이다. 즉 이것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요약된다.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의 선행(先行)된 요건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이다“(마 7:12).

마 22:37~40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라고 말씀한다.

기록자 마태의 의도는 유대인을 상대로 쓰였다는 마태복음을 통하여 그들이 그처럼 기대하고 대망하고 있는 그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성으로 임하신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그 하나님의 나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 안에 계시된 구원을 구하라는 것이다. 마태의 증거를 통하여 보여준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들이 단순히 이 세상에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구하고 찾으라는 말씀이 아니다. 오히려 베들레헴에 메시아가 나실 것을 구약성경을 통하여 알고 있었던 그들이 그 아기 예수가 태어났을 때 그 아기 예수를 찾지 않는 무관심과 같은 생활이(마 2장) 지금 마태복음 7장의 상황 속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들 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하지도 찾지도 않는 그들을 염두하면서 선포된 말씀이다. 그래서 이 선포된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는 유대인들에게는 불순종의 죄가 더욱 드러나게 될 것이며 이 다음 심판 때에 핑계치 못할 요인으로 남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하여 자신이 하나님 나라로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기 위해 오신 메시아임을 선포하고 있다(자기계시). 또한 이 말씀 속에서 예수님은 율법의 대강령(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을 이루시는 분으로 오셨음을 암시해 주는 말씀이기도 하다.

맺는 말
우리들이 처음 예수를 믿었을 때 무엇인가 남다르기 때문에 예수를 믿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러한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해 주고 있다. 우리들에게 구원을 받을 만한 어떤 배경과 조건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들로 하여금 믿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과 그 믿음과 구원을 선물로 주시는 분의 호의와 사랑에 의하여 우리들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고 구원을 찾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성경은 지적하고 있다.

이 같은 말씀을 상고한 우리들은 이제 어떠한 삶을 살아야 될지 자명해졌다. 마 7:12 말씀과 같이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이 나의 삶의 자리에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의 은혜를 누리고 있는 우리들은 되돌려 받을 것을 염려하지 않고 베푼다. 받은 것만큼만 주는 것도 아니다. “너와 내가 사랑하는 주님 때문염 그저 베풀 뿐이다. 그와 같은 사랑에는 조건이 없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된 우리 성도로서 구원의 문을 구하여 찾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이다.
(월간 <교회와신앙> 2001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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