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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무장지대에 흐르는 화해·협력 물줄기
장관급회담 무산 등 난기류속 지속되는 남북교류
2004년 08월 11일 (수) 00:00:00 이영종 yjlee@joongang.co.kr

 

지난 3일부터 서울에서 열릴 예정이던 15차 남북 장관급 회담이 무산되는 등 당국관계에 적신호가 켜졌다. 북한이 김일성 사망 10주기(7월8일)에 남측의 일부 인사들이 조문을 추진하다 여론 반대 등으로 자진 취소한 것을 놓고 ‘남조선 당국의 탄압’이라며 반발했기 때문이다.
북한은 또 7월 말 베트남에서 탈북자 468명이 무더기로 입국한 것을 놓고 ‘남측의 납칟유인 행위’라며 당국회담의 문을 닫아걸었다.

여기에 이달 말 한·미 합동 군사훈련인 을지-포커스렌즈 훈련이 예정돼 있어 당국관계의 재개가 당분간 힘들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남북 민간단체 간의 교류도 8.15 공동행사가 실무협의 단계에서 난항을 겪는 등 불발될 위기에 처했다. 지난 6월 6.15 남북공동선언 4주년을 계기로 남북 화해·협력 분위기가 한껏 고조되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답방 가능성까지 예견하던 것과 비교할 때 한층 썰렁해졌다.

그렇지만 남북관계의 이면을 꼼꼼히 짚어보면 표면적인 난기류 속에서 끊이지 않는 흐름이 있음을 발견한다. 먼저 정부가 북한에 지원하기로 한 40만t의 쌀 가운데 10만t의 국산쌀이 경의선과 동해선 육로를 통해 매일 전달되고 있다. 판문점 연락관 채널을 통해 북한은 매일매일 지원물자를 받을 계획을 알려오고 이런저런 요구사항을 전해오고 있다.

또 두 개 라인의 철도·도로 건설을 위한 자재와 장비가 북한에 속속 들어가고 있다. 개성공단 건설을 위한 자재와 기술인력도 마찬가지다. 금강산 관광객은 동해선 육로를 통해 오가고 있다. 당국관계의 경색 속에서도 정작 군사분계선을 가로지르는 교류는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기자는 최근 개성공단 건설현장을 직접 방문한 자리에서도 이런 남북 화해·협력의 장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 한국토지공사측이 마련한 버스를 타고 공단 건설현장을 취재하기 위해 군사분계선을 막 넘어 북녘 땅에 들어간 기자의 눈에 멀리 남측으로 태극기가 펄럭이는 모습이 보였다. 옆자리에 앉은 북측 안내원은 “저게 당신네 대성리 마을에 세워놓은 대형 깃대잖아. 워낙 크게 만들어 놓았으니 여기서도 눈에 띄는 것 아닌갚라고 설명했다.
 북측의 최전방 선전마을로 알려진 기정동의 대형 인공기 너머로 태극기가 교차하며 함께 휘날리는 모습은 묘한 느낌을 갖게 했다.

개성으로 향하는 2차선 도로 옆에는 남측에서 경의선 철도연결 공사를 위해 지원한 콘크리트 침목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길과 나란히 뻗은 경의선 철도는 이미 노반공사를 마치고 철도 레일이 깔렸다. 곳곳에서는 남측이 지원한 대형 덤프트럭과 중장비가 개성공단 조성을 위한 기초공사를 벌이고 있었다. 북한 근로자와 군인들에게는 이미 남한의 현대트럭을 운전하거나 대우 포클레인을 이용해 작업을 하는 게 낯선 일이 아닌 듯했다.

개성시로 들어가는 도로 옆에는 공단건설에 지장을 주고 있는 주택과 군사시설을 철거하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도로와 철도 건설을 위해 가파르게 깎아내 만들어진 벼랑에는 지하 벙커 시설이 그대로 드러났다. 경제적 실익을 가져다 줄 경협프로젝트를 위해 북한이 얼마나 서두르고 있는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북한은 870만 달러의 보상비를 받기로 하고 개성공단 지역 내 군사시설을 철거했다. 비무장지대에 인접한 서부전선의 요충지인데다 군사시설이 밀집해 있는 이 곳을 남한에 내주었다는 것은 남북관계 변화의 상징으로 기록될 수 있다.

서울에서 직선거리로 불과 60km 떨어진 북녘 땅 개성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기자는 그날 오전 7시40분 광화문을 출발해 개성 자남산 여관에서 찰밥과 송악산 두릅으로 점심을 먹었다. 현장 취재를 마치고 개성 고추장 몇 병을 사들고 자유로를 따라 서울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4시 30분이다. 분단의 장벽에 반세기 동안 가로막힌 개성은 맘만 먹으면 반나절에 다녀올 수 있을 정도로 손에 잡히는 곳에 있는 우리 땅이었다.

이처럼 비무장지대는 냉전시절 남북 대결의 최전선이 아닌 통일의 장으로 바뀌고 있다.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한을 휘감고 있는 화해·협력과 교류의 기운에 힘입어서다. 적어도 남북간 경의선과 동해선의 철도·도로 연결 현장에서는 비무장지대가 과거처럼 빗장이 굳게 닫힌 철책이 아니다. 유일한 남북간의 통로였던 판문점 외에 두 곳의 혈맥이 다시 이어진 것이다. 녹슨 철책과 철조망을 걷어낸 자리에는 철도와 도로가 새로 만들어졌다.
남북간의 교류·협력 활성화는 수치로도 확연하게 드러난다.

정상회담 직후부터 본격화한 남북간의 대화는 2002년부터 연 평균 30차례 열리고 있다. 지난해에는 38회 회담이 개최됐고 기간으로 따지면 106일 동안이다.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98년 이후 6년간 모두 5만3천명의 남측 사람들이 북한을 방문했다. 이는 그 이전 9년 동안의 2천400명에 비해 22배가 넘는 숫자다. 교역을 비롯한 남북간의 물적 교류도 지난해 7억2천만달러 규모로 성장해 남북교역이 북한 대외무역의 1/3을 차지할 정도가 됐다.

물론 이런 화해·협력의 물줄기 속에서도 한반도는 여전히 냉전의 기운이 가시지 않고 있는 게 현실이다. 핵개발 의혹으로 북한은 여전히 국제사회의 신뢰할 수 있는 일원으로 자리하지 못하고 있다. 북한은 117만명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의 군을 보유하고 있고, 지상군 전력의 70%를 평양~원산선 이남에 전진배치하고 있어 유사시 대남 기습공격이 가능한 능력과 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결국 비무장지대는 화해·협력과 군사적 긴장이 교차하는 공간이 됐다고 할 수 있다. 통일을 위한 기운을 모으는 데 박차를 가해 세계 유일의 분단국이란 오명을 씻을 기틀을 다지느냐, 아니면 다시 냉전의 상징이란 나락으로 떨어지느냐 하는 갈림길에 선 것이다.
북한이 대승적인 관점에서 남북 화해·협력의 장에 적극 나서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탈북자 문제 등 자신들의 체제와 관련된 사안이 불거진 데 대해 불만을 나타낼 수 있다.

또 개혁·개방의 길로 나서는 데 따른 두려움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남북간 당국대화와 교류·협력의 문을 닫아거는 것으로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북한당국은 알아야 한다. 더욱이 북한을 냉혹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국제사회는 이를 곱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명분 없는 당국대화의 단절을 걷어내고 명실상부한 화해·협력의 길로 이제라도 나서야 한다. 이것이 북한이 그토록 강조하고 있는 6.15 공동선언의 이행이고 ‘우리 민족끼리’의 이념을 실현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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