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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이 달라지고 있다
6·15 남북공동선언 4주년
2004년 06월 16일 (수) 00:00:00 이영종 yjlee@joongang.co.kr

남북 당국 회담 취재를 위해 6월 초 찾은 평양은 이미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돼 30도를 오르락 거리고 있었다. 남북 경제협력추진위원회 9차 회의에 참석할 36명의 남측 대표단을 태운 승용차와 버스는 순안비행장을 빠져나와 우리의 공항로에 해당하는 순안구역의 대로를 달렸다. 길 양 옆 논에는 모내기를 위해 나온 농업근로자(협동농장에 소속돼 일하는 농민)들이 바쁘게 일손을 놀리고 있었다.

곳곳에 붉은 기를 세워놓고 모심기에 바쁘던 이들은 외부 손님들의 차라는 것을 알아챈 듯 손을 휘저으며 반갑게 맞았다. 마차를 끌고 길가를 터벅터벅 걸어가는 소를 본 일부 대표단은 “우와, 아직도 소가 마차를 끄네”라며 탄성을 질렀다. 이번 방북이 처음인 사람들이었다. 차로 40여분 걸리는 평양시내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엔 수십 마리의 양떼가 갑자기 길을 막고 나서 차가 급정거 하는 소동을 빚기도 했다.

김일성 주석이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찾겠다며 1925년 조국을 떠났다가 45년에 돌아온 것을 기념해 지었다는 개선문에 들어서면서 평양시내가 시작됐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평양이 훨씬 산뜻하게 단장을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김정일 장군님을 중심으로 한 노동당을 결사옹위하자’는 등의 선전문구는 붉은색 바탕에 흰 글씨로 새로 칠해져 햇살에 빛나고 있었다.

정치적 내용의 선전문구 뿐 아니라 일반 상점들의 간판도 옷을 갈아입었다. 2년전 방북 때만 해도 녹이 슨 채 방치돼 있던 백화점이나 상점의 돌출간판은 거의 대부분 아크릴 판이나 페인트로 단장됐다. 도로 뒤편의 건물들은 여전히 페인트를 한번도 칠하지 못한 채 콘크리트를 드러내고 있었지만 전면의 상가와 주택들은 회색이나 흰색 계통의 페인트로 도색됐다. 낡은 건물의 곳곳에는 노동자들이 달라붙어 타일을 새로 교체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북측 안내원은 “모두 60~70년대에 지어진 건물인데 낡아서 개건(보수)하고 있는 중”이라며 “최근 들어 장군님(김정일 위원장을 지칭)의 지시에 따라 평양을 비롯한 도시의 환경을 관리하는 사업에 전체 인민이 떨쳐 나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평양의 변화는 이런 외형적인 데서만 나타나는 게 아니었다. 무엇보다 곳곳에 ‘간이매대’라고 불리는 우리의 노점상과 같은 판매대가 눈에 띌 정도로 늘었다. 대개 리어카 위에 매대를 마련하고 흰 천으로 천막형태의 차양을 쳤다. 이 곳에서 파는 물품은 주로 얼음보숭이(아이스크림)나 빙수, 고구마나 옥수수 같은 간식거리였다. 자전거에 리어카를 매달고 거리를 오가는 남새(채소)장수들도 적지 않았다. 대동강 가의 유명한 냉면집인 옥류관이나 평남면옥 등에는 점심시간 마다 국수와 냉면을 먹으러 온 주민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숙소인 평양 양각도 호텔에서는 시장경제를 향해 발길을 재촉하는 북한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객실은 외국 관광객들의 취향에 맞게 샤워기나 좌변기 등이 모두 국제규격 형태의 새로운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과거 북한에서 만든 다소 조잡한 집기를 쓰거나 중국산이 주를 이루던 것과 달라진 모습이었다. 낡은 열쇠를 건네주던 것에서 벗어나 이젠 전자감응 장치가 내장된 카드형 객실키로 교체했다. 층마다 마련된 로비에 김정일 위원장의 공장 ‘현지지도’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린 노동신문이 가지런히 정리돼 있는 것을 빼곤 중국 지방도시의 어느 호텔에 와 있는 듯한 분위기였다.

아침 식사를 마친 시간 호텔 메인로비에는 외국인 관광객을 안내하기 위해 준비 중인 조선국제여행사 직원들로 분주했다. 이들은 재일 조총련이나 중국은 물론 독일 등 유럽국가에서 온 관광객들을 그룹별로 모아서 소형버스에 태워 평양 시내관광이나 묘향산 등 당일관광 코스로 출발했다. 호텔 곳곳에 마련된 상품판매대에서는 들쭉술과 개성인삼주 같은 북한산 술과 기념품을 팔고 있었다.

모두 유로화를 기준으로 해서 상품가격이 표시돼 있었지만 달러의 경우에도 간단한 환전 절차를 밟아 사용할 수 있었다. 판매원들은 남한 대표단에게도 전혀 낯설지 않다는 표정으로 접근해 하나라도 더 팔려고 안간힘을 쓰는 표정이었다. 제법 많은 술을 산 한 손님에게는 “계산만 마치시면 그냥 일을 보러 가십시오. 저희가 포장을 해서 방에 올려 놓겠습니다”라며 웃음을 지어보였다.

양각도 호텔 옆에는 골프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9홀에 90~130야드 정도의 코스로 본격적인 골프를 즐기기에는 부족함이 있었지만 평양관광을 하러온 외국인들이 대동강을 바라보면서 잠시 머리를 식히기에는 괜찮은 수준이었다. 이 곳의 안내를 맡고 있는 여성은 “25달러면 라운딩 비용은 물론 골프클럽과 신발 등 장비 일체를 대여해 준다”고 설명했다. 잘 가꾸어진 골프코스에 남측 대표단이 구경을 위해 잠시 들어가려 하자 코스 관리를 책임진 여성 프로골퍼가 뛰쳐나와 대표단을 안내하던 북측 인사에게 “안내선생, 저렇게 구둣발로 코스에 들어가면 어떻게 합니까.

초보적인 예의는 지켜야 하지 않습네까”라며 푸념을 했다. 골프장 옆 연습장에서는 골프에 입문하려는 북한의 중년 남성들이 여성 레슨프로의 자세교정 지도를 받아가며 땀을 흘리고 있었다. 강변 둑에 연습장을 만들어 공을 대동강을 향해 칠 수 있게 만든 게 특이했다.

평양의 밤도 예전과 달리 부산했다. 아파트 한 개 동에서 불이 켜진 집이 10여 개에 불과하고 그나마 뿌연 백열등 한 개 정도 수준이었지만 이젠 밤 11시가 넘은 시간에도 60~70% 가 넘는 가구의 불이 켜져 있었다. 불빛도 예전보다 훨씬 밝아진 것이 느껴졌다. 양각도 호텔 37층에서 바라본 평양시내는 자정이 넘은 시간인데도 곳곳에서 번쩍이는 불빛이 터져 나왔다. 북측 안내원은 “도시 개건공사를 위해 밤새 용접작업을 하고 중장비들이 움직이는 소리”라고 설명했다.

물론 이런 변화의 바람 속에 일부 시행착오나 부작용도 있는 듯했다. 체류 기간 중 마침 이타르-타스를 비롯한 일부 외신이 “평양 당국이 주민들에게 허용했던 핸드폰 사용을 금지시키고 전화기를 회수하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체제에 위해요소가 된다는 판단에 다른 것이란 설명이다. 북측 안내원들은 이 보도의 사실여부를 확인하려는 기자의 질문에 함구로 일관했다. 하지만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호텔 로비와 시내 곳곳에서 쉽게 눈에 띄던 핸드폰 사용 모습을 전혀 볼 수 없었다. 북측도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핸드폰 사용이 중단된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처럼 6·15 공동선언 4주년을 맞는 평양에는 변화의 바람이 몰려들고 있었다. 실리와 실적·실력을 중시한다는 이른바 ‘3실 주의’가 자리 잡았고 일하는 만큼 보수가 주어지고 추가 실적에 대해서는 인센티브까지 부여되는 경제체제로 바뀐 것이다. 북한이 지난 2000년 취한 7·1 경제관리 개선조치의 효과가 어느 정도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나진선봉 특구나 신의주 특구개발이 실패로 돌아간 시행착오도 있었고 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극심한 경제난의 후유증으로 체제위기까지 치닫는 상황도 북한은 겪어야 했다.

하지만 북한은 98년 11월 금강산 관광이란 시험장을 통해 개방을 향한 조심스런 몸짓을 했고 2000년 6월에는 남북 화해·협력의 방향으로 돌아섰음을 안팎에 선언했다. 이제 북한은 이 같은 개혁·개방움직임에 탄력을 가해 나가느냐 아니면 머뭇거리다 다시 주저 앉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다. 북핵문제의 해결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등 전향적인 태도변화가 북한체제의 내구력을 더해주고 남북화해·협력의 정신을 이행해 나가는 첩경임을 북한은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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