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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론 작성의 단계2
1999년 05월 01일 (토) 00:00:00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장두만목사(강서침례교회 담임,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 교수)

(... 지난호에 이어)
 (2) 문맥 연구
 첫째, 본문의 문맥(context)을 연구하라.
 본문 연구에 있어서 문맥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웟키(Bruce K. Waltke)는 이렇게 말한다: "스피치에 있어서 가장 우선적이고 규칙은 문맥이 의미를 결정한다는 것이다."23)  실바 (Moises Silva)도 같은 의견이다:

  문맥은 우리로 하여금 의미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정도가 아니라, 사실상 문맥이 의미를 만들어 낸다. 대표적인 언어학 개론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어떤 단어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의미 가운데서 의식(意識)상태로 표출(表出)되는 의미는 문맥에 의해 결정된 의미이다. 모든 다른 의미는 폐지되고, 소멸되고,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 원리는 단어의 의미가 확정된 것 같이 보이는 경우에도 그대로 해당된다."24)

 몇 가지 예를 통해서 문맥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가를 생각해 보자. 
 '죽었다'는 단어의 경우, 우리는 흔히 이 단어를 '사망'과 연관시키지만 문맥에 따라서 '죽었다'라는 단어는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 "옷 색깔이 죽었다"라든지 "영희는 코가 죽었다"라든지 하는 경우에 '죽었다'는 단어는 사망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옷 색깔이 죽었다"는 것은 옷의 색깔이 산뜻하지 못하고 거무튀튀하다는 뜻이고, "코가 죽었다"는 것은 코가 납작하다는 뜻이다.

 헬라어의 '로고스'라는 단어의 경우, 우리는 요한복음 1장을 염두에 두고 '로고스'를 항상 '말씀'과 연관시키는 버릇이 있다. 그러나 문맥에 따라서 '로고스'는 전혀 다른 의미가 되고 만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5:32을 한 번 보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 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여기서 "음행한 연고 없이"라는 부분은 헬라어로 '파렉토스 로구 포르네이아스'인데 여기에 쓰인 '로고스'가 '말씀'의 의미가 아님은 부연할 필요조차 없다. 문맥상으로 볼 때 이 경우 '로고스'는 이유, 동기, 연고의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로고스'는 로마서 14:12; 마태복음 12:36; 사도행전 19:40 등에서는 '계산'(account, computation, reckoning)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고, 사도행전 8:21; 15:6 등에서는 '일, 문제' 등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문맥을 떠나서 본문을 연구하고 해석할 경우, 사실상 성경으로부터 거의 모든 것을 증명할 수 있다. 벌써 오래 전 이야기이지만, 필자가 구원받은 직후 필자는 어떤 선교사가 그리스도인은 영화관에 가서 안 된다고 하면서 그 증거로 사도행전 19:31을 인용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 당시에는 사도행전 19:31이 그 선교사가 주장하는 그런 의미인지 아닌지 판단할 만한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후 신학 공부를 체계적으로 하면서 그 선교사의 해석이 문맥을 떠난 해석의 전형적인 경우인 것을 발견했다.

 그러면 사도행전 19:31이 문맥 내에서는 어떤 의미인지 한 번 보도록 하겠다. 본문은 이렇다: "또 아시아 관원 중에 바울의 친구된 어떤 이들이 그에게 통지하여 연극에 들어가지 말라 권하더라." 아시아 관원 중 어떤 사람들이 바울에게 연극장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한 이유는 연극이나 영화 관람을 금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바울을 해치려는 사람들이 연극장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19:23-30을 읽어보면 19:31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게 된다.

 그러면 성경을 연구할 때 고려해야 될 문맥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몇 가지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

 ① 가까운 문맥(immediate context)
 주어진 어느 본문을 연구하고 해석할 때 그 본문의 앞에 있는 구절과 뒤에 따라 나오는 구절을 잘 살펴보아야 주어진 본문의 의미를 바로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갈라디아서 5:4을 한 번 예로 들어보자: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이 구절 자체만 가지고 본다면 구원받은 사람이 구원을 잃어버린다는 의미같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을 전후 문맥에 비추어 보면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바는, 만일 누군가가 율법으로 구원을 받으려고 한다면, 그는 모든 율법을 다 지키든가 아니면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되든가 둘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모든 율법을 다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율법으로 구원받으려는 자는 그리스도에게서 단절된 사람이요, 하나님의 은혜와는 상관이 없는 자이다.25)

 잠언 4:8-9을 한 번 보자. 본문은 이렇다.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그가 아름다운 관을 네 머리에 두겠고 영화로운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하였느니라." 필자는 오랫동안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휠씬 후에 필자가 미국에서 신학 공부를 제대로 하면서 여기에 나오는 '그'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지혜'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후 문맥을 읽어보면 '그'가 무엇을 가리키는가가 명명백백해진다.

 마태복음 10:24-25 상반 절의 경우를 한 번 보자. 본문은 이렇다: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너무나 많은 설교자들이 이 구절을, "제자는 그 인격이나, 신앙, 학식 등에서 선생을 능가할 수 없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그리고 어떤 주석 성경에서는 이 구절에 대한 참고 구절로서 누가복음 6:40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마태복음 10장 24절부터 33절까지를 읽어보면 본문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주제는 핍박에 관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24절과 25절도 핍박과 관련된 것으로 해석해야 된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는 이렇게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집 주인인 나를 바알세불이라고 하면서 비난하고 핍박하는데 그 집에 속해 있는 너희들(=제자들)이라고 핍박을 면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너무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들이 아무리 큰 핍박을 받아도 너희들의 선생인 내가 받는 핍박보다는 훨씬 작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복음 6:40을 참고 구절로 사용하는 것은 문맥을 완전히 무시하고 성경을 인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복음 15:20은 참고 구절이 된다.  

 누가복음 17:21도 문맥과 상관 없이 많이 인용되는 구절 중의 하나이다. 본문은 이렇다: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많은 설교자들이 이 본문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심령 가운데 임한다. 심령 천국이 이루어져야 영원 천국도 이루어진다"는 식으로 설교한다. 이것도 문맥을 완전히 무시한 잘못된 해석이다. 17장 20절부터 읽어보면 "너희"는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이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바리새인들을 가리킨다는 것을 쉽게 알게 될 것이다. 구원도 받지 아니한 바리새인들의 심령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해 있다는 것은 한 마디로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여기서 "너희 안"은 "너희들 가운데, 너희들 사이에" (among you, in the midst of you)로 이해해야 될 것이다. 이 본문은 하나님의 나라를 가지고 와서 지금 바리새인들 사이에 계신 메시야 자신을 가리키는 말씀인 것이다.    
 ② 먼 문맥(distant context)
 어떤 경우에는 주어진 본문의 전후에 있는 몇 절만 읽으면 의미가 분명해지지만, 어떤 경우는 한 장(章) 전체나 몇 장을, 또 어떤 경우에는 그 본문이 포함된 책 전체를 읽어야 의미를 올바로 파악하게 될 수도 있다.

 에스겔서 37장을 한 번 생각해 보자. 많은 부흥사들이나 설교자들은 뼈를 우리의 메마른 심령으로, 인자는 설교자로, 생기는 성령 또는 성령의 능력으로, 마른 뼈가 힘을 얻는 것은 중생으로 해석한다. 사실 필자 자신도 과거에는 이런 식으로 설교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부끄럽기 그지 않는 설교였다.

 본문의 문맥을 잘 살펴보면, 특히 11절을 보면 마른 뼈는 이스라엘 족속을 나타내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마른 뼈가 생기를 얻는 것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가리키고 있으며, 그 회복은 마지막 때에 일어날 것이라는 것은 36장에서 39장까지의 문맥을 보면 확실하다. 36장에서 39장까지는 말세에 관한 예언이기 때문에 37장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3) 문자적 의미의 연구
 둘째, 문자적으로 연구 해석하라.
 본문을 문자적으로 연구, 해석한다는 것은 두 가지 면을 포함한다.
 ① 그것은 우선 우화적으로 해석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우화적 해석(allegorical method of interpretation)이란 문자적 의미 뒤에 숨겨져 있는 깊은 의미를 발견하려는 노력인데, 이는 원래 희랍에서 시작된 것이다. 희랍 사람들은 철학적-역사적 전통과 함께 종교적-신화적 전통도 동시에 가지고 있었는데, 종교적 전통에는 신화적 공상적 요소는 물론 불합리하고 부도덕한 요소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철학적-역사적 전통의 관점에서 볼 때 종교적-신화적 전통은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랍인들이 종교적 전통에 대해 갖는 애착 때문에 이를 쉽게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양자(兩者)간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종교적 전통을 우화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하면, 종교적 전통에 속한 신화적 비이성적 요소들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대신 신화적 언어를 사용하여 표현하려고 하는 진정한 의미는 문자 뒤에 놓여 있다고 함으로 철학적-역사적 전통과 종교적-신화적 전통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려고 한 것이다.26)

 이러한 우화적 해석법은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인 알렉산드리아에 자연스럽게 유입(流入)되었고, 거기에 거주하던 유대인에게도 전파되어 결국은 이들을 통해 교회에 침투하게 된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의 유태인 가운데 우화적 해석법을 사용한 대표적 인물은 필로(Philo)이다. 필로는 희랍 문화에 심취해 있었는데, 희랍의 철학과 성경, 특히 모세 오경과의 충돌을 해결하기 위해 우화적 해석법을 광범위하게 사용했다.27) 그의 해석이 얼마나 황당무계(荒唐無稽) 했는가는 그의 글을 보면 너무 명백하게 드러난다. 하나님께서 동방에 에덴 동산을 만드신 것(창 2)에 관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미덕 (virtue)은 낙원 (paradise)이라고 불리우고 있으며, 낙원을 위한 적절한 장소가 에덴인데, 이는 사치 (luxury)를 의미한다. 미덕을 위한 가장 적절한 분야가 평화와 안락(ease)과 즐거움인데, 참된 사치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더욱이 낙원은 동방에 세워졌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올바른 이성은 (해가 지듯이) 지거나 소멸되지 않고 항상 솟아오르는 것이 그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상상하건데, 솟아오르는 태양이 흑암을 빛으로 채우듯이 미덕이 인간의 영혼 속에서 솟아오르면 그것은 안개조차도 빛나게 하며, 칠흑 같은 흑암도 물리친다. 모세는 또 이렇게 말한다: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창2:8b). 하나님은 선하시고 또 미덕을 위해서 인류를 지으셨기 때문에 마음(mind)을 미덕 안에 놓아두셨는데, 이는 훌륭한 농부같이 마음이 오직 미덕만을 배양하고 거기에만 치중하게 하기 위해서이다.28)

 알렉산드리아의 유태인들은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그 결과 우화적 해석법은 어렵지 않게 교회 내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도인 가운데 우화적 해석법으로 잘 알려진 사람으로는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와 오리겐(Origen)을 들 수 있을 것이나, 후자가 교회에 휠씬 더 큰 영향을 끼쳤다.

 오리겐에 의하면, 성경은 세 가지 의미, 즉 문자적(literal), 도덕적(moral), 신비적(mystic) 의미를 갖는데, 이는 사람이 몸, 혼, 영으로 구성된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가 세 가지 의미를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세 번째 의미에만 치중해 우화적 해석법을 광범위하게 사용하고 있다. 29)

 예를 들면, "그 소녀(리브가)는 보기에 심히 아리땁고 지금까지 남자가 가까이 하지 아니한 처녀더라"(창 24:16)는 구절은 사람이 회개하면 예수께서 그 영혼의 남편이 되지만 타락하면 사탄이 영혼의 남편이 된다는 의미라는 것이다.30)  뿐만 아니라 리브가가 물을 길러 우물에 갔다가 아브라함의 종을 만난 것은 우리가 날마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서 성경이라는 우물로 가야 한다는 의미라는 것이다.31)

 필로나 오리겐 같은 우화주의자(allegorist)는 본문 자체가 저자와 최초의 독자에게 어떤 의미였는가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고, 본문 뒤에 숨겨져 있는 깊은 영적 의미를 찾는 데만 급급한 나머지 갖가지 상상과 억측으로 뒤범벅이 된 해석 아닌 해석을 내놓고 말았다.

 유감스럽게도 우화적 해석법은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e)같은 대 학자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올바른 해석법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화적 해석법을 상당히 폭 넓게 사용했다. 예를 들면, 다윗이 눕고, 자고, 깬 것은(시 3:5)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키는 것이고, 아담과 이브의 타락의 기사에게 무화과 잎은 위선을, 가죽 옷은 죽음을, 그리고 네 강은 네 가지 미덕을 의미한다는 것이다.32)

 우화적 해석법은 해석이라기보다는 상상력의 장난에 불과하고, 해석자의 주관적 상상력이 모든 것을 좌우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본문을 바로 연구하고 해석하기 위해서는 문자적 해석법(literal method of interpretation)을 따라야 할 것이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우리가 다른 문헌을 이해할 때 사용하는 방법과 똑같은 방법을 사용한다는 것을 뜻한다.33)  예를 들어, 만약 석간 신문의 사회면에 "1999년 9월 25일 서울 청계천 4가에서 교통 사고로 인해 146번 버스의 승객 10명이 중경상을 입고 현재 고려대 안암 병원과 이대 병원에 입원 가료중이다"는 기사가 실렸다면, 이 기사를 어떻게 이해해야 되는가? 1999란 숫자의 숨은 의미를 찾고, 9나 25의 깊은 뜻을 발견하려고 노력해야 되는가? 청계천의 숨겨진 의미나 10이란 숫자의 이면적(異面的) 의미를 발견해야 되는가? 어느 누구도 위의 신문 기사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지 않고 기록된 그대로 이해할 것이다. 성경도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언어의 법칙에 맞게 해석해야 된다는 데에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

 만일 성경이 수사법(figures of speech)을 사용하고 있을 경우에는 수사법의 원칙에 맞게 해석하면 되는 것이다. 문자적 해석법은 수사적 표현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소위 '목석 같은 문자주의'(wooden literalism)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사용하는 표현에는 문자적 표현(literal expressions)과 수사적 표현(figurative expressions)이 있는데, 문자적 표현은 문자적으로, 수사적 표현은 수사법의 원칙에 따라 해석하자는 것이다.34)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나는 길이다"(요 14:6)고 말씀하실 때 그것이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사람이나 자동차가 다니는 길이라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수사법에서 일컫는 은유법이기 때문에 은유법의 해석 원칙에 따라 해석하면 되는 것이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1,000은 1,000을 의미하지 완전수를 의미하지 않으며,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을 의미하지 교회를 의미하지 않으며, 이스라엘 각 지파 가운데 12,000명은(계7) 이스라엘 각 지파 가운데 12,000명을 의미하는 것이지, 여호와의 증인을 의미하는 것도, 한국의 어느 종파를 의미하는 것도, 교회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만약 우화적 해석법이 올바른 해석법이라면 해석학은 무정부 상태(hermeneutical anarchy)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여러 해석자의 해석이 상이하고 상충될 경우 어느 것이 올바른 해석인지 판단할 기준이 없다. 그러한 경우에는 모든 해석을 다 맞다고 인정하든 다 틀렸다고 하든지 둘 중의 하나인데, 그렇게 되면 결국 성경 해석이라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고 말며, 따라서 성경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책이 되어 버리고 만다.

 ② 본문을 문자적으로 연구, 해석한다는 것은 본문에 쓰인 단어의 의미를 연구, 분석하라는 의미이다.
 설교자가 본문을 연구할 경우 본문에 있는 단어를 깊이 연구해야 된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특히 본문이 긴 경우에), 단어 하나 하나를 다 깊이 연구한다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단어나 구(句)를 골라서 그러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 신학적으로 중요하거나, 윤리적으로 중요하거나, 이해하기에 어렵거나, 설교자가 생각할 때 청중에게는 어려울 것같이 보이거나 하는 부분은 반드시 연구할 필요가 있다.35)  우리가 아주 흔히 쓰지만 그 의미를 간단하고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라면 할 수 없는 단어나 구(句)도 특별히 연구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믿음, 의, 피, 육, 옛 사람 같은 표현은 설교자의 상용어(常用語) 가운데 하나이지만, 이를 간결하게 설명할 수 있는 설교자는 그리 많지 않을 줄로 안다.

 '덕을 세우다'라는 표현을 한 번 생각해 보자. 이것은 우리가 굉장히 자주 쓰는 표현 가운데 하나이지만, 그 의미를 구체적으로 말하라 하면 참으로 난감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이 표현을 깊이 연구해 보면 참으로 유익한 결과를 가져오게 됨을 알 수 있다.  '덕을 세우다'라는 표현은 헬라어의 '오이코도메오'라는 단어를 번역한 것인데, 이 단어가 복음서에서는 24번 가운데 23번은 문자적으로 집을 짓는다(build)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마태복음 16:18은 예외로 간주할 수 있을 것 같다; 마 7:24, 26; 21:33; 막 12:1, 10; 눅 4:29; 7:5; 요 2:20 등).

 그런데 이 단어가 서신에서는 대개 '덕을 세우다'(edify)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고전 8:1; 10:23; 14:4; 살전 5:11 등). 그러니까 '덕을 세우다'는 표현과 '집을 짓는다'는 표현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복음서에서는 집을 짓되 문자적, 물질적인 집이라면, 서신에서는 집을 짓되 영적인 집을 짓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해 거듭난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 순간부터 주님 앞에 가는 순간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터로 삼아 그 위에 신앙의 집을 짓는 사람이다(cf. 고전 3:10-15). 그리스도인은 신앙의 집을 짓되 자기 자신의 집을 잘 짓도록 노력해야 되는 것은 물론이지만, 다른 그리스도인이 신앙의 집을 잘 짓도록 도와주는 일도 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덕을 세운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더 크고, 아름답고, 찬란하고, 웅장한 신앙의 집을 짓도록 도와주는 것을 의미하고, '덕이 되지 못하는 것'은 남의 신앙의 집을 망가뜨리고 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설교자가 '덕을 세운다'와 같은 막연하고 추상적인 표현을 조금만 시간을 내서 연구하면 참으로 구체적인 결과를 얻게 되는 경우가 많다. '덕을 세우는 것'과 '집을 짓는 것'을 연관시켜 설명하면 청중은 그 구체적인 의미를 생생하게 기억할 것이다.

 마태복음 14:22-33을 본문으로 해서 설교할 경우를 한번 보자. 여기서 반드시 연구해야 될 단어 가운데 하나는 22절 나타나는 '재촉하다'는 단어이다. 헬라어로는 이 단어가 '아낭카조'인데, 마태복음 14:22과 마가복음 6:45에서는 '재촉하다'로, 누가복음 14:23에서는 '강권하다'로, 사도행전 26:11에서는 '강제로 하게 하다'로, 사도행전 28:19에서는 '마지 못하여... 하다'로, 갈라디아서 2:3, 14; 6:12에서는 '억지로... 하게 하다'로 번역되어 있다. 그러니까 헬라어를 잘 모르는 사람도 '아낭카조'가 '억지로... 하게 하다', '강제로 ...하게 하다'(compel, force)의 의미라는 것을 조금만 연구하면 발견해낼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로 하여금 억지로 배를 타고 건너 편으로 가게 하셨다는 것을 발견한 설교자는 마음 속에 한 가지 의문을 갖게 될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도중에 풍랑을 만나 죽을 고생을 할 줄 아시면서도 왜 제자들을 억지로 가게 하셨을까?" 이런 의문을 가지고 본문을 연구하면(특히 31절의 주의해서) 상당히 좋은 결과를 가져오리라 믿는다.

 '보증'이라는 단어도 상당히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중요한 단어라고 생각한다. 만일 고린도후서 1:22; 5:5; 에베소서 1:14 등을 본문으로 해서 설교한다면 '보증'이란 단어를 연구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보증'은 헬라어로 '아라본'인데, '아라본'은 우리가 생각하는 '보증'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아라본'은 미국에서 아주 흔하게 사용하는 '다운 페이먼트'(down payment)를 의미한다.

미국 사람들은 값이 아주 비싼 물건을 구입할 때(예: 집, 자동차 ) 이를 현금으로 한꺼번에 다 지불하고 구입하는 경우는 그리 흔하지 않다. 대개 총액의 약 10% 정도만 물건을 인수할 때 현금으로 지불하고 나머지는 몇 년에 나누어서 지불하는데, 맨 처음에 현금으로 지불하는 돈을 가리켜 '다운 페이먼트'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아라본'은 "구입 가격의 일부를 미리 지급하여 그 물건에 대한 법적인 소유권을 확보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는데,36) 이를 통해 쌍방간의 계약을 유효하게 되고, 물건 구입자는 완불할 때까지 계속 돈을 지불해야 될 의무를 지게 되는 것이다.37)

 성령께서 바로 우리의 '아라본'이라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가! 세상의 물건을 거래할 때는 잘못하면 계약이 취소되기도 하고, 계약을 이행할 수 없는 형편이 되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성령을 '아라본'으로 주심으로 그 약속이 절대로 취소되거나 불이행되지 않음을 보여주고 계시는 것이다.

 만일 고린도후서 2:12-17을 본문으로 해서 설교한다면 연구해야 될 부분이 상당히 많이 있을 것이지만 17절의 '혼잡케 한다'는 표현을 반드시 연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14절과 15절은 후에 역사적-문화적 배경 문제를 취급할 때 언급할 것임). 여기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카펠류오'는 신약 성경에서는 단 한 번밖에 사용되지 않고 있지만, 일반 헬라 문헌에서는 상당히 많이 쓰이고 있다. '카펠류오'는 '카펠로스'에서 나왔는데 '카펠로스'는 '소매상'이란 뜻이다. 그러나 이 단어는 그냥 소매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을 속여서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소매상이란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 단어는 또한 희랍의 궤변론자들(Sophists)이 돈을 목적으로 지식을 팔아먹는 것을 매도할 때에도 사용되었고, 순수한 포도주에 물을 섞어 부당한 이익을 얻는 경우에도 사용되었다(cf. 사 1:22).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2:17에서 '카펠류오'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위와 같은 것을 배경으로 했을 것은 아마 거의 틀림이 없을 것이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라고 말할 때 그는 금전을 목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팔아먹는 일이나, 어떤 이익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변조(變造)시키는 일을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38)

 위에서 몇 가지 예를 통해 문자적 연구가 얼마나 본문의 의미를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전달해 주는가를 살펴보았다. 때때로 단어의 연구는 설교자가 기대한 바를 다 충족시켜 주지 못할 때도 있지만, 이 연구가 설교 작성 과정에서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은 부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4) 문법 및 구문의 연구
 셋째, 문법 (grammar)및 구문 (syntax)을 연구하라.
 원어의 구문 및 문법을 연구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설교자는 어쩔 수 없지만, 그러한 능력이 있는 설교자라면 이 과정을 통해서 본문의 의미를 명백하게 이해하기도 하고 난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기도 할 것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서 문법 및 구문의 연구가 왜 중요한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오늘날 어떤 목사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다 방언을 해야 한다"는 식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성경적인 가르침인가? 과연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방언을 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해결책은 고린도전서 12장, 특히 29절에서 31절까지를 구문론적으로 분석해 보면 그리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본문은 이렇다: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원문을 잘 관찰해 보면 각 문장이 모두 '메'로  시작하는 부정 의문문인 것을 알 수 있다. 헬라어에서는 부정 의문문을 '우'로 시작할 수도 있고, '메'로 시작할 수도 있는데, '우'로 시작할 경우는 질문자가 '예'(yes)라는 긍정적 답변을 기대하고 묻는 것이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13:55에서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가리켜,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라고 물었을 때, 물은 사람들은 긍정적인 답변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와 반대로 질문을 '메'로 시작할 경우, 질문자는 '아니'(no)라는 부정적인 답변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39)  예를 들면, 요한복음 9:40에서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라는 질문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질문은 '메'로 시작한 것으로 보아(                         ; ) 질문자가 부정적인 답변을 기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사도 바울이 "다 선지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로 질문할 때 '메'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니'라는 답변을 기대한 것이 분명하다. 다시 말하면, 사도 바울의 마음 속에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 사도일 수 없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 선지자일 수 없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 선생일 수 없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 방언할 수 없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 신유의 은사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 분명했다.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사도 바울이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 방언하는 자일 수는 없다"고 가르치면 더 이상 무슨 이론이 필요하겠는가?

 마태복음 28:16-20에 나타난 예수님의 지상명령(Great Commission)도 구문을 잘 연구해 보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의미와는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많은 설교자들은 본문을 네 개의 명령어(命令語)로 요약한다. 즉, "가라", "제자를 삼으라", "침례(세례)를 주라", "가르치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에서는 흔히 우리가 이해하는 식으로 네 개의 명령 동사가 사용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 하나만의 명령 동사가 사용되고 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명령은 "제자를 삼으라"(           )는 명령 하나밖에는 없고, 그 외의 것은 전부 현재분사이다.

따라서 구문론적으로 볼 때 '포류덴테스'(가서), '밥티존테스'(침례를 주고), '디다스콘테스'(가르쳐)는 모두 '마데튜사데'(제자를 삼으라)라는 동사에 종속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제자를 삼는 과정 안에 가는 것(=전도 훈련), 침례주는 것(=그리스도와의 동일시), 가르치는 것(=양육)이 다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한일서 3:6이나 3:9같은 구절에서의 문제점도 구문론적 연구를 통해서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3:6에서는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 (                                 )라고 했고, 3:9에서는 "하나님께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라고 했다.

 사실 이 구절을 읽어 본 그리스도인 가운데 당황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 두 구절에 의하면 거듭난 사람은 범죄치 않는다고 했는데, 실제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자주 넘어지고 범죄에 빠지는가! 본문은 중생한 그리스도인은 그 순간부터 죄라고는 아예 짓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이 문제는 위의 두 본문에 쓰인 동사의 시제가 현재라는 데 주목함으로 해결될 수 있을 것 같다. 헬라어의 현재 시제는 여러 가지 용법이 있는데, 위의 두 구절은 '습관적 용법'(customary use)으로 보면 무난할 것 같다. 이 경우에 3:6은 "그 안에 거하는 자는 늘 계속해서 습관적으로 범죄하지 아니하나니"라는 의미가 되어 큰 문제를 야기시키지 않게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20:17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의아심을 자아내는 구절 중의 하나이다. 부활하신 후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나타나셔서,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고 하셨다. 이 구절을 읽는 사람들은 "왜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나를 만지지 말라'고 하셨을까"하는 의문을 금치 못할 것이다. "여성 차별적인 발언인가, 아니면 이제 막 부활하신 몸이기 때문에 누가 손을 대면 부정 타기 때문일까?" 이런 식으로 생각한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의문도 본문의 구문론적 연구를 통하여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원문은 이렇다:                   .             (레게이 아우테 예수스. 메 무 합투). 여기서 '합투'(     )는 '합토마이'(       )의 현재 명령형이므로 동작의 시작(begin to touch)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시작된 동작의 계속(cling to, hold on to)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메 무 합투'(            )는 "나를 붙잡고 늘어지지 마라," "나에게 매달리지 마라"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40)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겠다:  "마리아야, 내가 죽었다가 다시 나타났기 때문에 너는 나를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붙잡고 늘어지는 데 그렇게 하지 말아라. 너는 아직도 한 동안 나를 다시 볼 수 있단다. 아직까지는 내가 아버지께로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이야." 41).
 
요한계시록 20:4-6도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본문 가운데 하나이다. 본문을 아무 선입관 없이 읽어보면 천년왕국과 함께 두 종류의 육체적 부활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 두 부활은 동시적인 것이 아니라 두 부활 사이에 1,000년이라는 간격이 있다는 것을 본문은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하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학자들은 모든 신자와 모든 불신자가 함께 부활하는 단 하나의 일반 부활(general resurrection)만이 세상 끝에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42)  이들은 대개 요한계시록 20:4의 첫 번째 부활은 영적인 부활, 즉 중생(重生)으로 해석하고, 20:5의 부활은 육체적 부활로 해석한다. 성경은 물론 영적인 부활에 관해서 가르치고 있는데(엡 2:4-7), 이는 영혼이 중생할 때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20:4의 부활은 결단코 중생을 의미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중생해서 신앙을 지키려고 하다가 순교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들이 또 영적으로 부활한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라 아니할 수 없다.

 본문을 헬라어의 구문론적 입장에서 한번 검토해 보도록 하자. 원문은 이렇다: '카이 에제산 카이 에바실류산 메타 투 크리스투 킬리아 에테, 호이 로이포이 톤 네크론 우크 에제산 아크리 텔레스데  타 킬리아 에테'(                                                     .                                                           ). 여기서 문제의 초점이 되는 것은 두 개의 '에제산'(      )이라는 동사의 의미와 용법이다. '에제산'은 '자오'(   )의 아오리스트(aorist; 不定過去 또는 單純過去) 시제인데, 여기서 '에제산'은 아오리스트 시제 가운데 '기동(起動)의 용법'(ingressive or inceptive use)으로 이해해야 한다.43) 

기동의 용법이란 어떤 새로운 상태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데, 예를 들면, "가난하게 되었다"(          ; 고후 8:9), "살아나게 되었다"(      ; 롬 14:9) 같은 것이 그것이다. 44)  두 동사는 한 문맥 내에서 동시에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강력한 반증(反證)이 없는 한 같은 용법으로, 또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두 동사가 다른 용법으로, 또 다른 의미로 쓰이고 있다는 아무런 반증도 발견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두 동사는 모두 "살아나게 되었다"로 이해해야 되며, 또 양자는 모두 영적인 부활을 의미하든지 모두 육체적 부활을 의미하든지 둘 중의 하나로 이해해야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는 영적인 부활을, 다른 하나는 육체적 부활을 의미한다는 주장은 구문론적으로나 석의적으로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알포드 (Henry Alford)는 이렇게 말한다:

   본문 자체(계 20:4-5)에 관해서 말하자면, 본문을 올바로 취급할 경우 요즈음 인기 있는 소위 영적 해석 같은 것은 나올 수가 없을 것이다. 만일 두 부활을 언급하고 있는 구절에서, 다시 말하면 어떤 영혼은 처음에 살아나게 되고 나머지 죽은 자들은 첫 부활 후의 일정한 기간의 마지막에 살아나게 되는 구절에서, 첫 번째 부활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적으로 부활하는 것을 의미하고 두 번째 부활은 무덤에서의 문자적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언어는 그 중요성을 다 잃게 되고, 성경이 무엇을 확실하게 증거한다는 것도 불가능하게 된다.

만일 첫 번째 부활이 영적인 것이라면, 두 번째 부활도 그러해야 하는데, 이것을 주장할 정도로 무모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두 번째 부활이 문자적이라면, 첫 번째 부활도 역시 그러해야 하는데, 이는 전체 초대 교회는 물론 많은 현대의 주석가들과 일치하는 견해이며, 필자 자신도 이것을 신앙 및 소망의 조항으로 주장하고 수용(受容)한다. 45)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문법 및 구문의 연구는 난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기도 하고 본문의 새로운 이해나 올바른 이해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문법 및 구문을 연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설교자는 이 과정을 소홀히 하거나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5) 역사 및 문화의 연구
 넷째, 역사적 - 문화적 배경을 연구하라.
 성경은 지금으로부터 최소한 2,000년 전에 고대 중근동(Ancient Near East)이라는 지역을 배경으로 해서 기록된 책이다. 오늘 우리와는 언어도 다르고, 지리적 환경, 역사적 상황도 다르고, 사고 방식도 다르고, 습관이나 풍속도 다르다. 우리 조상이 쓴 책이라 하더라도 2,000여 년 전의 책이라면 바로 읽고 이해하기가 힘들 것인데, 하물며 모든 배경이 상이한 성경임에랴!

 그래서 성경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당시의 역사적 - 문화적 배경에 대한 지식을 필수적으로 구비해야 한다. 역사적 - 문화적 배경에 대한 올바른 지식은 성경을 깊이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역사적 - 문화적 배경에 관한 지식이 없이는 성경을 아예 이해하지 못하기조차 하기도 한다.

 성서 고고학에 관한 지식은 성경의 세계와 우리의 세계 사이에 놓여 있는 시간적- 문화적-공간적 간격을 메워 주는 데 많은 기여를 할 것으로 생각한다. 때로는 좋은 주석이 그 간격을 메우는데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성서 지리나 이스라엘의 관습에 관한 이해도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믿는다.

 역사적-문화적 배경에 관한 이해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여기서는 몇 가지만 예로 들어서 설명하고자 한다.

 창세기 15장을 역사적-문화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없이 읽을 경우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조차 힘들다. 아브라함이 짐승을 잡아 둘로 쪼개고, 아브라함은 깊은 잠에 빠져 있고,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고 ... 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역사적-문화적 배경을 모르는 설교자는 본문을 영적으로 해석해 버리거나 아예 취급도 제대로 하지 않고 대강 얼버무려 버리고 만다.

 본문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의 계약(또는 언약;     )에 관한 관습을 이해해야 한다. 쌍방이 피의 언약(blood covenant)을 맺을 경우 짐승을 잡아 둘로 쪼개고 그 쪼갠 사이로 언약을 맺는 당사자가 동시에 지나감으로 그 언약에 대한 조인을 성립시켰던 것이다.

 15장 9절과 10절에서 짐승을 잡아 둘로 쪼갠 것은 언약을 맺는데 사용하기 위한 것이며, 솔개가 짐승 위에 내려서 먹으려는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언약 맺는 것을 사탄이 방해하는 것을 나타낸다. 13절 이하에서 애굽 노예 상태를 예언한 것으로 볼 때 솔개와 애굽이 비교 대조되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솔개가 아브라함과 하나님과의 언약을 방해하듯이 애굽이 또한 그 언약을 방해하는 것이다(솔개는 그 언약의 조인을, 애굽은 그 언약의 성취를 방해한다). 바로가 남자를 다 죽여 버리면 이스라엘은 결국 멸종되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성취될 대상을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솔개와 애굽은 모두 언약에 대한 적인 것이다.46)

 그런데 이 언약에는 특이한 점이 있다. 그것은, 이 언약은 분명히 하나님과 아브라함 쌍방간의 언약인데(18절에 이르기를,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라고 했다), 아브라함은 깊은 잠에 떨어져 있고(12절), 하나님 혼자서만 횃불의 형태로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신 것이다(17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은 언약이 분명히 조인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18절에서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라고 하여(특히 '카라트'<   >는 조약을 맺을 때 사용하는 보편적인 용어였음) 쌍방간의 언약의 성립을 명백히 말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아브라함과의 언약'(Abrahamic Covenant)은 비록 쌍방간의 언약이지만 무조건적 언약(unconditional covenant)이며, 그 언약의 궁극적 성취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온전히 담당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47)

 고린도후서 2:12-17의 경우, 역사적-문화적 배경에 대한 지식이 본문에 대한 이해를 깊고 풍성하게 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14절에서 16절까지는 당시의 로마 풍습을 알면 훨씬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로마에서는 장군이 원정(遠征)에서 승리할 경우 포로를 끌고 돌아올 때 향을 태워서 그 냄새가 퍼져 나가도록 하는 관습이 있었는데, 사도 바울은 여기서 이러한 로마의 관습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이 많은 주석가들의 견해이다.48)  여기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을 향기에 비유하여 그 향기가 우리를 통해서 도처에 퍼져나감을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간직하고 퍼뜨려야 될 책임이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를 본문을 통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역사적-문화적 배경에 대한 지식은 요한계시록 2-3장에 언급되어 있는 일곱 교회에 대한 생생한 이해에도 많은 도움을 준다. 라디오게아 교회의 경우를 한 번 보자(계 3:14-22). 라오디게아는 그 당시 유명한 것이 많은 도시였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부(富)였다. 이 도시는 은행의 중심지로 유명했는데, A.D 60년에 이 도시가 지진으로 엄청나게 파괴되었을 때에도 로마 정부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재건할 수 있을 정도로 부유했다. 부유한 도시의 안일(安逸)한 사고 방식이 교회 내에도 침투해 들어와 이 교회는 "나는 부자라 부족한 것이 없다"(계 3:17)고 말하나, 영적으로는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기 그지 없었던 것이다(계 3:17).

라오디게아는 또 물 사정이 좋지 않기로도 유명했다. 물의 부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도관을 통해 다른 도시로부터 물을 가져 왔다. 라오디게아로부터 남쪽으로 약 16km 떨어진 골로새는 차가운 물로 유명했는데, 그 물이 16km나 떨어진 라오디게아로 수도관을 통해서 오는 동안에 미지근하게 되어 버리고 말며, 또 북쪽으로 약 11km 떨어진 히에라폴리스는 뜨거운 온천으로 유명했는데, 그 물도 11km떨어진 라오디게아에 도달할 때 쯤에는 역시 미지근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미지근한 물이 얼마나 마시기에 역겹다는 것을 일상생활을 통해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주님께서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 3:15-16)고 하신 것은 위와 같은 배경 하에서 이해할 때 훨씬 더 실감이 날 것이다.

 그 밖에도 이 도시는 검은색 모직물 생산이나 안약 제조로도 이름을 떨쳤다. 이 도시의 유명한 안약도 영적인 시력 회복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고("네 눈 먼 것과"), 그 유명한 모직물로도 영적으로 벌거벗은 몸을 가리워 주지 못했다("네 벌거벗은 것을"). 49)

 주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하실 때 그 도시의 상황을 잘 활용하고 계시기 때문에 오늘날의 설교자도 그 도시의 역사적-문화적 상황을 잘 알고 있어야 주님께서 라디오게아 교회에 하신 말씀을 잘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역사적-문화적 배경을 연구할 때 봉착하는 하나의 큰 난관은 성경의 어느 구절이 '문화적 용어'(Cultural Terms)로 표현되어 있을 경우 그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문화적 제약을 받는 표현(Culturally bound expressions) 경우, 그 표현 자체를 액면 그대로 취할 것인지, 그러한 표현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원리를 취할 것인지, 아니면 양자를 다 버리거나, 다 취할 것인지 등이 문제로 등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문화적 표현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는 몇 가지 지침(指針)이 필요할 것 같다. 50)

 1. 일반적으로, 문화적 제약을 받는 표현의 경우 그 형태(form)는 변경하여 그에 상응하는 현대적 형태로 바꾸어 표현할 수 있으나, 그러한 표현이 가르치는 원리는 불변한다.
 예를 들면, "너희가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롬 16:16; 고전 16:20 등)는 명령의 경우, 만일 오늘날도 그 형태를 그대로 유지해 교회에서 서로 '키스'함으로 문안한다면 어떻게 될까?
 만일 동성(同性)끼리 그렇게 한다면 교회는 동성 연애의 온상으로 낙인찍힐 것이고, 이성(異性) 간에 그렇게 한다면 교회는 부도덕과 성적 타락의 표본으로 지탄을 받지 않을까? 더구나 요즈음 같이 '후천성 면역 결핍증'(AIDS) 노이로제에 걸린 시대에 서로 키스함으로 문안하면 어떻게 될까?

 초대 교회 때에는 서로 입맞춤으로 문안하는 것이 일반적 풍습이었기에 교회 내에서도 그렇게 해도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경우, 특히 한국의 경우, 입맞춤으로 문안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그에 상응하는 현대적 형태로 바꾸어서 표현해야 한다. 예를 들면, 악수 같은 것이 이에 해당될 것이고, 때에 따라서는 동성간의 가벼운 포옹으로도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는 표현이 가르치는 원리는 불변한다.

 2. 어떤 표현이 비록 문화적 제약을 반영한다 해도 그것이 불변하는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를 두고 있다면 그것은 변함없이 그대로 유지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창세기 9:6의 경우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고 했는데, 이 명령은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주어진 것이 분명하지만, 이 명령은 오늘날도 그대로 유효하다. 즉, 살인자는 사형에 처해야 되는데, 그 이유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일부 기독교인들이 사형 폐지론을 주장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물론 정치범이나 사상범까지도 사형하라고 성경은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나 살인자에 대한 사형은 하나님의 불변의 명령이다.

 3. 문화적 표현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관련되어 있을 경우 그것은 영속적이다.
 예를 들면,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딤전 2:10-11)는 명령은 오늘날도 그대로 유효한데, 이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혼과 이혼 문제(마 19)도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도 구속력이 있다.

 4. 이방인의 관습으로 하나님의 도덕적 성품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신?구약에서 금지된 것은 지금도 여전히 금지된다.
 예를 들면, 동성 연애(롬 1:26-27; 레 18:22), 수간(레 18:23) 같은 것은 구약 시대에나 초대 교회 시대에는 물론 지금도 여전히 금지되는데, 이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모독이기 때문이다.

 5. 역사나 문화와 관련되어 있지만 하나님의 성품이나 창조 질서와 관련되지 않은 명령은 그 적용에 있어서 융통성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레위기 24:8-9에서 진설병은 아론과 그의 자손만 먹으라고 했는데, 사무엘상 21:1-6에 보면 다윗과 그의 군대가 곤경에 처했을 때 먹은 것을 볼 수 있고, 주님도 비상시에는 그러한 것이 허락될 수 있음을 가르치고 계신다(마 12:1-5).
 6. 어떤 가르침이나 명령이 본문에서 어떻게 취급되고 있는지를 잘 살펴서, 본문에서 취급한 대로 취급해야 한다.
 예를 들면, 본문 자체가 어떤 명령이나 가르침에 대한 적용을 제한할 경우(cf. 고전 7:8; 출 3:5; 마 21:2-3), 그것은 오늘 우리에게는 구속력이 없다. 그러나 본문이 그러한 제약을 가하지 않을 경우, 그 가르침이나 명령은 역사적 - 문화적 상황을 뛰어 넘어서 보편성을 갖는다(cf. 살전 4:11; 4:17).
 위에 제시한 여섯 가지 일반적 지침을 따를 경우, 대부분의 문화적 표현은 큰 어려움 없이 해결할 수 있을 것이고, 오늘날의 청중에게 적용시키는 데에도 별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6) 본문 연구의 실례
 이제 마지막으로 실례(實例)를 통해서 본문 연구 방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가령, 마가복음 14:3-9을 본문으로 택해서 설교할 경우, 어떤 부분을 중심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을까?
 1. 본문을 연구하려면 먼저 본문에 기록된 사건과 같은 사건인 요한복음 12:1-8과 비교 대조하면서 연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2. 향유를 바친 여인에 대한 연구를 해야 할 것이다. 본문을 요한복음 12장과 비교해 보면 이 여인은 바로 나사로와 마르다의 형제인 마리아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에 연이어서 마리아는 그녀의 오빠 나사로가 죽은 가운데서 살아나는 기적을 목도했고, 그로 인해 주님에 대한 놀라운 사랑이 있었음도 알게 될 것이고, 또 그 가정이 그렇게 부유하지 않았음도 알게 될 것이다.
 3. 옥합에 대한 연구도 간단히 할 필요가 있다. 옥합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상자 모양이 아니라 목이 가늘고 긴 플래스코 모양이라는 것을 성서사전 같은 것을 통해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것이다.

 4. 4절의 "어떤 사람들"에 대한 연구도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을 요한복음 12장과 비교해 보면, "어떤 사람들"은 가룟 유다와 몇몇 제자들이란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마리아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귀한 것을 주님을 위해 기꺼이 바치겠다는 자세인데, 어떤 사람들은 그녀의 희생과 헌신을 비난하고 있다.
 5. "허비"라는 단어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허비란 도대체 무엇인가? 마리아는 자기의 귀한 것을 전혀 허비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왜 어떤 제자들은 그것을 허비라고 했을까? 허비는 어떤 물건의 액수와 관계 있는가, 아니면 그것을 누가 받느냐, 어떠한 태도로 바치느냐 하는 것과 관계 있느냐? 이러한 것들을 반드시 연구할 필요가 있다.
 6. '300 데나리온'에 관해서도 반드시 연구해야 한다. 한 데나리온은 어느 정도의 금액이며, 300데나리온을 오늘 한국에서의 구매력으로 환산하면 어느 정도일까?

 7. 예수님은 이 여인의 헌신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지셨는가(6절)? 그녀의 헌신에 대해 주님은 무슨 약속을 하셨는가? 그것이 오늘날로 말하면 어떤 의미인가?
 마가복음 14:3-9을 설교할 경우 위에서 필자가 대강 언급한 것보다 더 자세히 연구하기를 원하는 설교자도 있을 것이지만, 최소한도로 필자가 언급한 정도는 연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요한복음 3:1-15을 본문으로 설교할 경우 연구해야 될 내용은 어떤 것일까?
 1. 니고데모가 바리새인이라는 사실을 연구해야 한다. 바리새인이 어떤 사람들이란 것을 연구해야 니고데모가 중생하지 못한 이유나 배경을 더 잘 부각시킬 수 있을 것이며, 종교적 환경이나 전통도 중생과 직접 관계가 없다는 것이 드러날 것이다.
 2. 니고데모가 유대인의 관원이란 것도 연구해야 한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어느 정도의 신분인가? 사회적 신분이 중생과 관계 있는가?
 3. 니고데모는 왜 밤에 예수님을 찾아 왔을까? 낮에는 남의 눈이 두려워서 그랬을까, 아니면 조용한 밤에 자신의 영적 문제를 예수님과 깊이 있게 상의하기 위해서였을까?
 4. 2절에 나타난 니고데모의 태도를 연구해야 한다. 그는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했나?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인 관계를 맺은 사람인가?

 5. 3절에 있는 예수님의 답변을 깊이 연구해야 한다. '거듭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람이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필요한가? 좋은 종교적 배경, 높은 사회적 신분이 필요한가? 아니면 다른 무엇이 필요한가?
 6. 4절에 나타난 니고데모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바로 이해했는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출생과 니고데모가 이해한 출생은 어떻게 다른가? 애 이런 엄청난 오해가 생기게 되었나? 이것은 니고데모의 영적인 상태가 어떠함을 보여 주는가?
 7. 5절에 "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좋은 주석을 보면 여러 가지 견해가 있음을 알게 될 것이나, 설교할 때에는 그 모든 견해를 다 언급할 필요가 없다. 그 모든 견해의 장단점을 다 언급한다면 그것은 학교 강의이지 설교는 아니다. 설교는 강의가 아니다. 여러 가지 견해의 장단점은 설교자가 서재에서 혼자 씨름할 문제이다. 강단에서 외칠 때에는 그 여러 가지 해석 중에서 가장 타당하다고 결론지은 것 하나만 언급해야 할 것이다.

 8. 육으로 난 것과 성령으로 난 것은 어떻게 다른가 (6절, 7절)?
 9. 8절의 비유는 무슨 의미인가? 바람과 성령은 어떤 관계이며, 여기에 나타난 비유는 중생의 신비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10. 9절에 나타난 니고데모의 영적 무지를 다시 한 번 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선생'이었다니(10절)!
11. 11절로부터 13절에서 하늘의 진리를 확신 있게 가르치는 예수님의 모습을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12. 14절과 15절은 무슨 의미인가? 중생의 진리에 대한 결론으로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민수기 21:5-9의 사건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끝으로, 마태복음 7:21-23의 경우는 어떤 부분을 주로 연구해야 하겠는가?
 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가는 것이 아니요" (v.21a)
로마서 10:9-10에는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고 했는데, 이는 본문의 말씀과 상충되는 것 같이 보이지 않는가? 그 차이는 무엇인가?
 2.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v. 21b).
 "내 아버지의 뜻"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을 행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사람이 무엇을 '행'(行)함으로, 즉 행위로 천국에 들어간다는 의미인가?
 3.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v.22a.)
'그 날'은 언제인가?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선포하시는 일은 어느 때에 있을 것인가? 그리고 이 때에 예수님에 의해서 거절당하는 사람의 숫자가 많다는 사실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가짜 그리스도인은 우리가 상상하거나 짐작하는 것 이상으로 그 수가 훨씬 많은 것이다.

 4.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v. 22b).
 주의 이름을 열심히 부르는 것 자체가 천국 들어가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기적이나 권능을 행하는 자가 다 구원받은 자인가?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도 이적과 기사를 행할 수 있는가(cf. 출 7: 20-22; 8:1-7; 살후 2:9-10)?

 5.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v. 23).
 주님의 태도가 얼마나 강경하고 단호한가에 먼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천국 들어가는 문제에 대해서는 적당주의가 절대로 통하지 않는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라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주님이 이들을 한 때는 아셨다가 잊어버리셨다는 의미인가, 아니면 이들은 아예 처음부터 주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던 자들인가? 이들은 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불리웠는가? 이들은 주님의 이름도 열심히 부르고 선지자 노릇도 하고, 귀신도 쫓아내고, 권능도 행하고, 방언도 하고 신유도 하고... 했는데, 왜 이런 것들이 주님 보실 때에는 다 불법으로 인정되었는가? 주님께서 "내게서 떠나가라"하시면 그 운명은 어디가 될 것인가? 그들이 주님을 떠나서 갈 곳은 어디인가?
(월간 <교회와신앙> 1999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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