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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설교의 장단점
1999년 03월 01일 (월) 00:00:00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장두만목사(강서침례교회 담임,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 교수)

진정한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말씀의 전파는 오직 강해 설교를 통해서만 가능한데, 그러면 강해 설교를 하면 어떤 잇점이 있으며, 또 어떤 어려움이 있는가?

                       Ⅰ. 강해 설교의 이점

강해 설교를 하면 어떤 유익이 있는가? 스타트(John Stott)는 네 가지를 들고 있다.1)  (1) 강해설교는 설교의 한계를 분명히 설정해 준다(It sets the limit). 왜냐 하면, 강해 설교는 그 범위를 본문에 국한시키기 때문이다. (2) 그것은 본문에 대한 충실성을 요구한다(It demands integrity). 강해 설교는 원저자(original author)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를 밝혀서 현대의 청중에게 전하는 것이다. (3) 그것은 설교자가 피해야 함정을 보여준다(It identifies the pitfalls to be avoided).

스타트에 의하면, 설교자가 피해야 함정으로는 설교를 해 나가면서 본문에서 일탈(逸脫)해 자신의 생각을 따라가는 것(forgetfulness)과 본문에서 벗어나지는 않되 본문의 의미와는 다른 설교를 하는 것이다(disloyalty)이다. (4) 그것은 설교자에게 확신을 준다(It gives us confidence to preach). 왜냐 하면, 강해 설교는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의 견해도 스타트의 견해와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 그러나 필자는 그 잇점을 일곱 가지로 정리해서 말하고 싶다.

 첫째, 강해 설교는 설교에 신적(神的) 권위를 부여한다.
 강단에 서서 외치는 말이라고 해서 다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아니다. 강단에서 외치는 말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인간의 말이 너무나 많다. 강단의 권위를 빌려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것 같은 그릇된 인상을 청중에게 주면서 실제로는 자신의 견해나 사상을 설파하는 설교자가 너무 많다. 이런 것은 그것에다 무슨 이름을 갖다 붙이든지, 어떻게 전달하든지 상관없이 인간의 말에 불과하지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다.

그러한 것이 어떤 권위를 갖는다면 그것은 단지 설교자 자신의 인간적 권위밖에는 갖는 것이 없다. 다시 말하면, 그러한 것은 설교라고 부르든, 강연이라고 부르든, 강의라고 부르든 아니면 제 3의 무엇이라고 부르든 간에 하나님의 권위와는 상관이 없고, 따라서 청중은 그러한 설교에 반드시 순종해야 될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러나 만일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한다면 청중 가운데 개인적으로 그 설교자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그의 가르침에는 순종해야 한다. 왜냐 하면 그 설교자는 자신의 의견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가르침에 불순종하는 것은 그 설교자에 대한 불순종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인 것이다. 설교자가 강해 설교를 할 경우에는 설교자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있다는 분명한 확신을 갖게 되고, 그와 동시에 그의 설교는 신적인 권위를 갖게 된다.

 사도 바울은 그의 믿음의 아들이요 주안에서의 동역자인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고하고 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딤후 4:2). 여기서 <전파하다>는 동사는 헬라어로 <케뤼소>인데, 이 단어는 자기 자신의 생각이나 견해를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라, 왕이나 장군의 명령을 받아 그대로 선포해야 되는 사람이다.3)

  전령사로서의 설교자는 사람 앞에 나아갈 때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가 전령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면, 그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권위를 갖게 되고, 설교자는 확신과 담력을 갖게 된다. 확신에 넘친 설교가 회의와 불확신으로 가득 찬 설교와 같을 수 없다는 것은 부연할 필요조차 없다고 하겠다.4)

 둘째, 강해 설교는 설교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설교하게 한다.
 이것은 설교자가 어느 한 책을 택해서 시리즈로 설교할 경우 특히 더 그렇다. 어떤 설교자는 설교할 때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부분만 설교하는데, 이렇게 되면 청중은 식상(食傷)하게 되거나 영적인 편식증(偏食症)에 걸리게 될 것이다.

 필자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얼마 동안 출석했던 교회가 있었는데, 이 교회 목사는 거의 언제나 구원에 관한 설교만을 했다. 본문이 어디이든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고, 어디서든 간에 항상 구원에 관한 설교만 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곧 식상하게 되었고 따라서 얼마 후 그 교회를 그만두고 말았다.

 편식증은 육체적인 경우에나 영적인 경우에나 다 같이 문제가 된다. 비타민 C가 아무리 몸에 좋다. 해도 비타민 C가 든 음식만 먹는다면 곧 건강 문제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비타민 C가 든 음식은 물론 다른 영양소가 든 음식도 골고루 먹어야 건강한 몸을 유지할 수 있듯이, 영적인 건강을 유지하는 데도 하나님의 말씀을 골고루 다 섭취해야 하는 것이다. <균형식>(balanced diet)은 육체적인 건강에나 영적인 건강에 다같이 필수 불가결하다.

 필자가 미국에서 귀국한 후 2~3개월 지났을 때의 일이다. 우리 애들(당시 6세와 2세였음)의 얼굴이나 손바닥과 발바닥 등이 노랗게 되기 시작해서 황달병에 걸린 것이 아닌가 하고 염려가 되어 병원에 데리고 갔다. 의사는 우리 애들의 눈을 비롯해 여기 저기를 검사하더니 애들의 건강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애들이 왜 노랗게 되느냐고 물어 봤더니 잘 모르겠다면서, 아마 미국서 오래 살다가 한국에 와서 물이나 환경의 변화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이었다. 의사의 답변이 도무지 만족스럽지 못했지만 그냥 돌아오는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후 우연히 필자의 형님과 대화하다가 이 문제가 나왔다. 형님은 애들이 아마 귤을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 것 같으니 얼마 동안 귤을 먹이지 말아 보라고 제안을 하기에 그대로 했다. 사실 우리 애들은 귤을 무척 좋아해서 한 자리에서 귤 대여섯 개 정도 먹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2~3개월 동안 귤을 거의 먹이지 않았더니 과연 피부 색깔이 제대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편식의 결과는 육체의 경우에나 영혼의 경우에 다같이 바람직하지 못하다. 영적인 편식을 방지할 수 있는 최상의 길은 강해 설교의 방식으로 성경 전체를 설교하는 것이다.

 셋째, 강해 설교를 하면 설교의 자료가 무궁무진하다.
 제목 설교를 할 경우에는 설교자가 아무리 박학다식하고 상상력이 풍부하다 할지라도 오래 버티기가 어렵다. 아마 웬만한 설교자의 경우는 1년 정도만 제목 설교를 하면 설교 자료가 바닥나 버리고 말 것이다.

 설교할 준비가 되어 있든 안되어 있든 간에 설교해야 할 시간은 때가 되면 어김없이 찾아온다. 설교자에게 있어서 늘 설교해야 된다는 압박보다 더 압박감은 아마 없을 것이다. 설교의 자료는 바닥이 나 있고, 설교해야 할 시간은 무자비하게 계속 다가올 때, 설교자는 피가 마르는 것 같은 고통을 느낀다. 이런 저런 설교집을 미친 듯이 뒤져도 도무지 마음에 드는 설교를 발견하지 못할 때 설교자는 때로 목회를 포기하고 싶은 충동조차도 느낄 것이다.

"왜 내가 목사가 되었던고?" 하고 후회를 해 보아도 아무 소용이 없게 된다. 이런 경우에 어떤 목사는 울기까지 한다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목회를 한다는 것은 엄청난 기쁨과 특권인 동시에 형언할 수 없는 중압감과 고통이기도 하다.

 그러나 강해 설교를 하면, 특히 어느 한 책을 택해서 연속적으로 해 나가면, 설교 자료 때문에 걱정할 일은 없을 것이다. 설교가 하나 끝나면 그 다음에 무슨 설교를 할 것인가에 관해 염려할 필요가 없다. 다음 번의 설교 자료는 이미 정해져 있다시피 하기 때문에 그것을 제대로 연구만 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이미 있는 자료를 제대로 요리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자료 자체가 아예 없다면 얼마나 더 고통스럽겠는가!

 넷째, 강해 설교를 하면 다루기 힘든 문제(touchy subjects)를 원만하게 다룰 수 있다.
 목회 경험이 적은 목사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 가운데 하나는 교회에 어떤 문제가 생길 경우, 그 다음 주일에 바로 그 문제에 관해서 설교함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더 큰 문제를 야기시키거나 문제의 당사자에게 큰 상처를 주어 결국은 교회를 떠나게 만드는 미숙한 일을 한다. 목회를 하다 보면 많은 문제에 봉착하게 되고, 그 가운데 어떤 문제는 반드시 강단에서 취급해야 될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 특별히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아니하면 쓸데없는 오해나 더 큰 시험을 초래하게 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어느 한 책을 택해 연속해서 시리즈로 강해 설교를 해 나간다면 성도들에게 불필요한 오해를 주지 않고서도 다루기 힘든 문제를 다룰 수 있게 된다. 어느 책 한 권 전체를 설교할 경우 설교자는 여러 가지 내용을 골고루 다 설교해야 되고, 교회 내의 여러 가지 문제도 강해 설교 시리즈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다룰 수 있게 된다. 그럴 경우에 성도는 목사가 어느 특정인을 공격하기 위해 설교한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책 전체를 설교하다가 보니 오늘의 본문에 이르렀고, 따라서 저러한 내용으로 설교하는구나 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목사는 큰 말썽을 일으키지 않고도 힘든 문제를 다룰 수 있게 되는 것이다(이 경우에도 물론 목사가 그 문제를 지혜롭게 다루어야 한다는 사실은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다섯째, 강해 설교는 설교자와 성도 모두를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잠기게 한다.
 강해 설교를 하게 되면 설교자가 말씀에 깊이 잠기게 된다는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사실이다. 강해 설교는 본문 중심이기 때문에 본문을 제대로 연구하지 않고서는 강해 설교를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가 강해 설교를 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가 강해 설교를 계속하면 하나님의 말씀 전체에 깊이 빠져 들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강해 설교는 설교자를 말씀에 빠져 들어가게 할 뿐만 아니라 청중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빠져 들어가게 한다. 강해 설교는 청중으로 하여금 설교자에게 주의를 기울이게 하는 대신에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 설교자가 강해 설교를 하면 청중은 설교자가 주어진 본문으로부터 그들이 처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어떻게 발견하는지를 배우게 될 것이다. 라이펠드(Walter L. Liefeld)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회중은 성경이 해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그 해답을 어떻게 발견하는지도 알 필요가 있을 것이다."5)

 강해 설교는 성경으로부터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발견하는 법을 가르치는 하나의 좋은 모델이다. 청중은 설교자가 사용하는 모델을 통해 성경 연구법(PBS; Personal Bible Study)을 배우게 될 뿐만 아니라, 그들이 고심하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성경을 통해 스스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이렇게 될 경우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결국 말씀을 통해 그들의 삶은 변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글의 의사>(Jungle Doctor)로 유명한 화이트(Paul White) 박사는 이런 간증을 하고 있다. 그가 의료 선교사로 아프리카에 처음 갔을 때 서양식 침대를 정글에 사용해 보았지만 쓸모가 없었다. 환자들은 그러한 서양식 침대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퇴원해서 집에 돌아가면 습기차고 비위생적인 이전의 침대에서 잠을 잘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되면 그들은 다시 병에 걸려 병원 신세를 질 수밖에 없는 악순환을 되풀이했다. 서양식 침대는 그들이 따를 수 있는 모델이 아니었다. 그래서 화이트 박사는 그들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무와 끈을 이용해 간단한 침대를 만드니 환자들도 쉽게 그런 침대를 따라 만들 수 있었다. 환자들은 일단 퇴원하면 새로운 침대를 만들어 사용했고, 그렇게 하니 그들의 취침 여건은 개선되었고 따라서 그들의 건강도 개선되었다. 6)

 강해 설교가 바로 그렇다. 청중은 설교자가 제시하는 모델을 통해 성경 연구법을 배우게 되고, 그렇게 되면 성경 말씀 하나 하나가 바로 청중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고, 따라서 성경 말씀 속으로 깊이 잠기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섯째, 강해 설교는 성도들을 말씀으로 바르게 먹이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은 영적으로 극심한 기갈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고, 또 말씀에 대해서 너무 무지하다. 암송하고 있는 구절은 몇 개나 되며, 영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말씀을 제대로 찾아서 도와줄 수 있을 정도로 말씀에 해박한 성도는 얼마나 될까? 예수를 믿는다고 말은 하고 있고, 또 열심히 교회에서 봉사도 하고 있지만 뿌리가 없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 교인들이 너무 많다. 영적 수준이나 말씀에 대한 지식이 낙제점에 가까운 사람들이 부지기수이다. 어쩌면 이런 사람들이 오히려 절대다수가 아닐는지 모르겠다.

구원에 관한 기본적인 신앙조차도 없이 그냥 습관적으로 또는 의무 때문에 행하는 종교 생활이 신앙 생활의 전부인 양 착각하고 있는 교인들도 많다. 오늘 죽는다면 천국에 갈는지 지옥에 갈는지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에게 신앙이란 것을 논하는 것 자체가 별 의미가 없을는지도 모르겠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미신과 샤머니즘에 젖어 있는 사람의 수가 부지기수이다. 교회 내에서의 생활과 교회 밖에서의 생활은 이원화되어 신앙이 실제 생활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엄청나게 많이 있다. 교회 내에서는 다 좋은 성도이고, 집사이고, 장로이다. 그러나 실제 삶에서도 성도로, 집사로, 장로로서의 본을 보이며 사는 사람의 수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신문이나 TV에 보도되는 대부분의 사건 뒤에는 교인들이 연관되어 있는 서글픈 현실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왜 한국 교회가 이 지경이 되었는가? 이유는 많다. 그러나 아마도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영적인 양식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고 있거나, 공급은 받아도 도무지 영양가가 없는 음식을 공급받기 때문일 것이다. 카이저(Walter Kaiser)의 말은 이 상황을 적나라(赤裸裸)하게 묘사해 주는 것 같다:

   세계 도처에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전혀 건강하지 못한 상태에 있다는 것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쓰레기 같은 음식"(junk food)에다 인공 방부제가 첨가된 음식, 자연식을 대신하는 음식을 먹다 보니 교회는 영양 실조에 걸리고 말았다. 그 결과, 발암 물질이 들어 있는 음식이나 달리 건강에 유해한 음식을 섭취함으로 건강을 해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거보(巨步)를 내 디뎠던 바로 그 세대가 신학적, 성경적 영양실조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다. 이것과 때를 같이해 진정한 하나님 말씀 선포의 부재로 인한 전세계적인 영적 기근(암 8:11)은 세계 대부분의 교회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으며, 그러한  현상이 쇠퇴하고 있는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7)

 이러한 영적 기근 상태에 대한 해결책은 무엇인가? 맥아더(John MacArthur, Jr.)는 바로 강해 설교가 그 해답이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8)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선포하는 길만이 한국 교회와 거기에 속한 불쌍한 영혼을 살리는 유일한 길이다.

 일곱째, 강해 설교는 교회 성장의 원동력이 된다.
 오늘날 소위 풀러 학파(Fuller Theological Seminary)가 주도하는 교회 성장 운동이 전 세계에 풍미하고 있다. 아마도 목회자치고 교회 성장에 관심 갖지 않는 목회자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풀러신학교 교수들 및 그 학교 출신들이 주장하는 성장은 너무 양적인데 치중하기 때문에 갖가지 부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단순히 숫자가 많아지는 것만 가지고 성장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비만이라고는 할 수 있을지언정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장이라고는 할 수 없다. 올바른 성장은 질적 향상과 병행하는 양적 증가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성장의 요인은 참으로 복합적이다. 따라서 어느 한 가지만 잘한다고 해서 교회가 곧 성장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성장하는 교회 치고 강단이 약한 교회는 없고, 강해 설교를 착실히 하는 교회 치고 성장하지 않는 교회도 없다.

 찰스 스윈돌 (Charles Swindoll)이 오랫동안 목회했던 "풀러톤 제일복음적자유교회"(First Evangelical Free Church of Fullerton)이나 잔 맥아더(John MacArthrur)의 "그레이스 지역 교회"(Grace Community Church) 같은 경우는 모두 강해 설교가 그 성장의 비결이다. 이 교회들만큼 크지는 않지만 강해 설교를 통해 교회 부흥을 가져 온 경우는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으리만큼 많다.

 달라스에 소재한 제일침례교회(First Baptist Church)도 강해 설교가 성장의 주원인(主原因)이다. 주일 아침 출석 인원이 6,000~7,000명 정도가 되고, 교회의 재정 상태는 미국 내의 어느 교회보다 더 낫고, 약 40,000개의 교회를 가진 미국 남침례교회(Southern Baptist Convention) 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큰 교회가 바로 제일침례교회인데, 이 교회의 담임 목사님으로 오랫동안 시무했던 크리스웰(W. A. Criswell) 목사님은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18년 동안 나는 성경 전체를 설교했다. 창세기 1장 1절에서 시작해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절까지 계속해서 설교했다. 아침에 설교가 끝나면 저녁에 그 다음 부분을 설교했고, 이런 식으로 매주일 아침 저녁으로 성경의 메시지를 따라갔다. 하나님은 내가 기대했던 것 휠씬 이상으로 이 방법을 축복하셨다.

   사람들의 반응은 내가 놀랄 정도였다. 내가 그 시리즈를 처음 시작했을 때, 교회에서 아주 신중한 성도들 가운데 일부가 주님의 집을 비워놓을지 모른다고 했다. 그들은 말하기를, 예배에 계속 참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고, 또 따분하고 공허한 성경의 각 장(章)을 아슬아슬하게 훑어가는 메시지를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경전체를 설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을 내게 주셨다.

   그 결과는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집으로 몰려오기 시작했기 때문에 얼마 후에 본당(本當) - 이것은 미국에서 가장 큰 본당 가운데 하나이다- 은 더 이상 사람을 수용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아침 예배를 2부로 나누어 드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두 예배 때 모두 본당은 가득 채워졌다. 성도들은 예배 때 성경을 가져오기 시작했고, 또 읽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또 이전과는 달리 다른 사람들에게 전도하기 시작했다. 구원받은 영혼은 날로 더해갔다. 부흥과 갱신의 분위기는 주의 집에서 일상사(日常事)가 되었다. 그것은 내 생애의 최대의 경험이다. 9)

 목사가 강해 설교로 양들을 먹일 경우 반드시 급격한 교회 성장이 있다고 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사실 급격한 성장은 긍정적인 측면보다는 부정적인 측면이 훨씬 더 강하다. 얼마 동안은 점진적으로 성장하다가 교회가 질적으로, 내적으로 다져진 후에 좀더 빠른 성장을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이런 성장을 하려면 강해 설교는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강해 설교는 교회를 지속적으로 성장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생각된다.

                        Ⅱ. 강해 설교의 어려움
 위에서 강해 설교의 잇점 몇 가지를 살펴보았는데, 강해 설교는 난점이 전혀 없는가? 그렇지는 않다. 강해 설교라고 전혀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어려움 가운데 흔히 제기되는 것 몇 가지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

 첫째, 강해 설교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바쁜 목사에게는 큰 어려움으로  등장한다.

 강해 설교가 많은 시간을 요하는 주된 이유는 본문을 깊이 연구하고, 묵상해야 되기 때문이기도 하고, 때로는 연구하고 묵상한 것을 조직적으로 구성해야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19세기의 영국의 낳은 위대한 설교자 가운데 한 사람이 알렉산더 머클레런(Alexander Maclaren; 1826-1910)인데, 그의 설교는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 그는 외부의 강연이나 특별 초청 같은 것은 거의 다 거절하고 오직 말씀 연구에만 몰두했고, 설교 하나를 만드는데 무려 60시간을 소비했다고 한다.10)

 오늘날과 같은 분주한 사회에서 설교 하나에 60시간을 쏟아 붓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 1/5내지는 1/6정도는 조금만 애쓰면 가능하리라고 생각한다. 몇 년 전 달라스신학교 (Dallas Theological Seminary) 학생 한 사람이 달라스신학교를 졸업하고 현재 목회를 하고 있는 동문들을 중심으로 여론 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었다. 그 질문 가운데 한 가지는, 설교 하나를 만드는데 약 몇 시간 정도 소비하느냐는 것이었는데 그 답변을 모아 평균을 내 보니 12시간이었다고 한다. 필자의 경험도 이 조사와 일치한다. 12시간이란 시간이 결코 적은 시간은 아니다. 그러나 목사의 스케줄을 재조정하고 시간을 지혜롭게 잘 활용하면 이 정도의 시간은 낼 수 있을 것이다.

 목사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게으르거나 여러 가지 일로 너무 바빠서 설교 준비를 위해 제대로 시간을 내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설교가 사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를 안다면, 다른 어떤 일보다도 설교 준비에 우선을 두어야 할 것이다. 양들에게 풍성한 꼴을 늘 공급할 때 그 결과는 사역에 나타날 수밖에 없다. 꼴이 풍성하지 못하면 양들은 풍성한 초장을 찾아 여기저기 기웃거리게 되고, 결국은 더 풍성한 영적 양식이 공급되는 곳으로 이동하고 말 것이다. 영적인 기갈은 육적인 기갈 못지 않게 견디기가 힘든 것이다.

 게을러서 공부하기 싫어하고, 얼렁뚱땅 남의 설교나 대강 베껴서 설교하겠다는 사고 방식을 가진 목사는 목사가 되어서도 안 된다. 그런 목사가 강해 설교를 할 수 없다는 것은 재론(再論)의 여지가 없다. 강해 설교는 깊이 있는 연구와 묵상을 통해서만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때를 따라 양들에게 풍성한 꼴을 공급한다는 것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다. 필립 켈러(Philip Keller)는 그의 목양(牧羊) 경험과 시편 23편을 비교해서 쓴 양과 목자에서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푸른 초장은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푸른 초장은 엄청난 수고와 시간과 땅의 관리상의 기술의 산물이었다. 푸른 초장은, 거친 자갈 밭을 일구어 가시덤불과 나무등걸과 뿌리들을 제거하고 깊이 파서 흙을 부드럽게 고른 다음 풀 씨를 뿌리고 특별한 곡식과 콩을 심고 물을 대며 양들을 먹일 꼴들을 정성스럽게 관리한 결과로 이루어졌다.11)

 스펄전(Charles H. Spurgeon)의 다음과 같은 말은 모든 설교자가 반드시 귀를 기울여야 할 말이다: "배우기를 중지하는 자는 가르치기를 중지하는 자다. 서재에서 뿌리지 않으면 강단에서는 아무 것도 거두지 못할 것이다."12) 시편 기자가 노래한 바와 같이,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5-6).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2). 목사들은 성도들에게만 충성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목사들 스스로도 충성의 본을 보여야 한다. 사역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점(占)하는 말씀 사역에 충성되지 못하고서야 어찌 충성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누군가가 한 말이 기억난다: "성도들은 목사가 다른 일에 실패하는 것은 다 용서하지만 말씀 사역에 실패하는 것은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 사역에 있어서 설교가 차지하는 비중이 이 정도로 크다면 목사는 무엇보다도 말씀 사역에 충성해야 할 것이다.

사도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일꾼을 세운 것도 사역의 중심인 말씀 사역에 치중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행 6:1-6). 주님의 발 아래서 3년 동안 친히 배운 사도들도 말씀 사역에 최우선을 두기 위해서 다른 일을 뒷전으로 미루었다면, 오늘날의 설교자도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모든 것을 다 잘할 수 없다면 가장 중요한 몇 가지를 잘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바쁜 설교자들이 공부할 수 있으려면 다음과 같은 제언(提言)을 주의 깊게 경청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1) 일의 우선 순위를 정하라. 목사는 자기가 꼭 해야 될 일만 하고, 다른 사람이 해도 될 일 같으면 다른 사람에게 맡겨야 하고, 목사가 꼭 해야 될 일 가운데서 우선 순위를 정해서 그대로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출애굽기 18:13-27은 이 원리를 잘 보여주고 있다. 200만 명은 족히 될 백성들의 모든 문제를 모세 혼자서 처리함으로 모세는 모세대로 백성들은 백성들대로 지쳐서 불평과 원망이 들끓었다. 그래서 그 장인 이드로의 충고를 따라 십부장, 오십 부장, 백부장, 천부장을 세워 작은 일은 그들에게 맡기고 모세는 큰일만 맡게 되었다. 우선 순위를 따라 적절히 위임할 줄 모르면 효과적인 사역을 감당하기는 힘들 것이다. 

 (2) 가능하면 설교 횟수를 줄이라. 아무리 유능한 설교자라도 설교를 많이 하면 좋은 설교가 나올 수 없다. 어떤 목사들은 1주일에 설교를 10번 이상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그런 설교가 과연 들을 만한 가치가 있는 설교인지 지극히 의심스럽다. 필자가 믿기로는 1주일에 단 한 번만 설교를 하더라도 좋은 설교를 해서 성도들로 하여금 목사에게 대해 자부심을 갖게 하는 것이 10번 이상 하면서 성도들에게 별 감명을 주지 못하는 설교보다 훨씬 낫다. 성도들은 자기 목사에게 자부심을 느낄 경우 나가서 다른 사람에게 "와 보라!"고 외칠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이 자기의 목사와 자기의 교회에 대해서 자부심을 느끼는 것은 교회 부흥의 주요 요인 중의 하나이다. 그렇게 될 때에만 성도들은 열성적으로 전도하게 되고 따라서 새로운 사람들이 교회로 들어오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척 교회인 경우는 어찌 할 수 없을는지 모르겠지만, 가능하면 외래 강사도 자주 초청하고 조력자가 있으면 그에게도 설교할 기회를 주어 설교 횟수를 줄이도록 해야 할 것이다.

 (3) 일정한 시간을 공부에 할애하라. 11시나 12시쯤 되어서야 잠자리에서 일어나 오전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7시부터나 8시부터 공부하기 시작해 오전은 내내 공부하는데 사용할 필요가 있다. 사역은 오후부터 해도 충분할 것이다. 필자는 오전 시간을 온전히 공부에 전념하고 있는 목사를 여러 사람 알고 있는데, 그 중에서 아마 가장 잘 알려진 분이 크리스웰(W. A. Criswell)목사일 것이다.13)  매일 아침 시간을 온전히 말씀과 기도에 전무(專務)하는 그를 하나님은 엄청나게 축복해 주셨다는 것을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다.

 만약 어떤 이유로 오전 시간을 공부에 할애하기 힘이 든다면 1주일 중 어느 하루를 떼어서 공부에 전념하는 것도 고려할 만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한다.

 둘째, 강해 설교는 - 특히 어느 책 한 권 전체를 시리즈로 설교할 경우 - 자칫하면 청중에게 권태감을 주기 쉽다는 것이 큰 어려움으로 등장한다.
 부피가 큰 책(예, 창세기) 한 권을 차례대로 다 설교하려면 수개월이 걸리고 때로는 해를 넘기기도 할 것인데, 그렇게 되면 성도들이 그 책에 대해서 권태감을 느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설교자에게 다소 부담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경우는 다음과 같은 식으로 하면 권태감을 상당히 감소시킬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1) 가령 설교를 주일 아침과 수요일 밤 이렇게 두 번을 한다면, 주일 아침과 수요일 밤에는 각기 다른 책을 택해서 설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어느 한 책을 연속적으로 설교해 나가다가도 절기를 만난다든지 특별한 필요가 있다든지 할 경우는 시리즈를 중단했다가 2-3주 후에 다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에 크게 권태감을 주지 않고도 계속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2) 강해 설교를 처음 시작하는 설교자는 가능하면 부피가 작은 책(예, 에베소서, 빌립보서 등)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하여 강해 설교에 상당히 자신감을 갖게 된 다음에 부피가 큰 책을 택하면 큰 문제없이 설교해 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3) 책 한 권 전체를 다 설교하기가 너무 부담스러우면 어느 한 책의 일부만 설교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마태복음의 경우는 산상수훈만 뽑아서 할 수 있겠고, 요한복음의 경우는 14-17장만 할 수 있겠고, 요한계시록의 경우는 7교회만 설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예수님의 비유만을 뽑아서 할 수도 있겠고, 기적에 관한 이야기만 택해서 시리즈로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부피가 큰 책은 크게 몇 부분으로 나누어서 한 부분을 먼저 설교하고, 그것이 다 끝나면 일단 그 책은 중단했다가 얼마 후에 다시 돌아와서 먼저 번에 끝난 다음 부분을 해 나가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창세기를 설교한다면 , 홍수 이전(1-11장), 아브라함(12-25), 이삭과 그 아들(25-36), 요셉(37-50) 등으로 나누어 먼저 1-11장을 설교한 후, 얼마 후에 12-25장을 설교해 나가는 식으로도 할 수 있을 것이다.

 (4) 부피가 큰 책을 설교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각 장에서 중심이 되는 단락 하나씩만 설교하고 그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 방식이다. 그렇게 하면 창세기같이 두꺼운 책도 50회의 설교로 다 끝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창세기 1장의 경우는 26절에서 28절까지를, 2장에서는 18절에서 25절까지를 설교하는 식으로 해 나가고, 몇 년 뒤에 가령 창세기를 다시 설교한다면 먼저 번에 설교했던 부분이 아닌 부분에서 설교하면 성도들에게 권태감을 주지 않고도 성경 전체를 대충 훑어갈 수 있고, 또 수년 동안 설교 자료 때문에 걱정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셋째, 강해 설교는 범위가 너무 좁지 않느냐 하는 것이 흔히 제기되는 문제점 중의 하나이다. 이 비판은 옳다. 그러나 강해 설교의 철학 자체가 넓게 얇게 설교하자는 것이 아니고 좁고 깊이 있게 설교하자는 것이기 때문에 이 문제는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리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주일 아침에는 좁고 깊게 하는 강해 설교를 하고, 주일 저녁(또는 오후) 예배 때에는 제목 설교나 주제별 성경 공부를 하면 아침과 저녁이 상호 보완되므로 좋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주(註)

1) John R. W. Stott, Between Two Worlds, pp.126-33; 그 외에도 강해 설교의 잇점에 관하여는 Walter L. Liefeld, New Testament Exposition, pp. 10-13; Michael Green, "Expository Preaching," Asbury Seminarian 39 (Spring 1984):21-22; Keith A. Price, "Is the Best Coming from Your Pulpit?" Good News Broadcaster 42 (Nov. 1984): 32-35; Merrill F. Unger, Principles of Expository Preaching, pp. 24-31; Faris D. Whitesell, "The Values of Expository Preaching," The Sunday School Times and Gospel Herald 74 (July 15, 1976): 30-31; Sidney Greidanus, The Modern Preacher and the Ancient Text, pp.12-16을 참조하라.
2)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s.v., "       ," p. 431;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s.v.,
"       ,"  by Friedrich, 3:697.
3) Joseph Thayer, Thayer's  Greek  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s.v.,
"     ," p. 346.
4) 전령사로서의 설교자에 관하여는 John R.W. Stott, The Preacher's Portrait, pp. 33-59를 참조하라.
5) Liefeld, p. 12.
6) Ibid, pp. 12-13.
7) Walter C. Kaiser, Toward an Exegetical Theology, pp.7-8.
8) John MacArthur, Jr., "The Mandate of Biblical Inerrancy: Expository Preaching," in  Rediscovering Expository Preaching, ed., John MacAthur, Jr., p.24.
9) W. A. Criswell, "Preaching through the Bible,"  Christianity  Today (December 9, 1966), p. 22.
10) Warren Wiersbe, Wallking with the Giants, pp. 35-36.
11) 필립 켈러,『양과 목자』, p. 46.
12) C. H. Spurgeon, All-Round Ministry, p.236. cf. John Stott, Between Two Worlds, pp. 180-210.
13) W. A. Criswell, Criswell's Guidebook for Pastors, pp.59-60
(월간 <교회와신앙> 1999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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