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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자 집사/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하늘나라의 스타
1998년 07월 01일 (수) 00:00:00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이숙자 집사(세계찬양선교교회 집사)

내가 태어날 당시 우리 집안은 대전에서 손에 꼽힐 만큼의 유복한 가정이었다. 일본에서 만나 결혼해 한국으로 건너 오신 부모님은 여러 가지 사업을 하셨고 하는 일들이 성공해서 경제적으로 풍족해 주변에 있는 많은 거지들과 어려운 이웃들을 도와 주어 나라에서 주는 감사패도 받으신 적이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풍족하였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의 잦은 불화로 가족의 분위기는 항상 어두웠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일본 종교를 가지고 계셨고 어머니는 불교를 믿고 우상숭배하며 무속신앙에 심취해서 나중에는 신접하여 무당까지도 되고 싶을 만큼 무던히 애를 쓰고 있는 상태였다. 나는 그런 집안에서 4남 2녀 중 막내 딸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집안 사업이 너무 바쁜 나머지 당신 뱃속에 아이가 잉태되어 만삭이 된 줄도 모르고 배가 아픈 통증과 함께 갑자기 나를 출산했다고 한다. 그런데 불행히도 아기는 살 수 없는 체중 미달인 미숙아 상태였다. 내 위에도 한 명이 비슷한 상태에서 죽은 적이 있어서 미숙아인 나를 본 부모님의 마음은 절망적일 수밖에 없었고, 최선을 다해 살려 보려고 노력했지만 가망이 없는 상태라서 할 수 없이 아기가 죽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또한 부모님은 바쁜 사업으로 일손이 딸리다보니, 죽어가는 아기를 지키고만 있을 수 없어, 추운 바람을 막기 위해 안방에 쳐 놓은 병풍 뒤에 잠시 놓았다고 한다. 부모님이 여관업도 같이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안방마저도 손님을 받을만큼 바빠서 어쩔 수 없이 병풍 뒤에 둘 수밖에 없었겠지만 부모님의 무관심 속에 병풍 뒤에 있는 아기는 조용히 하루하루 침묵 속에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는 상태였다. 방치된지 6일째 되던 새벽, 큰 울음 소리와 함께 살아있음을 알리는 순간까지도 부모님과 가족들은 병풍 뒤의 아기를 잊었다고 한다.

울음 소리에 가족들은 급히 일어나 병풍을 재치고 눈과 입을 있는대로 뜨고 벌리고 절규하는 아기를 보며 빨리 아기를 아랫목으로 옮겨 안정을 취하도록 심장약을 먹이고 포기했던 아기가 살아난 것에 대해 너무도 놀란 나머지,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매일 심장약을 먹였다고 한다. 그 때 9년 차이가 나는 언니는 병풍 뒤에 있는 아기였던 그 때의 내 모습을 지금도 잊어 버리지 않는다고 한다. 그 때 큰 울음을 터뜨리며 손바닥보다 조금 큰 아기가 절규하는 모습을....

부모님의 노력 속에 살아난 나는 태어난 상태가 정상적이지 못해서 그런지 유년 생활은 허약한 몸과 병으로 인해 날마다 시달려야 했다. 이틀이 멀다 하고 굿과 함께 점치기를 좋아하는 부모님의 생활 속에 너무도 견디기 힘든 나의 허약한 몸은 학교교육을 제대로 받을 수 없을만큼 최악의 건강상태로 인해 조퇴하기가 일쑤였다. 때로는 조퇴하고 돌아오는 길에서 쓰러져 다시 정신차리기까지 몇 시간을 기절해 있었던 적도 있었다. 한참을 기절해 있다가 깨어나 힘없이 집에 갈 때면 같은 반 아이들이 공부를 마치고 나올 때도 있을만큼 너무도 몸이 약한, 언제부터인가 집안에서는 애물단지가 되었다.

집에서는 한 달에 한두 번의 대굿을 했다. 무당은 굿이 끝나든지, 굿을 하기 전에든지 시간이 나는대로 아버지, 어머니 형제들의 앞 날에 점을 보아 주었다. 이상하게도 나에겐 점이 안 나왔다. 몸도 약한데다 점까지 나오지 않는다며 어머니에게 학대 아닌 학대를 받을 만큼 유년시절은 악몽을 꾸는 것 같은 힘든 시절이었다. 하긴 나의 가족들은 무당 할머니에게서 듣는 각자의 미래에 대한 예언을 운명으로 알고 철저히 지키고 살아가는데 유독 나만은 점도 나오지 않고 아파서 거의 누워서 생활을 하고 있는 상태니 부모님과 형제들도 똑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이 세상에 살아갈 가치가 없는 존재로....

특히 당시 어머니의 눈총, 무서운 구박에 더욱더 힘들어진 나는 지칠대로 지친 나머지 매사에 신경질과 짜증을 내는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나도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받고 싶었고 그런 이유로 대들다가 어머니에게 더 많은 매와 학대를 받게 되었다. 나의 성격은 거칠어졌고 더불어 우울해지면서 공격적이다가 화가 치밀면 울어버리는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었다. 그때의 나를 지금 생각해도 하루하루 사는 것이 그렇게 힘이 들 수가 없었다. 너무도 비참했다.

부모님의 하시는 사업이 바쁘다 보니 나도 힘이 닿는대로 도와 드리는데 아픈 몸으로 도와 드리는 것이 잘되겠는가. 나는 최선을 다해 도와 드려도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칭찬보다는 냉랭한 무표정의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도와 드리다가도 내가 실수를 할 때는 욕설과 함께 무섭게 대하시는 어머니의 모습, 나아가 속이 상해 울어 버리고 말 대꾸하면 무차별로 두들겨 패고, 광에 가두고 죽어버리라는 어머니의 가혹한 행동 속에서 나는 부모님과 가족들에 대한 증오와 미움에 무서운 칼을 품으며 '내가 크면 부모님을 죽이겠다' 라는 지독한 마음과 가끔 나를 때렸던 '큰오빠에게도 복수하겠다' 라는 독한 생각을 매를 맞을 때마다 품곤 했다.

아기 때부터 정상적인 사랑을 부모로부터 받아보지 못한 때에, 공부도 제대로 할 리가 없었다. 기초도 없고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늘 꼴찌를 맴돌았으니까. 또한 부모님의 사업은 잘되서 풍요로운 삶을 살았지만 거의 매일이다시피 싸울 정도의 부모님들의 불화로 모든 가족들은 기쁨이 없는 생활을 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사업하시면서 술중독자로 살아가고 계셨고, 어머니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노름과 술을 즐기셨고 어머니 나름대로 사업을 하고 계셨다. 어느 한 분도 가정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아 자녀인 우리들은 우리들 스스로 알아서 생활을 개척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형제들은 나름대로 각자의 꿈을 키워가고 있었지만 유독 나는 꿈도 없고 희망도 없는 좌절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나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인정 받는 것이 하나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초등학교 4학년 음악시간에 음악시험을 볼 때인데 내 차례가 되어 나가서 노래를 부렀다. 재미있게도 같은 반 친구들이 감동을 받고 우는 것이었다.

"숙자 너, 정말 노래 잘한다."

여기 저기서 친구들이 노래 잘한다고 나를 부러워하며 좋아하는 것이었다. 노래할 때의 감정도 다른 아이들과는 사뭇 다르다며 나에게 관심을 보일 때는 나도 모르게 날아갈 듯 기뻤지만 워낙 가정에서 눌려 살았기 때문에 학교 생활도 쾌활하지는 못한 편이었다.

자주 시달렸지만 음악에 재능이 있다는 점은 친구들과 선생님께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중학교 들어가서는 노래 뿐만이 아니라 다른 부분에서도 친구들에게 더 인정을 받으려고 거짓말을 하는가 하면 친구들을 억누르고 공포를 주는 아이가 되었다. 집에서 받은 구박의 스트레스를 학교 친구들을 괴롭히며 풀어버리는 무서운 아이가 된 것이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감수성이 예민한 여학생들이었다. 나의 음악솜씨는 영락없이 발휘되어 공부쪽에는 자신이 없었지만 건강은 많이 호전 되었고 운동도 하게 되고 노래를 잘하여 친구들 간에도 선생님들에게 인기가 최고였었다. 교장 선생님에게까지 불려갔을 정도였다. 나는 다른 방향보다 유명한 가수가 되고 싶었다.

세상을 두려워하던 내게 꿈과 희망이 생겼다. 어둡고 답답한 집안을 나갈 수 있는 돌파구를 찾은 기분이었다. 작은 오빠와도 나는 가끔 노래도 맞춰 보면 가수의 꿈을 키우던 중 집앞에 노래 학원이 생겼다. "사랑해" 라는 곡이 대히트 할 때였는데 그 노래를 제작한 서울에 제작회사 사장님이 그 학원을 방문했다. 인재를 찾기 위해서였다. 오빠와 나는 노래 학원 원장님의 추천으로 레코드 제작회사 사장님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결과는 생각보다 좋았다.

레코드회사 사장이 오빠와 나를 서울로 초청해서 12곡을 선정해 주며 '숙이(숙자)와 용이(용주, 작은 오빠)' 라는 이름으로 작은 오빠와 듀엣으로 첫 레코드를 출반하는 영광을 얻었다. 그 후에도 대전 MBC TV 개국 프로에 학생 신분인데도 학교에서 인정해 줘서 출현했고 여러 곳에 신인 듀엣가수로, 솔로 가수로 불려 다니면서 출현했다. 이렇게 유명한 가수의 꿈을 키우던 중 오빠는 내가 고 3때 군대에 가게 되었다. 한편으론 서운했지만 한편으론 나 혼자 노래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는 기대도 했다.

태어날 때부터 축복받지 못한 상태에서 기적으로 살아나, 어수선한 가정 생활 속에서 병마와 싸우면서 갖은 고통을 당하며 어둡고 답답했던 지난 날을 회상하면서 미래를 향해 나는 나대로 순조로운 항해를 하는 기분이었다. 곧 스타가 되는 꿈도 꾸면서 고등학교(대전 충남여고)를 졸업하게 되었다. 그 다음해 엄한 부모님 몰래 나는 서울에서 개최하는 KBS TV 전국 노래 자랑에 출현해서 장려상을 거쳐, 그 해 연말 결선에서 대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실감이 안 났다.

10만대 1이라는 높은 관문을 통과한 영광이었지만 KBS 대상의 영예가 어떤 것인지 알기도 전에 나도 내 자신을 자제할 수 없이 세상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일류 가수가 되겠다는 꿈을 뒤로 한 채, 고삐가 풀린 망아지처럼, 타락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대상을 받은 나를 알아보는데만 만족하며 공인의 모범된 행실이 아닌 거의 매일 술과 담배로 교만스러운 행실로 타인에게 손가락질을 받을 만큼 문란했고 말로 표현 못할 포악한 행동을 했다. 지금 생각해도 그 때는 내가 아니었다.

당시에 부모님은 하시던 사업들이 서서히 기울어지는 상태였다. 그것은 나의 방탕함을 부채질 하는 사건이었다. 부모님에 대한 증오의 감정과 미움이 폭발해, 아버지와 어머니를 아무 이유없이 괴롭히고 형제들에게도 사납게 대들고 욕설을 퍼붓고 이유없이 반항을 했다. 이렇게 되자 성실치 못한 행동으로 KBS 방속국도 나를 외면 했고 모든 것이 쉽지가 않았다. 부모님의 사업이 기울자 일본진출도 시도했던 나는 불행히도 일본에 진출할 좋은 기회를 놓치고 한국에서 무절제한 생활을 계속했다. 참으로 허무한 시절이었다.

그런데 내가 잘못은 나에게 있으면서도 중풍을 맞은 아버지와 기울어가는 가사에 힘들어 하시는 어머니에게 내가 이렇게 된 데 대한 모든 책임을 전가하며 가족들에게 폭언을 서슴없이 했다. 참 어이가 없으셨을 것이다. 이후로 나는 17년이라는 세월을 술과 담배로 무절제한 생활을 했으니 나의 몸은 하나도 성한 곳이 없었고 위는 콩알만한 구멍이 났고 간은 폭음으로 인해 부었고 신장도 부었고 폐는 담배로 약해져서 목으로 피가 올라왔고 장은 파열이 되어 장티푸스와 함께 변기는 핏물이 되곤 했다.

또한 심장은 급한 성격으로 인해 항상 불안하고 온몸은 불규칙한 식사와 생활로 80kg을 육박하고 얼굴은 기미로 인해 지저분하고 꺼칠한 모습으로 변해 갔다. 기관지도 담배를 많이 피워서 걸걸하니 항상 가래가 끓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항상 잠겨 있었다. 나의 꿈은 산산조각이 나고 되는 일은 없었다.

부모님의 사업이 망했을 때 대전집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서울 미아리로 이사했다. 부모님은 당신들이 정성껏 33년을 섬겼던 신으로부터 배신을 당했다며 허탈감속에 빠져 있었다. 그 때 예수님을 믿었던 큰 올케와 친척들이 전도를 시작했다. 때는 절묘했다. 부모님은 인생의 위기 가운데서 예수를 만나게 되었다.

나 또한 이런 분위기에서 가끔 가족들과 교회를 다니다가는 발길을 끊고 세상이 좋아 행복과 부를 누리려고 부모님의 재산을 정리할 때 받은 일부 돈으로 레스토랑을 경영하며 내가 세운 계획대로 열심을 다하며 살고 있었다. 그러나 일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몸은 더 안 좋아졌고 그때마다 더 많은 술을 마시며 될대로 되라라는 식으로 자포자기 상태에 있을 때, 서울 직장에서 청주 직장으로 옮긴 큰 오빠 가정을 따라 이사한 어머니로부터(당시 아버지는 소천하셨음) 서울에 있는 나의 사업장으로 전화가 왔다.

내용은 당신 죽기 전에 나하고 한 번 같이 살아 보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 때도 술을 많이 마신 상태였다. 어머니를 용서 못하는 증오의 마음이 있다 보니 어머니에게서 걸려온 전화가 반가울 리가 없었다. 그런데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온 이후 전혀 상상하지 못한 반응이 내 마음 속에서 일어났다. 청주에 계신 어머니에게로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었다. 내가 경영하고 있던 레스토랑도 내 놓았는데 1년이 되도록 안 팔렸다. 그런데 하루는 가게 구석에 가서 처음으로 기도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

"하나님 이 가게를 팔리게 해 주시면 교회를 다니겠습니다. 팔게 해 주세요."

교회에 안 가본지도 10년이 넘었는데....

참 신기하게도 기도 이 후 15일만에 가게는 팔리게 되었다. 그 돈을 가지고 어머니가 계신 청주로 고속버스를 타고 내려 가는데 버스는 제 속도로 내려갔지만 나의 마음은 벌써 청주에 도착해 가족들과 만나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내 자신의 이런 마음에 놀랐다. 이제까지 가족에 대한 증오와 미움만 있었는데 그리고 큰오빠에 대한 미움도 컸는데 어떻게 날아갈만큼 기쁜 마음을 느낄 수 있을까? 정말 이해가 안 되었다.

청주에 도착한 나는 큰 오빠의 권유로 부페를 경영하게 되었다. 청주에서 부페를 경영하게 되자 나는 하나님께 약속했던 기도를 잊어버린 채 돈만을 벌기 위해 정신없이 뛰었다. 그러나 술고래와 담배골초인 나의 방탕함은 부페 경영도 소홀히 하게 되었고 누적된 물건 값을 갚지 못한 것을 가족들에게 책임을 전가시키게 되었다. 돈이 없으면 큰 오빠에게 빌려 썼고 결국 이에 지친 큰 오빠는 화가 나자 나에게 청주를 떠나 달라고 말했다.

나는 나 자신의 잘못된 모습을 각성하지 않고 오빠의 냉정함을 서운해 했다. 그런데 그렇게 배신감을 느낄 때 이상하게도 나는 하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도와 주세요'라고 생각지도 않은 말을 하곤 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릴 때도 있었다. 평상시 하나님을 의지하기는커녕 도리어 저주하는 내가 도와 달라는 기도를 하는 것이었다. 나도 이해할 수 없는 내 모습이었다.

장사가 끝나면 항상 술을 많이 마시고 들어 간 어느 토요일이었다. 그날도 술을 많이 마시고 다음날 아침 늦게까지 자고 있는데 머리맡에 어떤 그림자가 있는 느낌을 받아서 살짝 눈을 떠보니 어머니가 기도를 하고 계신 것이었다. 나는 놀라 눈을 감고 자는 척 했는데 어머니가 기도를 마치셨는지 "숙자야, 숙자야"하고 조용히 부르셨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다음말을 하자 나는 벌떡 일어났다. 그 말은 "교회 나가면 교인들이 도와줘서 장사가 잘 되고 돈을 많이 번다"는 말씀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자 마자 돈을 많이 번다는데 귀가 번쩍 뜨여서 자리를 박차고 세수를 하고 청주에 와서 처음으로 교회를 나가게 되었다. 단순히 돈을 잘 벌 수 있다는 말 때문이었다.

어머니와 큰오빠 가족이 섬기는 교회는 청주에서도 큰 교회였다. 오로지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생각에 첫발을 디딘 교회. 성도님들의 얼굴이 다 돈으로 보이는 것만 같았다. 어머니가 소개해 주시는 목사님들과 모든 성도님들과 인사할 때 나는 얼굴 마담식으로 장사만을 위해 인사했다. 그 때 그 모습을 하나님은 보셨을 때 얼마나 한심스러우셨을까....

그 때 생각하면 내 자신이 웃음이 난다. 하나님을 너무도 모르다니.

예배 시작하기 전에 어머니와 나는 강대상 옆 새신자 석에 앉았다. 앉아 있는 나는 오로지 '장사 때문에 나는 교회에 온거야' 라고 생각하며 예배가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조금 있으니까 예배를 알리는 소리와 함께 전자올겐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흐르면서 예배가 시작되었다. 나도 흉내를 낸다고 남들 하는대로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고 음악을 듣고 있는데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눈물이 가슴에 복받치면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어깨까지 들먹이며, 작은 소리지만 서러웠을 때 우는 것처럼 콧물과 눈물이 범벅이 되었다. '내가 왜 이러나.' 손목과 볼 등 여기 저기를 꼬집어 보았지만 한 번 터진 눈물샘을 막을 수는 없었다. 정말 주체할 수가 없었다. 눈물은 예배가 끝날 때까지 그치지 않았다. 손수건도 다 젖었다. 예배가 끝났다. 끝남과 동시에 눈물도 거짓말같이 멈췄다. 어머니는 아무 말씀도 안하셨다. 나는 창피한 나머지 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있었어도 내 마음엔 돈 생각 뿐이었다. 주일마다 돈 때문에 낮 예배에 한 번씩 나갔다.

그렇게 내가 운영했던 부페의 수입을 위해 교회를 다녔는데 이곳에서 나는 독특한 크리스천을 만나게 되었다. 부페에는 아르바이트 대학생들과 주방에서 일하는 주방식구들을 합쳐 12명 정도가 있었다. 그중에 특별히 열심을 다해서 일해 줬던 아르바이트 학생중에 한 자매가 있었는데 알고 보니 내가 다니는 교회 교인이었다. 그 때도 나는 교회는 다녔지만 낮예배만 나가면서 술과 담배는 말할 것도 없이 성격도 강퍅했고 세상에 나쁜 버릇들은 다 가지고 있었으며 욕심과 탐욕으로 물들어 있었다.

내 자신이 그러니까 믿든 안 믿든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다 그렇고 그렇겠지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그 자매는 외모부터 온유하고 겸손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고 성실함과 책임감과 진실함이 돋보였다. 나는 그 자매에게 신앙에 대한 궁금증을 묻고 싶어졌다. "하나님을 왜 믿느냐?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셔야 되느냐? 왜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은 한분이냐?"

겉으로는 비아냥거리며 기독교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가 많다며 따져 물었다. 그런 나의 행동에도 그 자매는 기분 나빠하지 않고 차근차근 대답해 주며 웃는 얼굴로 "살아계신 하나님은 사장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세요" 라고 말을 맺고는 퇴근하는 것이었다. 이런 자매의 뒷모습이 여운으로 남았다. 나의 마음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되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과 형제들에게도 받아보지 못한 사랑인데.... 한 번도 본적도 없는 하나님이라는 분이 나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나는 한편으로는 깊은 감동을, 또 한편으로 그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는 생각으로 마음이 어지러웠다. 다음 날도 그 자매를 붙잡고 시간만 나면 물어보고 따져대며, 궁금한 것을 물어 보았다. 내가 적극적으로 나서자 그 자매는 나와 같이 성경공부할 것을 제의했다. 나도 쾌히 승낙했고 시간이 나는대로 그 자매 는 집에서도, 가게에서도 성경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나는 도저히 성경을 이해하기가 힘들었고 현실과 맞지 않는 말씀을 더 이상 알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매는 아르바이트를 그만 두고 나서도 나에게 신앙을 심어 주려고 노력을 많이 해 주었다. 얼마 후 나는 따로 방을 얻어 살게 되면서 그 자매가 소개한 개척교회에 자매와 함께 옮기게 되었다. 어머니를 통해 교회에 첫발은 디뎠지만 개척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를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리고 더 중요했던 것은 자매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었으며 자매의 삶과 인격을 보면서 믿음이 더욱 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가을이었다. 혼자서 문을 열어 놓고 밖을 보면서 주방에서 담배를 피우고 조용히 앉아 있는데 파란 하늘과 큰 뭉게구름이 너무도 아름다워 감탄을 하면서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순간 하늘에서 쿠당탕하는 큰 우렁찬 소리와 우레와 같은 소리가 나면서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는 소리가 하늘에서 들리는 것이었다. 너무도 놀란 나는 피우고 있던 담배를 비벼 끄고 멋도 모르고 '아멘' 이라고 외치며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없었다.

의아하고 두려워 방으로 들어와 정신이 나간 사람같이 멍청히 앉아 있었다. 그 이후부터, 나는 스스로 성경을 보면서 말씀대로 그냥 믿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도저히 이해 못하는 말씀을 접할 때는 강한 의심으로 부정적 생각이 들면서 교회 생활하기가 힘들어졌다. 이때도 신앙의 동역자인 자매는 내게 많은 조언을 해 주었다. 그 자매는 언니라고 호칭을 바꿨다. "언니, 성경말씀이 제일 중요하니 지금부터 말씀을 자주 읽도록 하고 기도하도록 하세요."

자매는 말씀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나는 그 자매의 말을 믿고 성경 말씀을 본격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의심의 안개에 쌓여 보이지 않던 진리들이 가슴을 파고 들며 성경 말씀이 꿀송이 보다 달게 느껴졌다. 천천히, 끈질기게 하나님께 이해를 구하면서 몇 번씩 통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밤, 그 때까지 담배를 끊지 못해 주방에서 담배를 피우던 나는 거역할 수 없는 음성을 듣는다. "끊어라!" 아주 낮고 작으면서도 굵은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긴가민가해서 계속 담배를 피웠다. "끊어라!" 이번에는 조금 높은 음성이 들려왔다. 나는 놀람과 동시에 피우던 담배를 끄고 반 갑 정도 남은 담배도 꾸겨서 음식 쓰레기통에 버렸다. 허겁지겁 방으로 들어온 나는 너무도 어이가 없었다.

'항상 친구같이 옆에 있었던 담배를 나는 왜 버린걸까? 내가 어디에 홀린 것은 아닐까?'

나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누굴까. 아무도 없었는데.' 내가 헛소리를 들은 것이 아닐까 고민하다가 그냥 그날은 잤다.

담배 피우는 사람은 잠을 자고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찾는 것이 담배다. 어제 저녁 때 알 수 없는 상황이 있었지만 나는 다시 담배가 피우고 싶어서 슈퍼에 가서 담배를 사 가지고 어제 저녁 때처럼 부엌에서 담배를 피웠다. "끊어!" 이번에는 내 오른쪽 귀청이 터질만큼 큰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너무도 놀라 한모금 피던 담배를 물에 끄고 한 개피만 뺀 새 담배 한 갑을 손으로 꾸겨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이것이 17년 동안 친구같던 담배와의 결별이 되었다.

그런 이후 담배는 끊었지만 술과 커피는 여전히 보통 마시는 정도가 아닌 안 마시면 안되는 중독자의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있었다. 술을 마시는 사람치고 담배 안 피우는 사람이 거의 없었지만 나는 담배를 끊은 이후에도 술은 마셨지만 신기하게 담배는 절대 피웠다. 내가 담배를 안 피우게 되니까 남이 피우는 담배 냄새가 얼마나 비위가 상한지 '왜, 내가 저런 더러운 것을 그토록 피웠나?'라고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하루는 내가 사는 집주인이 찾아 왔다. "가끔 윗층에서 이숙자 집사님의 찬양부르는 소리와 노래 부르는 소리를 들었는데 참 노래 잘하시던데요." 칭찬을 하면서 자기가 다니는 교회에서 이번에 부흥회가 있는데 찬양 하셨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집사님에게 "부흥회 하게 되면 연락해 주세요" 라고 말했지만 요즘에 와서 나의 몸 상태가 부쩍 안 좋은 언젠가부터 목 후두쪽에 좁쌀만한 것들이 나기 시작하면서 커지는 느낌과 추웠다 더웠다 몸에 힘도 없고 침 삼킬 때마다 기분이 안 좋았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후두에 암이 형성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쌀 알갱이만큼 커진 혹들, 얼마 후 집주인인 집사님이 다니던 교회에 부흥회가 시작이 되면서 마지막날 신유집회 때 찬양을 하게 되었다. 걱정이 되었다. 건강상태가 너무도 안 좋았고 나의 몸은 술과 담배로 인해 모든 장기능에 병이 들었다.

특히 후두에 생긴 혹들로 인해 찬양하는데 많은 지장을 받았다. 그날도 힘들게 찬양을 마치고 강사님 말씀도 끝나고 아픈 분들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이 왔다. 강사님은 각자 아픈 부위에 손을 얹으라고 하시면서 철저한 회개와 하나님께서 고쳐주실 줄 믿고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크게 주여 3번을 부르고 기도하라고 하셨다. 나도 아프긴 아픈데 순간 생각이 안 났다. 하지만 그곳에 모인 성도님들과 나도 합심해서 눈을 감고 크게 주여 3번 부르짖는데 윗쪽에서 화살이 날아오듯이 날아오는 불덩이가 순식간에 따끔하면서 후두에 있던 혹들을 긁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순간 너무도 깜짝 놀라서 목에 손을 대고 표현할 수 없는 두려움과 감사가 교차하면서 3분 정도, 기도를 간절히 했다. 기도를 하면서도 두려움에 침을 삼키지 않고 있었다. 강사 목사님의 마무리 기도와 동시에 나의 후두에 생긴 혹들이 없어진 줄 믿고 침을 삼켰는데 답답하게 막혔던 하수구가 펑 뚫린 것처럼 나의 목을 괴롭게 했던 혹들이 없어지고 뿌리까지 뽑혔는지 수술한 것처럼 감각이 묘했다. 뛸 듯이 기뻤다.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 기도를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나님께 치유를 받은 이후에도 술은 여전히 마셨다.

왜 그런지 치유 전보다 더 마시고 폭주를 하면서 하나님을 욕하고 저주하고 신앙인 답지 못한 생활을 하는 것이었다. '이러면 안되는데 안되는데' 회의를 느낄 무렵 개척교회의 어느 집사님이 제의했다. "하나님께 새로운 마음가짐을 갖기 위해 기도원을 선택해 금식 갔다 오려 하는데 가고 싶은 분들은 신청하라는 것이었다." 금식은 해 본 적이 없지만 나도 하고 싶어 신청을 했다. 음력설 다음날 떠나서 3일간 일정을 잡고 한 기도원에 몇 분과 함께 하나님 은혜 안에 가게 되었다. 기도원에 가기 전 날 큰 올케로부터 안부전화가 왔다.

내가 올케에게 "내일 내가 처음으로 3일간 금식을 하기 위해 기도원에 간다"고 하자 올케는 기뼈하면서 나에게 이렇게 부탁했다. "고모, 이번 금식기도 가서는 술에 대해서만 기도해. 술 마시지 않게 해달라고. 술 끊게 해 달라고 다른 기도하지 말고. 술 한가지만 놓고 간절히 기도해요. 응?" 큰올케도 나의 알콜 중독이 걱정이 되었는지 간곡히 부탁을 했다. 나는 올케의 말에 순응하여 기도원에서 술문제만을 놓고 금식기도를 했다. 그러던 이틀째 되던 날 금요철야 예배가 있는 날이었다. 저녁 집회를 마치고 다음날 새벽까지 철야 기도를 하는데 나에게 이상한 반응이 왔다.

발끝에서 머리 끝까지 전기가 감전된 기분이 들면서 눈물이 솟아 올라오는데 폭포수 같은 느낌을 받을만큼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상태에서 회개의 통회 자복을 하였다. 얼마나 울었던지 속이 시원한 느낌을 받았다. 기도를 마치고 보니 새벽 2시경이 되었다. 그날 아침 삼일째는 하산해서 집에서 기도하자는 어느 집사님의 의견에 동의하여, 세면장에 세수를 하러 갔는데 얼굴이 쓰라려 세수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놀라 왜 그런가 거울 쪽으로 가서 얼굴을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볼기가 빨갛게 되어 있는데 물기포 같은 것이 드문드문 나 있는 것이었다.

술기운이 물기포로 뭉친 것 같았다. 삼일 째 금식 중이지만 하나님께 감사해서 하산하기 전 기도원 성전을 다 닦았다. 힘이 들만큼 넓은 곳이었는데 정말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힘이 펄펄 났다. 하산해서 집에 왔는데 시골집에 갔다온 자매가 와 있었다. 나는 너무도 감사한 나머지 자매에게 진심어린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난 이제부터 술도 안 마실 수 있다고 자랑했다. 자매도 같이 기뻐하며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했다. 18년 동안 하루가 멀다하고 나를 끈질기게 붙들고 늘어졌던 알코올의 악령이 나를 떠난 것이었다.

그 후 내 곁에서 열심히 신앙성장을 도왔던 자매는 서울로 완전히 이사갔다. 나는 자매가 없어서 혼자 신앙 생활하기에 조금은 힘들거라고 생각했는데 술과 담배를 끊은 상태여서인지 생각보다 어렵지는 않았다. 내 생활이 안정되가는 것을 보자 어머니와 오빠는 내게 결혼 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런 과정중에 어머니께서 갑작스럽게 소천하셨고 오빠의 사업이 도산했고 건강이 악화되는 상황이었다.

오빠 가족은 너무도 힘든 상황이 되었다. 할 수 없이 내가 하던 부페를 오빠에게 빌려 주고 나는 집에서 그냥 지내는 신세가 되었다. 갑작스런 가족의 어려움에 나는 당황은 했지만 평상시와 같이 새벽 예배에 나가 기도하는데 그날따라 복 받치는 서러움과 함께 통곡을 하게 되었다. 한참을 기도하다가 오빠에 대해 기도하는데, 이상하게도 제 마음에 서원을 하고 싶은 생각이 났다. "오빠의 건강이 너무 안 좋은데 건강회복시켜 주시고 살려 주신다면 저 이숙자 집사는 하나님께 남은 일생을 바쳐 결혼도 안 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들을 하길 원하며, 또한 세계 선교하며 순교하길 원한다"고 두 손을 들고 서원을 했다.

술과 담배를 끊어도 마음 한 구석이 답답했었는데 그 무언가 서원하는 순간 시원한 기분을 느꼈다. 눈물, 콧물로 인해 범벅이 된 나의 모습은 기쁨으로 변하였고 "찬양하라 내 영혼아"를 거듭 부르면서 슬픔이 기쁨으로 변해 버렸다. 그런 일이 있은 이후 나는 큰 오빠의 권유로 찬양 테이프를 제작하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찬양사역자가 되었다.

나는 찬양사역을 하면서도 하나님께 나의 갈 길을 인도해 달라고 기도를 했다. 여느 때처럼 말씀을 보던 중 마태복음 25장 31절부터 마지막절까지의 말씀에 감동을 받게 되었다. 감동 받은 이후 하나님께 기도했다.

"주리는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주고, 나그네된 자를 영접하고, 벗은 자에게 옷을 입히고 병든 자를 돌아보고, 옥에 갇힌자를 돌보는 자가 되게 하소서."

내가 이런 일들을 감당하길 원하신다면 나를 인도해 주셔서 용기도 주시고 함께 사역할 동역자도 만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나는 하나님께 너무도 감사한 마음을 무엇으로 갚아 드릴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매일매일 인도해 주실 줄 믿고 기다렸다.

1993년 1월 18일. 어느 화창한 날 오후 2시경 쯤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게 되었다. 그날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나는 약속과 서약을 글로 썼다. "하나님께 약속한 이후 지금까지 아니 죽을 때까지 제 것이 없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구원해 주시고 자녀로 인쳐 주신 아버지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 드리며 저의 남은 일생이 하나님을 위해 헌신 되길 원합니다."

지금 내가 사는 곳은 청주시 우암동에 위치한 곳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이곳에 이사왔다. 허술하지만 감사한 마음으로 4년이 넘도록 이곳에 살고 있다. 이곳은 방이 많이 있는데 오로지 전도의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에는 소외된 이웃과 장애인, 노인, 정신 장애인과 또한 나를 도와 봉사하는 동역자들과 같이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성실히 받들어 드리고 싶은 마음은 변함이 없는데 항상 부족함을 느낀다. 나는 몇 년 전부터 청주 교도소 교화위원으로서 사역하고 있다.

그곳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많은 자녀들이 있다. 그분들이 세상으로 나왔을 때 하나님 자녀답게 살 수 있도록 도와 주는데 조금이나마 동역자가 되어 드리길 원한다. 작년 9월에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또 다시 나의 찬양 음반이 제작되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호주로 계신 이곳 임마누엘 공동체는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며 오늘도 살아가고 있다. 나는 주님안에 꿈이 있다. 내가 하늘나라에 가기전 남은 일생을 소외된 이웃을 위해 봉사하기를 원하며 장애인들과 불우 이웃을 위해 하나님의 사랑을 나눠 주는 것이다. 그리고 영적으로 바로 서있지 못한 영혼들을 위해 내가 만난 하나님을 전해 드리고 신앙의 도움을 드리고 싶다. 또한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다. 최후에는 선교지로 파송되 선교하다가 순교하길 원한다.

몇 년만에 오빠로부터 건네 받은 사업채 부페를 3년 더 내가 경영하다가 건물주인이 바뀌면서 3월 말자로 그만 두었다. 무척 아쉬웠지만 오늘도 살아서 역사하시고 인도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평안함과 감사함으로 이곳에 모여 사는 임마누엘 공동체는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다. 세상의 스타가 되지 못하게 하시고 하나님께 봉사하며 찬양 사역자로 하늘의 스타로 만들어 주신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의 영광을 돌린다
(월간 <교회와신앙> 1998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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