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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12월 01일 (토) 00:00:00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윤자성 집사/ 미국 산호세 산타크라라 연합감리교회 여선교회 총회장

본고는 도미한 지 30여 년이 되었지만 고국 사랑은 한결같은 윤자성 집사(미국 산호세 산타크라라 연합감리교회 여선교회 총회장)의 삶의 여정을 담은 간증입니다. 미국에서의 결혼 생활에서 시부모들의 편견을 깬 지혜, 전폭적인 가족들의 후원 속에 만학의 꿈을 이루는 열정, 딸이 다니는 학교에서 한국 부채춤을 소개할 정도로 고국에 대한 강한 사랑이 글 곳곳마다 배어납니다. 한 해가 마무리되는 시점에 많은 도전이 되길 바랍니다.<편집자 주>


조상 적부터 섬겨 온 나의 하나님(딤후 1~5)
   
▲ 윤자성 집사의 가족들(우측부터 아들 Ray, 남편 Tom, 딸 Kathy)
디모데에게 믿음의 조상들이 있었던 것처럼 나의 신앙도 조상들의 믿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의사인 할아버지(의암 윤능호)께서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전도로 예수를 믿게 된 것이 우리 집안이 믿음의 집안이 된 동기가 되었다.

1907년 10월 도산 안창호 선생께서 소련 연해주에 거주하는 동포들을 계몽하기 위하여, 부라지스브로도크에 있는 신한촌에 들려 할아버지 댁에 3개월을 머무시게 되었을 때, 할아버지는 안창호 선생님으로부터 전도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다. 그 후 모든 식구가 다 예수를 믿게 되었다. 아브라함이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하다 복을 받았던 것처럼 우리 집안도 믿음의 사람을 대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총을 누리게 된 것이다.

주님을 영접한 할아버지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여 나중에는 안수집사 자격인 영수라는 직분까지 맡으셨다. 그리고 사회에서도 인정받아 함경남도 흥남시 초대시장이 되시기도 했다. 또한 지금의 사서함 137호를 신한촌에 개설하시어 국내외 해외 독립투사들의 연락창구 역할을 하셨고, 또 시베리아 연해주 YMCA총무도 역임하셨다. 그리고 제 2대 시베리아 선교사인 캐나다 부두일 목사님이 신한촌에 들렀을 때, 할아버님은 그에게 2년 동안 숙식을 제공하셨다. 또 할아버지는 신한촌에 교회를 세우시고 복음 전하는 일에도 앞장서셨다. 특히 할아버지께서는 안중근 의사 의거자금 200원(당시 쌀 한 가마니에 10전)을 기부하셨는데 이 모든 공로가 독립투사로 인정되어 할아버지께서는 국립묘지에 안장되셨다.

할아버지의 신앙과 나라 사랑하는 애국정신을 이어받은 아버지 윤경학 목사는 지금 LA에서 미주 안중근 의사 기념회장(1987년 창립)을 역임하시며 민족의 혼과 나라 사랑을 잊지 않도록 애국운동을 펼치고 계신다. 이렇게 나는 돈독한 신앙을 가진 조상들로부터 모태신앙이라는 영광을 지닌 채 유아부에서 대학부까지 24년을 서울에 있는 초동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우리 집 가훈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살전 5장 16절)이었다. 이런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지만 중등부 때까지는 으레적으로 교회를 다녔지 하나님을 진심으로 찾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신앙심이 깊어지게 된 계기가 생겼다. 당시 대천해수욕장에서 열린 서울 여전도회 연합수련회에 참석하신 어머님이 바다에 빠진 교우를 구출하기 위하여 물로 뛰어드셨다. 그러나 교우는 익사했고, 어머님은 사경을 헤매는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일로 인해 나는 하나님께 매달리게 되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것이 내가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만나게 된 동기가 되었던 것 같다.

그후 나는 고모(아버지 사촌, 작은 할아버님 딸)인 윤경애 전도사(세브란스병원 재활원전도사)의 신앙을 통해 이웃 사랑을 배웠다. 일본 요코하마 신학원을 나온 고모님은 결혼도 하지 않고 평생을 소외된 이웃들과 함께 살았고, 특별히 장애를 입은 아이들을 자식처럼 돌보며 사셨다. 나는 고모와 가까이 지내는 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그 시간들이 나를 신앙 안에서 자라게 했던 것이다.

미국사람을 남편으로 만나다
1968년 유학의 꿈을 안고 조국을 떠나 미국에 왔다. 그리고 일년 후인 1969년 추수 감사절 Dinner Party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처음 남편을 대했을 때 얼마나 준수하고 정중한지, 마음이 설렛다. 이런 사람이 바로 미국의 젠틀맨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흠모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마음뿐이지 영어회화가 서툴러 말을 시킬까봐 오히려 걱정을 했다. 미국 온 지 겨우 1년밖에 안된 때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가슴을 설레게 하던 그 미국 청년이 처음 만난 자리에서 데이트 신청을 했다. 나는 귀를 의심하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미국사람과 데이트를 한다는 것은 생각지도 않았거니와, 대화를 나눌 자신도 없었다. 하지만 그가 너무 좋아서 용기를 내어 데이트를 했고, 데이트한 지 2개월 정도 지난 후 남편은 내게 프로프즈를 해 왔다. 그 첫마디가 한국말로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였다. 언제 한국말을 배웠느냐고 물었더니 예일대학에서 영어로 번역된 한국 책을 주문해 그 동안 열심히 공부했다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31년 전 일이다.

결혼 프로포즈를 받았지만 결혼결정은 나의 의사가 50%일 뿐 부모님 승낙이 없이는 결혼할 수 없다고 했더니 미국사람의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고 말했다. 나는 서울에 계신 부모님께 미국인과 결혼을 하고 싶다는 편지를 한 후, 마음을 졸이며 결혼승낙을 기다렸다. 부모님께서는 미국 간 지 얼마 안 된 내가 한국인도 아닌 미국 사람과 결혼을 하겠다는 것이 걱정스러웠던지 미국에서 신학을 하고 오신 목사님들과 의논을 하셨고, 엔지니어들은 이혼을 잘 안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안심이 되셨던지 결혼을 허락하셨다.

남편도 자기 부모님께 결혼할 의사를 밝혔다. 그랬더니 먼저 아리조나 피닉스에 살고 있는 형이 남편을 방문했다. 아마 어떤 여자인가 선을 보러 온 것 같았다. 남편은 형이 있는 자리에서 부모님께 전화를 했다. 통화가 끝날 무렵 나에게 수화기를 넘겼다. 말도 서툴고 긴장감으로 가슴이 조여와 온 몸이 쪼그라지는 느낌으로 인사를 건넸다.

부모님께서는 Tom이 참 좋은 아들이요, 청년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면서 나에게 한국에는 말이나 소가 있느냐고 물어 오셨다. 순간 어이가 없었다. 남편이 부모님을 이해해 달라고 했다. 그 당시 인디아나주에는 동양인이 거의 없었고 Korea라는 나라는 이름도 들어 본적도 없었으며, 세계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고 했다. 아들이 어디 미개한 나라에서 온 여자와 결혼하겠다 생각해 부모님의 실망이 컸던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남편 Tom은 MIT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원자력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장래가 촉망되는 우등생이었다. 고등학교 때도 최우수생으로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받았다고 했다. 이런 아들이 동양여자와 결혼한다고 하니 기가 찼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들을 믿으면서, 결혼을 축복해 주었다.

결혼관에 있어서 한국과 미국은 너무나 달랐다. 자녀들의 행복을 우선으로 하는 미국의 부모님들을 생각하니 머리가 숙여졌다. 나의 부모님도 결혼을 허락하셨다. 그러나 아버님은 결혼 후 무슨 일이 있어도 집에 올 생각일랑 하지 말라는 말씀도 당부하셨다.

결혼식에는 어머님만 참석하셨다. 그 당시 한국정부는 부부가 동시에 외국에 나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머님만이 미국에 오셨다. 어머님이 미국에 오시기 전 결혼식 준비를 해야 하는데 나는 돈이 없었다. 남편은 나의 걱정을 들어주면서 결혼 준비 일체를 다 해 주었다. 기억하기에 내가 준비한 것은 결혼 Cake밖에 없었다. 사실 미국의 결혼 풍습은 여자 쪽에서 거의 부담하고 남자는 결혼 반지만 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웨딩드레스도 남편이 사 주었다.

남편은 지금까지 이 일에 대해서 부모님과 형에게 비밀로 하고 있는 것 같다. 한국 같았으면 두고두고 정신적으로 시달리게 했을 것인데. 남편은 결혼 31년이 지난 오늘까지 이 일로 공치사나 으름장을 놓으며 이야기 한 적이 한번도 없다. 그만큼 남편은 사려가 깊고 자상하고 진실한 사람이다.

미국 목사님 주례로 Santa Monica의 미국 장로교회에서 결혼예식을 거행했다. 결혼식 날 나는 훌륭한 남편을 선물로 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앞으로 낯선 땅에서 문화가 다른 남편과 어떻게 살아갈지는 주님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따르겠다고 기도했다.

결혼생활
결혼 일 년이 지난 후 첫째 아들 Ray를 낳았고 그 아들이 돌쯤 되었을 때, 시부모님이 처음으로 우리 집을 방문하셨다. 남편은 시부모님께 방에서는 신을 벗고 사는 것이 한국풍습이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그들은 신을 벗고 들어오셨다. 이튿날 아침 나는 일찍 일어나 시아버님의 구두를 온갖 정성을 다해 반짝반짝 빛나게 닦아 놓았다. 한국 며느리의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사실 결혼 초 남편의 구두를 닦았더니 남편은 너무나 놀라며 좋아했다. 그 일은 31년이 지난 지금껏 하고 있다. 그때 시아버님의 구두도 닦았더니 아침식사 후 시아버님이 구두를 보시면서. "What happened to my shoes!" 이제까지 가족 중에서 구두를 닦아준 일이 없었다면서 생전 처음이라고 기뻐하셨다. 시어머니도 보시고 놀라시며 "Beautiful! Tom! You are lucky" 라고 하시며, 몇 번이고 "Thank you"라고 하셨다.

나는 불고기를 비롯하여 몇 가지 한국음식을 해드리면서 한국을 소개했다. 한국에 말도 있고 소도 있느냐고 물어보시던 시부모님께 한국이 미개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 신경을 썼다. 그러나 김치는 내놓지 않았다. 결혼 초 처음 김치를 먹으려고 김치 병을 열었을 때 남편이 말죽은 냄새와 똑같다며 얼굴을 찡그렸던 것이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극이 심하지 않는 음식만 대접했더니 무척 좋아하셨다.

김치 이야기가 나왔으니 고백하겠다. 말죽은 냄새라고 얼굴을 찡그리던 남편이 지금은 김치를 잘 먹는다. 그러나 아직도 미역국 냄새는 싫어한다.

시부모님들이 돌아가신 후 6개월 후에 나도 시부모님 계신 인디아나를 방문하였다. 나를 처음보는 친척들과 이웃들이 나의 이름을 정확히 자성이라고 부르며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아마 시부모님들이 구두를 닦아 놓는 며느리라고 자랑을 많이 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이름까지 기억하신 것이다.

어쨌든 그후 시부모님들은 이따금 우리 집을 방문하셨다. 우리 집을 방문하시면 약 일주일 정도 계시는데 가시기 전 날 그 동안 우리 집에서 쓰시던 비누, 샴푸, 치약, 타올 등을 다 새로 사놓고 가신다. 이유인즉 자식 집에 와서도 자식한테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예의는 내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기에 이 일만은 고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자식이 부모를 봉양해야 하는데 어떻게 부모가 자식 집에 와서 머무르는 것을 신세진다고 여기시느냐?면서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만류했다. 그 후로 부모님들은 그냥 돌아가셨다. 대신 내게 필요한 선물을 보내신다.

나는 시부모님을 존경한다. 늘 남에게 베푸시기를 즐겨하시며, 넓은 아량으로 사람들을 감싸시는 그들을 존경하며, 이런 분들을 내게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결혼하고 몇 년이 지난 후 시부모님께 한국에서 부쳐 온 자개로 만든 상이나, 사방탁자, 자개함, 전화함, 벽거울 등을 선물로 드렸다. 생전에 처음 보는 물건이라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모른다. 이것을 보고 친척들과 이웃들이 부러워한다고 했다. 결국 이러한 물건들은 한국 문화수준과 국위를 선양하는데 이바지했다.

민족성도 다르고 생활습관도 다른 시댁이지만 나는 그 동안 별 어려움 없이 결혼생활을 해왔다. 그것은 시부모님들의 인품이 너무 고매하셨고 또 남편의 인격이 훌륭했기 때문이다. 결혼 생활 30년이 넘었지만 나는 한번도 남편의 사랑을 불신해 본 적이 없었고 남편 역시 나를 믿고, 아끼며 사랑한다.

남편은 참으로 진실한 사람이다. 우리 부부는 늘 대화를 나누면서 살았다. 남편은 결혼 초부터 대화를 소중히 여겼다. 세상 일들이 소리를 질러서 해결되는 일이 별로 없으니까 대화를 하자면서 소리 지르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31년을 살면서 손가락을 꼽을 만큼 싸워 본 적이 거의 없다. 남편은 언제나 내가 하는 작은 일에도 관심을 가지고 늘 격려와 용기를 주기 때문에 그런 남편에게 화를 낼 일이 별로 없었고, 나 역시 그런 남편에게 늘 감사하며 고마워하기 때문에 남편 역시 나에게 나무랄 것이 없다고 했다.

두 자녀를 키우면서 어려움이 많지 않을까? 걱정도 했지만 남편이 자녀들에게도 관심을 많이 가져 주었기 때문에 아이들도 사랑 속에서 밝게 자라 훌륭한 일꾼들이 되었다. 이 모든 것을 다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고 감사할 뿐이다.

달란트를 발견하다
결혼 후 처음 맞는 생일날, 남편은 생일선물로 Singer Sewing 기계를 선물로 사 주었다. 얘기만 듣던 Singer 미싱 기계가 너무 멋있었다. 미싱을 보니 친정 어머니 생각이 났다. 어머니는 바느질을 잘하셨다. 그래서 나보고도 늘 바느질을 배우라고 하셨다. 그러나 나는 이 다음에 돈 많은 신랑 만나면 뭐든지 사 입는다면서 바느질을 배우지 않았다. 미싱 기계를 선물로 받고 바느질하는 학교를 이곳저곳 알아본 후 늘어나는 기지(stretch sew)로만 바느질을 가르치는 class를 택했다.

class는 나에게 많은 흥미를 주었다. 숙제가 많아 밤 12시까지 옷을 만들곤 했다. 있는 정성을 다해 바느질을 꼼꼼히 해 가면 선생님 칭찬이 대단하셨다. class에는 동양사람이라곤 나 한 사람뿐. 숙제한 것을 미국 애들이 이것저것 물어보면 신이 났다. 남편은 내가 밤늦게까지 열심히 바느질을 하니까 미싱을 사 준 것을 후회한다고 했다.

바느질 class는 3개월을 다녔다. 수업이 끝난 후 내 자신이 너무 많이 변했다, 나에게 숨겨진 달란트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식구들의 바지와 셔츠, party에 가는 party dress도 내가 만들 정도로 바느질 솜씨가 늘어났다. 아직도 기념으로 그 때 만든 옷 몇 가지는 보관하고 있다. 달란트를 알아 낸 후 나는 공예며, 장식 만드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종류의 공예를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singer 미싱 기계로 인하여 나의 모든 취미생활이 이루어지지 않았나 생각한다.

배우기를 좋아하고 무엇이든지 배우면 끝을 맺는 나의 성격은 다양한 취미를 아마추어 경지에서 프로에 이르게 했다. 십자수 놓기, 뜨개질하기, 실크로 된 꽃 장식, 도자기 굽기, 유화 그리기, 심지어는 케이크 과자 만들기 등 나는 손으로 만들 수 있는 새로운 것이라면 뭐든지 배우기를 좋아해서 20여 년 동안 꾸준히 그 일들을 해 왔다. 그래서 이제는 프로가 되어 실리콘벨리에 있는 한국 TV 방송 여성 살롱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데코레이션 만드는 것을 소개하기도 한다.

집안에 있는 크고 작은 모든 가구와 장식들이 다 내 손으로 만들어졌다. 우리 집을 방문하는 사람들마다 이것도, 저것도, 다 당신이 만든 것이냐? 물으면서 놀라곤 한다.

이렇게 집안 공간을 아름답게 만들어서 가족들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기쁨을 주고 있다. 나 역시 내가 만든 공간 속에서 새로운 창의력과, 의욕으로 젊어지고 있다. 특히 25년 동안 손수 가꾼 정원을 거닐면서 갖가지 식물들이 아름답게 자라는 것을 보면서 우주의 신비와 하나님의 창조에 감사하고 있다. 그리고 정원을 손질하면서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도 겸하고 있다. 집안 구석구석 정성이 담긴 장식품들이 아름답게 정렬된 모습을 남편도 무척 좋아하며, 아내의 달란트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만학의 꿈을 이루다
   
▲ 미국에서 만학의 꿈을 이룬 윤자성 집사
취미생활을 통한 자신감과 함께 공부에 대한 꿈도 키워갔다. 남편이 미국 사람이라 남편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익히지만, 그래도 미국 사회를 좀더 알기 위해서는 미국대학에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다가 나이 43세가 되었을 때 미국 속담인 ?Never too late!? 이 말에 공감을 하면서 공부에 대한 꿈을 구체화했고, 45세가 되었을 때 드디어 대학에 진학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남편은 놀라워하면서 쾌히 승낙해 주었다.

1989년 De Anza College에서 1학년 교양과목을 등록했다. 처음 학기에 미술과 ESL(English) 과목과, 남편의 권유로 천문학(Astronomy)을 택했다. 남편은 이 과목은 쉽고 재미있기 때문에 내가 잘 해낼 것이라고 했다. 지금 생각하니 원자력을 전공한 남편에게는 너무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천문학은 나에게 너무나 힘든 과목이었다. 첫 시간, 나는 강의도 듣기 전에 질리고 말았다.

거의가 18살~25살 정도 되는 젊은 학생들이었다. 거기다 백인 여학생 말이 이 강의가 2번째라면서 이번에 점수가 또 떨어지면 전학을 갈 수도 없다고 했다. 그만큼 이과목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담당 교수는 22년째 이 과목을 가르치다가 이번 class를 마지막으로 은퇴하신다고 했다. 시험문제가 3000개나 되는데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낙제한다고 하니 기가 막혔다.

공부는 어려웠지만 나는 천문학을 공부하면서 우주의 광대함과 신비를 통해 하나님의 천지창조에 대한 경이로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저 우주에는 금성, 화성, 목성 등 이런 종류의 위성뿐인 줄 알았던 나에게 천문학은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게 해 주었다.

class에서 내가 제일 나이가 많았고, 한국 학생은 나 하나뿐이었다. 이 십년 동안 녹쓴 머리로 이십대들과 경쟁을 하자니 나는 그들보다 두 배, 세 배나 공부를 열심히 해야 했다. 외울 것이 너무 많아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머리의 아픔과 어려움을 이길 수 있도록 힘과 지혜를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공부에 매진했다.

새벽3시가 되면 눈이 떠졌다. 너무 걱정을 하다보니 깊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책상 앞에 앉아 시험공부를 시작하다가 울기도 했다. 내가 이 무슨 고생이람! 여행이나 다니면서 여가를 즐겨야 할 나이에 이 무슨 고생을 사서 할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천문학 교과서에 나오는 새로운 단어를 찾는 것만으로도 하루 해가 부족하다. 다행히 남편이 퇴근해 오면 그 단어들을 일일이 찾아주어 겨우 따라갔다. 그러나 막상 시험을 보니까 모든 것이 아리송했다. 첫 시험결과는 당연히 나빴다. 그래서 교수님께 class를 그만 두겠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낙심하지 말고 계속하라고 하셨다. 두번째 시험을 치른 후에도 성적이 지금보다 떨어지면 그 때 그만두라고 해서 한번 더 시도해 보려고 마음을 먹었다.

또 시험이 다가왔다. 정말로 얼마나 열심히 공부를 했는지 모른다. 결과는 성적이 많이 올라갔다. 그러나 성적은 많이 향상이 되었지만 그 동안 잠을 자지 못한 정신적, 육체적인 아픔을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에 class가 끝난 후 교수님을 만나 뵙고 더 이상 계속할 수가 없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랬더니 교수님께서는 17년 전에 Spain에서 이민 온 39세 된 여성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 여성도 나처럼 이 class를 택하고는 너무 어려워 더 이상 공부를 못하겠다고 했지만 자신이 용기를 주어 공부를 계속했고, 결국 무사히 졸업하여 지금은 고등학교 선생님이 되었으니 힘내라는 얘기였다.

학기말 시험이 왔다. 시험지에는 150문제로 4지 선다형이었다. 시험범위는 책 전체인 450페이지에서 출제되었다. 시험지를 받고 보니 머리가 어리둥절했다. 과연 정해진 시간내에 이 문제들을 다 읽고 쓸 수 있을까? 정신없이 100개쯤 답을 쓰다보니 고개가 너무 아파 머리를 들었더니 아무도 없었다. 이미 다른 학생들은 시험을 끝내고 다 나가버렸다. 텅 빈 교실에 나 혼자만이 남아 있었다. 그때 내가 당황했던 일을 상상해 보라! 텅 빈 시험장에 교수님과 나.

그 사실을 알고 나니 마음이 조급해서 문제가 제대로 보이지가 않았다. 교수님은 10분 남았다고 했다. 10분 동안에 나머지 50문제를 어떻게 해결한단 말인가?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나는 끝까지 해보겠다고 마음을 다지고 교수님께 20분을 더 달라고 애원을 했는데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나이 든 여학생이 그것도 동양인이 눈물까지 흘리면서 애원을 하니까 교수님도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20분을 연장해 주셨다. 나는 그 추가 시간 안에 150문제를 무사히 끝내고 시험지를 제출했더니 교수님께서 ?네 생각에 시험을 잘 본 것 같은가?? 하고 물으셨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시험 성적 발표 날, 학교에 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낙제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편에게 학교에 같이 가달라고 부탁을 했다. 일찍 퇴근한 남편과 함께 학교에 갔다. 드디어 내 이름이 불려졌고. 앞에 나가니 B학점이라고 했다. 나는 믿어지지가 않아 "You made a mistake"라고 했다. 그러자 "I did not do that, the computer did that." 하면서 틀림없다고 했다.

나는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악! 소리를 지르며 교수님의 목을 얼싸안고 깡충깡충 뛰었다. 교수님은 "My neck! My neck!" 하며 비명을 질렀다. 그 당시 교수님은 교통사고로 목에 깁스를 하고 계셨는데 나는 그 사실도 잊어버리고 교수님의 목을 끌어안았던 것이다. 교수님이 남편에게 "She worked very hard. She did a good job." 하며 칭찬을 아끼지 아니했다. 학교를 나오면서 남편이 내 손을 꼭 잡고 하는 말이  "I am so proud of you."  그 동안 밥도 제대로 못했으니 오늘 먹고 싶은 것 다 사겠다고 해서 참으로 오랜만에 즐거운 식사를 했다.

이 천문학 class는 내가 대학교 공부를 할 수 있는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으며 나의 생애에 잊을 수 없는 기쁨과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셨기에 이 모든 것을 감당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남편의 사랑과 수고에도 감사드리고 싶다.

천문학 class외에도 어려웠던 과목들은 너무 많았다. 심리학, 생물학, 사회학, 정치학, 컴퓨터 Graphics, 역사학. 특히 영어 class는 ESL부터 택해서 했는데 얼마나 외우는 것, 쓰는 것, 이야기하는 것뿐만 아니라 시험이 어찌 그리 많은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웠다. 영어 Speech Class때는 자기가 태어난 고장이나 자기 나라들의 전통적인 게임을 소개를 하는 시간이 있었다. 나는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윷놀이를 소개하기로 하고 학교에 담요 한 장과 윷을 가지고 가 class앞에다 담요를 깔고 순서와 규율을 말한 뒤 윷놀이를 보여 주니 한국에도 이런 게임이 있구나 하면서 모두들 좋아했다. 점수도 잘 받고, 한국을 소개하는 기회가 되었다.

사회학 시간 역시 외울 것이 많아 나에게는 무척이나 어려운 과목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 class에는 한국 남학생과 여학생이 한 명 씩 있었다. 그리고 이 class는 교수님이 너무 재미 있어서 수업 시간에는 학생 전체가 웃으면서 수업을 했다. 시험 때는 한국 학생들과 같이 공부를 했다. 그러나 나는 이해 못하는 사회적 단어나, 내용이 많아서 교수님을 만나 보충설명을 들어야 했다. 때론 교수님 사무실 앞에서 1시간 이상을 기다리며 공부를 하고 올 때가 있었다. 교수님이 또 왔느냐고 할 정도로. 교수님을 괴롭혔지만 그러나 매번 자세히 가르쳐 주셔서 얼마나 공부에 도움이 됐는지 모른다.

시험을 보면서도 이해가 안 되면 손을 들고 물어 보았다. 그러면 교수님이 나보고 앞으로 나오라고 하신다. 그래서 시험지를 들고 나가면 풀이를 약간 해주시고는 답을 손가락으로 짚어주시는 것이다. 처음에는 손가락이 왜 거기를 표시를 하는지 어리둥절하다가 그것이 답인 줄 알아차리고 감사했다. 교수님은 지겨울 정도로 찾아와서 붙들고 늘어지니까 내가 너무 안됐다고 여겼던지 답까지 가르쳐 주셨던 것이다.

수학시간에는 정신이 없을 때가 많았다. 문제를 풀어가다가 막히면 정신이 멍해졌다. 시험은 주로 50문제로 답은 선다형 3개 중에서 하나를 고르는 것인데 답 옆에다 풀어 가는 공식을 순서대로 써야 한다. 그래서 시험지를 받을 때마다 가슴이 뛰고 머리가 띵해졌다. 남편한테 과외까지 받아가며 열심히 하는데도 수학은 정말로 어려웠다. 하도 걱정하니 시험 때는 남편이 점심시간에 집에 와서 식사를 하면서 푸는 방법을 설명해 주곤 하였다. 그 수고로 나는 무사히 학점을 땄다.

미국에서는 초급대학에서 120학점을 따면 종합대학으로 편입이 가능하다. 그러나 나는 De Anza에 다니는 동안 평소 내가 관심이 많았던 학과인 Director가 되는 유아교육학, 실내장식학, 음악 등에서 196학점을 이수했다.

1993년 내 나이 49세에 드디어 종합대학인 UC Santa Cruz, Fine Art(유화)에 좋은 성적으로 편입하게 되었다. 캘리포니아에는 경치가 아름답고 좋은 대학교가 많이 있다. 그 중에서도 내가 다닌 이 대학은 산과 바다를 끼고 울창한 나무 숲 속에 위치해 자연환경이 너무 아름답고 매력적이다. 특히 미술과 학생들은 학교에 오면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없어질 정도로 Campus를 마음에 들어 한다.

학교에 입학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기뻐 마음이 들떴다. 그러나 한편, ?가정주부로서, 엄마와 아내의 역할을 하면서, 어떻게 공부를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염려와 그리고 재정적인 부담이 걱정이 되었다. 그때 우리 두 아이가 다 대학생이었다. 이제 나까지 공부하게 되면 남편 혼자서 세 사람의 비싼 대학 학비를 부담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학교를 다니는 것도 만만찮았다. 집에서 왕복 130km가 되는 먼 거리였다. 왕복 2시간 정도 운전해야 하는 험난한 운전코스였다. 이 길은 미국 하이웨이 중에서도 꼬불꼬불하고 경사가 심해 운전하기가 힘든 길이므로 아침, 저녁 통학하는 것이 보통 걱정이 아니었다. 하지만 하이웨이 양쪽 길에는 아름다운 상록수들이 즐비하게 서 있었다. 언제 보아도 늘 푸른 모습으로 꿋꿋하게 서있는 모습을 대하면서 나는 내 자신이 상록수이기를 바랐다. 비바람이나 날씨와 환경에도 상관없이 끈기와 인내로 자기를 지키는 나무를 보면서 비장한 각오를 다짐하며 공부에 다시 도전했다. 그때 나는 ?열심을 다하면 할 수 있다?는 표어를 만들었다. 크고 작은 어떤 일에도 최선을 다해 보기로 각오했다.

미국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은 쉬워도 졸업을 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우리 반의 구성은 주로 젊은 백인학생들이었다. 가장 나이가 많은 내가 그들과 경쟁을 하려면 또 얼마나 많은 인내와 용기가 필요할까? 나는 각오를 단단히 했다. 강의시간에는 교수님의 말씀을 좀더 잘 듣기 위해 언제나 맨 앞줄에 앉았다. 이 학교에서 제일 힘들었던 과목은 Lithographic이었는데 한 한기에 7작품을 마쳐야 했다. Litho란 돌이라는 뜻인데 이 돌은 Greece에서 수입한 400년 된 사각형돌이다.

그 돌을 맷돌같이 평평하게 갈아서 화학약품을 사용하여 마무리 짓는 작품이다. 유화를 그릴 때는 실수하면 그 위에 다시 그릴 수가 있지만 이 돌은 만일 평평하지 못해 작품이 잘 안 나올 때는 모두가 헛수고가 되는 까다로운 작품이었다. 그러나 열심히 해냈다. 그래서 우리 대학과 미술학과에서 발간하는 학보에 내 작품이 선정이 되어 실리는 큰 영광도 누렸다. 하지만 이런 영광 뒤에는 남편과 자식들의 희생이 있었다. 남보다 배나 열심을 다해야 했기 때문에 자연히 학교에서 시간을 보내는 시간이 많아 가족들이 가사 일을 나누어서 거들었다.

유화시간에는 완성된 화구를 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천을 사고 나무를 깎고 못을 쳐 캔버스를 만들어야 하는데 이 작업은 완전 중노동이었다. 그리고 작품을 구상해야 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아이디어는 떠오르지 않고 시간은 지나가고 숙제는 해야 하고 . 너무 속이 상해 남편에게 공부를 중단하고 여행을 가야겠다고 떼를 써보기도 했다. 그러면 그때마다 남편은 나에게 지금 눈을 감고 가고 싶은 곳에 30분 동안 다녀오라고 권했다. 나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지만 나는 너무 화가 나서 남편을 야속하게 여겼던 적도 있었다.

주말이 되면 가족이 함께 모였지만 내가 공부하는 동안은 주말에도 응접실에 큰상을 펴고 작품을 만들었고 남편은 그 동안은 내 친구가 되기 위해 옆에서 책을 읽으며 함께 시간을 보내었다. 참으로 자상한 남편이었다. 유화를 전공하는 나는 많은 준비물이 필요했다. 캔버스, 이젤 등 이 모든 것을 차에 싣고 학교를 가는 일도 만만치가 않았다. 남편이 그 수고를 담당했다. 아침마다 화구를 차에 실어주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내려도 주었다. 남편의 전적인 희생과 수고가 아니었다면 나는 공부를 마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좋으신 하나님께서 좋은 남편을 내게 선물로 주신 것을 나는 두고두고 감사한다.

학교생활을 통해 나는 좋은 인간관계를 배우게 되었다. 대다수의 교수님들은 늘 진지하게 강의에 임했고 학생들의 질문에 성의껏 대답해 주셨다. 학생들도 내가 쳐다보면 환한 웃음으로 대해 주었다. 내가 느낀 미국 대학생들은 아이디어와 순발력이 뛰어나고, 명랑하고 활기차며, 그리고 낭만적이다. 또 자기 일과 소신이 분명하며, 남에게 절대로 폐를 끼치는 일은 하지 않는다.

교수님들의 인격도 본받을 만했다. 하루는 교수님을 만나기 위해 교수실에 들렀는데 교수님의 의자가 높아서 나를 내려다보게 되었다. 교수님은 얼른 자기 의자의 높이를 조정해서 내 눈 높이로 맞추고 나서 상담을 해주었다. 그들의 겸손한 모습에 도전을 받았다.

전공과목인 유화는 아주 재미있게 공부를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림의 흐름이나 색의 사용에 대해 설명하기는 참으로 어려웠다. 나는 도서관에서 성공한 옛 화가들의 책을 통해 그 시대의 흐름과 역사들을 고찰하며 아이디어를 얻었다. 전공도 열심히 했지만 과외활동도 열심히 했다. 학교 합창단에 들어가 합창단 공연에 출연하기도 했다. 그래서 학교 생활이 결코 힘들고 삭막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비록 만학이었지만 젊은 대학생들과 호흡을 같이 하며 열심히 뛰고 놀면서 공부했다. 드디어 2년만에 모든 학과과정을 마칠 수가 있었다. 1995년도 UC Santa Cruz대학교를 51세에 졸업하고 Fine Art학사학위를 받았다. 공부를 시작한 지 6년만의 일이다.

학위를 받은 것은 내 스스로가 생각해도 놀랍고 대견한 일이었다. 그 당시 한국일보 San Francisco 신문기사에 '만학의 미국 학사모를 쓴 윤자성'이란 제목 하에 기사가 실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6년 간의 학업은 내게는 힘겹고 어려운 일이었고 눈물도 많이 흘렸지만, 그 이후로 나는 마음이 젊어졌고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열심히 하면 된다는 신념이 생겼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능히 할 수 있는 힘을 주신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사랑하는 조국 대한민국
캘리포니아는 세계 각 나라 인구들이 제일 많이 사는 곳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실리콘밸리에도 여러 나라 사람들이 살고 있다. 우리 딸 Kathy가 다니던 중학교에서는 일년에 한번씩 International Day(국제의 날)가 있다. 이 중학교뿐만 아니라 이곳 다른 중학교에서도 이 행사를 한다. 이 날은 자기나라의 특성과 특이한 면을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가르치는 날이다. 그리고 각 나라(자기 나라) 특징을 소개하는 분들은 어머니들인데 모두들 자기 나라를 멋있게 소개하려고 대단한 열성을 부린다.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일이니까 그때만 해도 30개 나라 정도가 소개되었다. 자기 나라 소개는 각 반에서 하고, 음식 소개는 바깥에서 하기로 되어 있었다. 시간은 20~30분 정도. 매 30분 정도마다 class에는 새로운 학생들이 몰려온다.

일본인들이 이 행사를 독차지 할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 나는 이들을 보면서 한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불같이 일어남을 어쩔 수 없었다. 나도 한국을 떳떳이 소개하고 싶었다. 비록 내가 미국에서 살고, 내 남편이 미국 사람이지만 나는 한번도 내 조국인 대한민국을 잊어 본적이 없었다. 내 조국이 잘 되고 부강하기를 위한 기도를 쉬어 본적도 없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떳떳한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14년 전에 우리 딸아이 중학교 국제의 날 프로그램에 우리 나라를 소개하기로 마음을 먹고 교장선생님을 찾아가 반에서 하는 순서가 끝난 후 운동장에서 하는 프로그램에 한국 순서를 넣어달라고 말씀드렸다. 교장선생님이 안 된다고 하셨다. 일본인들이 까만 옷을 입고 북춤을 30분 동안 해야 하기 때문에 추가로 프로그램을 배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5분에서 7분 정도의 시간을 절대 넘기지 않고 한국의 부채춤을 소개하겠다고 했다. 그 동안 한국이 소개된 것은 이 학교에서는 한번도 없었다고 했다.

이 학교는 그 당시 일본에 있는 중학교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었기에 교장선생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일본인을 끔찍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안 된다는 것을 사정사정 해서 겨우 승낙을 받았다. 그러나 막상 승낙을 받고 나니 참으로 난감했다. 나는 한번도 한국 춤을 추어 본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실리콘밸리 지역에는 무용하는 분도 없었기에 어디 가서 배워 올 수도 없었다. 그래서 친척 언니가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있는 무용선생님 한 분을 소개해줘서 찾아갔다. 꼭 춤을 배워야 한다고 우겨 그날부터 부채춤을 배우기로 했다. 행사가 있는 날로부터 5주전의 일이다.

그런데 그 무용선생이 그날 한번 나를 가르치고는 부채춤은 몇 번의 개인 지도를 받고 되는 춤도 아니며, 내가 너무 뻣뻣해서 도무지 배울 수 없을 것 같다면서 일치감치 포기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다. 나는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일주일 동안 열심히 연습을 하고 올 터이니 다음주 한번만 더 지도를 해 달라고 사정을 했다. 옷은 한국에 있는 여동생에게 부탁했다.

지도를 받고 온 이튿날 새벽부터 나는 부채 펴는 연습부터 시작했다. 누가 이기나 경쟁을 하는 것처럼 열심히 연습을 했다. 그런데 부채가 마음대로 착착 펴지지 않았다. 그래도 며칠을 죽어라 연습을 하니 좀 자연스럽게 펴지기 시작했다. 나는 춤을 추면서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아버지 제가 지금 한국의 명예를 걸머지고 한국을 소개해야 되는데 이 정도로 해선 안됩니다. 저에게 힘을 주시고, 자신감을 주십시오.?

연습은 계속되었다. 음악을 틀어놓고 팔을 벌리고 하나 둘 해가며 몸을 돌리며….  발 움직이는 것을 잊지 안으려고 써 온 종이를 읽어가면서 연습에 또 연습을 거듭했다. 일주일 맹연습을 하니 약간 자연스러운 티가 났다.

집에서 무용 선생님댁까지는 프리웨이로 왕복 2시간 걸리는 먼 거리였다. 그러나 멀어도 낮에 오라면 좋겠는데 밤 8시에 오라는 것이었다.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 차 뒤 좌석에 커다란 방망이를 하나 싣고 다녔다.

두번째 연습 날 선생님은 내가 하는 것을 보시고는 놀라워하시면서 어떻게 그 동안 이렇게 달라졌느냐면서 계속해보자고 했다. 부채 펴는 것과 동시에 몸이 돌아가는 것만 맞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열심히 연습을 했고 레슨을 네 번 받고 나니 국제행사의 날이 다가 왔다.

나는 LA에 계신 부모님께 이 행사와 내가 부채춤을 추어 한국을 소개한다는 것을 전화로 말씀드리니 너무 기뻐하셨다. 부모님은 연습을 잘할 수 있도록 계속 기도를 해주시겠다는 격려와 함께 행사 날 비행기를 타고 오셔서 참석을 하시겠다고 했다.

나는 부채춤만 연습하는 것이 아니라 class에 들어가 우리 한국의 특징을 소개하는 한글에 대해서도 준비를 해야 했다. 학교 class에서 한글을 소개시키는 시간을 위해 두 자녀들도 함께 거들었다. 우리 한복을 남녀별로 가지고가 남학생 여학생에게 한복을 입히고 우리 한복과 우리 한글을 소개하면서  따라서 읽게도 했다. ?가갸 거겨? 하면서 힘들어했지만 잘 들 따라 해줘서 기뻤고, 학생들은 한복을 보면서 ?예쁘다, 멋있다?며 손뼉도 쳐주었다.

나는 강의가 끝난 후 빨리 부채춤 옷으로 갈아입었다. 운동장에서 하는 순서가 내가 제일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운동장에 나가기 전 구석을 찾아가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이때까지 연습한 것 실수 없도록 도와주십시오. 부채가 떨어지지 않게 해주십시오. 우리 나라를 사랑합니다.? 기도를 드리고 나니 눈물이 글썽해지며 코가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한국이 소개되는 것이 이때까지 없었으며 한국인 어머니 앞에서 하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조국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나의 조국 대한민국을 내 자녀들과 이곳 미국사람들에게 아니 다른 민족들에게 아름답게 소개해야 한다는 비장한 마음으로 나는 운동장을 향했다.

700명의 중학생들이 운동장에 질서 있게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들 앞에 서 있는데 머리 속으로 갑자기 우리 태극기가 보였다. 나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한 후 교장 선생님이 눈으로 주는 사인과 함께 음악 테이프가 켜지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큰 운동장을 부채를 펴가며 크게 크게 돌았다. 부끄러움도 잊어버리고 혼신을 다해 추었다. 몸이 돌고 부채가 펴지면서 내 마음속의 태극기는 하늘 높이 펄럭이었다.

나는 기도하면서 춤을 추었다. ?하나님, 나는 내가 태어난 내 조국 대한민국을 사랑합니다. 내 나라는 문화가 뛰어난 나라입니다. 이 아름다운 문화를 이 몸으로 표현하게 도와주십시오.? 얼굴은 미소를 짓고 웃었지만 마음으로는 울었다. 자랑스러운 조국이 있음에 감격해서 울었던 것이다. 춤이 끝나자 박수가 대단했다. 실수는 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이색적인 부채춤을 보고는 잘했다고 칭찬하며 굉장히 즐겼다고들 했다.

교장선생님은 우리를 교장실로 불러 칭찬과 더불어 간단한 대접도 하셨다. 오늘 같은 날은 한국신문기자가 취재를 해야 한다면서 웃으셨다. 내 딸은 엄마가 실수할까봐 고개도 못 들었다고 했다. 나는 이 일로 한국학생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주었다. 그 이튿날에는 학교 게시판에 부채 춤추는 사진과 한복을 입은 미국 남학생, 여학생들의 사진이 걸렸다. 그리고 다른 중학교까지 소문이 나서 나는 이곳저곳 다른 중학교에 가서도 한국을 소개하게 되었다. 비록 내가 미국사람과 결혼하고 미국사람이 되었지만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어머니의 조국인 한국을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믿음의 동역자들
미국에 와서 좋은 친구를 만났다. 모두 20여 년 된 지기들이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Claudia(크라우디아)는 미국 교회를 다닐 때 만난 친구다. 그녀와 내가 친구인 동시에, 우리 딸 Kathy와 그녀의 딸 Debbie도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같은 학교에 다닌 아주 친한 친구이기도 하다. 15년 전에 이 친구가 나를 크리스천 여성들이 모이는 모임에 초청을 했다. 기도와 간증과 찬양을 드리는 모임이었다. 실리콘밸리에 있는 교파를 초월한 미국 여선교회 회원들이 모여 여자 강사를 초빙해 주님의 말씀을 듣고, 간증을 하며, 여성들이 필요로 하는 Topic을 가르쳐 주기도 하는 훌륭한 모임이었다.

또 믿지 않는 여성회원들도 초청해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권장하는 모임이었다. 이 선교모임의 본부는 Kansas주 Missouri에 있으며 Ston Croft라고 불리우는 선교기관으로, 실리콘밸리에서는 이 모임이 1938년 창단되어 63년이라는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이곳 Radisson Hotel 홀에서 계속 모임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Christian Women?s Club 모임에 참석하면서 주님을 통해서 어려움을 딛고 승리한 간증을 많이 듣게 되어 나 자신을 돌아보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그래서 난 이 여성선교모임에 관심을 가지고 10년 이상을 참석하고 있다. 헌신되어 있는 여성들의 모임이며, 거의가 백인이고 한국사람은 나뿐이다. 그래서 나는 가까운 친구들을 초대해 뜻 있는 시간을 갖기도 한다. 우리 한국도 이 선교 단체를 통해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이 모임에서 한국을 소개하며 크리스천 한국 여성의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한다.

여기서 걷어지는 작은 헌금은 Kansas주에 있는 Ston Croft 본부로 보내지어 세계 각국에 선교헌금으로 보내진다. 나한테 Decoration위원장을 시켜 10명쯤 되는 인원들과 일하면서 많은 것을 배우며 맡은바 최선을 다했다. 남의 흉을 보지 않고 자기 맡은 일에만 체계적으로 철저히 일하고 있다. 시간을 엄수하고, 친절하고 신앙심들이 투철하다. 이들을 통해서 나는 신앙의 도전을 받고 있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기회를 최대한 활용함으로 이들이 우리 나라에 와서 베푼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고 있다. 나는 가끔 이 모임에서 독창을 한다. 이번 돌아오는 12월 크리스마스 모임에도 독창을 하라고 해서 지금 준비중에 있다. 매달 100명쯤 모이는데 앞으로 이 모임이 더 확산되고 우리 한국교민들도 많이 참석할 수 있기를 기도하고 있다

푯대를 향하여
지난 31년 동안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며, 내 대신 집안 살림까지 하며, 재정적인 지원을 해 주며, 공부를 시켜 준 남편, 엄마가 공부를 잘 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었던 사랑하는 나의 아이들, 평생을 쉬지 않고 기도해주시는 부모님, 그리고 사랑하는 고모 윤경애 전도사님, 산타크라라 연합감리교회 담임 목사님, 그리고 교우들, 믿음의 친구들. 나는 이들의 사랑을 먹고 살아왔다.

그 받은 사랑이 너무 커서 어떻게 갚아야 할지를 모르겠다. 그래서 하나님께 받은 축복을 다른 이들과 나누고 싶다. 특별히 늦었다고 생각하며 움추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간증을 통해서나마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고 싶다. 나 같은 작은 여자를 통해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사랑하시고 역사하신다는 것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나는 Stanford University 특별활동 프로그램에서 Craft를 가르치는 사역과 Santa Clara 연합감리교회의 여선교회의 총회장직도 잘 감당하고 싶다. 부족한 사람에게 간증의 기회를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리며 최선을 다하고 싶다. 그리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
(월간 <교회와신앙> 2001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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