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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정순 목사/ "사랑의 선구자가 되어라"
1997년 11월 01일 (토) 00:00:00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엄정순목사/ 인덕원교회, 재소자 특수선교사역자 
                                                 

맑은 하늘에 울려 퍼지는 예배당 종소리 속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것은 초등학교 5학년의 순박한 소녀 시절이었습니다. 부모님께서 결혼 7년만에 얻은 장녀라 귀히 여기시며 이미 헌신을 서원하셨기에 늘 기도해 주시며 철저한 신앙 교육으로 성장하던 때, 나는 충남 홍성군 갈산면의 조그마한 병암산 기슭의 성결교회에서 큰 은혜와 은사를 체험하였습니다.

 '사랑의 선구자 되어라!' 
어린 마음의 심비에 깊이 새겨 주시는 주님의 음성은 얼마나 크고 신선한 능력이었는지 날마다 사랑의 삶을 다짐하며 내 인격의 그릇 속에 말씀을 담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랑의 선구자적인 일은 무엇일까?'  주님의 구체적인 지시를 받게 된 것은 예산여고 3학년 때였습니다. 전도의 불이 붙어 열심히 전도하던 때, 그 날도 하교시 전도지 한 웅큼을 쥐고 귀가 버스를 탔는데 깜짝 놀랄 일이 눈앞에 전개되었던 것입니다. 난생 처음 보는 일로, 버스 뒤쪽 10여 좌석에 푸른 죄수복을 입고 두 손은 수갑이 채워진 여자 수인들이 교도관들의 감시 속에 꼼짝 않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순간 하나님의 크신 손이 나의 등을 뜨겁게 미는 것을 느꼈고 나는 이미 그들의 수갑찬 손을 어루만지고 있었습니다.

 "갇힌 자들에게 가라! 사랑의 굶주림과 사악함의 죄로 인해 상처받은 저들에게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참 자유를 선포하라! 아멘."

 우리는 모두 전과자, 많이 탕감받은 죄인
 1980년 1월(서울신대 2년 재학시),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영등포 교도소를 가게 되었고, 나는 교화 위원으로 위촉받아 상담 및 교화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짧은 한복 차림의 정장을 한 나는 영등포 교도소 예배의 첫 날부터 큰 감동을 받게 되었습니다. 3~4백여 명의 재소자들 앞에서 나는 거룩한 의인이 되어 높은 강대상 의자에 앉아 잠시 묵도를 하고 눈을 떴습니다. 순간 수인들이 입고 있는 푸른 제복이 눈이 부시도록 빛나면서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20)

 하나님 앞에 인생은 모두 범법자(전과자)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다만, 우리는 드러난 죄인과 드러나지 않은 죄인으로 구분되어 있을 뿐입니다. 오히려 범법함이 드러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감내하며 마음에 통회하는 이들에게 구원의 은총이 임하며 그들이 임마누엘의 축복을 받는다는 복음의 진수를 깨달았습니다. 나는 "주님의 날, 새 하늘과 새 땅에 입성하게 될 때 하늘의 심판대 앞에 나는 과연 떳떳이 설 수 있을까?"는 생각에 잠시 잠겼습니다.

 어둡고 칙칙한 얼굴로 삭막한 분위기의 예배일 줄 알았는데 반대로 모든 죄 사함받은 하늘 나라 의인들이 기쁨이 충만하여 아버지께 영광을 올리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실로 믿을 수 없는 꿈만 같은 사실들 앞에서 나는 그냥 엎드러져 엉엉 울고 회개하며 감히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리라는 헌신을 재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확실한 사명의 삶은 지칠 시간이 없었습니다. 더욱이 사랑의 삶에는 샘솟듯 하는 기쁨이 넘칠 뿐입니다. 나는 애인들이 많이 생겼고 그 많은 애인들을 일일이 면담하고 손을 잡아 주며 편지하는 일로 얼마나 즐거운 지 짧은 시간이 아쉬웠습니다. 온통 남자들 뿐인 영등포 교도소에서 엄마의 손길처럼 따스함을 전해주는 나에게 어느 날, 보안과장님이 보안상 문제가 생길까 염려되니 재소자들과 악수하는 것을 자제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내 마음이 어찌나 섭섭하던지 주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 저를 빨리 60세가 되게 해 주세요. 어머니가 사랑하는 아들을 안아주 듯 다 끌어 안아주고 싶습니다."

 84년 12월, 내 기도를 들으신 주님께서 나의 사랑을 확인하셨습니다.
 "진정 저들을 사랑하는가?"
 "아멘, 네! 사랑하구 말구요"
 "그럼, 결혼하라! 진정 저들을 사랑하는 확증을 보이라!"

 평생토록 교도소를 출입하면서 복음을 전하며 재소자들과 자매 결연을 맺고 선교 활동을 하라는 줄로 쉽게 생각하여 '아멘' 하였음은 나의 큰 오해와 착각이었습니다. 나는 참으로 오만한 자신을 보았습니다. 부끄럽기 짝이 없게도 우월의식이라는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토록 교도소 형제들을 사랑한다하고 애인이라 생각하였건만 내 인생의 결혼 각본은 나 스스로 아주 멋있게 구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의 호세아 되어라!'
 85년 1월 교무과장님의 인도로 모범 재소자 5명을 맡아 성경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강하게 비침을 느끼며 "저를 맡으라!"는 주님의 위탁 명령을 받게 된 것입니다. 95번 김인철, 나이 29세, 상습 특수절도죄로 전과 6범, 7년 8개월 형기 중 5년째 복역 중, 초등학교 3학년 중퇴, 부모 형제 등 아무도 돌보는 이 없음.  실로 어처구니없는 주님의 중매하심이었습니다. 내가 계획한 멋진 결혼 각본과는 너무 차원이 다르기에 며칠을 고민도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과연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함으로 그에게 그 사랑의 확증을 보이리라고 생각하여 삼일간의 금식기도 후 그와 결혼할 뜻을 정하였습니다. 85년 4월 3일 교무과에서 아무도 모르게 김인철 씨와 나는 주님 앞에 약혼 기도를 하였습니다. 남은 형기 2년 8개월 동안 공부할 것을 부탁하고 검정고시 책과 신앙 서적을 차입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검정고시 모두 통과하였고, 만기 출소일인 87년 2월 17일 총신대학 신학과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리고 87년 4월 문화촌교회에서 조종남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늘의 축복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새로운 빛으로 사랑의 한 몸이 되었습니다. 과거는 이미 죽은 것이며 지나간 것입니다. 가장 소중한 시기인 어린 나이부터 사춘기를 거쳐 청년기에 이르기까지 불행하고 험난하게 살아온 남편의 억울한 세월을 나의 뜨거운 사랑으로 보상해 주고 싶었습니다. 그의 가치관을 바로 세워주며,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온전한 결혼 생활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남매, 자상한 남편과 함께 우리 가정은 그야말로 행복하고 감사한 천국생활이었습니다.

  고통의 풍랑 위를 걸어서
 사탄의 시기심은 주 안에서 행복을 만끽하는 단란한 우리 가정 포도원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예기치 않았던 불같은 시련의 코스에 다다른 것입니다. 20여 년간 이산 가족의 아픔을 견디어 오던 시댁 식구들을 다 만나게 되었으나 그 기쁨도 잠시, 시댁 가족들의 행패는 우리 가정을 짓밟기 시작했습니다. 시어머니는 험악한 자신의 삶을 비관하여 날마다 술에 젖어드는 알콜중독자였습니다.

저녁마다 이어지는 시어머니의 술 주정은 평화로운 가정을 깨는 독침이었습니다. 시어머니의 정신질환 발작은 날로 심각해져 치매 증세를 보일 정도였습니다. 4남매, 형제 . 자매들의 우애는 이미 금이 간지 오래였고, 가정들 마다 먹구름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모두 외면하는 시어머니를 내가 모셔야 했습니다. 불쌍하신 시어머니의 건강회복을 위해 날마다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술로 만신창이가 된 시어머니를 끌어안고 밤새워 진정시키고 물수건으로 몸을 씻기며 새 옷으로 갈아 입혀 드리고 아침엔 따뜻하게 해장국을 끓여 잡숫게 해드리는 일이 내 하루의 일과였습니다. 다음 날이 되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아침 식사를 하시고 나면 시어머니는 또 술 출장을 가십니다.

 그러나 낮에 두세 차례 전화를 걸어 내게 심한 저질스런 욕설을 퍼 부을 땐 헛심이 빠졌습니다. 아들을 향해 자기 남편이라고 억지 소리를 하며 안방에서 발가벗고 누워있는가 하면, 나를 죽이려고 극약을 몰래 숨겨 갖고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낭떠러지에서 투신 자살을 기도하여 병원치료를 받은 일도 세 차례나 됩니다. 갓 출소하고 행복한 결혼의 단 꿈이 산산조각 날만큼 큰 위기 앞에 있는 남편, 혹시 신학 공부하는 데 지장이 있을까 나는 노심초사 격려하며 달랬습니다.

 큰 딸 하영이를 임신하고 만삭될 때까지 어머니의 일로 인해 많이 울어서 인지 하영이는 태어나자마자 그냥 울어대기 시작했습니다. 연년생으로 아들 주영이가 태어났습니다. 손이 귀한 집안에 아들이 태어났으니 얼마나 경사이겠습니까? 그러나 치매 증세가 있는 시어머니는 이미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끔찍한 욕설로 손주에게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차라리 죽어라!"
 생후 열흘째 되는 날 할머니의 저주를 들은 주영이는 그만 실신해 버렸습니다. 소화 아동병원 중환자실에 입원을 시키고 나는 금식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나의 아버지, 아이가 불구가 되어도 좋으니 생명만은 제게 돌려 주시옵소서!"  '신생아 패혈증'이라는 병명이 나왔습니다. 이미 소생 불가능하다며 데려가라는 의사선생님께 통 사정을 하였습니다. 인공호흡기를 하루만 더 꼽아 달라고.  나의 강청에 못 이긴 담당 의사는 그럼 내일 데려가라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아버지, 나의 아버지여..."
 그 다음날 주영이를 데리러 병원에 갔습니다.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주영이를 감싸고 있는 죽음의 병균 90%와 남은 10%의 저항력이 싸우고 있는데 저항력이 어디서 그리 나오는지 병균을 잡아 퇴치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치료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던 아들 주영이는 주님의 치료하신 은총 속에 20일 만에 건강한 모습으로 내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딸 남매를 끌어안고 많이 울었습니다. 학생인 남편을 뒷바라지하랴, 연년생 두 아이를 젖먹여 키우랴, 시어머님 봉양하랴, 여간 벅찬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일지라도 나는 부정적인 생각이나 말은 할 수 없었습니다. 아들 주영이가 살아 돌아온 것을 생각하면 절로 힘이 솟았기 때문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사탄의 훼방이 끝났으리라 생각하고 산을 넘어왔는데 더 큰 산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게 아닌가요! 이젠 내 남편의 차례가 된 것입니다. 그토록 믿고 의지해 왔던 남편이 종로경찰서 유치장에 잡혀 있다는 것입니다. 망연자실한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경찰서로 달려갔습니다. '사기 및 유가증권 위조' 등의 사건으로 덜미를 잡힌 남편은 고개를 떨군 채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세 살, 네 살박이 아이 둘을 안고 업고 사건 담당 판사 서기한테 찾아갔습니다. 사건진술서를 샅샅이 훑어보더니 실형 5년, 감호소 10년 정도 구형될 것이라 하였습니다. 너무도 어처구니 없는 사실 앞에 나는 털퍼덕 주저앉아 하늘을 바라 보았습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15년 아니, 20년이라도 좋습니다. 남편이 죽지 않은 것을 감사합니다."    
 교도소 출소 후 4년 8개월만에 남편은 다시 수감되었기에 모든 것 다 버리고 두 아이를 안고 업은 채 남편이 갇혀있는 서울구치소 담 옆 작은 월세 헛간 방을 얻어 이사했습니다. 아빠의 사랑을 받으며 행복하게 자라야 할 하영, 주영이가 영문 모르게 미국(교도소)에 가신 아빠를 찾으며 울 땐 억장이 너무 아파 함께 부등켜안고 울곤 하였습니다. 우리 가정을 찢으려 4년을 괴롭히던 시어머님은 잠시 형님 댁에서 계시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아들의 구속된 소식을 듣고 11월 1일에 면회를 오셨습니다.

 어머니는 면회실에서 아들 손을 잡고 "아들아, 내가 잘못했다"고 우시며 통회하는 마음으로 유언을 하셨습니다. 우리 사는 작은 방에 오셔서 내 무릎에 얼굴을 묻으신 어머니, 함께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손자들을 꼬옥 끌어안아 보시고 가신 것이 마지막 인사일 줄이야. 2주일이 지난 후 시어머님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91년, 그 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고, 배고팠고, 가난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매일 매일 남편을 면회했습니다. 짧은 시간이나마 5분을 면회하기 위해 서너 시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엄마, 미국이 왜 이래?"  아이들의 질문에 답을 잊어버렸습니다. 실의에 빠질까? 남편을 위로하며, 면회하고 편지로 달랬습니다. 저녁마다 아이들을 품고 가정 예배를 드리며, 아이들을 재워놓고 밖으로 나와 밤새워 하나님께 찬미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펑펑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다 모았다면 작은 강 하나쯤 이루었을 것입니다. 얼마나 그 주체할 수 없는 뜨끈뜨끈한 눈물이었는지.... 아이들이 엄마를 닮아서인지 물 말은 밥을 간장에 찍어 줘도 잘 받아먹었습니다. 쌀 한 됫박을 가지고 들어왔던 터라 나는 굶식을 한지 벌써 오래되었습니다.

음식점 앞을 지나도 갈비 굽는 냄새도 내 코를 유혹하지 못합니다. 남편과 함께 고생하는 것은 지당한 일이기에 그저 견딜만 하였습니다. 마지막 남은 쌀 한 줌을 털어 씻을 땐 눈물 반 물 반이었습니다. 부모의 죄로 인해 내 사랑하는 아이들까지 내일부터는 생으로 굶겨야 한다니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팠습니다. 남은 저녁밥을 물에 말아 먹이고 간단한 설거지를 하면서 또 울었습니다. 아이들을 기도해서 잠 재우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저 담 너머엔 나의 사랑하는 남편이 있고, 위로 하늘엔 내 아버지 계시지요! 아버지, 저희들의 잘못으로 인하여 제가 백 날을 굶는 것은 견딜 수 있어요. 그러나 아무 잘못이 없는 아이들이 부모의 죄 때문에 생으로 굶어야 한다니.... 아버지!"

 뜨거운 눈물을 한없이 품어내는데 갑자기 내 눈물의 강에 내가 둥둥 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딸아, 깊은 밤 네 눈물의 기도를 내가 다 들었노라. 내가 네 눈물을 삼키노라."

 내 마음의 소원을 다 아시고 이루어주시겠다는 주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캄캄하고 깊은 밤, 승합차 한 대가 상향등을 비추며 우리 집 앞마당에 들어섰습니다. 장정 일곱 사람들이 대문을 노크하며 밤의 정적을 깨는 소리.

 "여기 혹시 엄정순 씨가 살고 있습니까?"

 '나를 찾는 소리 아닌가?'

 깜짝 놀라 그들에게 뛰어가 보니  5년 전, 영등포교도소에서 교화활동을 할 당시 교도관이셨던 집사님, 장로님들이 한 계급씩 진급하셔서 이 곳 서울 구치소로 발령받아 오신 것이었습니다. 오셔서 보니 김인철이 또 들어 와 있고, 나와 아이들의 면회와 편지하는 것을 알고 김인철을 불러 위로 격려하고, 주소를 가지고 나를 찾아오신 것이었습니다. 고마우신 장로님, 집사님들을 모시고 들어가 앉을 방이 없기에 그 마당에서 함께 부등켜 안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밤에 주님께서 오셔서 내 눈물의 기도를 하늘 이슬로 응답하셨습니다. 쌀 한 가마니(20kg)와 고기와 과자를 선물로 주고 가셨습니다. 나는 갑자기 큰 부자가 된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 내 살을 꼬집어 보았습니다. 그 후로 고마우신 장로님, 집사님들의 끊임없는 사랑과 배려는 '엘리야의 까마귀 역사'를 실감케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법정에서도 큰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좋은 변호사님의 노력과 나의 간곡한 탄원서는 15년 형기 중 14년을 탕감받게 하였고, 항소심에서 1년으로 형량을 확정짓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내 몫에 태인 십자가이니 스스로 지고 가려는 마음의 각오와 함께 어린 아이들과 서울구치소 담 옆 헛간에서 남편을 기다린 1년은 꼭 10년을 지낸 듯 하였습니다.

계산에 없었던 고통의 풍랑위를 눈물로 걸을 때 넉넉히 이길 힘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은총을 감사하고, 감당치 못할 시험을 허락지 않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하신 은혜를 늘 감사했습니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않는 기도 생활과 범사에 감사하라신 주님의 말씀따라 내게 닥치는 시험과 환란을 끌어 안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1년 10월 수감되었던 남편은 서울구치소에서 그 이듬 해 92년 10월에 사랑하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온 세상을 다 얻은 것만큼이나 기뻐하는 아이들과 함께 우리 네 식구는 새 삶을 계획했습니다. 남편과 이미 의논된 일이기에 수원에 있는 합동신학대학원에 입학시키려고 학교 옆에 월세 방 1칸을 세 얻었습니다. 남편의 학비와 아이들 교육비 및 생활비 마련을 위해 온갖 잡일을 다 하였습니다. 세일즈도 하고, 행상도 하였습니다. 모처럼 돈을 모아 자전거를 갖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는 남편을 주려고 2만원짜리 중고 자전거를 사가지고 끙끙 끌고 올 땐 자가용 사오는 것만큼이나 기뻤습니다.

 남편이 학교 다니는 모습을 보면 모든 피곤함이 사그러집니다. 봄의 새 아침에 지저귀는 새들의 찬양소리에 맞추어 하루 일과는 싱그러웠습니다. 논 밭둑에 솟아오르는 쑥을 한바구니 캐어 부침 가루에 반죽을 하고 후라이팬에 쑥 버무리 부침을 해 보니 얼마나 구수하고 맛이 있던지 점심시간이면 남편의 친구들을 다 초청하여 대접을 하였습니다. 이웃 집 홀로 사시는 외로운 할머니에게도 드리고, 지나가던 고물 장사 아저씨를 불러 따끈 따끈한 부침을 두어 장 잡수시게 하면 얼마나 좋아하시는 지, 사는 것이 다 즐거웠습니다.  

 사탄은 우리 가정의 행복을 마냥 훼방하는 일에 지칠 줄 모르나 봅니다. 또 다시 먹구름의 기운이 감돔을 느꼈을 때, 이미 사탄은 한 단수 높게 공격선을 넘어오고야 말았습니다.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며 새사람이 된 줄 믿었던 남편은 신학원 1년을 못 채우고 방황하더니 급기야 두 달만에 방탕의 길로 떠났던 것입니다. 이미 굽고 휜 길을 다시 펴기 어려운 것처럼 남편의 부패된 마음은 쉽게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자기 생각대로 세상을 맘대로 돌아다니며 살다가 돈이 떨어지면 집에 몰래 들어와 물건들을 갖다가 전당포에 맡기고 이런 일이 들통이라도 나면 가족들에게 심한 욕설과 폭력을 행하곤 하였습니다. 성난 사자처럼 이성을 잃은 그는 이미 사탄의 종이 되고 만 것입니다. 교도소에서 그토록 참회하고 반성하였건만, 다시는 죄 안 짓고 잘 살아보겠다고 다짐 다짐하고 맹세까지 했건만 나와 아이들의 가슴에 남긴 상처의 아픔을 그 무엇에다 비할까요?

믿는 도끼에 발 등을 한 번도 아닌, 수 없이 찍힌 격이 되고 말았습니다. 수 개월 동안 깊은 한숨과 고통의 늪에서 전혀 희망없는 현실을 지낼 때 이젠 하도 기가 막혀서인지 눈물도 말라 버렸습니다. 건강했던 내 육체에 스트레스로 인한 질병들이 속속 찾아 들었습니다. 신장병, 심장병, 피부 가려움증, 저혈압 등.... 이로 인해 밤잠을 뺏긴지도 이미 오래였습니다. 낮에는 아이들을 선교원에 맡기고 파출부 일을 해서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아이들도 이 일을 눈치 챘는지 엄마와 함께 밤을 지새우며 긴장된 날들을 지내곤 했습니다.

 93년 10월 16일 밤 10시경, 남편의 가출로 인하여 아픈 가슴을 끌어안고 기도하며 찬송하고 있을 때 "두려워 말라. 강하고 담대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라는 포근히 나를 감싸시는 주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나는 북받치는 눈물로 한없이 한없이 울고 말았습니다. 그 밤에 주님은 내 영혼과 육을 만져주셨습니다. 깨끗이 치유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그 말씀이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이 되었는지 날아갈 것 같았습니다. 남편을 사랑하는 맘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성경 호세아를 읽으며 끝까지 참고 용서하시며 기다리시는 주님의 사랑에 큰 힘을 얻었습니다.

 분명 주님께서 회개시킬 때가 있으리라 믿으며 그 불쌍한 영혼을 위해 기도를 쉬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위로하심이 있은 후 100여 일 될 무렵 남편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다시는 이런 나쁜 짓을 안하겠노라 다짐하며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하는 남편이 너무 고마워 옛 일을 다 용서하고 또 새 날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남편의 사기술에 또 속고 만 것이었습니다.

 사업차 돈이 필요하다며 별별 거짓말로 사기해 간 돈이 적지 않았습니다. 내 주변의 친척들은 물론 안면이 조금 있는 사람들에게까지도 내 이름을 팔아 피해를 끼치고 다녀서 내가 알지 못하는 빚을 다 갚아 주어야만 했습니다. 나는 철저히 사탄의 종된 남편에게 짓밟혔습니다. 하룻밤이 지날 때마다 내 검은 머리는 한 웅큼씩 뽑히며 하얗게 세어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더 이상 속아서는 안되리라!.     
 95년 3월 15일 두 아이들과 순교할 각오를 하고 서울구치소 가까이에 월셋방으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사랑스런 하영이, 주영이는 인덕원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서로 의좋게 학교 생활에 적응하고 있습니다. 

 하영이가 1학년 때, 글짓기를 잘하여 선생님께서 상을 주셨다며 공책 3권을 선물로 받아온 일이 있었습니다. 장하고 기특하여 글짓기한 내용을 읽어보니 아빠를 그리워하는 내용으로, 하영이가 가장 마음이 슬픈 때는 선생님이나 친구들이 '아빠'이야기를 할 때라고 글로 표현했습니다. 다른 친구들이 신나게 '아빠'이야기를 하면 하영이는 슬그머니 화장실에 가서 눈물을 지으며 그리운 아빠를 불러 본답니다.

 5월 30일은 하영이 생일입니다. 멋있게 초대장을 써서 친구들을 초대하였더니 20여 명의 아이들이 몰려 왔습니다. 준비해 놓은 돈까스를 해서 먹이고 서울랜드 옆 경마장에 가서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주 멋진 생일 파티였으리라고 자부한 내 생각은 빗나간 화살이었습니다. 생일 저녁 때부터 하영이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습니다.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터질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하영이의 불덩이 같은 몸을 끌어안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루 종일 괜찮다가도 저녁 때만 되면 갑자기 아픈 증상이 나타나길 일주일 째 되던 날, 하영이는 가슴과 머리를 붙들고 떼굴떼굴 뒹굴며 아프다고 우는 것이었습니다. 겁이 덜컥 나서 "하영아, 병원에 가 보자" 하였더니 하영이는 엄마 품에 꼬옥 안기면서 "엄마, 제 병은 병원에 가서 나을 병이 아니예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 줄까? 하영아, 소원을 말해 봐"

 "엄마, 저의 소원은 아빠가 보고 싶은 거예요. 사실은 제 생일날에 아빠가 전화 한 통화 해 주실 줄 알고 기다렸었어요. 아빠!"  

 사랑하는 하영이 주영이와 함께 세 식구는 한바탕 울었습니다. 세상에서 당하는 어떠한 어려움이라도 감수하겠는데 아빠없이 기운을 잃은 채 살아가야 하는 아이들의 힘없는 모습은 차마 가슴이 시렵습니다. 이미 멍든 아이들의 가슴을 달래는 일은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역기능된 결손 가정에서 자라야 하는 아이들에게 편 부모의 빈자리를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요? 차라리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가엾은 내 아이들, 그러나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그늘 아래 하늘의 은총을 받으며 살기에 믿음으로 다시 새 힘을 얻고 있습니다.

 주님의 보호하심 속에 나는 두 아이들을 품고 뜻을 세웠습니다. '정직' '사랑' '순교'로 가훈을 정하고 매일 가정예배를 드리며 아침마다 두 손을 얹어 축복기도 해 줍니다. 혹시 아비의 죄가 미치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 지혜롭고 건강하게 자라라고 늘 격려합니다. 주님께서 두 아이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두 아이들이 서로 의좋게 자라는 모습을 보노라면 참으로 위로가 되고 힘이 솟아납니다. 하영이는 첫 아이이자 여자라서 그런지 자상스러운 데가 있습니다. 동생을 얼마나 끔찍이 아끼고 사랑하는지 몸도 마음도 숙성하여 대견합니다. 엄마 몫을 대신 하느라 집안 일도 잘 합니다. 친정 아버님은 꼭 나 어렸을 때와 행동이 같다며 칭찬해 주십니다. 이름 그대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줄 믿습니다.

 늦은 밤, 교회 집회 마치고 돌아와 보면 하영이와 주영이는 엄마를 기다리다가 지쳐서 눈물 고인 채 서로 손을 꼬옥 잡고 잠들어 있습니다. 가슴이 뭉클해 집니다. 주영이는 어렸을 때 몸이 아파 적기성을 놓친 이유도 있지만 막내이고 보니 맘이 여린 귀한 아들입니다. 걸핏하면 눈물이 핑-돌며 울기를 잘합니다. 그래도 아들이라서 그런지 "엄마, 아빠 잊어버리고 나하고 다시 결혼하자"며 농담을 할 땐 마음이 든든해집니다. 잠잘 때도 나를 꼬옥 안아 주면서 뽀뽀도 해 주면서 "미스 엄, 이리와 봐" 그럴땐 꼭 남편의 품만큼이나 따뜻합니다. 주님께 영광, 주영 화이팅! "사랑스런 하영아, 주영아, 착하고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라! 늘 정직하고, 남을 위하여 사랑의 삶을 살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순교)하는 신실한 사람 되어라!"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생명 다하기까지!
 결혼 후 10년의 세월은 눈물의 골짜기였습니다. 내 각본은 아니었지만 실로 긴 고통의 터널을 지나왔습니다. 지난 여름(96년 7월 27일), 서울 구치소 통로인 인덕원 사거리에 교회를 개척, 설립하였습니다. '인덕원 교회'와 '새생활 교정 선교회' 입니다. 20년을 기도하며 소원하였던 눈물의 산실입니다. 30여 평의 2층 상가에 세를 얻은 교회이지만 주님께서 축복하시어 지금 막 부흥의 파도가 일고 있습니다.

주일에 20여 명의 식구들이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하고 함께 점심식사를 하며 기쁨의 교제를 나누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보내 주신 귀한 일꾼들과, 늙고 병들어 살 소망을 잃어버린 자, 평생을 불구로 지내 한숨 속에 차라리 죽기를 갈망했던 자, 귀신들려 고통받는 자, 남편이나 가족을 교도소에 둔 안타까운 재소자 가족들, 만기 출소를 하여 세상을 향하여 재기할 형제들, 세상살이 지치고 시달린 영혼들이 오늘 주님 앞에 인도되어 쉼을 얻고 있습니다.

 우리 인덕원 교회와 새생활 교정선교회를 향하신 주님의 뜻은 특수선교 사역임을 믿습니다. 내 평생 이뤄야 할 주님의 소원은 이렇습니다.

 첫째, 재소자 전도- 우리 나라 43개 교도소 내의 재소자 약 6만여 명은 나의 애인이요, 내 남편들이며, 내 아들들입니다. 사랑하는 주님의 귀한 어린양들을 예수의 귀하신 이름으로 애굽 땅 종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하늘에 속한 자 되게 할 것입니다.

 둘째, 재소자 가족 치유- 이곳 서울구치소만도 하루에 면회하기 위하여 다녀가는 가족이 평균 1천여 명이나 됩니다. 재소자를 가족으로 둔 그들에게 하나님의 진정한 위로하심과 평강을 빕니다. 재소자와 그 가족들을 위한 쉼터를 제공할 것입니다.

 셋째, 불우 재소자 자녀 양육- 최고수(사형수), 무기수 등 장기 복역으로 인하여 졸지에 생고아가 된 아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 어린아이들은 남이 아니라 나의 아이들입니다. 사랑하는 불쌍한 그 어린아이들을 내 자녀로 입양하여 순전하게 양육할 집에서 함께 살 것입니다.

 넷째, 출소자 자활의 터전 설립- 만기 출소를 하였으나 더 이상 오갈 곳 없는 불쌍한 나의 형제들을 위하여 자활의 터전을 세우며 그곳에서 함께 살며 인격훈련의 장을 함께 만들어갑니다. 다시는 범죄하지 않도록 연약한 의지를 강한 의지로 키우며, 머리로 살지 않고 가슴으로 살 수 있도록 신앙을 북돋웁니다. 삐뚤어진 가치관을 주안에서 온전한 인격으로 세우며 지난날의 잘못을 참회하며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어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게 할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자존감을 가지며 가정과 사회의 복지를 위해 남은 여생을 살 수 있도록 자활의 터전이 될 것입니다.

 여린 심지 같은 내 인생을 주님은 축복하시어 거대한 사명을 허락하셨습니다. 내 힘만으로는 결코 이 일을 이룰 수 없습니다. 이 소원 또한 내 개인의 것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의 소원이기에 그 분은 꼭 이루실 줄 믿습니다. 그 크신 사명 이루기 위해 아버지 앞에 엎드렸을 때 주님은 내게 하늘의 지혜를 허락하셨습니다.

'성화넥타이'와 '스카프'를 손수 제작하게 하시어 전국 교회와 성도들에게 보급하고 수익금 전체를 새생활 교정선교회 센터 건립기금으로 쓰려고 모금하고 있습니다. 또 내가 눈물의 깊은 골짜기에서도 감사로 찬미의 제사를 드렸더니 하나님께서 나에게 귀한 은사를 주셨습니다. 아름다운 찬송으로 아버지께 영광 돌릴 때 예수님의 사랑과 나의 진한 삶의 간증이 묻어 나오기에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경험하며, 위로와 새 힘을 받습니다. 나의 찬양 음반과 간증 녹음 테이프를 듣는 모든 이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계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저의 작품인 성화 넥타이를 많이 애용해 주시므로 주님의 뜻이 속히 이뤄 질 줄 믿습니다.

 이제까지 지내온 모든 일들을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왜 그리 고통스런 날들을 지내게 하셨는지 주님의 뜻을 다 헤아릴 수 없지만, 신앙의 기초가 없고 전과 많은 남편과 결혼하여 살면서 당한 모든 일들이 오늘 재소자 가족들의 아픔과 결손 가정의 자녀들의 심정이 어떠하며 그 가족들의 고통이 어떠한가를 이해하며 생과부 된 이들의 외로움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교도소 담 밑에서 쭈그리고 앉아 홀로 눈물 지으며 한숨짓는 노모님들을 만나면 우린 백 마디 말이 없을 지라도 벌써 이심전심이 되고 맙니다. 교도소 사역이란 특수 선교 사역인 만큼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마치 다니엘의 사자굴 속과도 같고 풀무불 속에 뛰어드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현재도 무겁고 힘든 십자가를 지고 있습니다. 사탄에게 붙잡힌 불쌍한 나의 남편을 비롯한 모든 방황하는 자들을 위해 저녁마다 두 손 들고 대신 벌을 섭니다. 그리고 회개의 중보기도를 드립니다.

 앞으로도 내 앞에 어떤 사탄의 돌풍과도 같은 시련의 바람이 불어닥칠지 모르나 담대히 대항하며 맞서며 하늘 뜻을 이룰 것입니다. 그리하여 '갇히고 눌린 자 위한 사랑의 삶에 죽으면 죽으리다'의 신앙 일념으로 순교의 꽃을 피울 것입니다.

 처음엔 강퍅하였으나 주의 사랑으로 복음을 받고 먼저 하늘 나라에 간 최고수 형제들, 나의 애인들, 그들의 사랑 손 때 묻은 편지를 보며, 지금은 주의 영광의 나라에서 주님께 내 소원을 직고하며 나와 온 성도들을 기다리며 영원 안식을 누릴 것을 상상해 봅니다.

 이제, 사랑하며 살기도 부족한 시간, 상한 비둘기와 상처입은 사슴처럼, 죄의 사슬에 묶여 떨고 있는 재소자들 모두를 품을 수 있는 사랑의 어머니가 되겠습니다.

 앞으로 10년 후엔 전국 교도소가 하나 하나 백기를 달며 교회가 되기를 위해 두 무릎 세워 기도 올립니다. 나의 평생 순례길을 다 할 때까지 나의 애인들을 사랑하며 보듬어 안고 저 천성에 이를 것입니다. 지금도 나의 마음은 교도소 안의 사랑하는 애인들과 함께 있습니다.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내 삶의 끝날까지!.


                     한  송  이   백  합  되  리  다

                 여린 심지 불꽃 하나 주님 앞에 섭니다.
                 바람에 꺼지지 않도록 주여 도와 주옵소서
                 갇히고 눌린 자 위해 사랑의 어머니 되라
                 주님 명령받은 이 몸 엎드리어 웁니다.
                 세상 부귀 날 비웃고 세상 권세 날 버려도
                 아버지의 사랑만은 영원토록 함께 하소서
                 어둔 세상 불 밝히는 작은 불꽃 하나로 남아
                 태우고 또 태워서 한송이 백합 되리다.

                 이름 없는 들풀 하나 주님 앞에 섭니다.
                 찬 바람에 견디도록 주여 도와 주옵소서.
                 꽃피워 향내 내리라 열매 맺어 영광돌리리
                 죽으면 죽으리다 이 몸 엎드리어 헌신합니다.
                 원수 마귀 날 찔러도 하늘 나라 소망하며
                 아버지의 품 안에서 영원토록 함께 하소서
                 썩은 세상 향내 내는 작은 들풀 하나로 남아
                 피우고 또 피워서 한 송이 백합 되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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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정순 목사 인터뷰
포로된 자에게 자유 선포하는 전도자

 
 정윤석 기자

고 3때부터 기도하던 엄정순 목사(39)의 간절한 소망은 21세 때 이루어진 셈이다. 푸른 수의를 입은 재소자들에게 복음 전도하는 전도자가 됐기 때문이다.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며 교도소를 오간지 18년, 그녀는 가장 어려운 곳에서 맛보는 가장 보람된 체험들을 해 왔다. 그것은 복음을 전하다가 최고수(사형수) 형제들이 예수를 영접하고 천국에 가도록 다리 역할을 해 주는 것이었다.

 물론 사형수들은 지면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끔찍한 일을 저지른 사람들이다. 강원도에서 가족들을 몰살시킨 사형수 등.... 이들은 처음에 모든 것을 거부하고 형무소 안에서도 자살을 기도하는 등 극단을 치닫는다. 정상이 아닌 것이다. 엄정순 목사는 그래도 두려워 하지 않는다. 끊임없는 편지, 가끔 넣어주는 영치금, 이러한 사랑과 기도가, 굳어질 대로 굳어진 사형수들의 마음을 녹였다. 그리고 예수의 뜨거운 피가 그들의 차디찬 죄수복 속으로 수혈되는 것이다.

 힘든 점도 없지 않겠지만 "여성이란 점 때문에 더 환영받아요"라며 자신의 힘든 점보다 재소자들이 좋아한다는데 관점을 맞춘다. 그리고 그것을 보람으로 생각한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그녀의 성품은 그녀를 성숙한 상담자로 만들었다. 깨져가는 가정, 역기능 가정과 대화하는 상담자가 되어 화해시키는 사역도 하는 것이다. 물론 그녀가 현재 일궈 놓은 가정도 역기능 가정이다. 때문에 깨져가는 가정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상담에 임한다.

 떠난 남편은 돌아올 줄 모른다. 그러나 원망하지 않고 기다리겠다고 한다. 왜냐하면 사랑하기 때문이다.

 아픔 가운데도 엄목사의 사역에는 휴식이 없었다. 94년부터 직접 디자인한 넥타이와 스카프를 판매하며 이익금은 출소자 선교기금으로 쓴다. 96년에는 인덕원 교회를 개척했다. 현재 20여 명의 성도가 모이는 교회의 목사인 것이다. 

 그녀의 꿈은 아직 머물지 않고 계속 앞을 보고 커나가고 있다. 출소자 자활의 터전 마련, 재소자 가족선교, 불우재소자 자녀 양육센터 건립, 교도관 선교는 주님이 자신에게 맡겨준 특수 사역임을 믿기 때문이다.
(월간 <교회와신앙> 1997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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