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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애 권사02/ 하나님의 대학, 한동대학교
1999년 01월 01일 (금) 00:00:00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김영애권사/ 온누리교회, 한동대 총장 사모


학교 주변은 논과 들, 그리고 산으로 둘러 쌓여 자연경관이 아름답지만 신설대학이라 여러 가지 문화시설이 부족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 온 남편이 불쑥 말했다.

"학교에 카페를 차리려면 돈이 얼마쯤 들까?"
"그건 왜요?"
"오늘 운동장을 지나가는데 학생들이 우리 학교에도 카페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부탁했어. 그래서 기도하자고 했지."

그는 차마 학생들에게 거절할 수 없어서 이미 반 약속을 한 것 같았다. 그 때 학교 형편으로는 카페시설이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나는 하나님께 기도했다. "식언치 않으시는 하나님! 당신의 아들이 총장으로서 식언해서 되겠습니까! 카페를 할 수 있도록 돈을 주세요!"

그 때 우리는 룻기서를 매일 묵상하고 있었다. 남편을 잃은 젊은 룻은 시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며 편안한 새 출발이 기다릴 수 있는 모압을 선택하지 않고 시어머니를 따라 나섰다. 그녀의 신앙적인 선택에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기근이었다. 그녀는 가난을 면하기 위해 곡식 이랑에서 낱알을 주어야만 했다. 그러한 룻을 눈여겨보던 한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그 사람은 그녀 앞에 곡식자루를 쏟아 부었다. 보아스였다. 그때 룻은 감동하여 보아스에게 말했다.

"소녀가 누구인 줄 알고 이렇게 선대하십니까?"
"나는 네가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온 줄 아노라."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나는 매일 주님께 눈물로 부르짖었다.
"하나님, 우리가 어떻게 해서 이곳까지 온 줄 아시지 않습니까? 우리 교수들도, 학생들도 그리고 학부형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서 하나님의 대학이라고 황무지에 선구자요 개척자로 아름다운 선택을 하였습니다. 우리에게도 보아스를 보내 주세요."
그리고 이 말씀을 어떻게 적용할까 생각했다.
이삭을 줍듯이 카페에 쓰일 헌 가구를 모으기로 했다. 이제 개교한 지 4개월째인 학교가 재정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아직 공개적으로 소문낼 용기가 없었다. 온누리교회의 성가대 연습실을 찾아갔다.
"성가대 여러 성도님들! 버리기는 아깝고 쓰기에는 헌 소파가 있으면 한동대학으로 보내 주세요. 우리는 신설대학이라 소파가 많이 필요합니다."

성가대 식구들이 눈치를 챘는지 얼마 후, 세 트럭 분의 헌 가구들이 학교에 도착했다. 교수 사모님들은 큰 교실을 치우고 가구들을 그 방에 배치했다. 좀 새 것은 입구쪽에, 낡은 것은 안쪽으로 배치했다. 어떤 분은 큰 식탁도 보내왔다. 남편은 헌 가구로 가득 찬 그 방을 보고 무척 좋아하며 지나가는 학생들을 그 방으로 불렀다.

"여러분 이제 카페가 다 되었어요!"
방을 둘러 본 학생들은 싱긋이 웃으며 꾸벅 절을 했다.
"총장님, 그리고 사모님들! 감사합니다!"
그러나 신세대인 그들이 눈에 그 카페가 마음에 들리 없었다. 그 방은 총 천연색 중고가구 전시장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난한 집안의 가장이 어찌 하든지 자식들의 뜻을 이루어 주고 싶은 마음이 바로 모두의 심정이었다.

학교 채플에 설교하러 오신 Y 목사님께 우리의 간절한 기도 제목과 QT 간증을 이야기했더니 그는 우리를 격려했다.

"권사님, 보아스가 나타날 거예요. 룻의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셔서 한동대학에도 똑같이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한동대학에 보아스를 보내 주시도록 저도 기도하겠습니다."
얼마 후 그로부터 전화가 왔다.

"권사님, 보아스가 나타났습니다. 곧 함께 포항으로 내려가겠습니다."
목사님과 함께 현관 앞에 한 젊은 부부가 서 있었다. 그런데 옆에 서 있는 부인을 보니 안면이 있는 분이었다. 나는 2년 전 한양 Y기독실업인 여성 모임에서 한 달에 한 번 정도 성경공부를 인도한 적이 있었다. 그때 만난 성인숙 집사였다.

"아니, 집사님이 여기 웬일이세요!"
그들 부부는 6개월 전에 돌아가신 아버님으로부터 유산을 물려받았다. 생전에 아버님이 가난한 친척들을 가족도 모르게 공부시키셨던 것을 뒤늦게 알게 된 그들은 아버님을 생각하며 자신들도 얼마간 가난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싶다고 목사님께 의논했다. 그러자 목사님은 제안하기를, "집사님! 한동대학을 아시지요? 그 학교에 카페를 차려 주고 수익금으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그분들은 이곳 포항으로 내려 왔다고 했다.

학교를 돌아 본 그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마음이 사로 잡혔다. 포항공항을 떠나기 전 그들은 나의 손을 잡고 말했다.
"권사님, 예쁜 카페를 하나 하셔요."
나는 그들이 얼마를 생각하고 있는지 참으로 궁금했지만 차마 묻지 못하고 그들을 전송했다. 며칠 후 서울에서 그 가족들과 다시 만났다. 나는 궁금함을 도저히 참지 못하고 바로 내 옆에 앉은 그녀에게 살짝 물어보았다.
"얼마쯤 생각하고 계시는데요?"
그는 내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권사님, 20억입니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아니 그렇게 큰 액수를! 그들도 학교에 내려오기 전까지는 그렇게 많은 액수를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성집사님은 2년 전보다 마르고 수척한 나의 얼굴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편안한 옛 생활을 두고 무엇이 부족해서 저들이 여기 와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일까!' 생각하며 돕고 싶은 마음 간절해졌다는 것이다. 그들은 나에게 카페보다 더 아름다운 간증을 들려 주었다.

맏사위와 맏딸인 이들 부부가 자신들의 유산을 한동대학에 기증하기로 결심하자, 한동대학의 이야기를 들은 동생들 4남매도 이미 분배받은 자기들의 유산을 내어놓기로 했다고 한다. 그들은 그 유산으로 지금 보다 더 넓은 아파트, 더 좋은 자동차로 편안한 삶을 살 수 있겠지만, 그 형제들은 아버님의 정신적 유산을 물려받는 것이 더 소중하다고 했다.

우리 부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놀라운 감격과 두려운 책임감이 앞섰다.

기증액수를 뒤늦게 들은 남편도 깜짝 놀랐다.
"하나님의 대학, 한동대학에 아직 채플이 없으니 그들만 동의한다면 이 돈으로 먼저 하나님의 전을 지어야 해, 물론 카페도 함께!"

그들은 즉시 현금 20억을 학교로 송금해 주었다. 지금 그 아버님의 호를 딴 효암관 건물공사가 한창 마무리 작업중에 있다. 얼마 있지 않아 천 명 이상 들어가는 채플 겸 다목적 효암관의 준공을 앞두고 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아름다운 선택을 했던 룻을 돌아보신 하나님께서는 궁핍한 우리 한동식구들도 돌아 보신 것이다.

"궁핍한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보지 아니함이여 가난한자가 영영히 실망치 아니 하리로다"(시 9:18).

한동대학은 개교와 함께 학생들 뿐 아니라 총장도 교수들도 모두 광야학교에 입학한 것이다. 광야는 오직 하나님 말씀으로만 살게 되어 있는 곳이다. 자신의 절대 무능을 느끼며 오직 하나님만 의뢰하는 훈련학교요, 하나님 앞에 보잘것 없는 우리의 자아가 깨어지는 학교이기도 했다. 내게도, 남편과 함께 한동의 광야학교에 입학한 후 매일 하나님 앞에 무릎꿇는 훈련이 시작되었다. 하나님은 아주 작은 것 하나라도 우리의 능력이나 힘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철저히 가르치시기를 원하시는 듯했다. 왜냐하면 어느 것 하나 쉽게 되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신 8:2).

재정의 훈련을 통해 하나님 의지하는 법을 배우다
초대 이사장이 떠난 후 학교는 또 하나의 위기를 맡게 되었다. 재정보다 더 큰 위기였다. 치밀하고 조직적인 힘에 의해 학교는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개교한 지 8개월째인 10월 어느 날, 학교와 총장을 맹렬히 비방하는 성명서 광고가 지역신문에 연거푸 게재되기 시작했다. 세인의 관심과 대학가에 주목을 받으며 화려하게 출발한 한동대학이 여지없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학교는 이전투구의 모습으로 세상에 비쳐지기 시작했다. '한동대학은 특정종교 집단에 치우쳐서 지역정서에 맞지 않으며, 지역학생들이 입학할 수 없는 높은 수준의 명문대학이 됨으로서, 지역에 하나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공격의 명분이었다. 따라서 기독교 대학이 아닌 시립대학으로 전환하라는 여론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지역대 비지역, 기독교 대 비기독교로 학교와 지역을 이간시키기에 꽤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학교에 무서운 풍랑이 일며 좌초의 위기가 닥치자 우리는 하나님께 더욱 매달리며 하용조 목사님께 도움을 청했다. 시립대학을 하라는 무서운 압박으로 워낙 다급한 상황에 목사님은 어떨결에 한동대학의 이사장이 되셨다. 새 이사장은 대학의 재정적인 위기도 해결해야 하는 무거운 책임도 동시에 져야 했다.

하목사님이나 총장인 남편도 아무 대책도 계산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개교하기 8개월 전에 이미 재단기업이 무너진 학교를 하나님이 친히 이끌어 가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간신히 개교를 한 총장이나, 기독교 정신의 대학을 포기하고 시립대학을 하라는 위협에서 학생들과 학교를 구하기 위해 엄청난 빚을 떠 맞게 될 하목사님이나 모두 세상적으로 보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사장이 된 후부터 하목사님은 어디에 어떻게 쓰여진 영문도 모르는 어음들을 막느라 얼굴이 수척해지고 새벽제단에 무릎 꿇는 시간이 길어졌다. 평생 겪어 보지 못한 사건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떤 땐 속수무책으로 어음을 막을 길이 없어 목사님과 남편은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앉았던 적도 있었다. 하목사님의 더욱 수척해진 모습을 보며 교회 식구들이 우리를 원망할 것 같아 기가 죽은 상태에서 고개를 숙이고 예배를 드린 적이 많았다. 이렇듯 학교 재정은 늘 긴박하여 하루도 마음놓을 날이 없었다. 당장 막아야 하는 천문학적인 숫자의 어음 앞에, 앞이 캄캄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우리에게 남겨진 학교의 부채와 재정문제는 광야 학교에서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지하는 법을 배우는 교과서요 시험지였다. 때로는 벼랑 끝으로 금방이라도 추락할 것 같은 절망감에 빠질 때도 있었다. 재정이 늘 어렵고 돈이 없는 가운데 해마다 50억 가까이 드는 기숙사를 한 동씩 지어야 했다.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학교의 위치상으로도 학생들의 전원 기숙사 생활이 불가피했다. 하나님이 주실 것을 믿고 일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기기묘묘한 방법으로 우리의 재정을 채워 주셨다. 곧 미끄러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가파른 절벽에서 사람들의 돕는 손길들을 통해 하나님은 격려의 밧줄을 때맞추어 우리들에게 던져 주셨다. 절박한 순간마다 어김없이 하나님은 돕는 손길들을 보내셨다.

하나님만 의지해야 하는 캄캄한 현실이 너무 두렵고 무섭고 외로울 때마다, 목사님은 늘 함께 걱정하고 기도하며 격려해 주셨다. 그가 학교를 도와줌으로서 개인적으로 받은 고난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또한 온누리교회도 재정적으로 큰 부담과 짐을 지게 되었다. 하목사님 자신도 모략과 중상으로 곤욕을 치르면서도 하나님의 대학, 위기에 처한 한동대학을 세우는 일에 함께 동역하는 것을 기뻐하며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그는 이 일이 분명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명임을 확신하고, 고통받고 신음하는 양을 위해 스스로 대가를 치르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 주셨다.

끝없는 성명서 전쟁
학교의 어려움은 재정뿐 아니었다. 또 다른 무서운 핍박과 시련이 닥쳤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육지에서 아득하여 갇힌바 된 바닷가에 장막을 치라.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여 내가 어찌하여 이 백성들을 나를 섬김에서 놓아 보냈는고 후회하며 바로가 병거 육백 승과 군대 장관을 거느리고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모세가 여호와 앞에 부르짖으매... 이는 내가 그와 그 온 군대를 인하여 영광을 얻어 애굽사람으로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출 14장)

이 절박한 상황이 우리 눈앞에 현실로 벌어졌다. 한동대학을 지역정서에 맞도록 시립대학으로 전환하라는 여론을 조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백화점 앞, 사거리, 그리고 단체 모임에서 시민들의 서명을 받아내는 용지가 배포되었다. 어떤 날은 학교 비난 성명서가 아파트의 우체통마다 꽂혀 있기도 하고, 배달되는 신문 간지에 광고지처럼 집집마다 끼어 배달되기도 했다. 날이 갈수록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공격을 가해 왔다.

우리는 육지에서 아득한 고도에 완전히 갇힌바 된 심정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몇 달 동안 요란했던 서명운동은 서명 목표 수를 달성한 듯 조용해졌다. 드디어 십만 명 이상의 시민들이 기독교정신의 대학을 반대한다는 서명을 받아 교육부와 관계요로에 진정한 것이다.

우리는 속수무책이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았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 시니이다. 내가 내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시 3:1~4).

나는 이 말씀만 의지하며 창밖의 바다를 바라보며 하나님께 눈물로 울부짖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이 과정에서 개입하셨다.

교육부에 진정이 올라오면 그 복사본을 해당 학교로 보내 주게 되어 있다. 그런데 교육부에서 학교로 보내 준 몇 장의 서명서 복사본 중에 한동대학 교수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 주민들의 서명서가 끼어 있었다. 교수 사모님들이 친하게 지내는 아래 윗층의 이웃들에게 서명 사실 여부를 물어 보았다. 아파트 주민 20가구 중에서 10가구 이상이 자신도 모른채 자기들 이름으로 도장이 찍혀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들은 위조서류에 분노하면서 이 일에 자신들이 증인을 서겠다고 했다. 참으로 이 일이 어찌 우연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곳에서 한 장의 조작된 서명서가 발각됨으로서 그 동안 10만 명 서명운동이 효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그토록 조직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막강한 재력까지 소모되었을 시립대학화의 주장은 슬거머니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제비는 인간이 뽑지만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

10만 명 서명 중 교육부에서 보낸 몇 장의 서류 중에 그 복사본이 뽑힐 수 있는 확률은 5천 분의 1이었다.

"여호와께서 내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시니 사람들이 내게 어찌할꼬"(시 118:6).

우리 앞에는 우리의 힘으로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궁핍한 재정의 홍해가 넘실거리고 있었고, 뒤에는 병거 육백 승을 거느린 군대장관들이 있었다. 오늘날 우리를 위협하는 병거 육백 승은 지역신문을 통한 성명서 기사들이었다. 막강한 세를 가진 공격자들이 우리를 추격하는 군대장관들이었다.

총장과 학교를 비난하는 성명서 광고를 지방신문에 내던 중에 5월 어느 날, 드디어 서울의 4대 중앙지인 신문에도 전면광고로 냈다. 광고비만 해도 엄청 든 큰 성명서였다.

네 번씩이나 실린 성명서를 보고 나는 그만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두렵고 무섭고 아팠다. 나는 잠시 나의 피난처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혹시 우리가 너무 순진하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닌가?"

주위에서 우리를 아는 사람들이 이 성명서를 보면 김영길 박사 예수 믿고 이제 망하게 되었구나 하는 소리를 할 것 같았다.

"하나님! 우리 이름은 고사하고라도 하나님 이름은 뭐가 됩니까?"

나는 하나님께 항의하며 한없이 울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성실한 과학자로 살아 왔는데, 이제 이 땅에 더 이상 살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했다. 남편이 나보다 뒤늦게 신문을 읽고 울고 있는 나에게 말했다.

"뭐, 생각보다 괜찮네! 당신 저기 벽에 걸어 둔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은 벽걸이로 그냥 걸어 놓은 거요? 우리가 저 말씀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면 죽은 송장이 아니오? 송장이 자기 명예 훼손이 되었다고 벌떡 벌떡 일어나는 것 보았소? 나는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니오. 하나님께서 내 이름을 쓰시도록 그분께 나를 올려 드렸으면 나를 높일 때만 드리고 낮출 때는 드리지 않았소? 몇 십 년 지나면 아무도 내 이름을 기억하지도 않을거요."

그리고 남편은 이제 나를 웃기려고 농담까지 했다.

"내 이름을 가져 가신 분이 내 이름을 가지고 삶으시든지, 구으시든지 나는 아무 권리가 없소!"

그제서야 나도 여유를 조금 찾아 남편에게 말했다.
"뭐 신문에 난 이름은 김영길이지, 김영애가 아니니까요.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난 당사자가 괜찮다고 하니 나도 괜찮아요."

나는 예수님을 영접한 후로 갈라디아서의 이 말씀을 좋아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저 말씀을 좋아해서 이런 고난이 오는가 싶어서 액자를 슬그머니 벽에서 떼어 내려놓기도 했다. 외울 때는 좋았고, 찬양할 때는 좋았지만 실제로 자신이 죽어야 하는 삶은 달랐다. 나는 한동의 광야대학에 입학하기 전에는 나 스스로 주님을 잘 따르고 잘 믿는 줄 착각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나는 여지없이 형편 없는 실력이 드러났다.

이 말씀을 실제 삶에 적용하며 산다는 것은 너무나 무섭고 어려웠다. 나는 이 광야대학에서 나도 모르게 나를 묶어 둔 자신의 자존심과 자아가 깨어지는 아픔을 겪으면서 비로소 조금씩 자유하는 법을 배워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남편은 성격이 단순하고 좀 둔한 편이어서 견딜 수 없는 현실을 잘 참아냈다. 나는 남편에게 가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은 감정의 나사 하나를 풀어 창조하셨나 봐요."

하나님의 귀한 동역자들
탁월한 교육학자로서 한동대학 교육 프로그램을 칭찬하며 격려해 주시던 전 국무총리인 이영덕 장로님은 하나님의 몸된 교회가 공격을 받고 주의 종이 공격을 받으니 평신도인 내가 차라리 몸으로 막아야 겠다고 한동대학 이사장직의 부탁을 수락하셨다. 그는 장차 유능하고 정직한 인재를 배출하고자 하는 한동대학교에 이 나라의 소망이 있다고 하셨다. 또한 전 과기처 장관인 정근모 장로님도 한동대 후원회장으로 앞장 서셨다. 한창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한동대학에 합류, 하나님의 뜻을 함께 이루어 가자고 후원회장을 맡으셨다. 이들 모두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들로, 고난과 역경을 알고도 이 시대 이 민족, 이 세계를 품은 기독인재를 배출하려는 사명으로 한동호에 승선하게 된 것이다. 학교에 대한 공격이 클수록 그 풍랑을 인하여 한동호는 더 빨리 항해하고 있다.

88년 온누리 교회에서 남편이 장로 장립을 받을 때, 우리 구역 식구들이 족자 하나를 선물했다.

"세상에서 거저 주는 열 가지 기쁨보다 주 안에서 한 가지 고통을 감사하며
만인의 조롱함을 무서워하기 보다 주님의 비웃음을 두려워할 것이며
세상의 방법으로 존경받는 자 보다 주님의 방법으로 인정받는 종되며
천 마디 만 마디의 가증된 입술보다 한마디 진실한 말하는 입술되어
주의 영광 위하여 주의 뜻 이루는 초석되게 하소서."

나는 이 족자의 글을 읽자 마음이 무거웠다. 그래서 집사님께 말했다.
"집사님! 나, 이 글 싫어요. 이렇게 살려면 얼마나 힘들겠어요?"
"권사님, 그러면 다른 액자로 바꾸어 올까요? 별로 마음에 드는 구절이 없어서 골랐는데...."
그러나 가지고 온 선물을 다시 바꾸어 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 대신 나는 그 족자를 잘 보이지 않는 구석에 걸어 두고 가끔씩 힐끔 보기만 했다.

그러나 이제 10년의 세월이 지나 한동의 광야에서 슬픔과 고난을 겪으면서 어느 날 문득 눈에 들어 온 그 족자는 나를 눈물겹게 했다. 그리고 마음에 파고들었다. 이제는 나는 그 말씀처럼 살기를 소원한다. 지금 나는 나를 구원하신 주님보다 사람들의 이목을 두려워하며 내 몫의 십자가를 던져 버리려는 나의 이기적인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나는 주님 앞에 죄송하여 울었다. 나는, 이제는 나는 나를 위해 보배로운 피를 흘려 그 값으로 대신 사신 나의 생명! 25년 전 나는 구원의 비밀을 깨닫고 영생을 값없이 은혜로 내게 주신 그 순간부터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에 나는 얼마나 감격하며 살아왔던가!

이제 나는 나의 주님이 우리에게 당부하신 새벽이슬같은 이 세상을 변화시킬 청년들을 양육하도록 우리에게 맡기신 특권을 감사하며 살고자 한다.

나는 사랑스러운 한동의 학생들을 보며 우리의 미래에 소망을 갖는다.

"이제 스무 살 안팎의 너희 청년들아!
어찌 우리 마음을 이렇게 울리는가!
머리 희끗희끗한 우리들
너희를 향한 사랑 이토록 간절한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기 때문이라.
우리 하나님께서 너희를 향한 뜻이 너무 크기 때문에,
너희들은 이 세상을 변화시킬 하나님의 다니엘들이기 때문에!"

한동에서 미래의 지도자들로 훈련받고 있는 이 민족의 작은 모세들인 우리 학생들! 이들은 장차 세상이 감당치 못할 하나님의 사람들로 그들이 있는 곳곳에서 지도자로서 세상을 변화시키게 될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히 11:1).
하나님 영광 받으소서!
(월간 <교회와신앙> 1999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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