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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더 깊은 신앙의 길(고춘자 권사)
1998년 09월 01일 (화) 00:00:00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고춘자 빛과소금교회 권사


보살이었던 할머니의 점괘는 이상했다. 일본군으로 징용당한 아버지가 죽든, 갓 태어난 내가 죽든 둘 중에 한명이 반드시 전쟁기간 동안 죽을 괘라고 했다. 어차피 한명이 죽을 것이니 할머니는 "아버지가 살아 돌아오기를 원하면 갓 태어난 아기를 죽이라"고까지 하며 점괘를 근거로 어머니를 닦달했다. 둘은 함께 살 수 없는 연이라는 것이었다.

계집아이는 쓸모 없고 사람 대접도 제대로 받지 못하던 때인데다 아버지는 징용을 당하고 혼자 시어머니를 모시던 어머니는 매일같이 그 일로 들볶여야 했다. 그래도 어머니가 계속 버티자 할머니는 "죽이지 못하겠으면 차라리 딸을 갖다 버리라"고 했다. 죽이라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밤이면 승냥이가 오가는 동네라는 것은 둘째 치고라도 버려진 아이가 혼자 살 수 없는 것은 뻔한 이치였다. 그러던 어느날 어머니는 동네 사람에게 자신의 처지를 얘기했다. "시어머니가 연이 안 맞아 부녀가 같이 살 수 없다"며 "버리든지 죽이든지 하라고 닦달한다"고 하소연을 하자 그 얘기를 들은 이웃 사람은 귀가 솔깃한 제안을 했다.

"이웃 동네에 사는 부부가 있거든. 예수를 믿는 집인데 애기를 낳지를 못해. 그 집에 딸을 주고 버렸다고 하는 것이 어떨까?"

버리느니 차라리 그 집에 주는게 낫다고 생각한 어머니는 나를 그 집의 수양딸로 넘긴 것이다.

이 이야기는 내가 자라면서 듣게 되지만 지금도 60이 되어가는 나의 마음 가운데 아픔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한 가정에서 버려진 나를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가정으로 나를 보내셨고 이 가정에서 어렸을 때부터 예수님을 영접하게 하셨을 뿐 아니라 수양딸임에도 불구하고 깊은 정과 사랑을 받으며 자라도록 인도하셨다.

지금은 감사할 따름이다. 만일 내가 보살 집에서 버려지지 않고 자랐더라면 예수님도 몰랐을 것이고 어쩌면 할머니가 하던 일을 잇게 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수양딸로 자라온 어린 시절
예수님 믿는 가정에 수양딸로 온 나는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하는 충신자가 되었다. 학생 때부터 열성을 다했고 시집가기 전까지 주일학교 반사를 하며 교회에서 개척한 곳에서 친구들과 활동을 했다. 늑대의 안광이 왔다 갔다하는 밤길도, 새벽길도 두려워하지 않고 교회 모임이 있으면 최우선 순위로 생각하고 다녔다. 시골교회의 사역이 힘들어서 떠나는 전도사님과 정이 들어 친구들과 눈물의 전송을 한 것도 다반사였다. '이제 교회는 어떻게 하나' 라는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던 나는, 예수 믿는 가정이라면 그저 좋은 것으로만 알았다. 순수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시집갈 때도 조건을 딱 하나 내세웠다. 우리 가정처럼 '예수 잘 믿는 집'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교회의 나이든 여전도사님은 이런 내 생각을 알고 열심히 중신을 섰다. 그분은 '여자가 예수를 믿는다'고 심한 핍박을 받아 집을 나와 신앙생활을 할만큼 열성적인데다 각 지역을 다니시며 교회를 17개 가량 세우신 분이었다. 어머니도 그분을 통해 신앙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나는 그분을 '할머니'라고 부르며 따랐고 그분은 나를 손녀처럼 귀여워 해 주셨다. 그 할머니가 중매를 서신 것이다. 할머니는 현재 내가 시집온 이 집이 잘 살뿐 아니라 무엇보다 예수를 믿는 가정이라며 칭찬을 했다.

"그 집의 마루에서 교회가 시작되었을 정도로 복받은 가정이고, 교회가 독립할 때는 터까지 마련해 준 가정이여!"

그러나 한 가지 감춘 것이 있었다. 바로 신랑이 교회를 잘 안 다닌다는 점이었다. 나는 시어머니는 집사였고 시아버지는 교회는 잘 안 다니셔도 교회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협조를 해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랑될 사람도 교회를 잘 다니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할머니가 그렇게 강조를 했기 때문에 그대로 믿고 있었다. 후일에 그 할머니는 "네가 그 집에 들어가면 신랑도 교회를 잘 다니게 될 줄 알았다"고 신랑의 신앙상태를 감춘 것에 대해 설명했다. 어쨌든 나의 결혼 조건을 잘 아시는 할머니가 신랑을 신앙 좋은 사람으로 추켜 세웠기 때문에 나는 나의 기준에 맞게 시집을 온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시집을 와서 보니 예수를 잘 믿는다는 신랑은 신앙에 대한 열정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것은 순탄치 않은 시집살이를 예고하는 듯했다. 신랑의 신앙을 알고부터 너무나 속이 상한 데다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말도 못할 정도로 심한 시집살이였다. 그 지역에 살던 사람이 다 알고 심지어는 교인들까지 알 정도였다.

결혼의 조건은 단 하나
시집살이는 집에서 운영하는 공장의 식모 노릇을 하는데서부터 시작됐다. 집에서 정미소, 연탄공장을 했기 때문에 많은 일꾼들의 밥, 빨래를 해 줄 사람이 필요했는데 내가 시집와서 해야할 주된 일이 바로 이 일이었다. 식모역할을 톡톡히 하게 된 셈이다. 밤낮으로 밥하고 빨래하고 옷을 깊고 하기를 수년 동안 하니 열 손가락이 생인손을 앓다시피 했다.

당시 나를 잘 아시던 담임목사님은 교회 일을 많이 하다가 시집간 후 달라진 것을 염려하여 시부모에게 "교회일을 하던 사람을 이렇게 가둬 놓으면 안된다"며 "교회에 내보내라"고 강권했다. 시어머니도 목사님 말이라면 순종하던 터라 이 말이 있고서야 겨우, 마지못해 나를 교회에 보내기 시작했고 내가 아동부 교사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시간을 할애해 주기도 했다.

그러나 식모처럼 내게 맡겨진 일을 해 놓아야 하는 데는 변함이 없었다. 그 날 할 일을 반드시 해 놔야 하기 때문에 교회 시간이 끝나면 시아버지는 어김없이 나를 데리러 가기 위해 교회 문앞에서 지키고 계셨다. 집에 들어오는 것은 정말 호랑이 굴처럼 너무너무 싫고 무서웠다. 그렇게 교회를 다녀왔다가 시어머니에게 일 못한다고 야단 맞으며 그냥 눈물로 지낸 적이 비일비재했다.

차츰 이런 생활이 계속되자 하나님이 원망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나님, 제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라고 원망하며 기도하고 싶어도 기도할 시간이 없을 정도였다. 잠을 자야할 시간인 새벽 2시에 일어나 연탄 배달 나가는 일꾼들의 밥을 해 주기 위해 기계처럼 일어나서 밥을 해 줘야 했을 정도로 바쁜 일정을 보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을 당할 때마다 마음속에는 시어머니의 신앙에 대해 의심하는 생각이 들었다. 심하게 말하면 시어머니는 믿는 사람 같지가 않았다. 하루도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는 분이 대문을 열고 들어오면 시작하는 말이 욕이었다. 22살의 나이에 무서운 나머지 맨날 울면서 살다시피 했다.

식모같이 생활한 시집살이
교회에서 실컷 기도하며 울고 싶었던 차에 기회가 생겨 교회에 갔다. 의자에 앉자 마자 울음이 나왔다. 하소연이 시작되었다.

"하나님, 예수님 믿는 사람이면 다 좋은 줄로만 알아서 잘 믿는 곳으로 시집가서 예수님 잘 믿게 되기를 원했는데 하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막상 시집을 와 보니까 신랑은 신앙이 없고 예수 잘 믿는 줄 알았던 시어머니도 이렇게 고된 시집살이를 시키시니 제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마구 따지며 울었다. 한참을 이렇게 기도를 하는데 옆에서 누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나를 중매해 준 할머니가 나를 생각해서 울며 기도하시며 우나 보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눈을 떠서 확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런가 보다하며 계속 해서 하소연하는 기도를 했다. 그런데 실컷 하나님께 시아버지 시어머니에 대한 푸념을 늘어 놓고는 눈뜨고 보니 옆에 있는 분은 할머니가 아니라 시어머니였다. 비밀스럽게 하나님께 하소연 한다고 감정에 못이겨 할 소리 못할 소리를 한 것을 시어머니가 다 들어버린 것이었다. 얼마나 가슴이 덜텅했는지 모른다. 너무나 겁이 났는데 놀랍게도 시어머니는 나의 기도를 들어보니 마음이 조금 움직였던 것 같다. 당신도 울면서 기도를 하고 계셨던 것이다.

시어머니도 기도가 끝나셨는지 말없이 나가셨다. 나는 집으로 와서는 민망해서 고개를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의외로 이 일을 겪은 후로 잠깐 동안은 시어미니의 야단이 오히려 줄었다. 내가 불쌍하게 느껴진 듯했다. 그 다음주에는 시아버지도 두루마리를 걸치시며 "며느리가 예수 잘 믿는 집인 줄 알고 시집왔다가 아닌 것을 알고 울며 기도했다는데 나도 교회에 가야되지 않겠나"라고 하시며 교회를 가시겠다고 할 정도였다.

그런데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또 시어머니의 구박은 시작되었다. 이유는 일 못한다는 점외에 한 가지가 더 있었다. 시집올 때 갖고 온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발단은 그런 점이었던 듯했다. 외아들로 자란 남편의 아내로 들어오는데다가 조금 '있는 집'이었기에 나에 대한 기대를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것이 충족 되지 못하자 일을 어떻게 하든 그것이 마음에 찰 리가 없었다. 미움을 사게 되었고 그것은 잘 풀리지를 않았다. 결국 어머니가 나의 단점 한가지를 발견하면 더 포장해서 시아버지에게 이르는 일이 반복되자 시아버지도 나를 미워하기 시작하셨다.

남편의 방황
이런 일이 반복되자 중간에서 남편만 심적고통을 더 받게 되었다. 남편은 방황하기 시작했다. 술을 마셨고 도박에도 손을 댔다. 그에 대한 책임에서도 나는 예외일 수 없었다. 이 일로 인해 시부모의 미움을 더 받게 된 것이다. "며느리 잘못 둬서 남편이 점점 더 망가진다"는 것이었다. 이에 남편은 불만을 풀지 못하고 계속 방황을 했다. 그러자 집안에 불화는 더 심화됐다.

나에게도 성격의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시부모가 무서워 고개도 못들고 살게 되자 다른 사람들도 미워져 얼굴 마주치는 것도 싫어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나는 맹세를 했다. '교회 안 나가겠다'고. 하나님이 계시면 어떻게 내가 이렇게 될 수 있을까라는 원망을 했다. 절대 교회를 안 나가겠다고 하나님 앞에 선언을 한 것이다. 교회에 발길을 끊고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가출이었다.

'안되겠다. 이 집 소원이 며느리를 잘 두는 것이라면 그렇게 해 주지. 자식은 시부모가 참 귀중하게 여기고 있지. 손자는 내 손에 한 번 만저보게도 하지 않고 젖먹을 때만 예외를 두었을 정도니까. 아이들은 시부모가 잘 키울 수 있을 거야.'

이렇게 해서 집에서 도망을 갔다. 그렇다고 친정에는 갈 수가 없어서 친구 집을 찾아갔다. 그런데 그 집에서 며칠을 묵다가 한 번은 창밖을 보니 중매를 섰던 할머니, 시아주버니도 보이는 것이었다. 나를 찾으러 온 것 같았다. 숨어서 나가지를 않았다. 그런데 친구집을 아는 할머니는 늘 그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결정적으로 친정어머니가 왔다.

"니가 자식을 고아로 만들 작정이냐, 니가 힘들다고 어떻게 자식을 버릴 수가 있느냐, 죽어도 그 집에서 살아야 한다고 각오하고 들어가라!"

울며 강권하시는 어머니의 말씀에 마음이 흔들린데다 시아주버지도 찾아왔다. "너를 찾고 있다. 들어가자."
"싫어요. 나를 그토록 미워하고 싫어하는 그 집에 내가 왜 들어가야 하나요? 좋은 며느리 얻어서 다시 살아보라고 나온 것이니까 그렇게 살으라고 하세요."
"아니야. 너를 반드시 데리고 오라고 하신다."

그때 우리 시부모가 뉘우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욱이 어른들의 만류가 끊이지 않자 '자식을 위해서 희생한다'는 결단을 하고 다시 들어가게 되었다. 들어와서 보니 시집살이가 전보다는 덜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두 분의 성품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이런 모습을 보며 교회를 안 나가던 내게는 나를 바꾸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성품이 쉽게 바뀌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교회도 열심히 나가고 교회봉사도 많이 하고 그래서 믿음이 있는 분인데도 성격을 죽이지 못하니까 변화되지 않는 부분이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내 성격도 역시 변화받지 못하고 있었다. 믿음이 있다고 했지만 어려운 일이 생기자 쉽게 낙심할 정도로 약한 믿음의 사람이, 성품이 변화되었다고는 기대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남편은 때로 시아버지에게 매를 맞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 더 반항적이 되가고 있었다. 남편은 공장직원들과 함께 어두운데 앉아서 늘 화투를 치고 술을 마셨다. 시아버지도 술을 매일 드셨다. 약주를 하고 오시면 시어머니가 시아버지에게 늘상 무슨 말을 해댔고 그 소리를 들은 시아버지는 바로 나에게 와서 매를 드시기도 했던 것이다.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이제는 오래 살으셨으면 내 마음도 알고 내가 행동하는 것을 봐도 마음을 알텐데라는 원망이 들었다. 효도를 하려고 해도 받아주지를 않으셨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나는 아버지마저도 보이면 피했고 안 보이면 마음이 편했다. 이런 나의 사정을 아는 남편은 때로는 나가서 살자고 종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반대는 내가 했다.

"당신은 이 집에 하나밖에 없는 자식인데 나가면 부모님 마음이 어떻겠어요? 나나 나쁜 사람이 되어야지 당신까지 나쁜 사람이 되서는 안되요."

이렇게 강조했다. 그러자 남편은 막 경운기에 살림을 실으며 "동네 창피해서 못 산다"고 시위 아닌 시위를 벌일 때도 있었다.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때린다는 게 납득이 안되었던 것이다.

남편은 시아버지 속만 썩이고 반항을 했고 시아버지는 오히려 나를 보고는 "네가 그렇게 가르쳐서 아범이 저렇다"는 것이었다. 그런 남편이 안스러웠던 나는 용기를 내어 시아버지께 정미소와 연탄공장을 정리하고 목장을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했다. 남편의 방탕한 생활을 마무리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다행히 시아버지의 허락이 떨어져 우리는 목장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부터는 더욱 일 속에 묻혀 살게 되었다. 그러니 시집살이의 고됨도 잊고 살게 되었다. 시부모도 내가 일하는 것은 좋아했다. 밤에는 12시 안에 잠을 못 자고 새벽에는 시아버지가 오셔서 퇴계원에 사는 목장으로 오셔서 벌써 문 두드리고 방문을 열어 젖히셨다. 이렇게 일 속에 묻혀 살았다.

이런 과정 중에 나는 다시 교회를 다닐 것을 결심했다. 그런데 교회를 안 다닌지 오래되어서 교회를 가고 싶어도 끌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가자 소리를 아무도 않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어머니가 권사 취임을 하게 되었다. 권사 취임을 하게 되자 어머니의 마음이 달라졌다. 취임하는 날, 먼저 교회를 가야 되지 않겠느냐며 옷을 한 벌 주셨다. 나는 못 이기는 척하고 교회를 나가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오게 된 것이다. 이렇게 시간이 지나며 나는 차츰 이전의 어둔 기억을 잊으며 신앙생활을 다져갔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남편도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계기는 교회를 나가자는 나의 권면과 기도를 못이겨 교회를 나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인데 결정적으로는 나를 중매해 준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남편에게 "얘야, 니가 예수를 잘 믿고 교회를 잘 나가는 것이 이 할머니의 원이다"며 유언하다시피 말씀했고 남편은 그러마고 대답을 한 것이었다.

15년 동안의 병환
남편이 예수를 믿으며 교회를 착실히 다니던 어느날 시어머니에게 병이 생겼다. 교회 새벽기도를 다녀 오시다가 철둑에서 넘어졌는데 허벅지 바로 윗뼈가 부러졌다. 병원에 입원해서 몇달 치료후에 고치고 나서 퇴원뒤에는 관절염으로 고생을 하셨다. 시어머니는 한 번 병환을 얻은 후 사고를 연속적으로 겪게 되었다. 관절염 치료를 끝내고 퇴원하는 버스에서 내리다가 그 밑에 깔리는 불상사를 겪으셨다. 그래서 몸이 찢기고 살이 성한데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 모습을 보니 눈물이 쏟아졌다. 미운정, 고운정 든다는 얘기가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았다. 이때부터 시어머니는 거동을 못하셨기 때문에 분비물을 내가 받아야 했다. 한 1년을 그렇게 지내다가 약간 차도를 보이던 어느날 운동을 하신다던 어머니가 새벽에 동네 한바퀴를 돌다가 다른 쪽 허벅지가 또 부러지는 불운을 당하셨다. 그래서 또 수술을 하고 양쪽 다리에 핀을 박고 생활을 하신 것이다. 밖에도 나갈 수 없고 집에서만 왔다 갔다 했다. 하루에 방안을 수십 바퀴를 돌고 이렇다하게 움직이지도 못하는 생활을 15년 하시다가 92년도에 돌아 가셨다.

그때는 내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세월을 살았던 것 같다. 목욕, 머리 감겨 드리고 땀을 닦아 드리고, 분비물을 받는 일을 했다. 그때야 비로소 시어머니는 나를 불쌍히 여기시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이때부터 내 편이 되어 주셨다. 과거의 미운 감정이 되살아날 듯도 했지만 들어앉은 시어머니가 밉지를 않았다. 불쌍하기만 했다.

91년도 3월의 일이었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기 1년 전 쯤 이번에는 남편에게 병이 생겼다. 자꾸 골이 아프다며 먹은 것을 토했다. 병원에 갔다. 의사의 진단은 "체한 것 같기도 하고 십이지장에 이상이 있는 것도 같고..." 라는 등 대수롭지 않은 듯이 말했다. '그러려니' 하고 집에서 일 주일을 누워 있었는데 남편이 너무 아프다고 하여 다시 동네 병원에 가게 되었다. 병원에 입원을 했을 때에는 병세가 악화돼 친구들이 병문안을 와도 눈을 못 뜰 정도였다. 사태가 너무 심각하여 큰 병원으로 옮겨 CT 촬영을 했다. 모래알같은 흰점 5~6개가 보였다. 그것을 찍어서 근처 병원에 가자 '기생충이 올라간 것 같다'며 '다른 병원으로 옮기라'고 진단했다. 다른 병원에 갔지만 다른 곳에서는 양성으로 나왔다. 기생충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아무 이상이 없는 줄로 알고 25일 가량을 멀쩡하게 병원에 있으며 남편은 "나는 나이롱 환자야"라며 산책을 즐기며 건강을 회복하는 모습이었다. 아무 일도 없을 듯했다. 그날도 나는 남편의 면회를 마치고 집에서 쉬고 있었다. 그런데 밤 12시가 되었을 때 갑자기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남편이 쓰러졌으니 빨리 병원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병원에 가자 남편은 이미 완전히 정신잃은 채로 죽은 사람처럼 침상에 누워 있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막 토할 것 같다고 해서 옆에 있던 아줌마가 토하도록 쓰레기통을 대 주었는데 화장실에 가겠다고 고집을 피우며 나가다가 복도 난간을 붙잡고 푹 쓰러지며 사지가 뒤 틀어지더라는 것이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될 수 있어요? 아니, 아픈 사람도 아니고 멀쩡한 사람이 병원에 와서 쓰러지는 경우가 다 있습니까?"

멀쩡했던 사람이 병원에서 쓰러져 사지지니 이해가 되질 않았다. 의사에게 항의를 해도 소용없이 남편은 그 날 이후로 거동을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8년째 거동을 못하는 남편
한 때는 완전히 죽게 될 줄 알고 장사지낼 준비까지 했었다. 수술도 머리 수술을 4번했고 중환자실에서 4개월 반을 식물인간으로 있어야 했다. 사람이 들어가도 모르고, 나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때부터 나는 주님께 회개를 했다. 그 전까지는 내가 잘난 맛에 살며 하나님 원망만 했던 것을 기억했다.

"내가 그렇게 평생을 기도하고 사는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나를 모른 척하십니까?"
이렇듯 투정만 부릴 줄 알았지 교회는 다니면서도 열정적인 면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남편 속 썩이지 시부모를 미워하는 마음을 품었었지 이러다가 남편까지 쓰러지니 정신을 차리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나는 중환자실에 들어간 남편을 위해 아침 한 끼 금식을 시작했다. 남편이 밥먹을 때까지 금식하겠다는 마음이었다. 대학병원의 교회에 가서 시간이 날 때마다 기도했다.

매일 회개하며 기도를 했다. 기도하고 회개하면서 "하나님께서 이 가정을 사랑하셔서 믿음의 가정으로 세우시려고 했는데 이렇게도 본인들도 깨닫지 못하고 신앙을 바로 갖지 못하니까 하나님께서 징계하시는군요"라며 기도했다. 또한 "내가 기도하지 않고 내가 이 가정에 신앙의 뿌리를 내려야 할 사명을 갖고 왔는데 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해서 오늘날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을 회개합니다"라고 했다.

이때부터 철저히 회개하며 "하나님, 남편을 살려만 주십시오. 살려만 주신다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습니다"라며 '남편을 살려만 달라'고 매달렸다.

당시 병원에서는 내 기도와는 반대로 "환자가 죽을 조짐이니 장사 준비를 하라"며 얼굴 볼 사람들은 전부다 들어와서 남편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라고 했다. 남편의 상태는 집안 사람들이 병실에 들어가서 얼굴을 보고 나오면 전부 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죄다 '살기는 다 틀렸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의 기도를 들으셨는지 남편의 명을 안 거둬 가셨다. 4개월 동안 남편을 위해 금식하며 회개한 응답의 결과가 죽는다던 사람이 움직이며 사람을 알아보는 것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남편은 계속적으로 차도를 보여 중환자실에서 한 달여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결국 장기 중환자실로 옮겨져 깨어나며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이때는 너무나 기뻐 복도를 막 뛰어 나가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너무나 감사한 마음을 외쳤다. 남편은 깨어났고 약간의 거동을 했다. 이것만으로도 감사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기도를 좀더 구체적으로 할 것을, 잘못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살려만 달라'고 기도했더니 정말 살려만 주신 것이다. 아예 '고쳐달라'고 기도하는 것이었는데 말이다. 아무튼 남편은 1년 만에 퇴원을 했다. 그러나 남편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소 . 대변을 처리하기 위해 거동할 힘도 없었고 좀 무리하면 쓰러지고 까무러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렇듯 우리 가정의 우환은 어머니가 92년도에 돌아가시고 남편은 환자로 남았으며 시아버지도 이미 병원생활을 몇 달 동안 하시다가 노환으로 돌아가신 것으로 이어졌다.

신앙의 참된 의미
어떤 사람들은 내가 당하는 고난에 대해 다른 관점을 제시했다. 내게 소명이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었다. 소명을 받은 사람인데 그 길을 가지 않으니 지금 고통을 겪고 있다는 얘기였다. 그 말을 들으면서 내게는 뉘우침이 왔다. 처녀적 일이 생각났다. 교회 일을 열심히 하던 10대 시절 나는 전도자로 살기로 결심한 적이 있다.

당시는 부흥회가 자주 없었기 때문에 한번 어느 동네에서 부흥회를 한다고 하면 기독교인들은 모두들 그곳을 좇아 다녔다. 16살이던 어느날 부흥회를 찾아갔는데 대구에서 온 강사가 집회를 인도했다. 당시 많은 은혜를 받은 나를, 그분이 불러 "예배 후에 사무실로 오라"고 했다. 사무실에 갔더니 나를 보고 "고선생은 소명을 받은 자니 지금부터 신학을 하라"며 "나를 따라오라"는 것이었다. 자신은 가르치는 사명이 있어서 신학자들을 다 가르친다는 것이었다. 사명자들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도 의논하라고 해서 집에 얘기를 하자 어머니는 기절할 정도로 놀랄 지경이었다. 어머니가 이렇게 나오자 나는 별 수 없이 포기를 했다. 집안에서는 더 공부를 시킬 계획이 없었고 더욱이 어머니는 나와 떨어져서는 못 사시는 분이었다.

그랬는데 시집에 자꾸 우환이 생기다 보니 이전에 품었던 꿈이 새롭게 피어 올랐다. 그래서 소명자 소리도 듣고 해서 '50줄이 된 지금에서 무슨 일을 해야 하나, 아는 것도 없고 무엇을 해야 하나' 고민을 하게 되었다. 1년을 이렇게 고민하다가 어느날 교회 다니는 한 성도가 신학을 한다고 해서 '어떻게 생긴 곳인지 가보자'는 마음이 생겼다. 그런데 그 사람도 나보고 신학을 하라고 권유했다. 그래서 한번 가서 구경을 해보자고 갔다가 나도 모르게 등록을 하고 왔다. 그런데 환자를 놔두고 어떻게 신학을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그때는 상태가 아주 심각했기 때문이다. 이 환자를 두고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고민을 했는데 사람들은 '순종하면 나을 것'이라며 계속 신학을 권면했다. 남편은 하나님이 일으키실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 생각은 하나님이 남편을 일으키든 안 일으키든 순종을 해야 되겠다는 각오로 가정부를 고용하며 신학을 시작했다.

일 년 동안은 그렇게 공부를 했다. 그러나 가정부에게 일을 맡길 정도로 집안 사정이 여의치가 않았다. 하나님께 기도를 했다. '하나님 제가 이런 가운데서 어떻게 공부를 하겠습니까? 남편을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시오'라고 기도를 했다.

이런 식으로 신학을 시작해서 이제 4학년이 되었다. 그동안에 학교 간 뒤로 남편은 한 번도 병원에 다시 간 적이 없고 갈수록 좋아지고만 있다. 많이 좋아졌지만 대소변을 받아야 하는 상태는 그대로다. 물론 지금은 학교 가기 전보다는 나아졌다. 하나님이 점점 돕고 계신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때로는 신학을 해서 "내가 이 나이에 무엇을 할 거냐?"라며 자조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곧 내 마음대로 살아온 인생이지만 이제부터라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를 쓰시나 그의 놀라운 능력을 지켜 본다는 기대가 크다. 이제는 하나님 앞에 맡겨졌으니까 "하나님, 배웠든지, 못 배웠든지, 공부를 했든지, 못 했든지 하나님이 이제는 쓰실대로 쓰십시오. 하나님께서 쓰시는 대로 필요하신 대로 순종하며 살겠습니다" 라고 기도하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전폭적인 의지가 놀라운 역사를 일으킬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맡기는 삶이 필요한데도 지금까지 하나님께 고통을 받아온 것은 사명자가 사명의 길을 가지 않으니까 주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처녀때부터 신학을 시작해서 하나님 뜻대로 살아야 되는데 내가 원래 가야 할 길을 가지 않고 인간의 행복을 찾아 왔으니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시집와서 고통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이다. 남들이 볼 때는 경제적으로 유복해 보이니까 좋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심적으로는 너무나 많은 고통을 받아온 인생이었다. 고된 시집살이에 이어, 시어머니 병 수발, 남편의 병 수발, 시어머니와 아버지의 장례, 자식들의 혼례를 치루는 등 집안 대소사를 혼자 힘으로 처리해야 했다. 이제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사명자라는 사실을 확실히 깨닫고는 "하나님, 죄송합니다. 제가 이렇게 미련해서 깨닫지를 못해서, 이렇게 자청해서 하나님의 징계의 매를 맞게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나의 고난을 통한 깨달음은 성경을 통해서 더욱 견고해진다. 성경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 광야를 가게 하셨는가 하면 또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셨고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뜻을 빨리 발견하고 하나님을 알게 되니까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 미련해서 깨닫지 못하면 더디다는 것을 여러 가지로 알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날마다 고생하고 죄짓고 회개하고 다시 깨닫고 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그들과 같은 생활을 했다'고 절실히 깨달았다. 정말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을 믿는다며 교회를 왔다 갔다 하고, '나는 구원받았어'라는 자족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 것이다. 정말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행해야 정말 믿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듣다. 바울이 무엇이 모자라 고통을 당하고 살았겠는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니까 그 고통을 다 받으면서 산 것이다. 지식, 부, 명예가 없는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핍박자로 매를 맞고 쫓겨 다니면서 유람의 생활을 한 것은 하나님을 위해 살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바울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와 만족을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있었다는 것을 이제서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나는 하나님을 믿노라 하지만 그 뜻대로 살지 못했기 때문에 마음에 평안이 없었고 늘 불안 중에 심적인 고통을 늘 받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그 고통의 과정중에서 내게 원하신 것이 있었다. 아마 내게서 제거되어야 할 불순물을 제거하는 작업을 하신다는 것을 깨닫기를 원하셨을 것이다. 그랬는데도 나의 무지함이 그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늘 하는 말이 "나는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라는 것이었으니까. 어려움이 생기면 "예수님을 이제 안 믿을 거예요. 주일도 이제는 안 지킬 겁니다. 제가 왜 이렇게 고통을 받아야만 합니까?"라고 따지고 들었던 태도. 진실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몰랐던 때문이었다. 이런 점에서 나는 지면을 통해 간증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한다.

하지만 "완전히 하나님께 맡겨져 그대로 살겠습니다. 그리고 나를 하나님 앞에 드렸기 때문에 이제 나는 내 것이 아닙니다"라고 고백하며 앞으로 하나님의 크고 비밀한 능력을 맛볼 삶을 기대하고 믿기 때문에 나의 삶을 간증형식으로 풀어놓게 되었다.

나는 자식들의 신앙생활도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길 기도하고 있다. 그렇게 맡기니 마음은 평안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이것을 내 생활속에 체득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요즘은 하나님이 내게 이렇게 생명을 주신 것도 감사하다. 나의 생명이 있었기에 몸이 불편한 남편을 8년 동안 봉양할 수 있었고 대소변을 받아 내면서도 신학을 하고 교회의 권사의 사명도 감당하며 최선을 다하게 하신 것이다.

이모저모로 바쁘게 뛰면서도 마음을 편하게 먹고 기쁘게 살자 사람들의 인정도 받을 때가 있다. '환자가 있지만 권사님은 복 받은 사람이다'는 평가도 받는다.

그러나 늘 깨닫는 것은 사명자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사도행전 1:8의 말씀처럼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증거하라는 것을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나 받은 사명이라는 깨달음을 갖고 있다. 나는 이 사명을 바로 하기 위해 사 학년이 된 지금 작정기도를 계획하고 있다. 아들들의 신앙 문제도 이 기간 동안 가슴을 찢는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께 강구할 계획이다.

그리고 경제위기를 맞아서 정말 남한테 꾸러 가지 않고 어렵지 않게만 해 주신 것도 감사한데 그냥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구제도 좀 하며 살고 있다. 구제는 현재 소녀 가장 한 명을 돕고 있으며 전도사님 소개로 홀로 된 사모 한 명에게 후원금을 주고 청소년 복지회 등을 돕고 있다. 노인정에는 조금씩 다달이 물질을 돕고 있다. 이런 일을 하니 더욱 마음이 편하고 하나님이 더욱 채워 주신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의 계획도 특별히 세운 것은 없다. 단지 중국에 선교를 돕는 역할을 하고 싶었다. 땅을 사서 선교에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이를 실천하기 중국에 가려고 마음을 먹은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떨리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또 환자를 데리고 어떻게 할까 싶어 두려워 했다. 남편의 병환을 중국의 한방치료를 이용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그런데 가려고 계획을 하던 중 갑자기 경제위기가 닥쳐 실행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현재는 계획을 보류한 상태로 있다. 또 하나님께서 남편을 고쳐 주셔서 이것을 방방곡곡에 전하게 하시려는 간증자로 쓰시든지 아니면 전도사로 보내셔서 쓰시겠다든지 하는 목적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일단 졸업을 하자'는 목표를 갖고 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대로 따라 하고자 한다. 하나님께서 남편을 데려 가시더라도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남편을 통해 나를 변화시키시고 나를 길러 주시고 주님의 섭리를 깨닫게 하셨으니까 어떤 상황이 오든 순종하는 믿음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목표는 오로지 하나님이다. 그것 밖에 이제 내 인생에 남은 없다는 생각이다.

지금도 일주일에 한 번씩 심방을 나가고 고등부 교사도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고 그대로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나의 삶을 통해 깨닫게 된다.

나의 삶을 돌아볼 때 물질의 복을 많이 받으면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살아왔던 세월이다. 돌아보면 이것처럼 미련한 생각도 없는 것 같다. 지금은 이 허상을 깨닫고 신앙의 참의미를 알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맡겨주신 달란트를, 맡겨 주신 일이 무엇인지 깨닫고 발견하고 개발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이며 가장 큰 행복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깨닫지 못할 때, 사람의 본분을 망각할 때 비극이 시작되는 것이다.

나의 앞으로의 삶은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게 가서 "하나님이 맡겨 주신 것을 이렇게 남겨왔습니다" 라고 내 놓을 수 있는 것으로 바꿔가는 것이 남은 목표이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도 멀었다. 그래서 더욱 십자가 앞에, 말씀 앞에 새로워지는 삶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최근에는 운전학원에 등록을 했다. 누가 들으면 "56세의 나이에 뭐할려구?"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남은 생 동안 주의 일을 하고, 환자인 남편을 더 편하게 수발하기 위해서는 운전을 해서 돕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어떤 것이든 내가 최선을 다해서 준비하고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사용해 오셨다. 

사람들은 나를 그다지 축복받지 못한 사람으로 알지 모른다. 남편을 날마다 목욕, 운동, 대소변 받기를 하는 것을 보고, 평생을 환자를 끼고 사느냐는 것이다. 15년 동안 거동을 못하시던 어머니를 모셨고 그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남편이 7년 동안 거동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남이 볼 때는 복을 받지 못한 사람으로 여기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믿지 않는 사람이 볼 때도 너무 고생을 한다며 안타까워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나 자신은 하나님께서 본래의 하나님의 언약을 찾기 위해서 나를 훈련하시고 연단하신다는 생각을 해 온 것이라 생각하며 감사하게 받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깨닫지 못함으로 40년을 고생하지 않았던가? 나도 깨닫지 못함으로 그런 고난을 받았던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를 알았으면 이렇지는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사랑의 매이자 하나님의 연단이었다. 내가 완전히 받을 만한 그릇이 되어 하나님이 "이제, 되었다"고 하실때 나에게 속한 문제는 하나님께서 모두 풀어주실 것이다. 물질적인 복보다 정말 믿음의 복을 받는 것이 진짜 복이지 물질의 복이 참 복은 아니다는 생각을 하며 지금도 나는 기도한다.

"하나님, 자손들에게 믿음의 복을 내려 주세요. 있어도 배풀지 못하고 마음을 쪼그리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없어도 마음이 편하고 없는 것 가지고도 구제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이 정말 믿음의 복이 아닙니까? 그런 복을 자손들에게 내려 주십시오."

정말 믿음의 복이란 하나님을 믿을 뿐만 아니라 그를 힘써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내 남은 생의 목표다. 나를 지금까지 고난으로 연단시키시고 새 삶의 희망을 주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월간 <교회와신앙> 1998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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