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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는 사랑의 관계에서 자란다
2005년 02월 16일 (수) 00:00:00 장경애 jka9075@empal.com

<신뢰> 중에서
브레넌 매닝 / 윤종석
복 있는 사람 펴냄
 

예수님 영광에 대한 인격적 체험, 즉 초월적/내재적 그리스도와의 생생한 만남이야말로 믿음과 소망의 기초이며, 그 믿음과 소망이 철저한 신뢰의 삶을 빚어 가르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다짐하셨다. 인내와 약속이다. 그분 임재의 약속과 그분 약속의 임재는 같은 말이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고난이나 악행의 피해를 막아 주겠다고 보장하신 적이 없다. 사실 그분은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한다(요 16:33)고 못박아 말씀하셨다. 그분의 약속은 우리가 힘들 때 발자국이 하나뿐이리라는 것이다.

정도는 달라도 고난과 상실은 모든 인생에 임한다. 우리가 그분의 임재를 믿고 그분의 약속을 바랄진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도 마찬가지다. 폐허의 한복판에서도 하나님 임재는 머문다. 신뢰하는 제자는 종종 이를 악물고라도 사실상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지금도 믿을 만한 분이다.” 무한한 능력으로 내 삶에 개입하시기 때문이 아니다. 그분이 믿을 만한 분인 까닭은, 세대를 타고 기독교 공동체들에게 주어지고 유지돼온 약속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는 비참한 사건들 속에서 신뢰는 설명을 요구하지 않고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리라(요 14:18) 약속하신 분께 시선을 돌린다. 삶의 문제들에 해답과 대책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에서 지혜와 능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뢰는 기다릴 줄 안다.

믿음과 소망처럼 신뢰도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다. 신뢰하려는 의지만으로 신뢰할 수 없다. 평생 내 책임으로 돌아올 한 가지를 내가 만들어 낼 수 없다니 얼마나 지독한 아이러니인가. 꼭 필요한 그 한 가지를 나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전폭적 의존의 의미다. 전폭적 의존은 믿음, 소망, 사랑의 덕에 있고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신뢰가 부족하다고 어찌 나를 책망할 것인가? 내가 어찌할 수도 없는 일로 왜 나를 질책하며 시간을 허비할 것인가? 그러나 내 능력 안에 있는 일이 있다. 예수님의 신실하심에 주목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모든 은택을 기억하며(시 103:2) 여정 내내 그분께 주목하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일이다.

우리가 그분의 애정에 냉담하고 그분의 신실하심에 지독히 배은망덕할 때도 늘 한결같은 예수님의 충절은 엄청난 일대 신비다. 그 충절 앞에 똑똑한 자들도 굴복하고 신학도 고개를 숙일 정도다. 우리는 자신의 한계를 겸손히 인정하며 간절히 기도할 수밖에 없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나의 신뢰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은, 내가 그 사람을 철저히 점검하여 신빙성을 무오하게 입증했다는 뜻이 아니다. 신뢰의 기초는 증거가 아니라 직관적 감, 본능, 감정이다. 물론 아무 기초도 없는 감정은 아니지만 마찬가지로 삼단논법이나 설문지의 결과물도 아니다. 신뢰란 상대에 대한 체험, 증거로 환원될 수 없는 체험에서 비롯된다. 대부분의 경우 신뢰는 쌍방적 사랑의 관계에서 자라간다. 내가 상대를 사랑하고 상대에게 사랑 받는 관계다.

월터 버가트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 증거를 보이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얼굴을 보이셨기 때문에 갖는 신뢰, 그 신뢰가 있어야만 악을 견딜 수 있다. 움직임을 요약하면 이렇다. 하나님 체험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다시 하나님께 대한 신뢰로 나아간다.”

나는 누구에게 갈 것인가?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요 15:15)라는 예수님 말씀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 가장 충격적 문장일 것이다. 이 말씀을 주해하며 성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다. “친구란 내 모든 것을 알면서도 나를 있는 그대로 전부 받아주는 사람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가진 꿈이 아니던가? 언젠가 어디선가 나는 나를 정말 이해해 주는 사람, 내 말은 물론 말 못하는 속까지도 이해해 주는 사람을 만날 것이다. 복음은 나사렛 예수가 그 꿈의 실현이라고 선포한다. 내게 가장 의미 있는 신뢰의 정의는 폴 틸리히의 것이다. 그는 신뢰를 ‘수용을 수용하는 용기’로 정의했다.

자신의 회의와 불안, 정욕과 게으름, 형편없는 기도생활과 메마른 신앙, 뒤섞인 동기와 나누인 마음을 예수님께 터놓고 솔직히 내보이는 것은 그분이 나를 수용하신다는 확신에서 나오는 우리의 모험이다. 그것은 불굴의 신뢰에 대한 온전하고 성숙한 표현이다. 사람들이 그분께 불충실할 때도 예수님은 절대 저버리지 않는 친구요 절대 충절이 딸리지 않는 신실하신 분이다. 자기혐오와 남남인 분이 우리를 자기혐오에서 떼어놓는다. 결국 예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는 그분 명령에 대한 순종으로 귀결된다.

어시스트 장경애/ 빛과소금교회 최삼경 목사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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