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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성결운동 초교파적 확산
복음주의 연구
2004년 02월 11일 (수) 00:00:00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목창균  교수/ 서울신대 신학전문대학원장

19세기 미국 교회에서 다양한 형태의 성결 운동이 일어났다. 그 대표적인 것이 오벌린 완전주의와 웨슬리안 성결운동이다. 전자는 1836년 챨스 피니에 의해 개혁교회 전통에서, 그리고 후자는 1835년 팔머의 화요집회를 통해 감리교 전통에서 태동되었다. 오하이오 주 오벌린대학 교수 피니와 학장 마한은 성결을 체험한 후, 학생들에게 온전한 성화의 교리를 가르치고 전국을 순회하며 성결에 관해 설교했다. 그것이 미국 개혁파 교회 성결운동의 시작이었으며, 그들의 교훈이 오벌린 완전주의다. 오벌린 완전주의는 <오벌린 전도자>와 마한의 주석서 <기독교인의 완전에 관한 성서적 교리>에서 자세히 전개되었다.

한편 성결은 감리교의 중심 교리였으나 19세기 중엽 남북전쟁 시기에 이르러 거의 잊혀진 주제, 사문화된 신조가 되었다. 남부 교회가 더욱 그러했다. 따라서 감리교의 성결운동은 기독교인의 완전 교리와 성결 체험을 부흥시켜 그것을 감리교의 중심 위치에 회복시키려는 영적 각성운동이었다.

먼저 웨슬리안 성결운동을 중심으로 19세기 성결운동의 발전과정을 살펴보자. 1835년 뉴욕의 감리교인인 사라 란크포드와 팔머 자매는 성결의 은혜를 체험하고 매주 화요일 팔머의 집에서 성결 촉진 기도회, 즉 ‘화요 집회’를 시작했다. 수백 명의 감리교목사들이 이 집회를 통해 성결을 체험했으며,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매주 성결 집회를 열었다. 1850년대까지 성결집회는 동부와 중서부의 대다수 도시에서 일반화되었다. 따라서 팔머의 화요집회는 19세기 미국 성결운동의 도화선이 된 동시에, 성결교리 부흥의 중심이 되었다. 팔머는 성결 부흥운동의 지도자, 잡지 <성결지침>의 편집인 그리고 순회 전도자로 활약했다. 

1858년 성결 부흥운동이 남부 지역을 제외한, 미국 전역에서 일어났다. 수많은 대규모 기도회가 북부의 거의 모든 도시에서 매일 같이 열려 모든 교단의 목사와 평신도들이 참여했으며, 50여만 명이 회심하게 되었다. 그러나 1861년에 일어난 남북 전쟁은 미국 역사의 새 시대를 열게 하고 산업 사회로의 급속한 전환을 일으킨 반면, 미국 사회의 도덕적, 영적 기반의 균열을 가져왔다. 대 교단은 사업적 방법과 부유층에 의해 지배되고, 교회 예배는 형식화되었다. 전시 윤리가 통용되고, 성도의 완전을 위한 속회와 캠프집회는 중단되었다. 어떤 면에서 종교와 도덕의 대 공황기였다.

전 후 종교적 부흥이 처음 일어난 곳은 남부였다. 1866년 감리교 남부 감독회의는 종교와 도덕적 위기의 해결책으로 웨슬리 원리에로의 복귀, 즉 성결의 재 강조를 결의했다. 그러나 남부의 종교적 부흥은 단명으로 끝나고,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침체 상태를 면치 못했다. 당시 많은 감리교인들은 이러한 종교적 이완 현상은 캠프집회의 재개를 통해 치유될 수 있다고 믿었으며, 그 구체적 움직임이 북부에서 일어났다. 뉴저지와 뉴욕의 감리교 목사 오스본과 인스킵의 주도로 1867년 뉴저지 주 바인랜드에서 성결체험 촉진을 위한 최초의 대규모 캠프집회가 개최되어, ‘성결촉진 전국 성결협회’로 조직되었다.

이 캠프집회는 1883년까지 52회 개최되었으며 성결운동 확산의 주요 도구가 되었다. 협회는 ‘전국 성결협회’로 발전했으며, 그 후 명칭이 ‘기독교 성결협회’로 바뀌었다.
캠프집회와 더불어 성결운동 확산에 공헌한 것은 성결서적 출판과 성결촉진 집회였다. 1870~1880년대 성결출판사들과 감리교출판사는 성결에 관한 많은 서적을 출판했으며, ‘전국 성결협회’는 <성결 지침>, <성결의 대변자> 등의 잡지를 발간했다. 한편 팔머의 화요집회를 모델로 한 성결촉진을 위한 수많은 집회가 매주 정기적으로 모였으며, 많은 부흥사들이 성결교리 전파에 헌신했다. 따라서 성결운동은 1880년대에 그 정점에 이르게 되었으며, 감리교뿐 아니라 장로교, 침례교, 회중교인들로부터 많은 동조를 얻었다.

성결운동은 감리교 내에서 시작되고 감리교인에 의해 주도되었지만, 초교파적이었으며, ‘기독교 성결협회’는 초교파적 협의체였다. 이 초교파적 성격은 감리교의 전통적 정책과 충돌을 피할 수 없었으며 1890년대에 감리교 지도자들로부터 성결운동과 성화의 교리에 대한 비판과 공격이 일어났다. “성결협회, 성결잡지, 성결 기도모임, 성결전파자, 모두는 현대적인 것이며 새로운 것들이다. 그것은 웨슬리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웨슬리가 살아 있다면, 결코 그들을 감리교 체제 내에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는다.”

모든 감리교 목사들은 성결운동의 지지와 반대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양자택일이 강요되었다. 따라서 급진파 성결인 중에는 감리교를 떠나 독립교단을 창립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1880년 다니엘 워너가 창립한 ‘하나님의 교회’를 시작으로 1895년에서 1905년 사이 적어도 20~30여 개의 성결교단과 교회들이 전국적으로 설립되었다. ‘전국성결협회’에 속한 대표적 교단은 ‘나사렛교회’와 ‘필그림 성결교회’였다. 전자는 1895년 블레스와 위드니에 의해, 그리고 후자는 1897년 냅과 리스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여러 독립 성결 그룹과 교회의 합병 산물이었다.

한편, 성결부흥운동 이전부터 있었던 ‘웨슬리감리교회’와 ‘자유감리교회’가 ‘기독교성결협회’에 가입하고 성결운동에 합세했다. 전자는 감리교에서 일어난 노예제도 논쟁의 여파로 노예제도 폐지론자들이 감리교를 이탈하여 1842년 창립한 것이며, 후자는 벤자민 로버츠가 현대주의자들과의 논쟁으로 감리교에서 축출되자 1860년 동조자들과 함께 세운 것이다. 또한 성결운동은 메노나이트계열의 ‘선교교회’에 영향을 미쳐, 이 두 교단이 성결운동에 참여하고 기독교성결협회에 가입했다. 1887년 심프슨이 세운 ‘기독교인과 선교사연맹’은 성결운동의 영향을 받았으나 ‘기독교성결협회’ 회원은 아니었다.

멜빈 디이터에 따르면, 1980년 성결운동은 미국에 약 125만 명의 정규 회원을 가졌으며, 나사렛교회가 가장 큰 성결 그룹이다. 선교분야에서는 ‘동양선교회’와 ‘세계 복음선교회’가, 그리고 고등교육기관으로는 인디아나주의 테일러대학과 켄터키주의 에즈베리대학이 성결운동과 관련된 대표적 기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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